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11화 : 아직은 한(漢)의 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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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11화 : 아직은 한(漢)의 천하


아직은 한(漢)의 천하

어쨌든 여포와 진궁을 죽인 조조는 곧 여포의 남은 세력을 수습 하는 일에 들어갔다. 죽음 대신 조조의 후대를 받자 감격하여 항복 한 장요에게 중랑장 벼슬과 함께 관내후(關內侯)를 내린 뒤 먼저 여 포의 옛 장수 장패臧)에게 항복을 권하도록 했다.

장패는 여포가 이미 죽고 장요도 항복했다는 말을 듣자 이끌고 있던 군마와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조조는 그에게도 후한 상을 내린 뒤 다시 태산의 도적 떼로 여포를 돕던 손관(孫觀)의 무리를 끌 어들이게 했다. 장패의 권유를 받자 손관, 오돈, 윤례 등도 차례로 무 리와 함께 조조에게 항복해 왔으나 오직 창희만이 귀순하지 않았다. 조조는 장패를 낭야의 상(相)으로 삼고 손관의 무리도 각기 벼슬 을 내린 뒤 청주와 서주의 바닷가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여포의 아내와 딸을 허도로 실어 보낸 다음 크게 잔치를 벌여 삼군을 먹인 뒤

진채를 뽑아 군사를 돌렸다. 조조의 군사가 허도로 돌아갈 무렵 그 곳 백성들이 길가에 나와 향을 사르며 조조에게 간청했다.

“유사군께 다시 서주를 맡기시어 저희들을 보살피게 해주 십시오.”

그 같은 백성들의 간청에 조조는 마음속으로 놀라움과 시기를 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포의 무능 때문에 덕을 본 탓이라고는 해도, 그토록 짧은 기간에 서주의 백성들을 사로잡은 유비의 이상한 힘에 대한 놀라움과 시기였다.

‘역시 무서운 인물이다. 반드시 허도로 데려가 내 연못에 가둬둬야겠다…….’

조조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부드럽 기 그지없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너희 정성이 갸륵하나 유사군께서는 이번 여포 토벌에 공이 매 우 크신 분이다. 먼저 천자께 뵈옵고 벼슬을 받은 뒤에 돌아와도 늦 지 않으리라.”

그러자 백성들도 그 말을 옳게 여겨 다만 조조에게 감사하고 물 러났다. 조조는 거기장군車騎將軍) 차주胄)를 불러 서주를 다스 리게 하고 회군을 재촉했다.

허창으로 돌아온 조조는 그 싸움에 나간 사람들에게 각기 공에 따라 벼슬과 상을 내렸다. 그리고 그중에도 유비는 특히 자신의 상 부(相) 가까운 곳에 집을 정해주고 천자께 그 군공이 큼을 상주하였다.

조조의 상주를 받은 헌제는 다음 날 조회를 열고 현덕을 불렀다.

현덕이 조복을 갖추어 입고 전각 아래 엎드려 천자를 뵈오니 천자는 무슨 정에 끌렸던지 그를 전상으로 불러 올리고 물었다.

“그대의 고향과 윗대는 어떻게 되는가?”

아마도 유비의 성을 보고 종친으로 여겨 물은 것이었다. 유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신은 탁군이 고향인 바,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예로 효경황제 (孝景皇帝) 각하의 현손(孫)인 웅)의 손자요, 홍弘)의 아들이 됩 니다.”

그러자 천자는 좌우를 돌아보며 명했다.

“종족)의 세보(世譜)를 가져와 찾아보도록 하라.”

이에 종정(宗) 벼슬을 하는 이가 종실의 세보를 가져와 유비의 혈통을 밝혀나갔다.

“효경 황제께서는 열네 분 왕자를 보셨는데 그중 일곱째 분이 중 산정왕이신 유승(劉勝)입니다. 승은 육성정후(陸城侯)정(貞)을 낳 고, 정은 패후앙을 낳았으며, 앙은 장후漳侯) 녹(綠)을 낳 고, 녹은 기수후(沂水侯) 연(戀)을 낳았습니다. 다시 연은 흠양후(欽 陽侯)영(英)을 낳고, 영은 안국후(安國侯)건(建)을 낳았으며, 건은 광릉후(廣陵侯) 애(哀)를, 애는 교수후(膠水侯) 헌(憲)을, 헌은 조읍후 (祖邑侯) 서(舒)를, 서는 기양후(祁陽侯) 의(誼)를, 의는 원택후(原澤 侯) 필(必)을, 필은 영천후侯) 달(達)을, 달은 풍령후(豊靈侯) 불 의(不)를, 불의는 제천후(濟侯) 혜(惠)를 낳았습니다. 이 혜(惠)가 낳은 게 바로 동군 범령(范令)을 지낸 유웅(劉雄)이며, 웅은 또 홍(弘)을 낳았던바, 홍은 벼슬이 없었습니다. 현덕은 그 홍의 아들입니다.”

헌제가 세보로 가만히 헤아려보니 유비가 자신에게 아재비[叔] 뻘 이었다.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편전으로 불러들인 뒤 숙질 간 이 보는 예를 펼치게 했다. 촌수는 수십 촌이 되고, 전한과 후한의 혈통이 바로 이어진 것도 아니어서 남과 다름없는 사이였으나 헌제 가 유비를 반긴 데는 까닭이 있었다.

