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8화 : 스스로 머리칼을 벰도 헛되이
스스로 머리칼을 벰도 헛되이
수춘성을 떨어뜨린 조조는 그 기세를 몰아 아예 원술의 뿌리를 뽑을 양으로 다시 회수를 건너 추격하려 했다. 장수들과 모사들을 모두 불러놓고 그 일을 의논하는데 순욱이 나서서 말렸다.
“몇 년이나 가뭄으로 흉년이 거듭돼 식량이 모자라는 때입니다. 만약 다시 군사를 내신다면 군사들은 지치고 백성들도 괴로움을 당 할 것이니 반드시 이롭지 못합니다. 잠시 허도로 돌아가 내년 봄밀 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심이 어떠실는지요? 군사를 먹일 양식을 넉 넉히 마련한 뒤에 다시 원술을 도모하십시오.”
조조가 들으니 한편으로는 옳고 한편으로는 옳지 못했다. 군량이 달리는 것은 사실이나 방금의 기세 또한 그대로 흩어버리기에는 아 까웠다. 따라서 얼른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보마(報馬)가 달려와 알렸다.
“장수가 유표에게 의지해 힘을 회복하고 다시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남양의 여러 현들이 모두 그를 따라 돌아서니, 조홍 장군께 서 대적해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벌써 여러 차례 쫓기다가 특히 이렇게 달려와 위급을 아룁니다.”
그렇다면 실로 큰일이었다. 자칫하다가는 허도와 천자까지 뺏길 판이었다. 이에 조조는 손책에게 글을 보내 강가에 진을 치고 유표 를 공격할 것처럼 보이게 했다. 유표가 함부로 군사를 내어 장수의 뒤를 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의병(疑兵)인 셈으로 군사를 허도로 돌 려 장수를 잡기 위한 준비였다. 그런 다음 조조는 떠나기에 앞서 다 시 유비와 여포를 불렀다. 유비를 전처럼 소패에 두게 하되 여포와 는 형제를 맺어 서로 돕고 싸우는 일이 없도록 둘에게 다짐을 받았 다. 장수를 없앨 때까지는 동쪽이 평온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 이었다.
여포는 든든한 동맹군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좌장군이란 벼 슬까지 약속받아 흡족하게 서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조는 여포가 돌아가기 무섭게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유비를 가만히 불러 장 수 다음으로 없앨 적을 밝힌 일이었다.
“내가 공을 굳이 소패에 머물게 한 것은 함정을 파놓고 호랑이를 기다리는 계책[掘坑待虎之計]이외다. 호랑이란 곧 여포를 이름이니 공은 진규 부자와 의논하여 그르침이 없게 하시오. 나는 때가 오면 응당 밖에서 공을 도울 것이오.”
실로 다급한 전갈을 받고 돌아가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빈틈없는 헤아림이었다.
조조가 동쪽의 일에 모든 대비를 갖춰둔 뒤 허도로 돌아오니 반 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외(段煨)란 이는 이각을 죽이고 오 습(習)이란 이는 곽사를 죽여 각기 그 목을 바치러 왔다는 것이었 다. 멀리 섬서의 산속으로 쫓겨 들어가 있었으나 언제 뛰쳐나와 걱 정거리를 만들지 모를 두 도적은 그렇게 화살 한 개 쓰지 않고 제거 되었다. 특히 단외는 이각의 목뿐만 아니라 그 가솔 이백여 명을 사 로잡아 허도로 끌고 온 게 돋보였다.
조조는 이각의 일족을 각 성문마다 나눠 보내 목 베게 하고 이각, 곽사의 목과 함께 거리에 내거니 보는 이마다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전날 이각과 곽사 때문에 모 진 고초를 겪었던 헌제였다. 그 둘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자 문무 의 대신들을 모아 태평연이란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단외에게는 탕 구장군(盪寇將軍), 오습에게는 진로장군(珍虜將軍)을 내려 각기 군사 를 이끌고 장안을 지키게 하니 둘은 성은에 감사하고 떠나갔다. 그 일이 매듭지어지자 조조는 곧 천자께 아뢰었다.
“아직 동탁의 또 다른 잔당인 장제의 조카 장수가 살아 있어 남양 일대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화근을 뿌리 뽑 아야 합니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동탁의 잔당이라면 머리를 흔드는 천자였다. 그 어느 때보다 흔쾌 히 허락하고 군사가 성을 나갈 때는 몸소 난가(駕)에서 내려 출정 하는 조조를 배웅할 만큼 정성을 보였다. 건안 삼년 초여름인 사월 의 일이었다.
조조는 순욱에게 넉넉히 장졸을 딸려 허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장수를 찾아나섰다. 때는 초여름이라 밀이 한 창익고 있었다. 지난번 원술을 칠 때 군량 때문에 죄 없는 부하를 죽여야 했던 쓰라림을 겪은 뒤라서 그런지 조조에게는 그 어느 때보 다 그 밀이 귀하고 탐스럽게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익은 밀을 베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약탈에 시달려온 백성들이라 군사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피해버린 탓 이었다. 그걸 안 조조는 사람을 풀어 숨어 있는 농부들이며 각처를 지키는 관리들에게 말하게 했다.
