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3권 – 12화 : 교룡은 다시 창해로
교룡은 다시 창해로
명부가 유씨(劉氏) 종친들에 이르렀을 때 문득 마등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이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으셨소?”
“그 사람이 누구요?”
동승을 비롯한 네 사람이 궁금한 듯 물었다.
“예주목 유현덕이 여기 있지 않소? 어찌 물어보지 않으셨소?”
마등이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동승은 적이 못 미더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비록 종친으로 황제의 아재비 뻘이 된다 하나 지금은 조조에게 붙어 지내고 있으니 어찌 이 일에 끼어들겠소이까?”
“반드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소. 내가 전에 사냥터에서 보니 조조가 폐하를 대신해서 만세를 받자 현덕이 등 뒤에 있던 관운장이 칼 을 빼어들고 조조를 죽이려 하였소. 현덕이 눈짓으로 그를 말렸으나, 한스럽게도 조조의 이빨이나 발톱 같은 장수들이 너무 많아서이지 조조를 죽일 마음이 없어서였던 것 같지는 않았소. 운장이 덤벼들어 봤댔자 마침내 조조를 죽이지 못할까 근심한 것이었소. 공께서 한번 끌어들여 보시오. 그는 반드시 이 일에 끼어들기를 허락할 것이오.” 그때 오석이 조용히 말했다.
“이 일은 너무 서둘러서도 아니 됩니다. 마땅히 의논을 맞추어 거 기에 따름이 좋겠습니다.”
모두들 그 말이 옳다 여겼다. 의논 끝에 먼저 동승을 보내 유비의 속마음을 알아보기로 하고 곧 헤어졌다.
다음 날 밤이었다. 동승은 천자의 밀조를 품은 채 어둠을 틈타 유 비가 묵고 있는 공관을 찾았다. 문지기로부터 거기장군 동승이 왔다 는 말을 듣자 유비는 문 밖까지 나와 동승을 맞아들였다. 작은 누각 으로 동승을 안내해 간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시립게 한 채 자리를 잡고 앉기 바쁘게 물었다.
“국구께서 밤중에 이렇게 은밀히 저를 찾으신 데는 반드시 까닭 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밝은 날에 말을 타고 서로 오가면 조조가 의심을 할까 봐 이렇게 어두운 밤을 빌려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동승이 그렇게 대답하자 유비는 더 따져 묻지 않았다. 상대가 먼 저 실토하도록 기다리려는 것인지 문득 술을 내오게 한 뒤 느긋이 동승을 대접할 뿐이었다. 마침내 동승이 먼저 그 일을 꺼냈다. 그러나 유비의 내심을 알 수 없어 말을 돌렸다.
“지난날 사냥터에서 운장은 칼을 빼어 조조를 죽이려 하였소. 그런데 장군은 눈짓을 하고 고개를 저어 운장을 말리셨으니 어찌 된 까닭이오?”
그 말에 어지간한 유비의 얼굴에도 놀란 빛이 떠올랐다.
“그걸 공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유비의 다급한 물음에 동승이 능청을 떨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 봤지만 나만은 보았소이다.”
그러자 유비는 다시 한번 동승을 살피며 한밤중에 몰래 찾아와 그런 말을 하는 까닭을 헤아려보았다. 그걸 보고도 조조에게 달려가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승의 처지나 신분으로 보아도 조조의 편으 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미 그가 관우와 자기가 한 일을 보았다니 그 이상 속을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우가 조조의 참람된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낸 것뿐입니다.”
유비가 솔직하게 그때 일을 말하자 동승도 그를 믿을 만하다 여 겼다. 문득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며 말했다.
“조정의 벼슬아치 된 자 모두 관운장 같기만 했던들 어찌 천하가 태평하지 않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소!”
“혹 공께서 저를 속이시지나 않을까 하여 진작 말하지 못했습니다. 꾸짖어주십시오.”
유비도 그 같은 동승을 보자 처음부터 그를 믿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듯 말했다.
“이걸 한번 보시오.”
동승이 눈물을 거두고 소매에서 천자의 밀조를 꺼냈다. 읽고 난 현덕은 비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동승이 꺼낸 의장을 보니 이미 여섯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첫째는 거기장군 동승이요, 둘째 는 공부시랑 왕자복이요, 셋째는 장수교위 충집이요, 넷째는 의랑 오석이요, 다섯째는 소신장군 오자란이요, 여섯째 서량 태수 마등이 었다.
“공들께서 모두 폐하의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치고자 하시는데 이 비가 감히 어찌 개와 말의 수고로움을 마다하겠습니까?”
의장까지 읽고 난 유비가 결연히 말했다. 그리고 흔연히 그 여섯 사람의 이름 아래 ‘좌장군 유비’라 적어넣었다. 밀조와 의장을 거두 어들인 동승이 다시 아쉬운 듯 말했다.