‘조조가 대권을 농단하여 나랏일이 하나도 짐을 위주로 이루어지 지 않고 있다. 비록 촌수는 멀다 하나 이제 이런 영웅의 기상이 있는 아재비를 얻었으니 뒷날 반드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헌제의 마음속에는 그 같은 바람이 있었다. 그리하여 단순히 종실 로 반길 뿐 아니라 좌장군(將軍)에 의성정후(宜城侯)로 봉한 뒤 잔치까지 벌여 유비를 은근하게 대접했다. 뒷날까지 유비를 따라다 닌 호칭 가운데 황제의 아재비, 곧 황숙(皇叔)이란 호칭은 그렇게 해 서 생겨났다.

하지만 조조 쪽이라 해서 그 같은 황제의 내심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조조가 조정에서 돌아오자 순욱을 비롯한 모사 들이 그를 맞으며 입을 모아 말했다.

“천자께서 유비를 아재비로 대접하는 것은 결코 명공께 이롭지 못합니다.”

“이미 유비는 황숙으로 인정되었고 나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야 하는 몸인데 어찌 그걸 못하게 하겠소? 더구나 나는 유비를 허도에 잡아두려는 것이니 그만한 대우는 받게 해주어야 되지 않겠소.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이름이야 천자와 가깝든 말든 실제로 대권은 내손안에 있으니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소.”

조조는 가볍게 모사들의 말을 받은 뒤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오히려 지금 당장 제거해야 할 것은 태위 양표(楊彪)라 생각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시오?”

“그 일이 그토록 급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모사들 가운데 하나가 물었다. 조조가 엄한 얼굴로 대답했다. “태위 양표는 원술과 친척이 될 뿐만 아니라 원소, 원술과 내통 하여 해를 끼친 일이 적지 않았소. 오래 두면 반드시 큰 화가 될 것 이오.”

“그렇지만 겉으로 아무것도 드러난 죄목이 없는데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조조가 한층 차갑게 대답했다.

“그거야 사람을 시켜 양표가 원술과 내통하고 있다는 말을 퍼뜨 리게 하면 되지 않겠소? 원술은 이미 존호를 참칭한 역적이니 그와 내통한 죄로도 결코 살아날 수 없을 것이오.”

그 하는 말로 보아 조조는 아직도 유비를 원소나 원술만큼 위험 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손안에 들어온 유비보다는 자 칫하면 원소, 원술 형제와 손을 잡아 내응하게 될 양표를 먼저 제거 하려 했다.

조조의 암시를 받은 측근은 다음 날로 곧 사람을 시켜 양표를 무 고(誣告)하게 했다. 양표가 원술과 몰래 내통하고 있다는 내용이었 다. 스스로 시킨 일이나 다름없건만 조조는 그 무고를 구실로 양표를 잡아 가두게 하고 만총으로 하여금 심문케 했다.

이때 북해 태수 공융(孔融)은 허도에 있었다. 조조와도 가까이 지 내던 그는 양표가 갇혔다는 말을 듣자 조조를 찾아와 말했다.

“양공(楊公)은 네 대(代)나 깨끗한 덕으로 조정에서 일해온 집안 의 사람입니다. 어떻게 원씨(袁氏)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하려는 게 아니외다. 조정의 뜻이오.”

조조가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그러나 공융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승상께서 하시려는 일은 옛날 주공(周公)과 다름이 없습니 다. 성왕(王)으로 하여금 소공(公)을 죽이게 해놓고, 주공이 나는 모르는 일이라 잡아뗀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조조는 공융의 밝은 헤아림이 얄미웠지만 그렇게까지 나오자 어 쩌는 수가 없었다. 양표의 벼슬을 떼어 고향으로 내쫓는 것으로 일 을 매듭지었다.

의랑으로 있던 조언(趙)이란 사람이 그 소문을 듣고 크게 분개 했다. 조조가 나랏일을 마음대로 하여 천자의 뜻도 받들지 않고 대 신을 내쫓은 일을 탄핵했다.

양표를 죽이지 못하고 살려 보낸 것도 마음에 차지 않는데, 그 일 로 자기를 탄핵하는 자까지 있다는 말을 듣자 조조는 몹시 노했다. 곧 조언을 잡아들여 죽였다. 의랑은 원래가 정치의 득실을 따지는 벼슬아치[諫官]이다. 그런 조언을 함부로 잡아 죽이는 걸 보자 조정 의 백관들 치고 조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짐작건대 조조는 여포를 잡아 죽임으로써 천하의 향방에 대해 어떤 자신을 얻었는 듯하다. 그리고 조정을 한층 더 자기 손아귀에 집 어넣기 위해 한 시험으로 조언을 죽였던 것 같다. 그래도 누구 하나 맞대놓고 조조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는 걸 보고 조조는 심중으로 더 욱 자신의 천하가 도래할 것임을 확인했을 것이다.

조조의 그런 내심을 읽은 모사 정욱이 조조에게 은근하게 권했다.

“지금 명공의 위명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 틈을 타 왕패(王覇)의 큰일을 꾀해보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조조도 별로 숨김 없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아직은 조정에 한나라의 팔다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소. 가 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될 것이오. 하지만 그들의 동정을 한번 살펴 보는 것도 좋겠지. 천자께 청해 사냥을 나가 적당한 때에 백관들을 격동시켜보겠소.”

그러고는 정말로 큰 사냥을 준비케 했다. 좋은 말에다 이름난 매 며 날래고 사나운 개에다 활과 화살까지 특별히 마련케 한 뒤, 군사 를 성 밖에 모아두고 들어가 헌제에게 아뢰었다.