“나는 천자의 밝은 조서를 받들어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는 역적 을 쳐 백성들을 해치는 무리를 없애려 함이다. 바야흐로 밀이 익어 가는 때에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켰지만, 나의 장졸들은 높고 낮 고를 가리지 않고, 다만 밀밭을 밟는 것만으로도 모두 그 목을 베리 라. 군법이 이토록 엄하니 그대들은 아무도 놀라거나 두려워할 까닭 이 없다. 각기 자기 밭으로 돌아와 땀 흘려 일한 바를 거두도록 하라.”
그 같은 조조의 말을 듣자 백성들은 기뻐하고 칭송하지 않는 이 가 없었다. 실제로도 장졸들은 모두 조조의 명을 받들어 밀밭을 지 날 때는 모두 말에서 내려 손으로 밀 이삭을 헤치며 걸을 정도가 되 니 군사가 지나는 길목마다 백성들이 나타나 절하며 맞았다.
그런데 일은 공교롭게도 조조 자신에게 벌어지고 말았다. 조조가 말에 탄 채 어떤 밀밭 곁을 지날 때였다. 밭 가운데서 비둘기 한 마 리가 날아올라 조조가 탄 말 앞을 스쳐갔다. 놀란 말이 길길이 뛰며 밀밭 속으로 뛰어들어 손 쓸 틈도 없이 밀밭 한쪽을 짓밟아놓고 말았다.
조조는 행군주부를 불러 자기가 밀밭을 밟은 죄를 논의하게 했다.
“어떻게 감히 승상께 죄를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행군주부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스스로 법을 정해놓고 이제 스스로 어겼으니 죄를 받지 않고 어떻게 무리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조조가 그렇게 답하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 베려 했다. 여럿이 달려들어 칼을 뺏어 가까스로 말렸으나 조조는 여전히 자신 에게 군법을 시행하려 들었다. 그때 곽가가 나서 말렸다.
“예로부터 『춘추』의 뜻을 따라 법이라도 존귀한 데는 미치지 못합 니다. 승상께서는 지금 대군을 이끄시는 존귀한 몸으로 어찌 스스로 를 죽이려 하십니까?”
그러자 조조는 한동안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춘추』에 그런 말이 있다면 나는 겨우 죽음을 면할 수는 있 으리라. 그러나 어찌 이대로 넘길 수야 있으리!”
그러고는 투구를 벗더니 머리칼을 잘라 땅에 던지며 높이 소리쳤다.
“비록 목을 남겼으나 이 머리칼로 내 목을 대신하리라!”
실로 자신의 목을 베는 거나 다름없을 만큼 서릿발 같은 치죄였 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시켜 삼군(三軍)에게 그 머리칼을 돌리며 말 하게 했다.
“승상께서 밀을 밟으면 목을 벤다는 영을 내리신 바 있었다. 이제 말이 놀라 밀을 밟게 되었으나 승상께서는 이와 같이 머리칼을 잘라 목을 대신하였다. 승상께서도 이러하셨거늘 너희가 그 영을 어겨 어 찌 살아남기를 바랄 수 있으랴.”
그 말을 들은 장졸들은 모골이 송연하였다. 그 뒤로는 누구도 감 히 군령을 어기려 들지 못하니 대군이 지나가도 밀 한 포기 꺾이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뒷사람이 그 일로 지었 다는 시이다.
십만의 용맹한 장졸 마음 또한 십만일세. 十萬貔貅十萬心
한 사람의 호령으로는 다스리기 어려우나 一人號令衆難禁
칼 뽑아 머리칼 베어 그 목을 대신하니 拔刀權
보게나, 조조의 이 간드러진 속임수를 方見曹瞞詐術深
어떤 머리 빈 서생이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히려 심한 것은 그의 비뚤어진 눈이다. 실로 얼마나 절묘한 조조의 용인술(用人術) 이며 군중 통제의 극치인가. 그런데도 기껏 그걸 속임수로만 보았다 면 그 같은 안목의 서생이 보낸 삶이란 뻔하다. 일생을 초야에 묻혀 서도 제 한 몸 추스르기조차 힘겨웠을 것이다.
한편 장수는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몰려온다는 말을 듣자 유표에 게 급히 글을 보내 뒤에서 호응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자신은 수 하장수 뇌서(敍)와 장선(張先)을 거느리고 군사들과 함께 적을 맞 으러 성을 나갔다. 오래잖아 조조의 대군이 이르자 양편 군사는 둥 글게 진을 치고 맞섰다.
먼저 장수가 말을 몰고 진 앞으로 나와 조조를 가리키며 꾸짖었다.
“너는 인의로 겉을 꾸미고 있으나 속은 염치조차 모르는 놈이다. 짐승이나 다를 게 무엇이랴. 지난번에 그 같은 낭패를 당하고도 죽 으려고 다시 여길 왔느냐?”
그 말을 들은 조조는 노했다. 맞대거리할 마음조차 없는 듯 허저 를 보고 소리쳤다.
“어서 가서 저 어린 놈의 목을 가져오라!”