“앞으로 셋만 더 끌어들일 수 있다면 모두 열 명의 의사가 모인 셈이 되오. 그렇게만 되면 조조 그 역적을 도모할 수 있으련만………….”
“때에 맞게 천천히 꾀해나가시면 될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가볍게 이 일을 드러내 밖으로 말이 새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유비가 그렇게 동승의 조급을 달랬다. 이런 얘기 저런 궁리로 동 승은 오경 무렵이 돼서야 돌아갔다. 그를 바래다주고 돌아온 유비는 문득 생각했다.
‘이미 조조를 적으로 삼기로 작정했으니 아무래도 예민한 그에게 는 어떤 느낌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 대비해 미리 손을 써야겠다.’
그리고 그 방책으로 뒤뜰에 묵어 있는 채마밭을 이용하기로 했다. 날이 밝기 무섭게 그 밭을 손수 일군 유비는 역시 손수 씨앗을 구해넣고 물을 주었다. 아무런 야망도 없는 순박한 농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유비의 그 같은 돌변에 까닭을 알 리 없는 관우와 장비가 투덜거렸다.
“형님께서는 천하 대사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고 하잘것없는 농부 들의 일을 배우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너희가 알 바 아니다.”
유비는 그렇게 대답할 뿐 까닭을 말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그 의 연함 뒤에 숨겨진 어떤 깊은 뜻을 느꼈던지 관우와 장비 또한 다시 는 그 일을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관우와 장비는 어디 가고 유비만 허름한 농부 차림으로 뒤뜰의 채마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허저와 장요가 수 십 명을 이끌고 찾아와 말했다.
“승상께서 부르십니다. 사군(使君)께서는 얼른 갈 채비를 하십시오.”
그 돌연한 부름에 유비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었다. 그러나 내색 없이 물었다.
“몹시 긴한 일이오?”
“모릅니다. 그저 제게 가서 사군께서 오시도록 청하란 분부만 내 셨습니다.”
허저가 무뚝뚝히 대답했다. 혹시나 동승의 모의에 가담된 일이 탄로나지 않았는가 하는 불안도 있었지만 유비는 달리 구실이 없었 다. 하는 수 없이 두 아우도 딸리지 못한 채 조조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요사이 집에서 큰일을 하고 있다 들었소만…………….”
조조가 웃는 얼굴로 유비를 맞으며 말했다. 큰일이라는 말에 유비는 가슴이 섬뜩했다. 절로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얼른 대꾸조차 못했 다. 그러나 조조는 어찌 된 셈인지 여전히 다정하게 유비의 손을 잡 고 자신의 뒤뜰로 갔다.
“현덕, 농사를 배우는 일은 쉽지 않소. 어떠시오? 할 만하오?”
조조가 다시 그렇게 물은 뒤에야 유비는 문득 조조가 말한 큰일 이 농사란 걸 깨달았다. 동승과 꾸미고 있는 일을 가리킨 것이 아니 란 걸 알자 유비도 마음을 놓으며 대답했다.
“별일이 없기에 소일거리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농사를 배운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슬몃 보니 조조는 왠지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아마도 몰 래 사람을 놓아 유비의 동태를 살피다가 그가 흙을 주무르며 소일한 다는 말을 듣고 속 깊이 가진 의심을 다소나마 푼 듯했다. 유비는 속 으로 채마밭 가꾸기를 잘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화 가지를 보니 매실이 푸르게 잘 익었더구려. 문득 지난해 장 수를 칠 때의 일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소. 그때 행군 중에 물이 모자라 장졸들이 모두 목이 말라 했는데, 나는 한 가지 꾀를 썼더랬 소. 채찍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그곳에 매화숲이 있다고 거짓으로 소리친 것이오. 그 말을 들은 군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자 한 결같이 입에 침이 돌고, 그래서 잠시 갈증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이오. 이제 그 매실을 보니 어찌 느껴지는 게 없겠소? 마침 담근 술이 잘 익었기에 매실을 안주로 공과 함께 술잔을 나누고 싶었소. 그 때문 에 허저를 보내 현덕을 청한 것이오.”
조조가 드디어 유비를 부른 참뜻을 밝혔다.
유비는 그제서야 완연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불러준 정에 가볍게 감사한 다음 조조가 끄는 대로 작은 정자에 올랐다. 정자에 는 이미 술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조조가 말한 대로 쟁반 위에는 푸 른 매실 삶은 것이 안주로 나와 있고 곁에는 잘 익은 술이 한 독 담 겨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반쯤 오를 무렵 갑자기 검은 구름이 짙게 덮이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도 장대 같은 소나기였다.
“용이다! 용이 등천을 한다.”
검은 구름 사이로 기괴한 형상이라도 비쳤던 것인지 정자 아래서 두 사람의 술자리를 시중들고 있던 자들 가운데 하나가 문득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소리에 조조와 유비도 난간에 기대 검은 하 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소리친 자가 가리킨 하늘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은 용의 변화를 아시오?”