“폐하, 신이 사냥갈 마련을 했으니 오늘 하루는 정사를 잊고 전야 를 한번 마음껏 달려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경의 뜻은 고맙지만 전야를 달리며 짐승을 쫓는 일이 제왕된 자 의 바른 길이 아닌 것 같아 두렵소.”

갑작스런 청이라 천자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조조가 좋은 말로 구실을 댔다.

“예부터 제왕은 수(蒐, 봄에 하는 사냥), 묘(苗, 여름에 하는 사냥), 선

( 가을에 하는 사냥), 수(狩, 겨울에 하는 사냥)라 하여 봄·여름·가을·겨울 할 것 없이 교외로 나가 무위(武威)를 천하에 떨쳤던 것입니다.

지금 사해가 시끄럽고 어지러우니 마땅히 전야에 나가 사냥을 하심 으로써 폐하의 무위를 떨쳐 보이실 때입니다.”

조조가 그렇게 간곡히 나오니 천자로서는 마다할 수가 없었다. 마 지못해 사냥을 따라 나서니 말은 소요마(逍遙馬)요, 활은 보석을 아 로새긴 보궁에 화살은 금으로 된 촉을 가진 금비전(金箭)이었다. 조조도 한껏 위엄을 부려 발굽 누른 비전마(飛電馬)에 십만의 무 리를 딸린 채 천자와 더불어 허전(田)으로 나가는데, 군사가 둘러 싸 몰이를 하는 넓이만도 이백 리에 이를 지경이었다. 유비와 관, 장 두 아우도 그 사냥에 따라 나섰다. 각기 활과 화살을 안장에 매달고 무기를 든 데다 가슴을 싼 갑옷까지 안으로 받쳐 입은 채였다.

조조는 무엄하게도 천자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다시피 앞서 나아 갔다. 마땅히 말 한 필 거리는 뒤떨어져 따라야 할 것임에도 조조가 짐짓 말을 달려 겨우 천자와는 말 대가리 하나 차이밖에 두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 조조의 등 뒤에는 곧 심복 장교들이 따르고 백관들은 다만 멀찌감치서 천자를 시중들 뿐 감히 가깝게 다가가지 못했다. 마침내 허전에 이르러 사냥이 시작되는데 어떤 길가에서 천자는 말에서 내려 시립하고 선 유비와 마주쳤다. 천자가 반가운 마음으로 청했다.

“짐은 오늘 황숙께서 사냥하는 솜씨를 보고 싶소. 어서 말에 오르시오.”

그 바람에 유비와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는 두 아우도 천자의 일 행에 끼어 사냥을 하게 되었다. 마침 얼마 가지 않아 토끼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조금 전에 헌제에게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유비는 곧바로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보기 좋게 토끼를 꿰뚫어놓았다.

“훌륭한 솜씨요.”

헌제는 한층 유비가 미더운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얼마를 달려 다시 조그만 언덕 하나를 도는데 이번에는 가시덤불 속에서 한 마리의 큰 사슴이 뛰어나왔다. 헌제가 연달아 세 번이나 화살을 날렸으나 맞지 않았다.

“승상께서 한번 쏘아보시오.”

헌제는 약간 무안한 얼굴로 조조를 돌아보며 들고 있는 자신의 보궁과 금비전을 내밀었다. 조조는 단 한번의 사양도 없이 천자가 내미는 활과 화살을 받았다. 그리고 한껏 시위를 당긴 뒤 살을 날렸 다. 금비전은 어김없이 사슴의 등줄기에 꽂히고, 사슴은 한마디 구 슬픈 비명과 함께 풀 위에 고꾸라졌다.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사슴에 꽂힌 화살이 금비전인 것을 보고 쏜 사람이 헌제인 줄로 안 군신과 장교들은 그렇게 손뼉을 치며 환호를 보냈다. 그때 해괴 한 일이 벌어졌다. 조조가 말을 달려 나가 천자를 막아서더니 군신 과 장교들의 만세에 손을 들어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조조의 그 참람된 행동에 군신은 모두 낯색이 변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한 것은 관운장이었다. 머리칼을 올올이 곤두세우고 누에 같 은 눈썹 아래는 봉의 눈이 불을 뿜는 듯했다. 금세 말을 박차고 달려 나가 한칼에 조조를 베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 같은 관우의 모습을 본 유비는 놀랐다. 황황히 두 손을 저으며 눈짓을 보내 관우를 말렸다. 다행히 관우도 유비가 그렇게 하는 걸 보고 억지로 노기를 억눌러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유비는 혹시라 도 자기들의 그런 행동이 눈에 띌까 봐 얼른 조조에게 다가가며 치하했다.

“승상께서는 실로 신궁(神弓)이십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승상의 솜씨에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조조도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빙긋 웃으며 검사를 했다.

“이는 모두 천자 폐하의 홍복이외다.”

그러고는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헌제에게 뒤늦은 하례를 올렸다. 그러나 천자의 보궁은 기어이 돌려주지 않고 자기 허리에 걸었다. 그럭저럭 몰이와 사냥이 끝나고 천자와 조조는 허전에서 한바탕 잔치를 벌인 뒤 허도로 돌아왔다. 사냥에 따라 나섰던 여러 신하와 장수들도 각기 돌아갈 채비를 했다.

“조조는 임금을 속이고 제 시커먼 뱃속을 드러내기에 한칼에 베 어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까닭으로 형님께서 저를 말리셨 습니까?”

그들 형제만 돌아오는 길에 관우가 문득 유비에게 물었다. 유비가 조용히 까닭을 밝혔다.