허저가 달려 나오는 걸 보고 장수도 자기 수하 장선을 내보냈다. 하지만 허저는 장선 같은 무명소졸의 적수가 아니었다. 맞붙고 삼합 이 안 돼 장선은 허저의 대도에 쪼개져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 러잖아도 세력에서 밀리던 장수의 군사는 때를 놓치지 않고 덮치는 조조의 대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한 싸움에 그대로 뭉그러져 달아나 니 조조는 그들을 추격해 곧장 남양성 아래에 이르렀다.
간신히 성안으로 쫓겨 들어간 장수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나오 지 아니했다. 조조는 성을 둘러싸고 치려 했으나 성을 둘러싼 호가 넓을 뿐만 아니라 물까지 깊어 급히 다가들 수 없었다. 이에 조조는 군사들에게 명해 호를 흙으로 메우게 하는 한편 장작과 풀더미를 성 벽에 기대 쌓아 사다리를 삼게 하고, 또 따로이 높은 구름사다리를 만들어 성안을 살피게 했다. 그 자신도 매일 말을 타고 성을 돌며 공 격하기 좋은 곳을 찾았다.
그렇게 하기를 사흘 만에 조조는 드디어 한군데 공격할 만한 곳 을 찾아냈다. 서문이 있는 성벽 쪽이었다. 조조는 그곳에다 장작과 섶을 쌓아올리게 한 뒤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그쪽으로 성벽을 오르게 했다.
이때 가후(賈詡)가 성안에서 그 같은 광경을 보고 장수에게 말했다.
“내가 보니 조조의 뜻을 알겠소. 오히려 그의 계책을 거꾸로 이용하면 될 것 같소이다.”
“그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여러 번 그의 꾀를 빌려 위기를 넘긴 장수가 기대에 찬 눈길로 가후에게 물었다.
“내가 성 위에서 보니 조조는 사흘이나 성을 돌며 이곳저곳을 살 폈소이다. 그는 성 동남쪽의 벽돌색이 헌것과 새것이 같지 않은 데 다 녹각(角, 대나무 또는 굵은 나뭇가지를 사슴뿔처럼 얽어 출입을 막거나 울타리처럼 둘러치는 것)도 태반이 허물어진 걸 보았을 것이오. 그리하 여 그쪽으로 군사를 내려고 정해놓고는 일부러 성의 서북쪽에다 장 작과 섶을 쌓아 그곳으로 들이칠 것처럼 허장성세를 하고 있음에 틀 림이 없소. 우리가 거기 속아 동남쪽의 군사를 서북쪽으로 돌리면 밤을 틈타 갑작스레 빈 동남쪽으로 기어오르려는 수작이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별로 어려울 것 없소이다. 내일 날래고 씩씩한 군사들을 뽑아 배 불리 먹인 뒤 가볍게 차리고 동남쪽에 있는 집안에 숨어 있게 하시 오. 그런 다음 백성들을 군사로 꾸며 함빡 서북쪽에 몰리게 한 뒤 거 짓으로 그곳만 힘들여 지키는 체하시오. 밤이 되면 조조는 틀림없이 동남쪽으로 기어오를 것이오. 그가 성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한 소리 포향으로 일제히 숨겨두었던 군사를 내면 그를 사로잡기는 힘들지 않을 것이외다.”
실로 감탄할 만한 가후의 계교였다. 장수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의 말을 따랐다.
그것도 모르고 높은 곳에서 성안을 살피던 조조의 군사가 탐마(探馬)를 보내 알려왔다.
“장수가 모든 군사들을 성의 서북쪽으로 빼돌려 지키게 하는 바 람에 성의 동남쪽은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드디어 내 계책이 맞아떨어졌구나!”
그러고는 가만히 영을 내려 성을 허물 지레와 호미며 성벽을 기 어오를 갈고리 따위를 준비하게 한 뒤, 낮 동안은 힘을 다해 서북쪽 을 들이치는 체했다. 과연 서북쪽에는 전에 없이 많은 장수의 군사 들이 들끓고 있는 것 같았다.
실속 없이 요란하기만 한 쌍방간의 공수가 서북쪽에서 되풀 이된 뒤 밤이 왔다. 이경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때다!”
조조는 그렇게 외치며 장졸들을 격려해 성의 동남쪽으로 갔다. 낮 에 미리 준비한 지렛대며 끌 따위로 본시 허술한 성을 허물고 녹각 을 베어 넘기는데 성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장수가 군사 를 모두 서북쪽으로 돌린 탓이라 지레짐작한 조조는 앞장서서 장졸 을 이끌고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차례 방포 소리가 나더니 사방에 복병이 일었다.
“속았다. 어서 빨리 군사를 물려라!”
조조가 그렇게 외치며 말 머리를 돌렸으나 등 뒤에서는 어느새 장수가 날래고 씩씩한 군사만 골라 이끌고 몸소 앞장서 짓쳐왔다. 그렇게 되면 이미 싸움이고 뭐고 없었다. 조조는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성을 빠져나오고도 수십 리를 쫓겨야 했다.