자리로 돌아온 조조가 무얼 생각했는지 불쑥 유비에게 물었다. 평 소처럼 유비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말은 몇 가지 들은 게 있습니다만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드리겠소.”
조조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용이란 크고 작아지기를 마음대로 하며[能小能大], 위로 솟고 아래로 숨기를 또한 마음대로 하오[能昇能隱]. 크게 되면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며, 작게 되면 겨자씨만 해지고 형태를 감추어버리 기도 할 수 있는 것이오. 솟은즉 드넓은 우주 사이를 날고, 숨은즉 파도 안에 엎드려 없는 듯이 보일 수도 있소이다. 이제 봄이 한창이 니 용이 때를 타 변화를 일으킬 때요. 마치 사람이 때를 얻어 천하를 종횡함과 같으니, 용이란 물건은 영웅에 비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 외다. 현덕께서는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셨으니 틀림없이 당세의 영 웅이라 할 사람들을 알고 있으리다. 바라건대 내게 한 사람만이라도 말해주시오.”
용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그렇게 느닷없는 영웅론으로 번졌다. 얼른 듣기에는 자연스러웠으나 유비는 그 뒤에 숨은 조조의 뜻을 짐작했다. 영웅론을 통해 유비의 안목은 물론 그릇의 크기를 가늠해 보려 함에 틀림없었다.
“제 안목으로 어찌 영웅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유비가 일시에 어떻게 대꾸할지 몰라 그렇게 발뺌을 했다. 유비가 일부러 대답을 피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채지 못할 조조는 아니었 다. 한층 엄숙한 얼굴로 유비를 다그쳤다.
“지나친 겸손이오. 그러지 말고 한번 속을 터놓고 이야기해보시오.”
“제가 승상의 은혜로 조정에까지 올라와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습 니다만 천하 영웅에 대해서는 실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유비가 다시 한번 의뭉을 떨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얼굴은 모른다 해도 이름은 듣지 않았겠소? 어디 들은 대로라도 말씀해보시오.”
조조는 끝내 유비를 놓아주지 않았다. 유비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자 한동안을 생각하는 체하다 우물우물 대답했다.
“회남의 원술이 어떠하겠습니까? 군사와 곡식이 넉넉하니 영웅이 라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무덤 속의 말라빠진 뼈다귀 [塚中枯骨]일 뿐이오. 이르든 늦든 반 드시 내게 사로잡힐 위인이외다.”
조조가 한마디로 원술을 여지없이 깎아내리며 재촉하듯 유비를 살폈다. 유비는 다시 크게 마음에도 없는 인물을 댔다.
“하북의 원소도 있습니다. 사세(世)에 걸쳐 다섯 번이나 삼공(三 公)의 자리에 오른 가문으로 거기에 덕을 입은 벼슬아치들이 문하에 많습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호랑이처럼 기주를 터로 삼아 그 부리는 이들 가운데는 여러 일에 능한 이들이 매우 맡으니 영웅이라 할 만 합니다.”
조조가 약간 허세가 밴 웃음으로 유비를 반박했다.
“원소는 겉모양이 번듯하나 담이 작고, 일을 꾸미기는 좋아해도 맺고 끊는 힘이 없소. 큰일을 하려 하면서도 지나치게 제 몸을 사리 고, 엉뚱하게도 작은 이익에는 목숨까지 잊고 덤비니 어찌 영웅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또 한 사람 생각나는 이가 있습니다. ‘강하의 여덟 준재[江夏八 ‘의 하나로 위엄이 구주(州)에 떨친다는 유경승(劉景升)은 영웅 이라 할 만합니다.”
유비는 다시 형주에 있는 유표(劉表)를 들먹여보았다. 조조는 한 층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유표는 헛된 이름뿐 속은 아무것도 없는 자요. 영웅이 아니외다.”
“그럼 한창 혈기 있고 억센 손백부는 어떻겠습니까? 지금 강동을 다스리고 있으니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책은 그 아비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뿐이니 영웅이라 할 수 없소.”
“익주의 유계옥(劉玉)은 어떻겠습니까?”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조조에게 까닭 모를 불안까지 느끼며 유 비는 익주의 유장(劉璋)까지 끌어냈다. 험한 산천에 의지해 겨우겨 우제 땅이나 지켜나가는 위인을 자신은 한번도 영웅이라 여겨본 적이 없음에도 조조의 심문 같은 물음을 배겨내지 못해 주워섬기 고 있었다.
“유장이 비록 종실이라 하나, 다만 집 지키는 개에 지나지 않소. 어찌 영웅이라 하겠소!”
조조는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인해놓고 또다시 유비를 빤히 쳐다 보았다. 유비는 한층 다급해지는 기분으로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대 기 시작했다.
“장수(張纖), 장로(張), 한수(韓) 등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말할 가치조차 없는 소인들이오. 그야말로 시시한 조무래 기들이지.”
조조가 손뼉을 치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두 눈만은 여 전히 유비를 살피고 있었다. 유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능청을 떨 며 화제를 돌리려고만 애를 썼다.
