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3화 : 드높구나 춘추(春秋)의 향내여

랜덤 이미지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3화 : 드높구나 춘추(春秋)의 향내여


드높구나 춘추(春秋)의 향내여

조조가 길을 틔워주자 관운장은 군사를 이끌고 산을 내려가 하비 성으로 들어갔다. 간밤에 조조가 들어왔다가 다시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니 성안의 백성들은 황망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관공은 그런 백성들을 진정시킨 뒤에 부중으로 들어가 두 형수를 뵈었다.

감부인과 미부인은 관운장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 나와 맞았다. 관운장은 계하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두 분 형수님을 놀라게 하였으니 실로 제 죄가 큽니다.”

하지만 두 부인에게 더 궁금한 것은 유비의 생사였다. 절을 받는 둥 마는 둥 입을 모아 다급히 물었다.

“황숙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송구스럽게도 아직 가신 곳을 모릅니다.”

관우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두 부인이 다시 물었다.

“큰아주버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관우는 비로소 간밤의 일을 천천히 밝혔다.

“저는 어제 성을 나가 죽도록 싸웠습니다만 마침내는 고단하고 지친 몸으로 작은 토산에 몰린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조조 의 장수 장요가 제게 와 항복을 권해왔습니다. 저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던바, 조조가 모두 들어주기로 하고 군사를 물려주어 이렇게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두 분 형수님의 뜻을 들어보지 않고 결정한 일이라 함부로 조조에게 가지 못하고 먼저 이리로 온 것입 니다.”

“그 세 가지 약조가 무엇입니까?”

감부인과 미부인이 또다시 입을 모아 물었다. 관우가 조조와의 일 을 남김없이 털어놓자 감부인이 비로소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은 목 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조조의 군사들이 성안으로 밀려들 때만 해도 우리들은 죽은 목숨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조조는 우리들의 터럭 하나 상하 지 않고 군사 하나 집안으로 뛰어든 법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이 미 큰아주버님께서 깊이 헤아리시어 정하신 일인데 저희에게 물을 까닭이 무엇입니까? 다만 두려운 것은 조조가 뒷날 우리가 황숙을 찾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까 하는 것뿐입니다.”

“그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가서는 제게도 조조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관운장이 그렇게 감부인을 안심시켰다. 그러자 두 부인은 더 의심않고 말했다.

“모든 일은 큰아주버님께서 알아서 처결하십시오. 저희 따위 아녀자들에게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감부인과 미부인으로부터 그 같은 허락을 받고서야 관공은 드디 어 조조를 만나러 갔다. 겨우 수십 기만 거느리고 항복의 뜻을 표하 러 나선 길이었지만 조금도 의젓함을 잃지 않은 자세였다.

관운장이 왔다는 말을 듣고 조조는 진문 밖까지 나와 그를 맞았다. 

“싸움에 진 장수를 죽이지 않고 거두어주시니 실로 큰 은혜를 입 었습니다.”

조조를 본 관우가 말에서 내려 절하며 말했다. 비굴해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욕됨과 분함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목소리가 이상 하게 떨렸다. 조조가 황망히 답례했다.

“평소부터 운장의 충의를 흠모해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소. 오 늘 다행히 이렇게 만나보게 되니 평생의 바람이 헛되지 않은 듯하 오이다.”

“문원이 대신하여 세 가지 일을 아뢰었고 또 승상의 허락하심을 받았습니다. 부디 그 일이 어그러짐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관우가 한 번 더 세 가지의 약조를 꺼냈다. 조조로부터 직접 듣고 자 함이었다. 조조도 쾌히 응해 주었다.

“내 말이 이미 입 밖으로 나갔는데 어찌 믿음을 저버리겠소?”

“이 관아무개는 황숙께서 계신 곳만 알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리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때 절하여 감사하고 떠나지 못하더라도 승상께서는 부디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현덕이 만약 살아 있다면 공은 반드시 그를 따를 수 있을 것이 오. 다만 두려운 것은 난군(軍) 중에 이미 죽었을까 걱정이외다. 공은 마음을 넓게 먹고 천천히 수소문해보도록 하시오.”

천하에 둘도 없는 의리에 또한 둘도 없는 배포의 만남이었다. 관우가 다시 한번 엎드려 고마움을 표하자 조조는 그를 일으키고 크게 술잔치를 벌여 대접했다. 그리고 이튿날로 진채를 뽑아 허도로 돌아갔다.

관운장도 수레와 행장을 마련하고 두 형수를 태운 뒤 스스로 호 위하며 조조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도중에 역관에서 묵게 되었을 때였다. 조조는 은근히 유비와 관우의 사이가 그 일로 틀어지기를 기대하며 두 부인과 관우를 한곳에 거처하게 했다. 유비는 생사를 알 수 없는 데다 두 부인은 젊고 아리따웠으며 관우 또한 풍채가 남 달리 빼어났기 때문에 생긴 기대였다.

하지만 『춘추(春秋)』의 의로 길러진 관우의 정신은 애초부터 욕망 에만 충실해온 조조의 헤아림 밖이었다. 관우는 방 밖에다 등불을 밝히고 밤부터 아침까지 시립해 있는데 조금도 지치거나 싫증난 기 색이 없었다. 조조는 그러한 관우의 인품에 다시 한번 감복했다. 전 보다 한층 더 관우를 사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러러보는 마음 까지 일었다.

그리하여 허도에 이르자 조조는 큰 저택 하나를 관우에게 내리고 두 부인을 모시게 했다. 관우는 그 저택을 두 집으로 갈라 안채는 늙 은 군사 여남은 명이 파수를 보게 하고 자신은 바깥채에 기거했다.

조조는 이어 관우를 헌제에게 데려갔다. 믿던 유비의 아우라 그런지 헌제는 관우를 대함이 남달랐다. 조정으로 보면 이름없는 장수에 불과한 관우에게 편장군(偏將軍)이란 벼슬을 내렸다.

다음 날이었다. 조조는 또 크게 잔치를 벌이고 관우를 불러 윗자 리에 앉혔다. 그리고 여러 모사와 장수들을 모아들인 뒤 관우를 항 복한 장수가 아니라 손님을 대하는 예로 보게 했다. 뿐만 아니라 따 로 좋은 비단과 금은 그릇을 바리바리 관우에게 실어 보냈다. 그러 나 관우는 비단 한 자투리 술잔 하나 손댐이 없이 그대로 두 형수에 게 올려 한곳에 모아두게 했다.

관우의 환심을 사려는 조조의 노력은 실로 집요했다. 관우가 허도 에 온 이래 사흘마다 작은 잔치요, 닷새마다 큰 잔치[三日小五日大 였다. 또 아리따운 여인을 열 명이나 뽑아 관우에게 보내 철석같 은 그의 심정을 누구러뜨려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관우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자들을 한번 거들 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안채로 보내 두 형수를 시중들게 했다. 뿐만 아니라 사흘에 한 번씩은 안채 문밖에서 허리를 굽힌 채 두 형수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극진히 모셨다.

“황숙의 소식은 아직 없으십니까?”

그때 두 부인은 유비의 소식을 묻고 관우가 송구스럽게 없다고 대답하면 다시 말한다.

“큰아주버님께서는 이제 그만 돌아가 편히 쉬십시오.”

그러면 관우는 비로소 자기의 거처인 바깥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조조는 그 소문을 듣자 다시 한번 탄복해 마지않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관우가 입은 녹색 비단 전포(戰 袍)가 이미 낡은 걸 본 조조는 즉시로 관우의 몸을 재게 한 뒤 귀한 비단으로 새로이 전포 한 벌을 지어주었다. 관우는 감사하며 받았으 나 다음 날 보니 낡은 전포 안에 그 새 전포를 받쳐입고 있었다. 조 조는 관우가 새 옷을 아끼느라고 그러는 줄 알았다.

“운장은 어찌 그리 검소하시오?”

조조가 농담삼아 웃으며 물었다. 관우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제가 검소해서가 아닙니다. 헌 옷은 지난날 유황숙께서 제게 내 리신 것이라 언제나 형님의 얼굴을 뵈옵듯 입고 지냈습니다. 이제 승상께서 새 옷을 지어 내리셨으나 차마 그 새 옷으로 형님의 지난 은혜를 덮을 수 없어 헌 옷을 겉에 입었을 뿐입니다.”