“아우의 뜻은 장하나 쥐 잡으려다 독 깨는 꼴이 날까 두려워서였 네. 생각해보게. 조조와 천자는 말대가리 하나 사이도 떨어져 있지 않고 또 그 주위는 그의 심복들이 둘러싸고 있지 않았나? 만약 아우 가 한때의 분함을 참지 못해 가볍게 움직였다가는 조조는 죽이지도 못하고 천자만 상하게 했을 것이네.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그 죄는 거꾸로 우리가 뒤집어쓰게 되었을 것 아닌가?”

생각이 깊은 관우라 유비의 말을 듣고 그때의 정경을 떠올려보니 과연 그랬다. 그러나 여전히 분함은 남는지 한스럽게 말했다. 

“오늘 그 역적을 죽이지 못했으니 뒷날 반드시 나라의 큰 화근이 될 것이오.”

유비가 그런 관우를 다시 단속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오늘 일은 비밀로 하고 결코 가볍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되네.”

하지만 그날의 사냥에서 가장 분한 꼴을 당한 것은 역시 헌제 자 신이었다. 헌제는 궁궐로 돌아가자마자 복황후(伏皇后)에게 울며 말 했다.

“짐이 대위에 오른 이래 간웅이 잇대어 일어나 처음에는 동탁의 시달림을 받게 되더니, 뒤에는 이각과 곽사의 난리를 당하게 되었소. 실로 여느 사람이 겪지 못한 고초를 이 몸과 그대가 겪었는데, 이제 다시 조조가 나타났구려. 조조는 한나라의 신하로서 뜻밖에도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고 대권을 희롱하여 함부로 위세를 부리며 복록을 누리고 있소. 짐이 매양 보고만 있자니 등에 가시를 지고 있는 듯한 데, 오늘은 또 사냥터에서 나를 대신해 사람들의 치하를 받기까지 했 소이다. 그 무례함이 이미 극에 달했으니 오래잖아 딴 음모를 꾸밀 것이라, 실로 우리 부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소……………” 

그 말에 황후가 헌제를 위로했다.

“조정에 가득한 공경(公卿)들이 모두 한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데 설마 나라의 어려움을 구할 이가 하나도 없기야 하겠습니까? 너무 심려하지 마옵소서.”

그런데 황후의 그 같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사람이 밖 에서 들어서면서 힘있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 사람을 추천하겠 습니다. 반드시 나라의 큰 도적을 없이 해낼 수 있는 인물입니다.”

황제가 놀라 살피니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복황후의 아비 되 는 복완(完)이었다. 헌제는 눈물을 거두며 물었다.

“황장(丈)께서도 조조 그 역적이 나랏일을 함부로 하고 있는 것 을 알고 계셨소?”

“허전에서 사슴을 쏘았을 때의 일을 누가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 러나 또한 이미 조정이 조조의 피붙이이거나 졸개로 가득하니 나라 의 인척 된 이가 아니면 누가 충성을 다해 역적을 치려 하겠습니까? 부끄럽게도 신은 늙고 힘이 없으나, 다만 한 사람 거기장군이요, 국 구(國舅)인 동승(董承)은 한번 그 일을 맡겨볼 만합니다.”

복완이 그렇게 대답하자 헌제의 얼굴에도 한 가닥 밝은 기운이 돌았다.

“동(董국구가 나라의 어려움을 당해 힘을 다하고 있음을 짐도 익 히 알고 있소. 마땅히 그를 불러들여 대사를 의논해보리다.”

그리고 금세라도 사람을 시켜 동승을 부를 듯 서둘렀다. 복완이 황급히 그런 헌제를 말렸다.

“지금 폐하의 좌우에는 조조의 심복들이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만 약 잘못되어 일이 새 나가는 날이면 그 화가 작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옷 한 벌을 짓게 하시고 옥대(玉帶)하나를 곁들여 동승에게 내리십시오. 옥대의 속 을 뺀 다음 밀조를 접어 넣고 꿰매게 하시면 겉보기에는 감쪽같을 것입니다. 그 뒤에는 동승에게 넌지시 그 속에 밀조가 들어 있음을 알리시고 옷과 함께 주어 보냅니다. 동승이 집으로 돌아간 뒤 몰래 옥대에서 밀조를 꺼내 읽는다면, 비록 그 일이 낮에 이루어진다 해 도 귀신도 모르게 폐하의 밀명이 그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헌제가 들으니 그럴듯했다. 따라서 복완이 돌아가기 무섭게 밀조 를 짓는데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써 나갔다. 밀조가 다된 뒤 헌제는 다시 복황후를 시켜 자주 비단으로 옷 한 벌을 짓게 하고 그에 곁들 인 옥대 속에 그 밀조를 넣어 꿰매도록 했다.

비단옷과 밀조를 접어 심을 넣은 옥대가 마련되자 헌제는 곧 사 람을 보내 동승을 불러들였다. 영문을 모르고 불려온 동승이 예를 마치기 무섭게 헌제가 입을 열었다.

“짐이 간밤에 황후와 더불어 지난날 패하(河)에서 고초를 겪던 일을 얘기하다가 문득 국구를 떠올리게 되었소. 그리고 새삼 그때 국구께서 세운 큰 공을 생각하여 늦게나마 위로할 양으로 이렇게 불 러들인 것이오.”

“황송하옵니다.”

몇 년 전의 일을 새삼 감사하는데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동승은 감 격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헌제는 그런 동승을 이끌고 전각을 나가 태 묘(太廟)로 갔다. 조조의 눈과 귀도 피하고 얘기도 자연스레 꺼낼 수 있는 곳으로 헌제가 택한 곳은 거기에 있는 공신각(功臣閣)이었다.