“지금 제가 댄 사람들을 빼면 이 비는 실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기어이 유비가 속으로 두렵게 생각하던 말을 꺼내 고 말았다.
“무릇 영웅이란 가슴에는 큰 뜻을 품고 배에는 좋은 지모(智)가 가득한 사람으로 우주의 기운을 머금고 하늘과 땅의 뜻을 토해내는자요.”
그렇게 말해놓고 의미심장한 눈길로 유비를 보며 씩 웃었다. 유비 는 여전히 모르는 체 어리석은 물음을 던졌다.
“그런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정말 모르시겠소?”
조조가 다짐하듯 그렇게 묻더니 손가락을 들어 먼저 유비를 가리 키고 이어 자신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이라면 오직 현덕과 여기 이 조조가 있을 뿐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비는 눈앞이 아뜩했다. 무지렁뱅이 농군 흉 내를 내가면서까지 자신을 감추려 애썼건만 날카로운 조조의 눈은 어느새 그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나를 그렇게 보았다면 이제는 끝이다.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꼼짝없이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그로서는 영원히 그대로 잡혀 있거나 죽어서만이 그의 손아귀를 빠 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유비의 손에 쥐 어져 있던 수저가 떨어져 탁자 아래로 흘렀다.
그런데 때마침 한줄기 소나기가 쏟아지며 뇌성이 크게 일었다. 조 조의 말에 놀라 수저를 떨어뜨려 놓고야 일이 더욱 나쁘게 된 것을 알고 당황하던 유비는 얼른 그 뇌성을 핑계로 삼았다. 머리를 수그 려 땅바닥에 떨어진 수저를 주우며 짐짓 부끄러운 듯 말했다.
“좀 전의 천둥소리가 얼마나 무시무시하던지 그만 이렇게 수저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조조가 그걸 떨어뜨린 이유를 캐물을 것에 앞질러 대비하는 한편 자신의 겁 많음을 가장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조조의 의심을 덜기 위 해 급작스레 꾸며댄 말이었다.
워낙 알맞은 시간에 울린 뇌성이라 조조도 그것까지는 의심하지 못했다. 적이 풀린 얼굴로 농담삼아 물었다.
“장부도 뇌성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성인께서 빠른 번개와 매서운 바람이 일면 반드시 변괴가 있다 했습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유비가 더욱 두려움을 과장하며 되물었다. 유비의 그같이 절묘한 임기응변에 조조는 결국 그가 수저를 떨어뜨린 까닭에 대한 의심은 커녕 오히려 이미 가슴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의심까지 줄이고 말았 다. 유비가 속으로 뜻한 바대로였다.
여기서 언뜻 보여지는 것은 두 사람의 대비이다. 조조도 유비도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지모를 쓰고 사람을 속였다. 그런데도 조조 는 지모와 속임수의 대명사로 불리는 반면 유비는 성실과 정직의 화 신처럼 전해졌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대략 두 가지로 보여진다. 그 하나는 조조가 자신의 지모를 자랑하는 반 면 유비는 언제나 그것을 숨겼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조가 일생 을 통해 공격적인 입장에 있었던 반면 유비는 항상 수비적인 입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재주가 드러나면 시기를 받고, 강자는 약자보다 동정을 받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그 시대의 감정이 그대로 후세에 전해진 것이리라.
어쨌든 조조와 유비는 다시 화기애애한 가운데 술잔을 비우기 시 작했다. 그런데 장대처럼 쏟아지던 비가 막 멎으려 할 때였다. 갑자 기 두 사람이 후원으로 뛰어들더니 보검을 빼들고 조조와 유비가 술 을 마시는 정자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곳을 지키던 무사들이 가로막았으나 잘 당해내지 못했다. 조조가 놀란 눈으로 살펴보니 다 름아닌 관우와 장비였다.
그날 두 사람은 성 밖으로 활쏘기를 나갔다가 그 얼마 전에야 유 비가 거처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맏형인 유비가 보이지 않아 좌우에 물으니 허저와 장요가 수십 명을 이끌고 와서 데려갔다고 하지 않는 가. 이에 놀란 두 사람은 급히 승상부로 달려가 유비가 있는 곳을 물 었다.
조조의 종자들로부터 유비가 조조와 함께 후원에 있다는 말을 들 었으나 종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조조가 그렇게 유비를 불러들여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우리가 함께 뛰어들어가 형님을 지키세.”
관우가 그렇게 말하자 장비도 두말없이 따라 들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아무도 막지 못하다가 조조가 있는 후원에 이르러 서야 비로소 가로막는 자가 생겼다. 그러나 그들도 이미 그 두 사람 의 주인이 자기의 주인과 유쾌하게 담소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 걸 오래 보아온 뒤라 피를 보아가며 막으려고는 들지 않았다.