장수는 날이 밝을 때까지 조조의 군사를 추격해 마음껏 죽인 뒤 에야 졸개를 수습해 성으로 돌아갔다. 그제서야 조조도 정신을 차리 고 군사를 점검해보았다. 그 하룻밤 사이에 죽고 상한 자가 오만이 넘었고 빼앗긴 치중 또한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거기다가 여건과 우금 같은 장수들까지 부상을 입었을 정도여서 더 이상 남양을 에워 싸고 공격할 수도 없었다.
“지금 조조가 싸울 마음을 버리고 돌아가려 하고 있소. 급히 유표 에게 글을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끊으라고 하시오. 그렇게만 되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으리다.”
가후가 장수에게 다시 그렇게 권했다. 그의 말을 따랐다가 번번이 재미를 본 장수라 마다할 리 없었다. 곧 글 한 통을 써서 유표에게 보냈다.
장수의 글을 받자 유표도 귀가 솔깃했다. 곧 조조의 돌아가는 길 을 끊으려고 군사를 일으키려는데 탐마가 달려와 알렸다.
“손책이 호구에 군사를 내었습니다.”
호구에 군사를 내었다면 장차 형주를 엿보려 한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다.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조조의 길을 끊다가 손책이 정말로 밀려들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표가 주춤하고 있을 때 모사 괴량이 나서서 권했다.
“손책이 호구에 군사를 낸 것은 조조의 꾀일 뿐 결코 형주를 엿보 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조조가 다시 싸움에 졌다 하니 이 틈 을 타 그를 치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지금 곧 군사를 일으키십시오.”
그 말을 듣자 유표도 어느 정도 형세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수하 장수 황조에게 굳게 형주로 오는 길목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은 군사 를 일으켜 조조가 돌아가는 길을 끊으러 갔다.
유표가 안중현에 이르러 장수에게 자기가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을 알리니 힘을 얻은 장수는 가후와 함께 성을 나와 조조를 뒤쫓기 시 작했다.
한편 그 같은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릿느릿 군사를 몰아 돌 아가던 조조는 양성에 이르렀다. 지난번 장수와의 싸움에서 참담하 게 쫓겼던 육수가에 서자 조조가 갑자기 말 위에서 큰 소리로 목을 놓아 울었다. 여러 장수들이 놀라 까닭을 묻자 조조는 더욱 슬피 울 며 대답했다.
“나는 지금 지난해 이곳에서 죽은 나의 장수 전위를 생각하고 있 다. 어찌 통곡이 나오지 않겠느냐!”
그러고는 즉시 그곳에 군마를 멈추게 한 뒤 크게 제사를 차려 전 위의 죽은 넋을 달래었다. 스스로 향을 사르며 울고 절하는데 그 정 성이 얼마나 애절한지 삼군이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위의 제 사가 끝나자 그다음으로는 죽은 조카 조안민(安民)과 맏아들 조앙 (曹昻)을 제사 지냈다. 그리고 그밖에 그 싸움에서 죽은 이름 없는 군사들의 넋은 물론 자신을 위급에서 구해준 뒤 화살에 맞아 죽은 대완마(馬)까지도 빠짐없이 위로했다.
뒷날 조조가 쓴 계략의 요체를 허허실실로 보는 사람이 많다. 만 약 그들이 옳게 본 것이라면 이번에도 조조는 멋진 허허실실의 계략 을 펴고 있는 셈이었다. 얼른 보아서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행동 같 지만, 조조는 그곳에서 잃은 장수와 조카와 자식과 생전에는 이름조 차 몰랐던 군사들이며 죽은 말까지도 마음껏 슬퍼하는 동안 한편으 로는 놀라운 사기앙양의 계책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조의 장졸들은 머릿수는 많아도 한결같이 패전으로 사기 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조조가 새삼 일 년 전에 죽은 장수와 무명 사졸들에게 애절한 정성을 바침으로써 은연중에 감사 (死)의 분위기를 부추겼고, 또 그들 모두를 죽인 게 장수의 군사들 이었음을 일깨움으로써 적에 대한 두려움을 적개심과 복수감으로 바꾸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조의 눈물이나 정성 자체를 거짓이라 할 수는 없다. 그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울었을 뿐이었다. 다만 거기서 어떤 계략적인 요소를 말한다면 그렇게 마음껏 자기의 감정에 충실해도 되리라는 걸 그가 미리 알았다는 정도일까. 조조가 순수하게 감상에 만 젖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있었음은 이튿날 허도로부터 날아든 순욱의 전갈을 받아든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유표가 장수를 돕고자 안중현에서 길을 끊으려 하고 있습니다.”
장수 하나도 못 당해 쫓겨오는 조조에게는 실로 놀랄 만한 전갈 이었다. 하지만 답서는 침착하기만 했다.
“나는 하루에 십 리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행군을 해왔소. 적이 뒤따라올 것을 어찌 모를 리 있겠소?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속에 세워둔 계책이 있으니 안중현에 이르기만 하면 장수는 반드시 깨 뜨려질 것이오. 그대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문득 군사들을 재촉하여 안중현의 경계에 이르렀다. 그 때 이미 유표는 먼저 그곳에 이르러 험한 요해처에 자리를 잡고 있 고 장수도 멀지 않은 곳까지 따라와 있었다.