손수 향을 사른 헌제는 거기에 모셔져 있는 화상(畵像)을 동승과 함께 하나하나 살피며 지나갔다. 중간쯤에 있는 한고조(漢高祖)의 화상에 이르렀을 때였다.

“우리 고조께서 어떤 곳에서 몸을 일으켰으며 어떻게 이 나라를 여시었소?”

황제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동승이 놀라 대답했다.

“폐하께서 신을 놀리시는 것입니까? 이 나라가 창업된 일을 폐하 께서 어찌 모르실 리 있습니까? 태조 고황제(皇帝)께서는 사상(泗 上) 마을의 정장, 이장 정도)이셨으나 석 자 칼로 큰 뱀을 베시고 의를 앞세워 몸을 일으키시었습니다. 천하를 종횡하기 삼 년에 진 (秦)을 넘어뜨리고 오 년에는 초(楚)를 없애니 천하가 그분을 따라 만세의 기업을 이룩하신 것입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들어서 아는 그 일을 무슨 일로 폐하께서 새삼 신에게 물으십니까?”

“조종(祖宗)은 그와 같이 영웅이셨건만 자손된 이 몸은 이토록 겁 많고 힘없는 허수아비 임금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을 수 있겠소!”

문득 황제가 그렇게 탄식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한고조를 좌우에서 받들고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저 두 사람은 유후(劉侯) 장량과 찬후(鄭侯)소하가 아니오?”

“그렇습니다. 고조께서 나라를 여실 때 저 두 사람의 힘에 기대인 바 실로 많았습니다.”

동승이 어렴풋이 헌제의 뜻을 짐작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 다. 그러자 천자는 사방을 둘러보아 가까운 곳에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가만히 동승에게 말했다.

“경 또한 마땅히 저 두 사람처럼 짐 곁에 서게 될 것이오.”

그 말에 동승이 몸둘 바를 몰라하며 겸사했다.

“신은 한 치의 공도 없는데 어찌 그 같은 일이 당키나 하겠습니까?”

황제는 그 같은 동승을 그윽히 바라보다가 다시 예전 일을 꺼냈다. 

“짐은 항상 서도(西都)에서 경이 어가를 구해준 공을 잊지 않고 있소.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못했구려.”

역시 어딘가 숨어서 듣고 있는 귀를 두려워해서인지 말은 그렇게 해도 뜻은 딴 데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은 이어 느닷없이 입고 있던 비단옷을 벗고 옥대를 풀더니 동승에게 내밀었다.

“경에게 이 옷과 띠를 내릴 것이니 마땅히 입고 띠되 항시 내 곁 에 있는 듯하시오.”

얼핏 보아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승은 감격 해 받으면서도 다시 한번 천자의 기색을 살폈다. 헌제가 그런 동승 의 눈길을 받고 문득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경은 돌아가거든 자세히 살피어 부디 짐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시오.”

그제야 동승도 그 옷과 띠가 예사 아닌 뜻이 담긴 물건임을 짐작 했다. 쓸데없는 되물음으로 자칫하여 말이라도 새 나갈까 두려워 말 없이 받아들고 천자의 앞을 물러 나왔다.

과연 조조가 풀어놓은 눈과 귀는 매서운 데가 있었다. 동승이 미 처 대궐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조조에게 말이 들어갔다.

“황제와 동승이 공신각에 올라가 가만히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들어보니 어쩐지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이에 당장 대궐로 달려간 조조는 마침 대궐을 나서는 동승과 마주치게 되었다.

뜻밖에도 조조와 마주치게 된 동승은 피할래야 마땅한 곳도 없어 그대로 길가에 선 채 조조에게 예를 표했다. 조조가 아무것도 모르 는 체하며 물었다.

“국께서는 무슨 일로 입궐하시었소?”

하지만 찬찬히 살피는 조조의 눈길에서 동승은 이미 조조가 모든 걸 듣고 달려온 길임을 알아차렸다. 서툰 거짓말로 조조의 의심을 키우기보다는 바른대로 말하는 게 옳다고 여겨 대답했다.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기에 들어왔더니 비단옷과 옥대를 내리셨습니다.”

“그럼 그 옥대를 끌러 보여주시오.”

조조가 대뜸 그렇게 요구했다.

아직 동승도 그 옥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으나 조조가 그같이 말하자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헌제가 나중에 가만히 덧붙 인 말이 떠오르며, 틀림없이 그 안에 밀조가 들어 있으리란 짐작이 갔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국구 어른 띠를 받아오지 못하겠느냐?” 

동승이 걱정과 두려움으로 머뭇거리자 조조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좌우를 꾸짖었다. 놀란 수하들이 우르르 달려와 빼앗듯 동승의 옥대를 받자 한참을 이 잡듯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가 지어낸 웃음 과 함께 옥대를 아직 손에 쥔 채 동승에게 말했다.

“정말 좋은 옥대외다. 이번에는 그 비단옷도 한번 보여주시오.”

그러자 동승은 어쩔 수 없이 비단옷마저 벗어 조조에게 내주었다. 조조는 다시 그 비단옷을 살피기 시작했다. 미심쩍은 곳은 햇볕에 비춰보아 가면서까지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한참을 그러더니 돌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스스로 그 비단옷을 입고 옥대 를 둘렀다.

“잘 맞느냐?”