그 뜻밖의 대답에 조조는 절로 감탄했다.

“운장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오!”

그러나 그 같은 감탄도 잠시 조조는 유비가 부럽다 못해 거센 시새움에 미움까지 일었다.

‘현덕, 그대는 실로 무서운 사람이다. 이 조조가 별별 공을 다 들 이고 갖은 수를 다 짜내도 못하는 일을 그대는 아무도 모르게, 어쩌 면 자신마저도 모르게 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는 입에 침이 마르게 관우를 칭찬해도 마음속 은 결코 즐겁지 아니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관우가 여느 때처럼 바깥채에서 『춘추』를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데 안채에서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두 부인께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계십니다. 까닭은 알 수가 없으나 장군께서는 속히 들어가보도록 하십시오.”

놀란 관운장은 곧 옷차림을 가지런히 하고 안채로 갔다. “두 분 형수님께서는 무슨 일로 그토록 슬피 우십니까?”

여느 때처럼 안채 문 밖에서 허리를 굽혀 큰 소리로 문안을 드린 관운장이 물었다. 감부인이 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내가 간밤에 황숙께서 흙구덩이에 빠져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잠을 깨어 미부인과 의논하다 보니 문득 황숙께서 이미 구천에 드신 것 같아 이렇게 둘이 함께 울고 있습니다.”

“꿈속의 일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이는 틀림없이 형수님께서 지나 치게 형님을 근심하신 까닭에 생긴 꿈일 것입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관운장은 그렇게 좋은 말로 두 형수를 달랬다. 그러나 자신도 마 음속으로 비감(悲感)이 일어 솟는 눈물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입으 로는 좋은 말을 거듭하면서도 두 눈은 비 오듯 눈물을 흩뿌리고 있 는데 홀연 조조에게서 사람이 왔다.

“승상께서 잔치를 열고 찾으십니다.”

이미 조조에게 항복한 몸이라 관운장은 아니 갈 수가 없었다. 곧 두 분 형수께 하직하고 승상부로 향했다.

“어서 오시오, 운장. 마침 집에서 빚은 좋은 술이 익었기에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해보았소.”

조조는 관운장이 들어서자 그렇게 반기며 맞았다. 그러나 관공의 두 눈이 붉고 눈가가 젖어 있는 걸 보자 놀란 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눈물 지으신 자취가 있구려.”

“두 분 형수님께서 형님을 생각하여 슬피 우시는 바람에 제 마음 에도 슬픔이 일어 그리되었습니다.”

관운장이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애써 꾸민 자리 에서 처음부터 유비를 그리는 말을 듣자 조조는 마음이 좋지 않았 다. 그러나 그 특유의 절제로 속마음을 감추고 껄껄 웃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술이 제일 좋은 약이오. 자, 이 술잔으로 모 든 시름을 씻으시오.”

그리고 연거푸 몇 잔을 권했다. 하지만 술은 슬픔과 걱정을 씻어 내기도 하나 더 크고 깊게 하기도 한다. 잔을 거듭할수록 관운장의 얼굴은 밝아지기는커녕 더 어둡고 울적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긴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살아서 나라의 은혜에도 보답하지 못하고, 더욱이 함께 죽기로 한 형님과의 맹세까지 저버리게 되었으니 실로 이 관아무개는 쓸모 없는 인간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처량할 뿐입니다…….”

그 말에 조조는 다시 속으로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공을 들 여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자신은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고 또 유 비의 일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런 일시적인 감정 보다는 관운장을 탐내는 마음이 위였다. 편치 않은 속을 억누르고 슬며시 말머리를 돌렸다.

“운장의 수염이 몹시 볼만하구려. 헤아려보신 적이 있소?”

조조의 그 같은 물음은 뜻밖에도 효과가 컸다. 관우는 자부심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예와 덕성은 물론 외모에 대해서도 자부심에 차 있었다. 자부심이란 종종 그것이 성실한 인격의 뒷받침이 있는 한 자기 상승의 원동력이 된다. 사실 관우를 한낱 떠도는 협객 에서 천하가 알아주는 충의지사로 길러간 것은 바로 그런 자부심이 바탕된 자기 발전의 부단한 노력이었다. 하지만 또한 자부심은 종종 자신의 능력과 이상을 혼동시키기도 한다는 데서 그 소유자에게 치 명적인 해를 끼치기도 한다. 관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생을 그 자부심 때문에 부침을 되풀이하는데 그날 그를 아득한 슬픔과 비 탄의 정조에서 끌어낸 것도 그 자부심이었다.

“아마도 수백 뿌리는 되는가 봅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너덧 뿌리 씩 빠지는데 겨울에는 더 심하기 때문에 검은 비단 주머니로 싸둡니 다.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는 일이지요.”

관우가 이번에는 자랑하듯 자신의 수염을 쓸며 대답했다. 조조는 관우가 수염 얘기에 쏠려 울적함을 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관우 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구려. 내가 운장을 위해 수염 주머니를 하나 지어드리리다.”

그러고는 좌우에 명하여 좋은 비단으로 주머니를 지어올리게 했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에 천자가 보니 관우가 턱 아래 주머니를 매 달고 있는데 가슴 아래까지 드리워 있었다.

“그 주머니는 무엇이오?”

이상히 여긴 헌제가 관우에게 물었다. 관우가 은근히 자랑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신의 수염이 길고 어지러워 승상께서 그걸 싸두라고 주머니를 지어주셨습니다.”

“그거 참 재미난 일이요. 어디 한번 봅시다. 어떤 수염이길래 주머니로 싸두어야 하는지 궁금하구려.”

헌제가 그렇게 말하자 관우는 수염을 싼 주머니를 벗겼다. 배까지 드리운 검은 수염이 그 안에서 나오자 헌제가 감탄해서 말했다.

“참으로 수염이 아름답구려! 그대를 미염공(公)이라 불러야겠소.”

천자가 그렇게 말하니 그 뒤로는 사람들이 모두 관우를 미염공이라 불렀다.

또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관운장을 위해 잔치를 연 조 조는 술자리가 끝나자 몸소 승상부 밖까지 나와 관운장을 배웅했다. 그런데 관운장의 말이 몹시 야위고 지쳐 보였다.

“공의 말이 어째서 이렇게 야위었소?”

조조가 관운장에게 물었다. 관운장이 대답했다.

“천한 몸이 너무 무거워 말이 그 무게를 잘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살이 붙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다시 선심을 쓸 좋은 기회가 생겼다 싶었다. 곧 좌우를 시켜 말 한 필을 끌어오게 했다. 오래잖아 온몸이 불붙은 숯처럼 시뻘겋고 모양이 몹시 크고 힘차 보이는 말 한 필이 끌려나 왔다.

“공은 이 말을 알아보시겠소?”

조조가 그 말을 가리키며 관우에게 물었다. 관우가 금세 그 말을 알아보고 되물었다.

“이 말은 여포가 탔던 그 적토마(赤兎馬)가 아닙니까?”

“그렇소. 특별히 공에게 주려고 하오.”

조조가 그렇게 말하며 안장과 고삐를 갖추어 관우에게 주었다.

“승상, 고맙습니다. 실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관우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번 세 번 조조에게 절해 고마 움을 나타냈다. 평소의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지나친 감사였 다. 조조가 까닭없이 마음이 어두워져 물었다.

“지난날 내가 미인이며 비단과 금은을 보낼 때는 절하며 받는 일 이 없더니 이제 말을 주자 이토록 기뻐하며 두 번 세 번 절하시는구 려. 어찌하여 사람은 천하게 여기면서 한낱 짐승은 이토록 귀히 여 기시는 거요?”

그러자 관우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저는 이 적토마가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다행 히 이 말을 얻게 되었으니 만약 형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된다면 하루 로 달려가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승상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감탄할 만한 의리요 정이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한편 놀 라고 한편 후회하였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소태 씹은 기분으로 거 듭 감사를 올리며 적토마를 끌고 가는 관우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 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조조는 차차 관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 는 일에 자신을 잃어갔다. 그 같은 조조의 심경을 잘 보여준 게 장요(張遼)를 잡고 탄식처럼 한 물음이었다.

“나는 운장을 박하게 대접하지 않았건만 그는 항상 떠나갈 생각만 하니 어찌 된 셈인가?”