조조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어두운 밤을 틈타 험한 곳을 뚫고 길을 열게 했다. 그리고 몰래 기병(兵)을 길 양편에 묻어둔 채날 이 밝기를 기다렸다.
조조가 길을 버리고 험한 산속으로 들어가버리자 바로 만나게 된 장수와 유표는 날이 밝는 대로 조조를 찾아나섰다. 한군데 험한 산 속에 조조의 군사가 보이는데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필시 조조가 달아나고 의병을 세워둔 것일 게요. 급히 뒤쫓 읍시다.”
이미 싸움에 져 쫓기는 조조가 유표까지 합세한 마당에 적극적인 공격으로 나올 리 없다고 판단한 장수는 그렇게 권했다. 유표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대로 조조의 군사들이 매복하고 있는 험지로 이끌 고 온 군사를 몰아넣었다.
유표와 장수의 군사들이 험지 깊숙이 들어왔을 때 조조는 미리 숨겨두었던 기병을 내어 들이쳤다. 며칠 전의 승리에 들떠 있던 장 수의 군사들이나 멋모르고 덩달아 따라 들어온 유표의 군사들이 그 치밀하게 짜여진 기습에 당해낼 리 없었다. 둘 다 넙치가 되도록 얻 어맞고 길을 내어주니 조조는 그 기세를 타고 가볍게 안중현을 빠져나와 진채를 내렸다.
닭 쫓던 개 중에도 이마까지 호되게 쪼인 개 꼴이 된 유표는 간신히 패군을 수습한 뒤 역시 간신히 패군을 수습해 나타난 장수를 보고 한탄했다.
“조조의 간계에 거꾸로 당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소?”
그러나 아무래도 젊은 탓인지 장수가 다시 혈기를 부렸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에게 매양 있는 일입니다. 한번 더 해봅시다.”
유표도 이왕 군사를 일으킨 뒤라 그냥 물러설 수는 없다 싶었다. 이에 그들 양군은 다시 안중현에 모여 조조를 뒤쫓을 채비를 갖추 었다.
이때 조조의 진중에는 또다시 놀라운 전갈이 날아들었다. 허도를 지키고 있는 순욱이 원소가 군사를 일으켜 비어 있는 허도를 노린다 는 걸 탐지하고 글을 보내 알려온 것이었다.
조조는 당황했다. 원소라면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인물이 아니었 다. 그를 적으로 삼지 않기 위해 얼마나 근신해온 조조였던가. 천자 가 대장군을 내리는데도 그는 원소를 의식하여 사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승상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그를 달래기 위해 대장군의 벼슬 과 기주, 청주 등 네 곳의 자사를 함께 얻어주지 않았던가. 언젠가는 그와 천하를 두고 한판 승부를 겨루어야겠지만, 그 마지막 순간까지 는 적으로 삼고 싶지 않은 인물이 원소였다. 공손찬과 해묵은 싸움 에 묶여 있기에, 그리고 표면적이나마 동맹 관계이기에 안심하고 떠 나왔는데 이제 그가 움직이려 한다니 실로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원소에 비하면 장수나 유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에 조조는 잠시 그들을 버려두기로 하고 그날로 군사를 돌려 허도로 향했다.
조조가 군사를 돌렸다는 소식을 탐지한 세작이 나는 듯 장수에게 알렸다.
“이땝니다. 급히 조조를 추격해야 합니다.”
장수가 유표를 재촉하듯 말했다. 함께 있던 가후가 그런 장수를 말렸다.
“뒤쫓으셔서는 아니 되오. 뒤쫓다가는 반드시 낭패를 보게 되리라.”
그때 유표가 나섰다.
“오늘 뒤쫓지 않으면 앉아서 기회를 잃을 뿐이오. 뒤쫓아야 하오.”
그리고 오히려 힘써 장수를 권했다. 이에 장수도 그토록 따르던 가후의 말을 어기고 유표와 나란히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를 뒤쫓 았다.
겨우 십여 리쯤 갔을 때였다. 조조의 후대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표와 장수의 군사를 들이쳤다. 뒤쫓는 데만 다급해 있던 그들 양 군은 또 한 번 조조에게 호된 꼴을 당하고 쫓겨나는 수밖에 없었다. 반이나 줄어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간 장수가 무안한 얼굴로 가후에게 말했다.
“공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가 정말로 이렇게 지고 말았소.”
그때 가후가 빙긋이 웃으며 권했다.
“이제 다시 군사를 정돈해 뒤쫓으십시오. 조금 전과는 다를 것입니다.”
“지금 이미 졌는데 어떻게 다시 쫓는단 말씀이오?”
장수와 유표가 입을 모아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나 가후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이제 뒤쫓으면 반드시 크게 이기실 것이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목을 베어도 좋소이다.”