조조의 그 같은 물음에 좌우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꼭 맞습니다. 승상을 위해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조조는 동승을 돌아보며 물었다.

“국구께서는 이 옷과 띠를 내게 주실 수 없겠소?”

실로 외람된 청이었다. 천자의 하사품을 중도에서 가로채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나 조조로서는 그럴 법도 했다. 분명히 의심스러운 데도 급하게는 단서를 잡을 길이 없으니 자신의 부중으로 그 옷과 띠를 가져가 천천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폐하께서 은덕을 베풀어 제게 내리신 것이라 함부로 다른 이에 게 넘길 수가 없습니다. 승상께서 정히 옷과 띠가 필요하시다면 제 가 따로 한 벌 지어 올리겠습니다.”

동승이 점잖게 거절했다. 그러나 조조는 더욱 의심이 드는 듯 목 소리까지 날카로워지며 따지고 들었다.

“새삼 옷과 띠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국구께서도 마찬가지가 아 니겠소? 그런데 폐하께서 국구를 불러 이렇게 옷과 띠를 내리셨으 니 이상스럽지 않소? 혹 이걸 주고받는 가운데 무슨 음모가 있는 것 은 아니오?”

그 말에 동승은 뜨끔했다. 얼른 낯색을 부드럽게 하여 조조의 말을 받았다.

“감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승상께서 굳이 그 옷과 띠를 원하신다면 그대로 거두어주십시오.”

동승이 너무도 쉽게 천자가 하사한 비단옷과 옥대를 바치려 들자 조조도 조금 의심이 풀리는 기색이었다. 무언가가 있는 듯하지만 그 옷과 띠는 아니라 여겨 금세 말을 바꾸었다.

“공이 폐하로부터 하사받은 것을 내가 어찌 빼앗겠소? 그저 장난 으로 그래보았을 뿐이오.”

그러고는 비단옷과 옥대를 돌려준 뒤 대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호랑이 굴을 빠져나오는 듯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온 동승은 곧 사람의 출입이 없는 서원에 자리를 잡고 헌제가 내린 옷과 띠를 살 폈다. 먼저 비단옷을 펼쳐놓고 밤늦도록 솔기 하나까지 자세히 살폈 으나 아무것도 이상한 게 없었다.

‘천자께서 이것들을 내리실 때 자세히 살필 것도 아울러 명하셨 다. 틀림없이 어떤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아무것도 찾 을 수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동승은 홀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다시 옥대를 살피기 시 작했다. 옥대는 백옥(玉)이 영롱하게 박힌 것인데 겉에는 작은 용 과 꽃이 수놓아져 있고 안은 자주색 비단으로 곱게 바느질되어 있었 다.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살폈으나 역시 특별한 것은 눈에 띄 지 않았다. 하지만 헌제의 은밀한 암시를 받은 터라 그대로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에 동승은 옥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수없이 거듭하여 조사를 했다. 아무리 오래 들여다보아도 이상한 게 없자 차츰 피로하고 싫 증이 났다. 그래서 그날 밤은 그만큼 살핀 것으로 그치고 잠이나 잘 양으로 옥대를 거두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등(燈)의 불똥 하나가 옥대에 떨어지자 금세 뒷면 바닥에 불이 붙 었다. 동승이 놀라 손가락으로 눌러 껐지만 어느새 비단에 난 구멍 으로 옥대의 안감이 내비쳤다. 천자의 하사품에 흠을 낸 송구함으로 그곳을 살피는데 문득 이상한 게 보였다. 흰 깁으로 된 안감에 군데 군데 핏자국 같은 게 비친 까닭이었다.

동승은 급히 칼을 찾아 옥대의 속을 타보았다. 짐작대로 흰 깁에 씌어진 것은 피로 쓴 천자의 밀조였다. 동승은 놀라 밀조를 펼쳤다.


‘짐이 듣기로 인륜에서 크게 치는 것은 부자의 도리가 먼저이고, 존비에서 특히 으뜸으로 여기기는 군신의 도리가 무거움이라 하였 다. 근일 조조는 나라의 대권을 희롱하여 군부를 속이고 억누르며, 또 패거리를 짓고 서로 사사로이 맺어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있 다. 벼슬을 내리고 상과 벌을 주는 일을 멋대로 하니 어찌 짐을 이 나라의 주군이라 할 수 있으랴.

짐이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바는 그로 하여 장차 천하가 위태로워짐이다. 경은 나라의 대신일 뿐만 아니라 짐의 가까운 인척 으로서 고황제께서 이 나라를 여실 때의 힘들고 어려웠음을 잊지 말 라. 널리 충의를 겸한 열사들을 불러모아 간사한 무리를 쳐 없애고 다시 사직을 평안케 할 수만 있다면 이는 실로 조종에 큰 다행이 되리라. 손가락을 깨물어 흐른 피로 조서를 써 경에게 부치나니 거듭 신중하게 생각하여 짐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 없을진저! 건안 사년 봄 삼월 조서를 내리노라.’


동승이 읽어보니 대강 그러했다. 읽기를 마친 동승은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나라 꼴과 자신의 처지가 슬프고도 부끄럽고 또한 분했 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 눈을 붙이는 듯 마는 듯 새벽부터 다 시 서원으로 나와 천자의 밀조를 펴 들었다. 읽고 또 읽었으나 너무 도 엄청난 조조의 세력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마땅한 계책이 떠오르 지 않았다.

동승은 천자의 밀조를 탁자 위에 펴둔 채 조조를 죽일 계책을 생 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운 탓인지 미처 계책을 떠올리기도 전에 깜박 졸음이 왔다.