그 바람에 관우와 장비는 더 큰 소동 없이 칼을 빼든 채 유비의 등 뒤로 가 시립할 수 있었다.
“그대들 둘은 어찌하여 이렇게 오셨소?”
조조가 약간 어이없는 얼굴로 관우와 장비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둘 중에서 좀더 생각이 밝은 관우가 얼른 자기들의 실수를 깨닫고 궁색한 대답을 했다.
“듣기로 승상과 저희들 형님이 함께 술을 드신다기에 칼춤이라도 추어 흥을 돋워드릴까 하고 달려왔습니다.”
그들이 입으로 무슨 소리를 한다고 해도 속마음을 읽지 못할 조 조가 아니었다. 그러나 노여움보다는 수백의 군사와 수십의 용장(勇 將)들이 몰려 있는 자신의 부중府中)으로 단 둘이 뛰어든 그들의 의 리와 충성이 더욱 조조를 감동시켰다.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둘에 게 말했다.
“여기는 홍문(門)의 연회장이 아니거늘 어찌 항장(項)과 항백 (伯)이 쓸 데가 있겠소?”
홍문의 연회란 초한(漢)이 천하를 다툴 때 세력이 큰 항우가 보 다 약한 유방을 죽이기 위해 홍문이란 곳에서 연 잔치이다. 그때 항 우는 처음 모사인 범증의 말대로 유방을 죽이려고 했으나 막상 만나 서 그의 말을 듣고는 죽일 마음이 없어져버렸다. 그걸 안타까이 여 긴 범증이 칼춤을 핑계로 유방을 죽이려고 들여보낸 초군(楚軍)의 장수가 바로 항장이요, 유방을 구하러 뛰어든 게 항백이었다. 따라 서 조조의 물음은, 나는 너희들의 형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너 희가 어찌하여 이럴 수 있느냐 하는 나무람 섞인 농담이었다.
조조가 자기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그렇게 묻자 둘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말없이 얼굴만 붉히고 서 있는 걸 보고 조조는 한층 소리 높여 웃은 뒤 부리는 이에게 영을 내렸다.
“저 두 번쾌()에게도 술을 올려라.”
번쾌는 바로 저 홍문의 연회에서 유방의 목숨을 노려 칼춤을 추 는 항장과 항백을 역시 칼춤으로 가로막으며 유방을 지킨 한군(漢 軍)쪽의 맹장이었다.
조조의 그 같은 너그러움에 관우와 장비도 감동하여 절하며 잔을 받았다. 조조가 한층 호쾌하게 웃고, 은근히 마음 죄던 유비도 비로 소 마음을 놓고 따라 웃었다.
“조조가 놀라 우리 둘을 죽이려 들까 실로 두려웠습니다.”
술자리가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지간한 관우도 긴 한숨을 내뿜 으며 그렇게 말했다. 유비가 빙긋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럴 리야 있겠나?”
“그런데 조조가 왜 형님을 불렀습니까?”
“그야 나를 떠보기 위해서였지. 하기야 정말 위태로운 때가 있기는 했네.”
그리고 유비는 그날 있었던 일을 둘에게 얘기해주었다.
“내가 농사를 배우는 척한 것은 조조가 내게 큰 뜻이 없다는 걸 알게 함이었지. 처음에는 조조도 그렇게 속아주는 것 같았네. 그런 데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뜻밖에도 조조가 나를 가리키며 자기 와 비길 만한 영웅이라 하지 않겠나? 나는 그 말에 놀라 그만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수저를 떨어뜨리고 말았네. 생각해보게. 조조가 정말 나를 그렇게 본다면 당장 죽이지는 않는다 해도 영영 나를 이 렇게 붙들어둘 게 아닌가? 거기다가 수저를 떨어뜨려 놓고 나니 이번에는 조조가 그 일로 새로운 의심을 가질까 두렵더군. 만약 내가 놀란 게 그가 내 속셈을 꿰뚫어본 때문이란 걸 알면 그의 의심은 더 커지지 않겠나? 그런데 때마침 천둥이 울려 나는 짐짓 천둥소리에 겁먹은 척함으로써 나를 숨길 수 있었네. 그때야말로 진정으로 위태로운 때였다네.”
그 말에 관우와 장비도 감탄을 거두지 못했다
“실로 놀라운 형님의 고견이십니다.”
그러고는 한층 공경하는 눈길로 유비를 우러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조조는 다음 날 또 유비를 불렀 다. 이번에는 다른 뜻 없이 정으로 부른 술자리였다. 한참 주거니 받 거니 술잔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와 조조에게 알렸다.
“만이 기주에서 돌아왔습니다.”
만총은 원소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기주로 갔던 사람이라 조조는 궁금한 게 많았다. 거기다가 현덕에 대한 뿌리 깊은 의심도 거의 없 어진 뒤라 조조는 그 자리로 만총을 불러들였다.