장요도 조조의 노력이 번번이 허사로 돌아가는 걸 곁에서 보아온

터였다. 운장을 달래 데려온 사람이 바로 자기라 적이 송구스런 마 음으로 말했다.

“제가 한번 그의 속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 관운장을 보러 갔다.

“제가 형을 승상께 천거하기는 했습니다만 무엇 모자라고 뒤진 일이나 없는지요?”

서로 예를 끝낸 뒤 장요가 넌지시 물었다. 관우가 고개를 설레설 레 흔들며 대답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승상의 두터운 보살피심에 무어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를 지경이외다. 하지만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황 숙 생각으로 가득 차 그분이 계신 곳을 그릴 뿐이오.”

“형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무겁고 가벼운 것 을 분별하지 못하면 장부라 할 수 없습니다. 현덕공이 아무리 형을 잘 대접했다 하더라도 우리 승상만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형 은 어찌하여 떠날 생각만 하고 계십니까?”

“나도 조공이 나를 두터이 대접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이미 황숙의 두터운 은의를 입은 데다 함께 죽기로 맹 세까지 하였으니 저버릴 수 없소이다. 끝내 이곳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오. 하지만 그냥 떠나지는 않겠소. 반드시 조공의 은의에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니 그 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장요의 다그치는 듯한 물음에 관우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미 장요 가 온 뜻을 헤아린 듯했다. 장요 역시 관우가 조조의 사람이 될 리는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행여나 하는 기분으로 다시 물었다.

“만약 현덕공이 이미 세상을 버리셨다면 그때는 어디로 돌아가시겠소?”

“그때는 형님을 따라 땅밑에 들 뿐이오!”

결국 장요는 아무리 해도 관우를 조조 아래 머물게 할 수는 없으 리란 것을 한 번 더 확인했을 뿐이었다.

장요는 관우와 헤어지자마자 조조에게로 갔다. 장요로부터 관우 의 말을 전해 들은 조조는 탄식했다.

“주인을 섬기는 데 그 근본을 잊지 않으니 운장은 실로 천하의 의사다! 하지만 끝내 보내야 한다니 참으로 아깝구나.”

조조가 못내 안타까워하자 순욱이 한 꾀를 일러주었다.

“저 사람이 말하기를 공을 세워 은덕을 갚은 뒤라야 떠날 것이라 했습니다. 만약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떠날 수 없 을 것입니다.”

조조도 생각해보니 관우를 잡아두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 괴롭 게 고개를 끄덕이며 순욱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 유비는 원소 밑에 머물러 있었다. 그 한 몸은 편했으나 생사 를 알 수 없는 가솔들이며 두 아우의 일로 아침저녁 마음이 편치 못 했다.

“현덕은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으시오?”

원소가 그런 유비에게 물었다. 유비가 울적하게 대답했다.

“두 아우는 소식이 없고 아내와 가솔들은 모두 조조 그 역적 놈에 게 떨어졌으니 살아 있기를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나라 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집안조차 보전하지 못한 터에 어찌 걱정이 없겠습니까?”

그러자 원소가 왠지 겸연쩍은 표정을 짓다가 불쑥 말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군사를 내어 허도로 가려고 했소. 마침 따뜻한 봄철이 되었으니 군사를 일으키기 좋은 때요. 함께 조조를 칠 의논 이나 합시다.”

그리고 여러 모사들을 불러모은 뒤 조조를 깨뜨릴 의논을 시작했 다. 전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에는 조조가 서주를 칠 때라 허도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때 우 리가 군사를 내었더라면 조조는 허도를 구할 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서주는 이미 깨뜨려졌고 조조의 군사들은 그 싸움에 이겨 한창 그 기세가 날카로우니 가볍게 맞설 수 없게 되 었습니다. 시일을 끌며 조조에게 틈이 벌어지기를 기다려 움직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원소가 들어보니 자못 옳은 헤아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유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전풍은 내게 굳게 지키는 쪽을 원하는데 현덕의 생각은 어떻소?” 

“조조는 임금을 속이는 역적입니다. 명공께서 치지 않고 구경만 하시다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대의를 잊었다는 말을 들을까 두렵습니다.”

전풍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는 원소를 유비가 부추겼다. 세 상의 평판을 중히 여기는 원소의 허영심을 겨냥한 부추김이었다. 과 연 원소는 그 말에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현덕의 말이 매우 옳소! 곧 조조를 치도록 하겠소.”

그 한마디로 군사를 일으킬 결정을 내렸다. 전풍이 그런 원소를 한 번 더 말렸다.

“아니 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너희들은 글줄이나 희롱하며 무(武)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다. 나로 하여금 천하의 대의를 저버리게 할 작정이냐?”

원소가 조금 전의 동요도 잊고 성난 목소리로 전풍을 꾸짖었다. 그러나 전풍은 물러서지 않았다. 머리는 조아릴지언정 말투는 한층 꼬장꼬장해져 말렸다.

“만약 명공께서 저의 옳은 말을 듣지 않으시고 군사를 내신다면 반드시 이롭지 못한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 말에 원소는 더욱 노했다.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는 마당에 어디서 함부로 요망한 주둥아리를 놀리느냐? 여봐라, 저놈을 끌어내다 목을 베어라!”

그렇게 소리치며 탁자를 쳤다. 유비가 그런 원소를 말려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나 전풍은 끝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저수)는 전풍이 옥에 갇히는 걸 보자 원소의 뒤끝이 반드시 좋지 않을 걸 알았다. 마침내 출병이 결정되어 떠나기 전날 일가친 척을 모두 불러모은 뒤 있는 재산을 모조리 나누어주며 말했다.

“나는 군사들과 함께 가는 터라 이 싸움에 이긴다면 위세가 더할나위 없을 것이요, 진다면 이 한 몸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재물이 무슨 소용이랴!”

그리고 처연히 종군해 가니 그의 일가친척들은 모두 눈물로 그를 배웅했다. 저수의 가슴속에 숨겨진 불길한 예감이 은연중에 그들에 게도 전해진 것이리라.

원소는 대장 안량(顔良)을 선봉으로 삼아 군사를 먼저 백마성( 馬城)으로 내었다. 오래 함께 지내 안량을 잘 아는 저수가 원소를 일 깨웠다.

“안량은 속이 좁은 사람이니 비록 무예가 뛰어나다 해도 혼자 보 내서는 안 됩니다.”

“안량은 나의 상장이다. 너희들이 헤아릴 바가 아니다!”

원소는 그 한마디로 저수의 말을 물리치고 그대로 군사를 나아가 게 했다. 원소의 대군이 여양에 이르자 동군 태수 유연(延)이 놀라 그 일을 허도에 알렸다. 조조는 급히 사람들을 모아 원소를 막을 의 논을 했다.

원소가 대군을 일으켜 허도로 오고 있다는 소문은 관우의 귀에도 들렸다. 유비가 그들과 함께 있음을 알 리 없는 관우는 그것을 조조 의 은혜를 갚을 좋은 기회로 보았다. 소문을 듣기 바쁘게 승상부로 달려가 조조에게 말했다.

“승상께서 군사를 일으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라건대 저 를 앞장세워 주십시오.”

하지만 조조는 아직 관우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순욱이 말했듯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는 것만이 그를 오래 잡아둘 수 있는 길이라 여긴 까닭이었다.

“아직 장군을 번거롭게 할 때는 아닌 듯하오. 그럴 일이 있으면 그때 마땅히 장군에게 청을 드릴 것이오.”

조조가 그렇게 나오니 하는 수가 없었다. 관우는 머쓱해져 승상부를 나오고 말았다.

조조는 곧 십오만의 군사를 일으킨 뒤 세 길로 나누어 원소를 맞으러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다시 유연의 급한 전갈이 와 조조는 먼저 오만을 떼어 몸소 이끌고 백마로 달려갔다.

얕은 토산에 진채를 내린 조조는 그 위에서 원소군의 진채를 바 라보았다. 넓은 벌판 가득 안량이 이끈 십만의 정병이 진세를 벌이 고 있었다. 원소군의 전부였다. 그들을 한참 내려다본 조조가 문득 곁에 있던 옛 여포의 장수 송헌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그대는 여포 아래서의 용맹한 장수라 했다. 안량과 한번 싸워볼 만하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그러잖아도 옛 주인 여포를 사로잡아 조조에게 바친 일 외에 이 렇다 할 공을 세워보지 못한 송헌이었다. 조조의 물음에 한마디로 응낙하고 창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갔다.