“국구께서 마침 계셨구려. 어찌하여 이토록 깊이 잠드시었소?” 동승이 그 같은 소리에 놀라 깬 것은 이미 해가 높이 솟은 뒤였다. 자신은 탁자에 기대 잠이 들어 있는데 맞은편에는 어느새 시랑(侍 郞)으로 있는 왕자복(服)이와 앉아 있었다.

동승은 문득 천자의 조서를 생각하고 탁자 위를 살폈다. 그런데 거기 있어야 할 조서가 없지 않은가.

“국께서 찾는 게 혹시 이게 아니시오?”

동승이 황망하여 여기저기 살피는 걸 보고 왕자복이 소매에서 조서를 꺼내 보이며 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어떻게?”

동승이 놀라 물었다. 그러자 왕자복은 금세 몸을 일으켜 뛰쳐나갈듯 말했다.

“그대가 조공(公)을 죽이려 하니 나는 마땅히 이걸 승상부에 갖다 바쳐야겠소!”

동승이 그런 왕자복의 소매를 잡으며 눈물 젖은 얼굴로 말렸다. “만약 형께서 그렇게 하시면 이제 우리 한실은 끝이오…………….”

그 말에 비로소 왕자복도 비분에 젖은 얼굴이 되어 본심을 털어 놓았다.

“국구께서는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다만 국구의 결심을 가늠해보 았을 뿐이오. 우리 조상 또한 대대로 한실의 녹을 먹었으니 내겐들 어찌 충심이 없겠소이까? 바라건대 형을 도와 한 팔의 힘이라도 되 고자 하오. 우리 함께 조조 그 역적 놈을 죽이도록 합시다.”

원래 왕자복은 동승과 막역한 사이였다. 동승의 문지기도 그가 자 기 주인과 교분이 두터운 걸 알고 그대로 사원에 들여주는 바람에 뜻밖에도 피로 쓴 천자의 조서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동승이 어떻 게 마음을 정했는지 몰라 짐짓 그렇게 떠보았던 것이다.

“형의 뜻이 그러하다니 실로 나라의 큰 복이요. 아직 대한(漢)의 운세가 다하지는 않았음이 분명하오.”

왕자복의 본심을 알자 동승이 가슴을 쓸며 그렇게 말했다. 왕자복 이 다시 한 의견을 내놓았다.

“이같이 큰일은 말로써만 해서는 되지 않을 것이오. 우리 밀실로 가 함께 의장(狀)을 쓰고, 삼족을 버려 한실의 은덕에 보답하도록 합시다.”

동승도 왕자복의 말을 옳게 여겼다. 흰 비단 한 폭을 꺼내 의장으로 삼고 먼저 자기 이름을 썼다. 왕자복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 을 동승의 이름 아래 나란히 쓴 다음 다시 한 사람을 천거했다.

“장군 오자란(吳子蘭)이 나와 몹시 가까운 사이인데, 함께 일을 꾀해볼 만하오.”

동승도 함께 일할 사람 둘을 천거했다.

“조정에 그득한 대신들 가운데 오직 장수(長) 교위 충집(种輯)과 의랑 오석(吳)이 내 심복이라 할 만하외다. 나와 더불어 이 일을 함께할 것이오.”

그렇게 서로 간에 끌어들일 수 있는 인물들을 꼽아보고 있는데 홀 연 아이종이 들어와 알렸다.

“충(神)교위와 오(吳)의랑께서 오셨습니다.”

다름 아닌 충집과 오석이 불린 듯 찾아온 것이었다. 동승은 그것이 좋은 조짐인 듯 여겨졌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외다.”

그같이 기뻐하며 왕자복을 잠시 병풍 뒤에 숨긴 뒤 두 사람을 맞아들였다.

주인과 손이 각기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는데 문득 충집이 찻잔 을 놓으며 숙연한 어조로 물었다.

“지난날 허전에서의 사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슬프고도 한스 럽지 아니합니까?”

“그거야 누군들 그렇지 않겠소만 어쩌겠소? 방도가 없지 아니하오?” 

동승이 짐짓 힘없이 대꾸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오석이 분연히 소리쳤다.

“우리는 이미 조조 그 역적 놈을 죽이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우리를 도와줄 이가 없는 것입니다.”

“나라에 해가 되는 일을 없이 하는 것이니 비록 죽는다 해도 원망 스러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충집이 다시 그렇게 오석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때 병풍 뒤에 숨어 있던 왕자복이 뛰쳐나오며 험하게 얼러댔다.

“너희 둘은 조승상을 죽이려 들었으니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다. 동(董)국구께서는 나와 승상부로 함께 가서 증인이 되어주시오.” 

그러자 충집이 성난 눈길로 왕자복을 노려보며 꾸짖었다.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어서 한나라 귀신이 될 터인즉 역적 놈에게 붙어 잘살기를 바라는 네놈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느냐?”

그때 동승이 웃으며 충집과 오석을 진정시켰다.

“놀라지 마시오. 사실 우리도 바로 그 일을 의논하기 위해 두 분을 만나고 싶어했소. 왕(王)시랑은 그저 한번 말로 장난을 쳐본 것이오.” 

그러고는 소매에서 밀조를 꺼내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어리둥 절해하던 충집과 오석도 헌제의 조서를 보자 동승의 말을 믿었다. 공손히 받들어 읽어나가는데 샘솟듯 하는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동승이 흰 비단을 내밀어 이름을 청하자 짧은 망설임도 없이 나란히 이름을 적어 함께 일하기를 맹세했다.