“그래 간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위로의 술 한잔을 내리기 바쁘게 조조가 물었다. 만총은 술 한잔을 비울 생각도 않고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무엇보다도 급히 승상에 알려드릴 일이 있습니다. 공손찬이 원소 에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말에 조조가 번쩍 정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술기운이 싹 걷힌 얼굴로 물었다.
“공손찬이 무너졌다니? 어서 그 자세한 경과를 말하라.”
얼른 믿어지지 않아 멍하니 만총을 바라보고 있던 유비도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만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승상께서도 아시다시피 한때 공손찬은 원소보다 세력이 크면 컸 지 작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소가 힘을 다해 세력을 키워가는 동안 공손찬은 자만에 빠져 지키는 데만 연연해했습니다. 그러다 보 니 싸움이 거듭될수록 점점 이롭지 못했는데 공손찬은 거기서 그치 지 않고 더욱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과감히 나가 싸우는 대신 더욱 크고 든든한 성을 쌓아 안으로 움츠러드는 방도를 취한 것입니다.
공손찬은 그 성 위에다 다시 높이가 열 길이나 되는 누각을 세워 역경루(樓)라 하였는데 거기다가 곡식을 쌓아두고 군사 삼십 만 으로 성안에서 지키기만 했습니다. 혹 그 성 외에 다른 성이 원소에 게 포위당해 좌우에서 그곳을 구하고자 청을 해도 끝내 들어주지 않 았습니다. 만약 한 곳을 구해주게 되면, 뒤에 다른 곳에서 싸우는 자 들도 그 구함만을 기다려 죽도록 싸우려 들지 않는다는 까닭에서였 습니다. 그렇게 되니 원소의 군사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공손찬은 가 만히 앉아 여러 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저희 주인이 구해주지 않는 다는 것을 알자 죽기로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 고 항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토록 강성하던 공손찬이 그렇게 어이없이 망할 수야 있나?”
조조가 만총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만총은 차근차근 그 뒤의 경과를 얘기해 나갔다.
“물론 공손찬도 가만히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마침내 세력이 외로워진 걸 알자 그도 여러 가지로 방도를 내보았습 니다. 먼저 허도로 사람을 보내 승상께 구원을 청하는 글을 올렸으 나 도중에 그 사자가 원소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히는 바람에 뜻을 이 루지 못했습니다. 다시 흑산적(山)의 우두머리인 장연(張燕)에게 글을 보내 안팎에서 호응해 원소를 치려 했으나 그 또한 글을 지닌 사자가 원소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오히려 거꾸로 적에게 이용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글에서 공손찬은 장연이 지른 불길을 군호로 성안에서 달려 나와 원소군을 치기로 했는데 그걸 원소가 이 용한 것입니다. 원소가 거짓으로 자기 진채에 지른 불을 장연의 구 원군이 온 줄로 믿은 공손찬이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성을 나왔다가 군마만 태반이나 꺾여버렸을 뿐입니다. 겨우 성안으로 물러나 지켜 보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형세가 너무도 기운 뒤였습니다. 원소의 군사들이 땅굴을 파고 공손찬이 거처한 누각 아래에 이르러 일제히 뛰쳐나오며 불을 지르니 공손찬은 도망칠 길조차 없었습니다. 결국 먼저 처자를 죽이고 공손찬도 스스로 목매 죽으니 일가의 시체마저 모두 불타 무덤조차 남기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거기까지 듣자 유비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한때 는 동탁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지금 영웅으로 이름을 내걸고 있는 제후들 가운데서는 가장 먼저 기업(業)을 이룩했던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지가지없는 고아로서 순전히 혼자 힘으로 북방의 효 웅(梟雄)이라 불릴 만큼 큰 세력을 쌓았던 투지의 사나이에게는 너 무도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최후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피 유비를 울게 한 것은 그와의 오랜 세월이 었다. 이십여 년 전 노식의 초당(草堂)에서 만난 이래 유비의 삶은 그와 깊은 관련을 맺어왔다. 돗자리를 짜며 탁현의 저잣거리를 떠도 는 유비에게 그래도 유협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게 해준 것 은 그 무렵 탁령 (涿令)으로 와 있던 그의 숨은 도움이었으며 장비를 얻게 한 것도 결국은 공손찬의 힘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 겨우 수백 의 잡병(雜兵)으로 세상에 나온 뒤에도 항시 저만큼 앞서가 있던 공 손찬은 유비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마지막에는 유비가 공손찬의 한 팔이라고 알려질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에게서 자만과 안주의 기색이 보이고 자신을 그저 한 부 장(副將) 정도로 취급하는 데 반발해 그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했지 만 공손찬은 실로 유비에게는 거의 갚을 길 없는 은혜의 빛을 준사 람이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성급한 야망에 들떠 있었는지 모른 다.-혹은…… 자신이 몇 년만 그 곁에 남아 진심 어린 충고로 그를 말렸던들 공손찬이 그토록 참담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과 함께 유비는 문득 그런 후회와 한탄이 일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조는 달랐다. 한때는 같은 대의 아래 싸웠고 또 한때는 적으로 맞섰던 공손찬이란 거목의 쓰러짐에 대한 감상도 잠시, 그는 곧 냉정한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그 뒤 원소의 동태는 어떤가?”