그러자 장수는 그 말을 믿었다. 이미 여러 번 그의 비상한 계략에 덕을 본 까닭이었다. 하지만 유표는 가후의 말을 의심하여 함께 가 려 하지 않았다. 이에 장수는 자신의 군사만 수습해 다시 추격했다. 과연 그 추격에서 장수는 크게 이겼다. 조조의 군사는 잇대인 치 중을 길에 버려둔 채 흩어져 달아났다. 신이 난 장수는 계속해 뒤쫓 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한차례 방포 소리가 나면서 한 떼의 군 마가 길을 막는 바람에 감히 더 따라가지 못하고 조조의 군사가 버 리고 간 치중만 수습해 돌아왔다.
장수가 수많은 수레에 가득 전리품을 싣고 돌아오는 걸 보고 유 표가 가후에게 물었다.
“앞서는 날랜 군사로 쫓겨가는 군사를 추격하려는데 공은 반드시 질 거라 했소. 그런데 뒤에는 이미 싸움에 진 군사로 방금 이긴 군사 를 치는데 공은 반드시 이길 거라 했소. 결국 일은 그대로 되었으나 어찌해서 그런지 알 수가 없소이다. 바라건대 공께서는 밝게 가르쳐 주시오.”
“어렵잖은 일이지요. 장군께서 비록 군사를 잘 쓰신다 하나 조조 의 적수는 못 됩니다. 조조의 군사가 패했다고는 해도 반드시 굳센 장수를 뒤로 돌려 뒤따르는 적을 막게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군사가 아무리 날래어도 능히 당할 수 없을 것이니 처음 은 반드시 질 줄 알았지요. 하지만 조조가 저렇게 급히 군사를 물리 는 것은 허도에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이라 보아 틀림없습니다. 우리 의 추격하는 군사를 깨뜨린 뒤에는 저도 급한 터라 반드시 수레를 가볍게 하고 급히 돌아가려 하겠지요. 아마도 더는 뒤를 방비할 여 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바로 그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다 시 뒤쫓은 것이니 능히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초절(超絶)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가후의 식견이었다. 장수 와 유표는 모두 그 같은 가후에게 감복하였다. 가후는 다시 그런 그 들에게 권했다.
“이미 조조는 그물을 벗어난 새가 되었으니 더 연연하지 마십시 오. 남은 일은 두 분이 서로 의지해 다시 있을 조조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유(劉)장군께서는 형주로 돌아가시고 장(張)장군께서는 양성을 근거로 삼으시되, 서로 입술과 이 같은 사이가 되어 위급할 때 도우 면 두 곳을 모두 보존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들어보니 옳은 말이었다. 이에 유표와 장수는 각기 군사를 이끌고 근거지로 돌아갔다.
한편 돌아가는 조조의 기분은 황망한 중에도 참담했다. 스스로의 머리칼을 베어가며 군기를 세우고 떠난 길이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군사만 적지 않이 축내고 돌아가게 된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후군이 장수의 공격을 받아 몹시 위태롭습니다.”
한번 호된 꼴을 당한 걸로 다시는 추격이 없을 줄 믿었던 조조는 그 말에 놀랐다. 급히 장졸들을 이끌고 몸을 돌려 구하러 갔다. 가보 니 이미 장수는 물러가고 쫓겨온 후군들이 이상한 말을 했다.
“만약 산 뒤에서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나 장수의 길을 막지 않았더 라면 저희들은 모조리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의 군사라더냐?”
조조는 고맙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급히 물었다. 그때 한 장 수가 창을 끼고 말을 달려왔다. 후군 가운데 하나가 그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바로 저 사람입니다.”
“그대는 누군가?”
조조가 말에서 내리는 그 장수를 보고 물었다. 그 장수가 조조에게 군례를 올린 뒤 씩씩하게 대답했다.
“저는 진위 중랑장으로 있는 이통(李通)입니다.”
이통은 강하 평춘 땅 사람으로 자를 문달)이라 썼다. 그 무렵 여남을 지키고 있었으나 조조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 다시 물었다.
“그대가 어찌하여 이리로 오게 되었는가?”
“근래 여남을 지키고 있다가 승상께서 장수, 유표의 무리와 싸우 고 계신단 말을 듣고 특히 돕고자 하여 달려온 길입니다.”
그 말에 조조는 기뻤다. 천만다행으로 후군이 곤경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좋은 장수까지 하나 얻은 셈이었다. 이에 조조는 여러가지 좋은 말로 이통을 치하한 뒤 그를 건공후建攻侯)로 올려 여남 서쪽에서 장수를 막게 했다. 이통은 후(侯)에 봉해진 기쁨으로 조조 에게 절하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여남으로 돌아갔다.
조조가 뜻밖으로 신속히 돌아온 때문인지 원소 쪽에서는 움직임이 없었다.
한숨을 돌린 조조는 이번에 새로 그편에 가담한 손책을 자기 사 람으로 잡아두고자 먼저 표를 올려 상주했다.
‘손책은 지난번에 역적 원술을 칠 때에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 라, 이번에도 유표를 견제하여 그 공이 적지 아니합니다. 손책을 토 여장군(將軍)에 오후(吳侯)로 봉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그리고 이미 허수아비가 된 황제가 그걸 윤허하자 조조는 조서와 함께 사신을 강동으로 보내 손책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유표를 지키 게 했다. 손책이 기꺼이 조조의 말에 따랐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렇게 하여 장수와 유표에 대한 방비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조 조는 자신의 승상부로 돌아갔다. 여러 벼슬아치들이 차례로 조조를 찾아보고 돌아간 뒤 순욱이 물었다.