“두 분께서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내가 가서 오자란을 데려오겠습니다.”

왕자복은 문득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나가더니 오래잖아 오자란 을 데리고 왔다. 오자란도 주저없이 의장에 서명하고 뜻을 함께하기 로 하니 일은 처음 동승과 왕자복이 예정한 대로 된 셈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네 사람의 동지를 얻게 된 동승은 기뻤다. 감격에 겨워 후당에 조촐하게 술자리를 마련하고 함께 마시는데 사람이 와 알렸다.

“서량 태수 마등馬騰)이 뵙고자 합니다.”

원래 동승과 마등의 교분이 얕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이 중하니만 큼 그 자리에 함부로 사람을 들일 수 없었다. 동승이 궁색한 거짓말 을 지어내어 마등에게 전하게 했다.

“내가 지금 병이 나서 만나볼 수 없다고 하라.”

그러자 문 지키는 이는 들은 대로 마등에게 전했다. 그 말에 마등 이 성나 소리쳤다.

“저녁 나절 동화문(東門) 밖에서 너희 주인이 비단옷에 옥대를 띠고 나오는 걸 보았는데 어찌하여 아프다는 핑계냐? 내가 일없이 온게 아닌데 왜 막으려 드느냐?”

문지기가 다시 동승에게 돌아가 그 같은 마등의 노기를 전했다. 동승도 마등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병을 핑계로 문 앞에서 되돌려 보 낼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제공께서는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가 나가보고 오겠소이다.”

동승은 그렇게 말하고 안채로 내려가 대청에서 마등을 맞이했다.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마등이 따지듯 물었다.

“이 등)은 도성으로 들어와 천자를 뵈옵고 서량으로 돌아가는 길이외다. 떠남에 앞서 국구께 작별 인사라도 드릴까 하여 찾았는데 어찌하여 그냥 내쫓으려 하시오?”

“천한 몸에 몹쓸 병이 나 달려와 맞지 못했으니 죄가 큽니다.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동승이 궁색하게 변명했다. 그러나 마등은 번득이는 눈으로 그런 동승을 살피더니 비꼬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얼굴에 봄 기운이 돌지언정 병색은 보이지 않는구려.”

마등이 그렇게 말하자 동승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 보라는 듯 소매를 떨치고 일어난 마등이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 서며 한탄했다.

“모두가 나라를 구할 사람은 아니로구나!”

말 속에 뼈가 있다더니 마등의 말이 바로 그랬다. 그제야 동승도 느끼는 바 있어 마등을 붙들며 물었다.

“공은 어찌하여 이 몸이 나라를 구하려 들지 않는다 보시오?” “허전에서 사냥할 때의 일을 보고 나는 가슴이 터질 듯한 의분을 느꼈소이다. 그런데 공은 황실의 가까운 인척으로서 오히려 얼굴에 술 기운을 띤 채 역적을 칠 생각은 조금도 않으니 어떻게 황실을 어 려움에서 구해낼 수 있겠소?”

동승은 그 말에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등이 거짓으로 자기 를 떠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짐짓 놀란 체 마등을 나 무랐다.

“조승상은 나라의 대신으로 지금 조정은 참으로 그분에게 의지하는 바 크외다. 공께서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소이까?”

그러자 마등이 벌컥 성을 내며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면 조조 그 역적 놈을 옳다 여기는 것이오?”

“보고 듣는 눈과 귀가 있소이다. 바라건대 목소리를 낮추시오.”

동승이 그렇게 주의를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등은 오히려 소 리 높여 동승을 꾸짖었다.

“실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만을 탐하는 무리로구나! 너와 큰일 을 의논하려 했다니 사람을 잘못 보아도 크게 잘못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충의의 인물이라 여겨 틀 릴리 없는 단호함이었다. 동승은 그런 마등의 소매를 움켜쥐며 은 근하게 말했다.

“공은 잠시 노기를 누르시오. 내 공께 보여드릴 게 있소.”

그리고 마등을 서원으로 데려간 뒤 천자가 내린 조서를 보여주었다.

읽기를 마친 마등은 분기로 머리칼이 곤두서며 이를 가는데 입술 이 씹히어 입 안에 피가 그득할 지경이었다.

“만약 국께서 거사하신다면 나는 즉시로 서량의 병마를 이끌고 달려와 밖에서 호응하리다!”

그러자 동승은 그를 안내해 왕자복과 오자란, 충집, 오석 등이 기 다리는 곳으로 데려가 서로 보게 한 뒤 의장을 꺼내 이름을 쓰게 했 다. 서명을 마친 마등은 함께 술을 들다 모두에게 피를 섞어 나누어 마시게 하여 엄숙히 말했다.

“우리는 죽더라도 서로 배반하지 않기로 맹세하였소!”

그런 다음 다시 자리에 앉은 다섯을 가리키며 약간 안타까운 듯 덧붙였다.

“만약 뜻을 같이할 사람이 열만 되면 큰일을 이루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을 동승이 받았다.

“충의지사란 그렇게 많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외다. 되잖은 자가 끼어들면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소.”

그러나 마등은 기어이 조정 관원들의 명부[鴛行鷺簿]를 가져오게 하며 말했다.

“비록 조조가 대권을 희롱하고 있으나 천하는 엄연히 대한의 것이오. 찾아보면 이 많은 문무의 대신들 가운데서 어찌 한둘의 충신이야 더 없겠소?”

그러고는 명부를 넘기며 백관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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