문기 아래서 칼을 비껴든 채 말 위에 있던 안량도 송헌이 달려오 는 걸 보았다. 한마디 성난 외침과 함께 말을 박차 송헌을 맞았다. 송헌은 기세 좋게 창을 내질렀으나 원래가 어림없는 상대였다. 겨우 세 합을 부딪기도 전에 안량의 한칼을 맞고 목이 떨어졌다.

“안량은 참으로 무서운 장수로구나!”

보고 있던 조조가 질린 얼굴로 탄식했다. 송헌과 함께 여포를 묶어 조조에게 항복해 왔던 위속이 곁에 있다가 분연히 조조에게 청했다.

“저놈이 내 친구를 죽였으니 원수를 갚아야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원한다면 가라. 부디 송헌의 한을 풀어주도록 하라.”

조조가 못 미더운 대로 출진을 허락했다.

위속은 나는 듯 말에 올라 창을 휘두르며 달려 나가더니 안량의 진 앞에 이르러 큰 소리로 안량을 꾸짖었다. 안량이 아무 대꾸 없이 달려 나와 위속을 맞는데 두 말이 한번 엇갈리는가 싶더니 위속 또 한 몸이 두 쪽으로 갈라져 말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는 누가 안량을 당하겠는가!”

위속마저 어이없이 죽는 걸 보고 낙담한 조조가 다시 그렇게 탄식했다.

“제가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서황이 큰 도끼를 둘러메고 나서며 소리쳤다. 조조는 말없이 고개 를 끄덕여 그에게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서황도 끝내 안량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미 이름난 장수를 둘씩이나 죽여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안량이라 그런지 서황이 원래 약한 장수가 아니건만 스무 합을 견디지 못하고 조조의 본진으로 쫓겨 들어왔다.

서황마저 그 꼴이 나자 조조의 여러 장수들은 한결같이 안량을 두려워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게 되면 싸움은 이미 틀린 일이었다. 조조가 먼저 징을 쳐 군사를 거두고, 안량 또한 그날 싸움에서

얻은 것에 만족했는지 군사를 거두어 본진으로 돌아갔다.

첫 싸움에서 두 장수를 잃어 기세가 꺾인 조조는 근심에 사로잡 혔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군막 안을 서성이고 있는데 정욱이 들 어와 말했다.

“제가 안량을 대적할 만한 인물 하나를 천거해 올리겠습니다.”

그 말에 조조는 귀가 번쩍 틔어 물었다.

“그게 누구요? 누가 안량을 당해낼 수 있단 말이오?”

“관운장이 아니면 아무도 안량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공을 세우게 되면 이내 내게서 떠날 것이오. 나도 그가 지난날 화웅을 베던 일을 떠올렸으나 그 때문에 말을 내지 않 은 것이오.”

조조가 씁쓸한 얼굴로 그렇게 반대했다. 정욱이 그런 조조에게 다 가들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하실 일은 아닙니다. 만약 유비가 살아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원소에게 투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운장을 내 보내 원소의 군사를 깨뜨린다면 원소는 반드시 유비를 의심해 죽일 것입니다. 유비가 죽는다면 운장이 가려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조조가 들어보니 과연 기막힌 꾀였다. 곧 정욱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사람을 뽑아 허도에 있는 관우를 불렀다.

조조의 부름을 받은 관우는 이내 출전 채비를 하고 두 분 형수에 게 작별을 드렸다. 두 부인이 그런 관우에게 당부했다.

“큰아주버님께서는 이번에 가시거든 꼭 황숙의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관우는 그렇게 대답하고 적토마 위에 올랐다. 종자 몇 명만 뒤딸 린 채 그날로 백마에 이른 관우는 곧 조조를 찾아보았다. 조조는 관 우에게 안량이 송헌과 위속 두 장수를 죽인 일을 말하고 도움을 구 했다.

“제가 한번 살펴보고 처결하겠습니다.”

관우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답해 조조를 안심 시켰다. 조조는 술을 내어 그런 관우를 대접했다.

“안량이 다시 싸움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조조와 관우가 몇 번 술잔을 나누기도 전에 홀연 군사가 달려와 알렸다.

“따라오시오. 공이 안량을 살필 수 있는 곳으로 내가 안내하겠소.” 

조조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관우를 토산 위로 데려갔다. 산꼭대 기에 조조와 관우가 자리 잡자 조조의 여러 장수들이 그들을 둘러 섰다.

“저것이 하북의 인마요. 참으로 그 기세가 웅장하지 않소?”

조조가 안량이 진세를 벌여둔 곳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기치 가 선명하고 창칼이 수풀처럼 덮였는데 엄정한 가운데도 위세가 넘 쳐 흘렀다. 그러나 관우의 눈에는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한번 슬쩍 훑어본 뒤에 비웃듯 내뱉었다.

“제가 보기에는 흙으로 빚은 닭의 떼서리요, 기와로 구운 개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큰소리였다. 조조가 다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비단 해가리개 아래 녹슨 전포와 금갑(金甲)을 받쳐 입고 칼을 든 채 말 위에 앉은 자가 안량이오.”

“안량이란 자도 제가 보기에는 저잣거리에 푯대를 세워놓고 제 목

을 팔려고 내놓은 자와 같습니다.”

관우가 다시 차갑게 대꾸했다. 조조가 그런 관우를 타일렀다. 

“너무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되오.”

그러나 관우는 조금도 듣는 기색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바라건대 만군 중으로 나가게 해주십시 오. 반드시 안량의 목을 잘라 승상께 바치겠습니다.”

“군중에서는 우스갯소리가 없는 법입니다. 운장께서는 소홀히 말 씀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듣다 못한 장요가 관우를 나무라듯 말했다. 관우는 그 말에 대꾸 도 않고 분연히 말 위에 뛰어올랐다. 청룡도를 꼬나잡고 산 아래로 달려 나가는데 부릅뜬 봉의 눈에 누에 같은 눈썹을 치켜세운 품이 말 대신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할 작정 같았다.

관우가 성난 기세로 뛰어들자 하북의 군사들은 감히 그 앞을 가 로막지 못했다. 물결 갈라지듯 비켜서 길을 내주니 관우는 똑바로 안량에게 다가들었다.

비단 해가리개 아래 서 있던 안량도 관우가 달려오는 걸 보았다. 먼저 누구인가를 알아보려 했으나 적토마가 너무 빨랐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어느새 관우가 눈앞에 이르러 있었다. 놀란 안량이 급히 칼을 휘둘러 막았지만 손발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관우가 청룡도를 높이 쳐들어 내려찍자 안량은 허무하게도 말 아래로 떨어 져 죽었다.

관우가 때를 놓치지 않고 말에서 뛰어내려 안량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말 안장에 그 목을 걸더니 나는 듯 다시 말 위로 뛰어올라 적진을 헤치고 나오는데 마치 무인지경 지나듯 했다.

그 엄청난 기세에 놀란 하북의 군사들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저절로 어지러워졌다. 그때 다시 조조의 군사가 승세를 타고 덮치니 싸움은 그대로 결판나고 말았다. 원소의 군사들은 헤아릴 길이 없는 시체와 수많은 마필 및 군기를 남겨놓고 수십 리를 쫓겨갔다.

관운장이 안량의 목을 들고 산 위로 돌아오자 거기 있던 여러 장 수들은 한결같이 칭하해 마지않았다. 그중에서도 조조의 감탄은 특 히 더했다.

“장군은 참으로 신인이외다!”

그러나 공을 이룬 뒤에 겸손한 것이 또한 유별난 자부심에 못지않 은 관우의 특징이었다. 대단찮은 일을 했다는 듯 겸양의 말을 했다. 

“저 같은 것에게야 어찌 그 말이 가당하겠습니까? 제 아우 장익덕 은 백만 대군 중에서 상장(將)의 목 얻기를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 듯 합니다.”

기쁜 중에도 그 말에 조조는 가슴이 서늘했다. 좌우에 늘어선 장 수들을 둘러보며 깨우쳐주기를 잊지 않았다.

“뒷날 장익덕을 만나거든 결코 가볍게 맞서지 말라.”

그리고 소매와 옷깃에 그 이름을 적어 잊지 않도록 당부했다.