한동안의 침묵 끝에 조조가 그렇게 묻자 만총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제 원소는 항복한 공손찬의 군사들까지 거두어 그 성세는 실로 대단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우 원술은 회남에 있으면서 호 사와 교만이 지나치고 군사와 백성들을 돌보지 않아 모두들 그를 버 리고 떠나매 그 세력이 몹시 약해졌습니다. 이에 마침내 지탱하지 못할 것을 짐작한 원술은 사람을 원소에게 보내 천자의 호(號)를 바 치고 그에게로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원소 또한 원술이 가진 옥 새가 탐이 나 그걸 허락하니 원술은 친히 옥새를 호송하여 바치리라 약조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그대로 버려두면 회남은 기주로 돌 아가고 맙니다. 만일 원소와 원술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면 그때는 다시 그 땅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그전 에 급히 일을 처결하십시오.”
만총이 그렇게 말을 맺을 때야 유비도 비로소 감상에서 깨어났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그렇게 생각하자 먼저 떠오른 것은 조자 룡의 훤한 얼굴이었다.
공손찬이 거느리고 있던 모든 장수가 원소에게 항복했다 할지라 도 조자룡만은 그럴 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이미 한번 원소를 버리 고 온 그라 죽지 않았다면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돌고 있으리란 짐작 이 갔다. 지난번 헤어질 때 눈물을 글썽이며 떠나던 그를 차라리 자 신 곁에 잡아두는 편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며 유비는 다시 한번 때 늦은 후회를 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이 현실로 돌아오자 더욱 다급한 것은 자신의 처지였다.
‘공손찬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 같은 변화야말로 내게는 한 기 회다. 이때를 틈타 조조로부터 몸을 때내지 않는다면 언제 다시 때가 올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유비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조조에게 청했다.
“만약 원술이 원소에게 투항하려 하면 반드시 서주를 지나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제게 한 갈래의 군사를 나눠주십시오. 도중에 기 다리다 그 길을 끊고 들이치면 원술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미 유비에게서 제법 의심을 거둔 조조라 그 말을 별로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유비가 자청하여 싸우러 가겠다는 게 기쁜지 빙긋이 웃으며 반승낙을 했다.
“내일 천자께 말씀 올리고 되도록 빨리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겠소.” 그리고 다음 날 현덕이 보는 데서 헌제에게 그 일을 상주했다. 헌 제가 마지못해 허락하자 조조는 유비에게 오만 군마를 내어주고 원 술의 길을 끊게 했다. 유비에게 좀 꺼림칙한 게 있다면 장수 중에 조 조의 사람인 주령(朱靈)과 노소(路昭)를 끼워서 유비에게 딸려 보낸 정도였다.
출전의 명을 받은 유비가 헌제께 작별의 군례(軍禮)를 올리니 헌 제는 눈물로 유비를 보냈다. 곁에서 한 힘이 되어줄 유비가 떠나는 데 대한 아쉬움과 그동안의 정이 어우러진 눈물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도성을 빠져나갈 구실을 얻었으나, 유비는 혹시라 도 그 일이 조조의 모사들에게 알려져 방해를 받게 될까 두려웠다. 그날 밤으로 군사들을 점고하고 마필을 살핀 뒤, 천자로부터 받은 장군인(印)을 차고 출전의 길에 올랐다. 더 이상 서두를 수 없을 만큼 재촉과 재촉 속에 재빨리 이루어진 출전이었다.
동승은 십리 밖에 있는 정자까지 배웅을 나왔다. 현덕은 좌우에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려 동승에게 나직이 말했다.
“국구께서는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십시오. 이번 길은 반드시 제 명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서둘러 도성에서 몸을 빼는 유비가 서운하기도 했지만, 동승은 도 리가 없었다. 다만 좋은 말로 유비에게 당부할 뿐이었다.
“공은 마땅히 그 일을 마음에 두시어 부디 폐하의 바람을 저버리지 마시오.”
그리고 아쉬운 듯 유비와 작별했다.
“형님, 이번 출정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두르십니까?”
동승이 돌아가자 다시 길을 재촉하는 유비에게 장비가 물었다. 진 작부터 묻고 싶었으나 곁에 다른 사람이 있어 참아온 끝이었다. 유 비가 비로소 속을 털어놓았다.
“나는 새장에 갇힌 새요, 그물에 든 고기 같은 신세다. 지금 이렇 게 떠나는 것은 마치 고기가 대해로 돌아가고 새가 푸른 하늘로 치 솟아 오르는 것과 같다. 새장과 그물에 얽매임을 받지 않으려는 것 이다. 알겠느냐?”
그 말을 듣자 장비는 물론 곁에 있는 관우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주령과 노소는 조조가 내게 딸려준 자들이니 각별히 눈여겨 살 피고 얼른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자.”