“승상께서는 느릿느릿 안중 땅까지 오시고도 어떻게 반드시 이길 걸 아셨습니까?”
“장수가 많지 않은 군사로도 나를 괴롭힐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 게 남양을 잃으면 더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오. 자고로 군사는 물러서려 해도 돌아갈 길이 없으면 죽도록 싸우는 법인데 장수의 군사가 바로 그러했던 것이오. 비록 성을 공격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그때까지 아직 곧 반격할 힘이 남아 있었음에도 나는 그를 꾀어내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행군했었소. 그가 성에서 멀리 나오기만 하면 가만히 계략을 써서 사로잡을 작정이었소. 나중에 유표가 끼어들었 지만 별로 군사를 부리는 데 밝지 못한 위인이라 또한 별로 걱정되 지 않았소. 오히려 그 때문에 앞뒤가 막힌 꼴이 된 우리 군사들만 죽 도록 싸우게 만들었을 뿐이었소. 따라서 나는 반드시 그 싸움에 이 길걸 알았던 것이오.”
그러자 순욱은 조조의 놀라운 병략에 감탄해 절로 그 앞에 머리를 그렸다. 그때 마침 곽가가 들어왔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렇게 저물어 찾아왔는가?”
조조가 곽가에게서 심상찮은 표정을 읽은 듯 물었다. 곽가가 소매 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올리며 대답했다.
“원소가 승상께 사자를 보내 글을 보내왔습니다. 공손찬을 치려 하니 특히 양식과 군사를 좀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듣기로 원소는 내가 없는 틈을 타 허도를 엿보았다. 그런데 이제 내가 돌아오고 나니 딴전을 피우는 게 아닌가?”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글을 펴보았다. 별로 달갑지 못한 부탁에 문투까지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원소가 이토록 무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를 치려 해도 힘이 모자라니 실로 한스럽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읽기를 마친 조조가 분한 듯 곽가에게 물었다. 곽가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승상께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원소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못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조조가 알 수 없다는 눈길로 곽가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 원소의 세력은 기주, 청주를 비롯한 네 주에 걸치 고 군사는 백만을 일으킬 수 있다고 호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곽가는 원소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한 고조가 힘으로는 항우에게 당해내지 못했음은 주공께서도 알 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지략이 나아 항우가 더 강했으나 마침내 한 고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지금 주공과 원소 또한 그와 같으 니 주공께서는 열 가지 이길 것이 있고, 원소에게는 열 가지 질 것밖 에 없습니다. 비록 원소의 세력이 성하나 반드시 두려워할 일만은 아닙니다.”
“내가 열 가지 이길 것이 있고, 반대로 원소는 열 가지 질 것이 있 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첫째는 원소는 번거로운 예를 좋아하고 지나치게 꾸미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공께서는 일의 알맹이만 취하시고 나머지는 저 되어가는 대로 맡기십니다. 이는 이른바 자연에 합하는 것으로, 도 에서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의로 이기고 계신 것입니다. 원소는 거스름[逆]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주공께서는 따름[順]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원소가 군사를 일으키려면 천자를 거슬러 일으켜야 하지만 주공께서는 바로 그 천자의 명에 따라 군사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법도 하이. 천자를 모시고 있는 건 나니까. 그럼 나머지 여 덟은 무엇인가?”
“셋째는 다스림[]에서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환제, 영제 이래 로 정치가 잘못되고 있는 것은 잘못에 너무 관대한 탓입니다. 그런 데 이제 원소는 다시 그 관대함으로 사람을 모으는 데 비해 주공께 서는 매서움으로 그 잘못을 바로잡고 계시니 이는 바로 다스림에서 주공이 앞서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는 헤아림[]에서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원소는 겉으로는 재주 있는 이를 도탑게 대하나 안으로는 시기하며, 사람을 쓰는 데 는 친척을 많이 뽑아 씁니다. 이에 비해 주공께서는 겉으로는 요란 스럽지 않으나 속으로는 쓸 사람의 재주를 밝게 알아보며, 사람을 쓰는 데도 오직 재주에 따라 고릅니다.
다섯째로는 꾀함[謀]에서 나은 것입니다. 원소는 여러 가지로 일 을 꾀하나 결단하는 일이 적지만 주공께서는 한 가지 계책을 얻으시 면 이를 곧 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여섯째는 덕입니다. 원소는 모든 일을 오직 자기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하나 주공께서는 지성으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니 이는 덕으로 써 원소를 이기고 계신 것입니다.
일곱째는 어짊[仁]에서 원소를 앞지르고 계신 일입니다. 원소는 가까운 사람만 보살피고 먼데 사람은 소홀하게 대하는데 주공께서는 모든 사람을 두루 근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덟째는 밝음[明]에서 나은 일입니다. 원소는 남이 참소하는 말 을 들으면 의혹을 일으켜 마음이 어지러워지지만 주공께서는 그렇 지 않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헤아려 행하시니 이는 주공 께서 원소보다 밝음을 뜻합니다.