한편 관우에게 대장을 잃고 쫓겨가던 안량의 군사들은 도중에 원 소의 본진을 만났다.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큰 칼을 쓰 는 장수가 안량의 목을 베어가는 바람에 싸움에 크게 졌다는 말을 듣자 원소가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장수가 누구이겠는가?”

“그는 틀림없이 유현덕의 아우 관운장일 것입니다.”

저수가 망설일 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원소는 앞뒤 를 헤아려보지도 않고 왈칵 성부터 냈다. 마침 곁에 있던 유비를 손 가락질하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네 아우가 나의 아끼는 장수를 죽였으니 틀림없이 네놈과 서로 짜고 한 짓일 것이다. 너를 살려두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고는 무사들을 시켜 유비를 목 베게 했다. 유비가 그런 원소 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를 죽여 명의 분을 푸시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제 말을 한마디만들어주십시오. 어찌 한쪽의 말만 듣고 지금까지 우러러 온 정을 끊으시려 하십니까? 이 비는 서주를 잃은 이래 아우 운장이 죽 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모습이 비슷한 사 람도 있는 법이라 붉은 수염에 얼굴이 길다 해서 꼭 관아무개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어찌하여 그 일을 살피지 않으십 니까?”

원소는 원래 주견이 뚜렷한 사람이 아니었다. 성난 중에도 유비의 말을 들어보니 옳게 여겨졌다. 곧 성난 기색을 거두고 오히려 저수를 꾸짖었다.

“네 그릇된 말에 자칫 좋은 사람을 죽일 뻔했다. 앞으로는 말을 삼가도록 하라.”

그러고는 다시 유비를 상좌로 끌어올려 안량의 원수 갚을 일을 의논했다.

원소와 유비가 한창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 문득 한 장수가 뛰어 들어 원소에게 청했다.

“안량은 나와 형제처럼 지낸 사람입니다. 이제 조조 그 역적 놈에 게 죽음을 당했는데 어찌 한을 풀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에는 저를 보내주십시오.”

유비가 살피니 키가 여덟 자에 얼굴은 해태같이 무섭게 생긴 장 수였다. 바로 안량과 나란히 이름을 떨치던 하북의 맹장 문추(醜) 였다. 안량의 죽음으로 어둡던 원소의 얼굴이 그를 보자 일시에 밝 아졌다.

“오오, 문추로구나. 그대가 아니면 누가 안량의 원수를 갚아줄 수 있겠는가? 좋다. 그대에게 군사 십만을 줄 터이니 얼른 황하를 건너 조조를 잡아 죽이도록 하라.”

그때 다시 저수가 나서서 말했다.

“아니 됩니다. 지금은 연진 땅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시다가 따로 이 관도에 군사를 나누어 보내도록 하는 게 상책입니다. 섣불리 황 하를 건넜다가 무슨 변고라도 있으면 모두가 돌아올 수 없게 됩니 다. 부디 헤아려 일을 정하십시오.”

원소는 그 말을 듣고 벌컥 화를 냈다.

“너희들은 모두 군사들의 마음을 느리고 풀어지게 만들어 세월만 허비하니 큰일에 방해만 될 뿐이다. 어찌하여 군사를 움직이는 데는 재빠름을 높이 여긴다[兵貴神速]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느냐?”

그렇게 저수를 꾸짖어 물리쳤다. 저수는 길게 탄식하며 원소 앞을 물러갔다.

“윗사람은 제 뜻만 세우려 들고 아랫사람은 공을 다투기에 바쁘니 넓고넓은 황하를 내 어찌 건널꼬?”

그리고 병을 핑계로 다시는 의논에 끼어들지 않았다.

은근히 원한 대로 원소가 다시 군사를 일으키게 되자 유비가 청했다.

“이 비는 큰 은혜를 입고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저를 문추 장군과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첫째로는 명공의 은덕에 보답하 위함이요, 둘째로는 제 아우 운장의 일이 참인지 아닌지 살펴보 고 싶습니다.”

“현덕의 뜻이 그러하다면 함께 가도록 하시오.”

원소는 기쁜 얼굴로 그렇게 허락하고 문추를 불러 현덕과 함께 전부 군사를 이끌게 했다. 문추가 달갑잖은 얼굴로 원소를 올려보며 말했다.

“유현덕은 이미 싸움에 여러 번 진 장수입니다. 군사를 부리는 데 이롭지 못하니 주공께서 꼭 그를 보내시고 싶으시다면 그에게 삼만 군을 나눠주어 뒤를 맡게 하겠습니다.”

아끼는 장수의 말이라 원소가 그걸 허락하자 문추는 스스로 칠만 을 이끌고 앞서 가고 유비에게는 삼만을 주어 뒤를 따르게 했다.

한편 조조는 운장이 하북의 명장 안량을 한칼에 베는 것을 보자 흠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조정에 운장의 공을 요란스 레 상주해 올리니 조정은 운장에게 한수정후(壽亭侯)를 내리고 그 도장을 새겨 보냈다.

그러나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 조조에게 다시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원소가 이번에는 대장 문추를 보내 이미 황하를 건너게 했습니다. 지금 연진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기세가 여간이 아니랍니다.”

이에 조조는 먼저 그곳의 백성들을 서하(西河)로 옮겨가게 한 뒤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맞으러 나아갔다. 그런데 그때 행군의 배치가 몹시 특이했다. 지금까지의 전군을 후군으로 삼고 후군을 전군으로 삼으니, 군사를 먹일 곡식과 말 먹일 풀은 앞서고 군사는 뒤를 따르 게 되었다.

“곡식과 말먹이 풀을 앞세우고 군사를 뒤따르게 하시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건(呂)이 이상히 여겨 조조에게 물었다. 조조가 천연스레 대답했다.

“곡식과 마초를 뒤에 두면 도둑맞고 빼앗기는 일이 많아 앞에 세운 것이네.”

“만약 적병을 만나 빼앗기게 되면 그 일은 또 어쩌시겠습니까?”

여건이 이상한 듯 다시 물었다. 조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그때 가면 알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그리고 아직 의문을 풀지 못한 여건을 버려둔 채 곡식과 치중을 앞세워 보내고 자신은 후군에 남았다.

조조가 후군에 섞여 한참 연진을 향해 나가는데 홀연 전군 쪽에 서 크게 함성이 일었다. 조조는 짐짓 놀란 체 사람을 시켜 무슨 일이 났는지 알아보게 했다. 오래잖아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하북의 대장 문추의 군사가 이르러 아군은 군량과 말먹이 풀을 모두 빼앗기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후군 은 이토록 멀리 있어 구원해주기 어려우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 니까?”

그러나 조조는 별로 놀라거나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문득 채찍 을 들어 양쪽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북의 군사들이 그토록 강하다면 잠시 피하는 길밖에 없지. 저 기가 좋겠다. 모두 저리로 피하라.”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조조의 군사들은 그 산 언덕으로 기어올 라갔다.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은 원래 병가가 꺼리는 바였다. 그러나 조조는 거기다가 한술 더 떴다. 

“여기서 마음껏 쉬도록 하라. 투구를 벗고 갑옷을 끌러도 좋다. 말 은 모두 풀어주어 풀을 뜯게 하라!”

언덕 위에 오른 조조는 또다시 그런 뜻밖의 영을 내렸다. 내막을 알 리 없는 군사들은 조조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때 문추의 군사들 이 어느새 그곳에 이르렀다.

“적군이 왔습니다. 어서 빨리 마필을 거두게 하시고 물러나도록 하십시오. 백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장수들이 입을 모아 조조를 재촉했다. 오직 순유荀)만이 그런 장수들을 급히 말렸다.

“지금 바야흐로 승상께서 던진 미끼에 적이 걸려들었는데 어찌하여 군사를 물린단 말이오?”

순유는 벌써부터 조조의 속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았다. 조조가 그런 순유에게 눈짓을 보내며 웃었다. 순유는 조조가 더 말하지 말 라는 뜻인 줄 알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문추의 군사들은 이미 조조의 전군으로부터 군량과 마초며 수레 와 병장기를 빼앗아 재미를 본 뒤였다. 다시 말들이 흩어져 있는 걸 보자 욕심이 일었다. 싸움은 뒷전에 두고 이리저리 말을 잡는 데만 힘을 쏟으니 대오가 제대로 유지될 리 없었다. 자연 앞뒤가 뒤섞이 고 좌우가 얽혀 부대 간의 구분도 없고 군령도 통하지 않는 난군( 軍)이 되고 말았다.