유비는 그런 두 아우를 재촉해 더욱 행군을 빨리 하게 했다. 이때 곽가와 정욱은 조조의 세력 아래 있는 곡식과 돈을 헤아려 보기 위해 조조 곁에 없었다. 그런데 돌아와 들으니 그사이 조조가 유비를 서주로 보냈다고 하지 않는가. 둘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조조에게 달려가 물었다.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셨습니까?”
“원술이 원소에게로 가는 길을 끊기 위해서요.”
조조가 아직도 별다른 의심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정욱이 답답한 듯 말했다.
“지난날 유비를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으실 때, 저희들은 오히려 그를 죽이라고 청했으나 승상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랬지.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었네.”
“거기다가 지금은 또 유비에게 군사까지 주어 보내셨으니 이는 곧 용을 풀어주어 바다에 들게 하고 호랑이를 놓아주어 산으로 돌아 가게 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뒷날 다스리려 하신들 어떻게 다시 잡 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곽가도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승상께서는 유비를 죽이시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어이없게도 군사까지 딸려 떠나게 하셨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적을 놓아주 는 데는 하루면 되지만 그 근심은 만세에 이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깊이 살펴주십시오.”
곽가까지 나서자 조조도 아차 싶었다. 아직 유비가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임을 다행으로 여기며 허저를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는 먼저 장졸 오백을 이끌고 달려가 유비를 뒤쫓거든 그에 게 되돌아오라고 전하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허저는 그렇게 답하고 날랜 군사 오백을 뽑아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한편 유비는 재촉에 재촉을 거듭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먼지가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유비는 대강 그들이 누군지 짐작이 갔다.
“저것은 반드시 조조가 우리를 뒤쫓으러 보낸 군사들일 것이다. 영채를 세우고 만일에 대비케 하라.”
유비가 굳은 얼굴로 관우와 장비에게 말했다. 유비의 영대로 행군 을 멈추고 진채를 세운 관우와 장비는 각기 무기를 든 채 유비 곁에 갈라섰다.
뒤따라온 허저가 보니 갑주와 무기를 엄히 갖추고 가지런히 진세 를 벌인 군사들 앞에 범 같은 두 아우를 거느리고 선 유비의 위풍이 전에 없이 당당했다. 자신도 몰래 두려운 마음이 일어 유비 앞에 이 르자 말에서 내리며 군례를 올렸다.
“공은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소?”
유비가 부드럽고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허저가 까닭없이 움츠러들며 대답했다.
“승상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되돌려 돌아가시기를 특히 장군께 청합니다. 따로 상의하실 일이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밖에 나와 있을 때는 임금의 명도 받지 않 는다 하였소. 더구나 나는 이미 임금을 뵈옵고 승상과도 말을 나눈 뒤에 떠나왔으니 이제 새삼 달리 의논할 것도 없소이다. 공께서는 속히 되돌아가 승상께 이 같은 내 뜻을 전해주시오.”
말은 여전히 부드러우나 그 안에 담긴 뜻은 강한 거절이었다. 한번 더 말을 붙였다가는 한바탕 싸움이 불가피하게 느껴질 정도여서 적은 군사를 이끌고 온 허저로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저 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헤아려보았다.
‘승상께서는 저 사람과 교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이번에 내가 받은 명도 그와 싸움을 해가면서까지 끌고 오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말로 저 사람을 되돌아오게 하라는 것이니 이제 이렇게 나오는 이상 그대로 돌아가 저 사람의 말이나 빨리 전하는 게 좋겠다. 힘으 로라도 저 사람을 되돌릴 작정이셨다면 어찌 내게 오백의 군사만 주 셨겠는가.’
그렇게 마음이 정해지자 허저는 그대로 유비의 말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알겠습니다. 승상께 그대로 전해 올리겠습니다.”
허저는 그 말과 함께 말 위에 오르더니 군사들을 이끌고 오던 길 을 되짚어 돌아갔다.
“그것 보십시오. 유비가 순순히 군사를 되돌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 마음이 변한 걸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저가 돌아가 조조에게 유비가 한 말을 전하자 정욱과 곽가가 곁에서 그렇게 입을 모았다. 그러나 조조는 아직도 유비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걸 믿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게는 주령과 노소가 있소. 그들이 곁에 함께 붙어 있으 니 현덕은 감히 마음이 변할 수 없을 것이오. 더구나 내가 이미 보내 놓고 어찌 다시 불러들인단 말이오?”
그러고는 다시 유비를 뒤쫓으려 하지 않았다.
유비가 이미 도성을 떠났다는 말을 듣자 동승과 함께 조조를 죽이려는 음모에 가담한 나머지 사람들은 적지 않이 기세가 상했다. 그중에도 마등은 자기의 근거지인 서량이 급하다는 전갈이 오기 바 쁘게 군사를 이끌고 그리로 돌아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