아홉째는 법을 펴심[]에서 뛰어난 일입니다. 원소는 자기 주관 에 따라 옳고 그름을 뒤섞어버리는데 주공께서는 법과 도가 한가지 로 엄하고 밝습니다. 실로 원소가 따를 수 있는 바 못 됩니다.
열 번째는 군사를 부림[武]에서 주공께서 원소를 앞지르고 계신 일입니다. 원소는 허세를 부리기만 좋아할 뿐 군사를 움직이는 요점 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공께서는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이 기시며 군사를 부림[用] 귀신같이 밝으시니 원소는 감히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곽가의 말은 청산유수와 같았다. 그러나 입에 발린 아첨이 아니라 조조와 원소의 장단점을 정확히 따지고 헤아려 밝힌 것이었다.
“지나친 말이다. 공의 그 같은 말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조조는 짐짓 그렇게 겸손을 떨었으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 다. 가만히 듣고 있던 순욱이 곽가를 거들었다.
“곽봉효(孝)가 말한 그 열 가지는 제 어리석은 소견과도 들어 맞습니다. 원소의 군사가 비록 많다 해도 두려워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러자 곽가가 다시 조조를 격려하듯 말했다.
“저희 말을 믿고 잠시만 원소의 무례함을 참으십시오. 당장은 그를 이용해 오히려 이쪽의 근심거리를 먼저 없애는 게 좋겠습니다.”
“그를 이용해 당장의 근심거리를 없애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조조가 곽가를 살피며 물었다. 곽가가 미리 준비한 듯 대답했다. “서주의 여포는 겉으로는 주공을 따르는 체하고 있으나 실로 가 슴과 배의 큰 화근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침 원소가 공손찬 을 치겠다고 하니 못 이긴 체 그를 부추겨 그대로 하게 하십시오. 그 렇게 되면 달리 허도를 넘볼 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므로 주공께서는 그 틈을 타 멀리 군사를 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여포를 쳐 없 애고 동남(東南)을 평정한 뒤 원소를 도모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렇 지 아니하고 우리가 원소를 공격하게 된다면 여포는 반드시 그 빈틈 을 노려 허도를 뺏으러 달려올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등과 배 로 적을 맞는다는 뜻이 되어 그 해를 입음이 결코 적지 아니할 것입 니다.”
그 같은 곽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조조가 아니었다. 원소의 무 례함 때문에 치솟던 화를 깨끗이 억누르고 이내 의논을 여포 칠 일 로 바꾸었다. 순욱이 나서서 말했다.
“동으로 여포를 치는 일 또한 그리 쉽게 보실 게 못 됩니다. 먼저 유비에게 사람을 보내 승상의 뜻을 알리고, 그로부터 그쪽의 사정을 들은 뒤에 군사를 일으키는 편이 옳습니다.”
역시 맞는 말이었다. 당대의 으뜸가는 맹장이요, 기름진 서주를 근거로 삼고 있는 여포라 가볍게 대할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전에 원술을 치고 돌아오면서 유비에게 가만히 해둔 말도 있어 조조 는 곧 순욱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에 조조는 먼저 유비에게 여포를 칠 뜻과 함께 그쪽의 사정을 묻는 밀서를 보내고 다음으로 원소를 부추기는 일에 들어갔다. 황제 에게 상주하여 전에 원소에게 내린 대장군 벼슬에다 태위를 더하고 아직 보내지 않은 기주, 청주, 유주, 병주의 도독(都督) 인수까지 얹 었다. 그런 다음 전에 그가 보낸 글에 답하는 밀서를 지닌 사신과 함 께 원소에게 보냈다.
‘・・・・・・공께서 공손찬을 치신다면 나는 마땅히 군사를 내어 돕겠습
니다.’
잔뜩 원소를 추켜세우는 말을 빼면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과 함께 조조의 그 같은 글을 받자 원소는 몹시 기뻤다. 비록 조조처럼 천자를 끼고 있지는 못했으나 벼슬은 전에 황후의 오라버니가 올랐던 대장군에 삼공의 하나인 태위까지 더해지니 결코 조조에 비해 낮지 않았다. 거기다가 조조가 발끈하리 라 생각하며 쓴 글의 답장도 마치 윗사람에 올리는 것처럼 공손하고 간곡하기 그지없었다.
‘조조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마지막에 군사와 식량까지 보내겠다는 내용까지 읽자 원소는 그 렇게 결론을 내렸다. 조조가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걸 꺼렸던 것은 기우로만 여겨졌다.
그렇게 되면 먼저 쳐 없애야 할 것은 당연히 여러 해를 두고 싸워 온 공손찬이었다. 들리는 말로 그 무렵 공손찬은 안주(安住)와 만심 (心)의 기색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원소가 보낸 장수들을 여 러 차례 두들겨 쫓아보내고 세력이 북방 여섯 주에 미치면서부터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던 약점이었다. 이에 원소는 먼저 공손찬부터 쳐 없애기로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이번에는 내 몸소 앞장서 공손찬을 치리라. 장졸들은 반드시 힘을 다해 그를 사로잡을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날랜 군사 십여만과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스스로 북정(北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