“이때다! 모든 장졸들은 언덕을 내려가 적을 쳐부수라!”

조조가 그런 문추의 군사들을 내려다보다가 소리쳤다.

조조의 군사들이 갑자기 쳐내려오자 말을 쫓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던 문추의 군사들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문추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웠으나 뒤죽박죽이 된 군사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했다. 대오 도 없고 군령도 통하지 않아 허둥대다가 저희끼리 밟고 밟히는 형편 이었다.

그제서야 문추는 지금까지의 손쉬운 승리와 그 수많은 노획품이 모두 조조가 계략으로 내준 미끼였음을 깨달았다. 더 깊이 빠져들기 전에 도망치고자 급히 말 머리를 돌렸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조조가 그런 문추를 가리키며 자기 장수들에게 다시 소리쳤다.

“문추는 하북의 명장이다. 누가 가서 사로잡아 오겠느냐?”

“제가 가보겠습니다.”

장요와 서황이 한꺼번에 그렇게 대답하고 말을 달려 나갔다. 그리고 달아나는 문추를 뒤쫓으며 크게 외쳤다.

“문추는 닫지 말라!”

고개를 돌려 두 장수가 쫓아오는 걸 본 문추는 창을 안장에 꽂고 활을 꺼냈다. 화살을 시위에 먹여 장요를 겨누어 쏘는데 서황이 그 를 향해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다.

“비겁한 놈! 어디다 활질이냐?”

그 말에 뒤쫓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장요가 얼른 고개를 숙 여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그러나 화살은 장요의 투구를 맞추고 투구끈을 끊어놓았다. 하마터면 얼굴에 맞을 뻔했던 장요는 크게 성 이 났다. 다시 말을 재촉해 뒤쫓는데 뒤이어 날아온 화살이 타고 있 던 말의 볼따구니를 꿰뚫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한 말이 무릎을 꿇 으며 나뒹구니 장요도 견디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문추가 그 좋은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돌연 말 머리를 돌려 말에서 떨어져 뒹구는 장요의 목을 베려 들었다. 서황이 급히 도끼 를 휘두르며 나가 그런 문추를 막았다. 그러나 겨우 장요를 구해냈 을 뿐, 문추의 등 뒤로 많은 군마가 밀려오는 걸 보자 이내 말 머리 를 돌려 달아났다.

이에 다시 힘이 난 문추는 물가를 따라 서황과 장요를 뒤쫓았다.

그때 홀연 한 장수가 여남은 기를 이끌고 깃발을 펄럭이며 말을 달려왔다. 아끼는 두 장수의 위험을 보고 조조가 다시 출전을 허락한 관운장이었다.

“적장은 달아나지 말라!”

관우가 크게 소리치며 문추를 가로막았다. 얼결에 맞부딪고 난 뒤 에야 문추도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원소 앞에서 친 큰소리 와는 달리 안량의 원수갚음에 앞서 겁부터 먼저 났다. 세 합을 싸우 기도 전에 말을 박차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관우가 탄 말이 어떤 말인가, 천하의 적토마라 빠르기가 문추의 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느새 문추를 뒤따라와 칼을 들 어 그 머리통을 갈기니 문추의 목은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조조는 흙언덕 위에서 관우가 문추의 목을 베는 걸 보자 일시에 인마를 몰아 내려왔다. 하북의 군마는 태반이 물에 빠져 죽고 그들 에게 빼앗겼던 군량과 마초며 말은 다시 조조에게로 돌아갔다.

관운장이 좌충우돌하며 쫓기는 원소의 군사들을 죽이고 있을 때 문추의 뒤를 받치고 있던 유현덕이 부근에 이르렀다. 앞서 나가 있 던 군사들이 문추의 소식을 알아 유현덕에게 전했다.

“전군이 패했는데, 이번에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장수 가 문추를 베어 죽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유현덕은 황급히 물가로 말을 몰아 싸움터를 건너 보았다. 화살이 닿을 거리로 물 건너 싸움터에서 한 장수가 나는 듯 말을 몰며 하북의 군사들을 짓밟고 있는데 그를 따르는 깃발에는 ‘한수정후 관운장’이란 일곱 자가 뚜렷했다. 정말로 아우가 조조의 진중에 살아 있음을 확인한 셈이었다.

반가운 마음 같아서는 불러 만나보고 싶었으나 승세를 탄 조조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인 관우라 그럴 수도 없었다. 우선 위급이나 피하 고자 문추의 남은 군사들을 거두어 원소의 본진으로 돌아갔다.

그때 원소는 본진과 더불어 관도까지 나와 있었다. 유현덕에 앞서 문추가 싸움에 져 죽은 소식부터 원소에게 들어갔다.

“이번에 문추를 죽인 것도 관우임에 틀림없습니다. 유비는 거짓으 로 모르는 체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사인 심배와 곽도가 원소를 찾아보고 그렇게 말하며 유비를 헐뜯었다. 귀가 엷은 원소는 그 말에 크게 노했다.

“그 귀 큰 도적놈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

그렇게 내뱉으며 기다리는데 유비가 오래잖아 찾아들었다. 원소는 앞뒤 살필 것도 없이 유비를 가리키며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여봐라, 저놈을 당장 끌어내다가 목을 쳐라!”

“명공, 제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유비가 놀라 원소에게 물었다. 원소가 노한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네 아우를 시켜 이제 또 내가 아끼는 장수 하나를 죽였다. 그러고도 죄가 없다 하겠느냐?”

유비는 속으로 다급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청했다.

“저를 죽이더라도 한마디만 들어주신 뒤에 죽이십시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더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조조가 이 유비를 미워하여 꾸민 계책입니다. 제가 명공께 의지하고 있는 줄 알자 제가 명공을 도울까 두려워 특히 관운장을 보내 안량, 문추 두 장수를 죽이게 한 것입니다. 명공께서 그 일을 알면 반드시 노해 저를 죽이리라 생각하고 한 일 이니, 이는 즉 명공의 손을 빌어 이 유비를 죽이고자 하는 계책이 아 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라건대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그 말에 줏대없는 원소의 노기는 이내 눈 녹듯 스러졌다. 대신 가 장 생각 깊은 체 오히려 곽도와 심배를 꾸짖어 물리쳤다.

“현덕의 말이 옳다. 그대들은 몇 번이나 까닭없이 죄없는 사람을 죽이도록 충동하여 내어진 이름에 해를 끼칠 뻔했다.” 그리고 다시 현덕을 전처럼 윗자리에 앉게 했다.

“명공의 너그럽고 크신 은혜를 입었으니 실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믿을 만한 사람 하나를 뽑아 운 장에게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가서 글과 함께 내가 여기 있다 는 소식을 전하면 운장은 반드시 그 밤으로 달려올 뿐만 아니라 명 공을 도와 함께 조조를 없애고 안량과 문추의 원수를 갚을 것입니 다. 그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유비가 때를 놓치지 않고 원소에게 그렇게 물었다. 원소는 더욱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허락했다.

“내가 운장을 얻게 된다면 안량과 문추를 함께 거느린 것보다 열배 낫소.”

이에 유비는 그 자리에서 관우에게 보낼 글을 썼으나 워낙 중한 일이라 그걸 가지고 갈 만한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이오. 잠시 군사를 물리고 마땅한 사람 을 구해 보내도록 합시다. 조조와의 싸움은 관운장을 얻은 후에 해도 늦지 않소.”

원소가 다시 생각 깊은 체 그렇게 말하며 군사를 무양(武陽)으로 물리게 했다. 그리고 수십 리에 뻗쳐 진채를 내린 뒤 군사를 묶어 움 직이지 아니했다.

원소가 그렇게 물러나자 아직 그의 근거를 뽑을 만한 힘을 갖지 못한 조조 또한 군사를 물리는 길밖에 없었다. 하후돈에게 군사를 주어 관도의 길목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장졸들과 함께 허도 로 돌아갔다.

천자를 뵙고 싸움의 경과를 간단히 전한 조조는 곧 크게 잔치를 열고 뭇 관원들을 불렀다. 어쨌든 싸움에 이기고 돌아온 끝이라 여 럿에게 위로와 치하를 내리기 위함이었다.

물론 관도의 싸움에서 으뜸가는 공을 세운 것은 관우였다. 조조는 관우의 무예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운 뒤 여건을 돌아보았다. 

“전에 내가 군량과 마초를 앞세운 것은 문추를 잡기 위한 미끼를 놓은 것이었네. 오직 순공달(荀公, 순유)만이 알더군.”

뒤늦게 여건의 의문에 대답하는 조조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있 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탄복을 금치 못했다.

술자리는 그렇게 차차 무르익어갔다. 그런데 한창 흥이 오를 무렵 홀연 급한 전갈이 왔다.

“여남에서 황건의 잔당 유벽(辟)과 공도(都)가 몹시 험하게 날 뛰고 있습니다. 조홍이 여러 번 싸웠으나 이롭지 못해 군사를 보내 구해주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관우가 그 말을 듣기 바쁘게 일어나 말했다.

“바라건대 제가 개나 말의 수고를 맡아 여남의 도적들을 깨칠까합니다.”

“운장은 이번 싸움에 큰 공을 세웠으나 아직 이렇다 할 보답조차 못했는데 어찌 다시 힘든 싸움길에 나서려 하시오?”

조조가 공을 서두르는 관우에게 물었다. 어서 빨리 그로부터 입은 은혜의 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관우가 둘러댔다.

“이 관아무개는 오래 한가로이 지내면 반드시 병이 납니다. 한 번 더 몸을 풀어 병을 막을까 합니다.”

어떻게 들으면 오만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람에게 반한다는 게 원래 그러한지 조조에게는 조금도 역겹지 않았다. 오히 려 그런 관우의 호기에 어떤 믿음까지 가지며 그 자리에서 출전을 허락했다. 군사 오만과 아울러 우금과 악진을 부장으로 딸려 다음 날로 여남을 향해 가게 했다.

“관우는 언제나 유비에게로 돌아갈 마음뿐입니다. 만약 유비의 소 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가버릴 사람이니 자주 나가게 해서는 아니 됩 니다.”

조조가 너무 쉽게 허락하는 걸 보고 순욱이 몰래 조조에게 말했 다. 우금과 악진을 부장으로 딸려 보낼 만큼 그쪽으로도 전혀 살피 지 않은 조조는 아니었으나 순욱이 그렇게 말하자 뜨끔한 모양이었 다. 문득 미간에 한 가닥 주름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소. 이번에 한 번 더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다시는 싸우러 내보내지 않겠소이다.”

한편 여남에 이른 관우는 곧 영채를 세우고 싸울 태세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영채 밖에서 두 사람의 세작이 잡혔다는 전갈이 왔다. 끌려온 둘을 관우가 보니, 놀랍게도 그중에 하나는 손건이었 다. 관우는 급히 좌우를 꾸짖어 물리친 뒤 손건에게 물었다.

“공은 그때 서주가 무너진 후 어디로 갔는지 자취조차 알 길 없더 니 이제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시었소?”

“저는 겨우 몸을 빼쳐 나온 뒤 여남 땅을 떠돌아다니다가 다행히 유벽이 거두어주어 그에게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장군께서는 어떻게 하여 조조에게 가게 되었습니까? 또 감, 미 두 부인께서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아직 모르십니까?”

손건이 관우의 물음을 받고 그렇게 되물었다. 이에 관우는 그동안 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손건에게 일러주었다. 듣고 난 손건이 문득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근자에 들으니 현덕공은 원소에게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소식 을 듣고 그리로 가려 했으나 아직 마땅한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런데 다행한 일은 유벽과 공도도 원소에게 투항하여 함께 조조를 치 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를 이렇게 보낸 것도 이번에 장군께서 오신 다는 말을 듣고 그 뜻을 장군께 알리고자 함이었습니다. 내일 유벽 과 공도 두 사람은 거짓으로 싸움에 진척 달아날 것이니 장군께서 는 되도록이면 빨리 허도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가서 두 부인을 모시고 원소에게로 가면 거기서 현덕공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관우는 한동안 감격으로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 다가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어 말했다.

“이미 형님께서 원소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는 밤길을 달려서라도 반드시 그리로 갈 것이오. 그러나 한스런 것은 내가 안량과 문추를 베어 죽인 일이구려. 이번 일이 그 일로 어떻게 변할까 두렵소이다.”

“그것은 제가 먼저 가서 원소의 허실을 살핀 뒤에 다시 장군께 와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손건이 그런 말로 관우를 안심시켰다. 그러자 관우가 눈물이 글썽 한 얼굴로 다짐했다.

“형님의 얼굴을 다시 한번 뵈올 수 있다면 만 번 죽더라도 마다하 지 않을 것이오. 이번에 허도로 돌아가면 되도록 빨리 조조와 작별 하고 그리로 가리다.”

그리고 그날 밤 몰래 손건을 놓아 보냈다.

다음 날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싸움을 돋우니 유벽과 공도도 나란히 진문에 나와 섰다. 관우가 그런 둘을 꾸짖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조정에 반역하려 드느냐?”

“너는 주인을 배반한 놈이다. 그런데 오히려 나를 꾸짖으려 들다니 가소롭구나!”

공도가 거짓으로 관운장의 화를 돋우었다. 관운장도 짐짓 화난 듯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어떻게 주인을 배반했단 말이냐?”

“유현덕은 원본초에게 가 있는데 너는 그를 버리고 조조를 따르 고 있다. 그게 주인을 저버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자 관우는 대꾸 대신 칼을 휘두르며 말을 박차 달려 나갔다. 분통이 터져 더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공도는 그 엄청난 기세에 질렸다는 듯 한번 제대로 어울려보지도 않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관우가 말을 달려 그런 공도를 바짝 뒤쫓았다. 한참을 쫓 기던 공도가 문득 몸을 돌려 말했다.

“옛 주인의 은혜를 잊어서는 아니되오. 나는 이제 여남을 내줄 것이니 공은 속히 이곳을 평정하고 허도로 돌아가시오.”

그러고는 말을 후려 달아났다. 공도의 뜻을 알아차린 관우는 그를 쫓는 대신 군사들을 몰아 일시에 앞으로 나가게 했다. 그러자 유벽 과 공도의 군사들은 정말로 싸움에 크게 져 쫓기는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관우는 무사히 여남을 평정하고 그곳 백성들을 안돈시키자마자 허도로 군사를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조는 성 밖까지 나와 관 우를 맞아들이고 군사들에게는 후하게 상을 내려 노고를 위로했다. 조조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가 끝나자 관우는 거처로 돌아 가 여느 때처럼 안채 문 밖에서 두 형수에게 문안을 드렸다. 감부인 이 답을 하기 바쁘게 물었다.

“큰아버님께서는 두 번이나 바깥으로 싸움을 나갔다 오셨는데 도 아직 황숙의 소식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못 들었습니다.”

관우가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아마도 황숙께서 돌아가신 모양이구려! 큰아주버님께서는 우리 두 사람이 괴로워할까 봐 일부러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지요.”

두 부인이 문득 그렇게 말하며 통곡했다. 관운장은 듣기가 민망해 그 자리를 피했으나 두 부인은 오래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때 안채를 지키던 군사들 중에 관공을 따라 싸우러 갔다가 돌아온

늙은 군사 하나가 있었다. 두 부인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걸 보 고 문 밖에서 소리쳤다.

“두 분 부인께서는 그만 우십시오. 주인께서는 지금 하북의 원소에게 계십니다.”

“그대가 어찌 아는가?”

감부인이 울음을 그치고 물었다. 늙은 군사가 멋모르고 밝혔다.

“관장군을 따라 싸우러 나갔을 때 장군의 진채로 와 그렇게 일러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급히 운장을 불러들이게 했다.

“황숙께서는 아주버님을 저버린 적이 없으신데 아주버님은 이번 에 새로이 조조의 은덕을 입자 지난날의 의를 잊으신 모양이군요.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따지며 묻는 부인의 목소리는 꾸짖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제서야 관운장은 누군가 부인에게 사실을 이야기한 줄 알았다. 머리를 숙이 며 조용히 대답했다.

“형님께서 지금 하북에 계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분 형수 님께 알리지 않은 것은 이 일이 바깥으로 새어나갈까 두려워서였습 니다. 형님께로 가는 것은 때를 보아 천천히 도모해야지 급하게 서 둘러서는 아니 됩니다.”

그 말에 관운장의 깊은 뜻을 깨달은 부인도 성난 기색을 풀었다.

“그렇다면 아주버님께서 하신 일이 옳습니다. 마땅히 긴밀하게 처리하셔야지요.”

그렇게 말하며 부끄러운 빛까지 띠니 관운장도 비로소 근심을 거두고 물러났다.

관운장은 유비를 찾아갈 방도를 깊이 생각해보았으나 마땅한 계 책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공연히 마음만 어지러워 앉으나서나 불 안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 무렵 우금도 유비가 하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만히 조조에게 알리니 조조는 장요를 불러 관운장을 떠보게 했다. 명을 받은 장요는 그 길로 관우를 찾아가 불쑥 말했다.

“듣기로 형께서는 싸움터에서 현덕의 소식을 얻으셨다기에 이렇 게 하례를 드리러 왔습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관운장은 그 말을 듣자 놀랐다. 장요가 그 일을 알고 있다면 조조 또한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 감출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자 오히려 거리낌없이 속을 드러냈다.

“비록 옛 주인이 살아 계시다 하나 얼굴 한번 뵈옵지 못했으니 무엇이 기쁘겠소? 오히려 시름만 쌓일 뿐이오.”

“형과 현덕의 교분이 저와 형의 교분에 비해 어떠합니까?” 

관우가 솔직하게 속마음을 드러내자 장요도 말을 둘러 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이번에도 관우는 속말을 그대로 입밖에 내었다. 

“공과 나는 붕우의 교분이 있소. 그러나 황숙과 나는 붕우의 교분 에다 형제의 정이 겹치고 군신의 의까지 더했소. 어찌 더불어 비교가 되겠소이까?”

“그렇다면 이제 현덕이 하북에 있음을 알았으니 형께서는 그리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그렇소이다. 지난날의 말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소? 문원께서 마침 찾아오셨으니 부탁드리는 바지만 승상께 돌아가거든 이 뜻을 전해주시오.”

관운장은 오히려 장요가 찾아온 것을 조조에게 자기 뜻을 알릴 기회로 삼았다.

하릴없이 돌아간 장요는 곧 조조에게 관우의 뜻을 전했다. 한동안 어두운 얼굴로 말이 없던 조조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문득 표정을 밝게 고치며 말했다.

“알겠네. 내게도 생각이 있네. 꾀를 쓰면 그를 붙잡아둘 수도 있겠지.”

한편 장요를 보낸 관운장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두 부인과 많지 않은 수하들이나 그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은 홀몸으로 달려가 는 것보다 열백 배 어려운 일이었다.

“친구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문득 부리는 늙은 군사가 그런 관우를 깊은 생각에서 끌어냈다.

“들라 이르라.”

관우가 그렇게 불러들여 놓고 보니 전혀 낯선 사람이었다.

“공은 뉘시오?”

관우가 의아로운 눈길로 찾아온 손을 보며 물었다. 손이 목소리를 낮추어 자기를 밝혔다.

“저는 원공() 아래서 일하는 사람으로 이름을 진진(陳震)이라 합니다.”

그가 원소에게서 왔다는 말에 관우는 몹시 놀랐다. 곧 좌우를 꾸짖어 물리친 뒤에 또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선생께서 이렇게 오신 데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어인 일이십니까?”

“현덕공께서 보내신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진진은 그 말과 함께 편지 한 통을 내주었다. 관우가 뜯어보니 눈 에 익은 유비의 글씨였다.


‘이 유비와 그대는 지난날 도원에서 함께 죽기로 하였네. 그러나 이제 맹세는 어그러져 옛 은혜는 잊혀지고 의리는 끊어진 듯하이. 보기에 그대는 공명을 이루고 또 부귀를 얻기로 작정한 사람 같으니 바라건대 이 유비의 목을 가져가 큰 공을 이루도록 하게나! 어찌 몇 자 글로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펼칠 수 있겠는가. 다만 깊게 목을 늘여 그대의 명을 기다릴 뿐이네.’


그 같은 글을 읽자 관우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유비가 야속하 고 또한 진작 죽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큰 소리로 통곡하며 탄 식했다.

“제가 형님을 찾고자 아니한 것이 아니라 다만 계신 곳을 몰랐을 뿐입니다. 어찌 부귀를 구해 옛 맹세를 잊었을 리 있겠습니까?”

그러자 비로소 운장의 속마음을 확인한 진진이 은근하게 말했다. 

“현덕은 공을 그리는 마음이 이와 같고 공 또한 옛 맹세를 저버린 게 아니라면 어찌 이대로 계십니까? 얼른 하북으로 가서 뵙도록 하 십시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처음과 끝이 분명치 못하면 군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조조에게로 올 때가 뚜렷했으니 갈 때 또한 뚜렷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글 한 통을 써드릴 터 이니 번거로우시겠지만 공께서 먼저 가 형님께 전해주십시오. 나는 조조에게 작별을 고한 뒤에 두 분 형수님을 모시고 그리로 가서 형 님을 뵙겠습니다.”

관운장의 그 같은 말에 진진이 물었다.

“조조가 떠남을 허락지 않으면 어쩌시겠습니까?”

“내가 죽을지언정 어찌 이곳에 계속하여 머물겠습니까? 그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진진도 마음을 놓은 듯 말했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공께서는 어서 글을 써주십시오. 제가 현덕공께 전해 올리겠습니다.”

이에 관우는 붓을 들어 썼다.


‘듣기로 의로움은 진정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요, 충성스러움은 죽 음을 돌보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義不負心 忠不顧死]. 관우는 어려 서 책을 읽어 어렴풋이나마 예와 의를 아는 바 있으니, 저 양각애( 角哀)와 좌백도(左伯桃)의 옛일(둘 다 연나라 사람으로 친구였는데 함께 초나라에 가다가 큰 눈비를 만났다. 이에 좌백도가 가지고 있던 식량과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며 양각애를 떠나게 하고 자신은 빈 나무등걸에서 굶어 죽었 다)에 이르러서는 세 번이나 탄식하고 울었습니다.

전에 하비성을 지킬 때 안으로는 쌓아둔 곡식이 없고 밖으로는 구원 오는 군사가 없어 오직 싸우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 나 두 분 형수님의 목숨이 무거우니 함부로 제목을 끊고 몸을 내던 져 형님께서 저를 믿고 맡기신 뜻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잠시 굴 레 쓴 몸으로나마 살아남아 뒷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로 했던 것 입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여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형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곧 조조를 만나 작별을 고한 뒤 두 분 형수님을 모시고 그리로 돌아가겠사오니 만에 하나라도 저를 의심치 마십시오. 만약 제가 딴마음을 품었다면 귀신과 사람이 아울러 저를 죽여 간이 쪼개 지며 쓸개가 쏟아지게 할 것입니다. 종이와 붓으로 어찌 다할 수 있 겠습니까? 다만 절하며 뵈올 날이 가까우니 엎드려 비옵건대 부디 이 같은 관우의 진정을 밝게 살펴주십시오.’


관우가 쓰기를 마치고 글을 봉해 내어주자 진진은 깊이 간직하고 하북으로 돌아갔다.

진진을 보낸 관운장은 곧 안으로 들어가 유비에게서 사람이 온 일을 알린 뒤 조조가 있는 승상부로 갔다. 작별을 고하고자 함이었 다. 그러나 조조는 관운장이 그 일로 올 줄 알고 문앞에 회피패(回避 牌)를 높게 걸어놓고 있었다. 손님을 만나지 않겠다는 뜻이니 관운 장은 마음이 급했으나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조 만나는 일을 다음 날로 미룬 관운장은 우선 자신이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명하여 수레와 말을 준비케 했다. 그리고 집안 사람 들에게는 원래 가지고 온 것이 아니면 모두 남겨두고 특히 조조에게서 받은 것은 터럭 하나라도 가지고 가는 일이 없게 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관운장은 다시 조조의 부중을 찾았다. 감사와 아울러 작별을 고하려 함이었으나 문에는 여전히 회피패가 높게 걸려 있었다. 몇 번이나 거듭 찾아가도 조조는 끝내 만나볼 수가 없 었다.

관운장은 할 수 없이 장요의 집으로 가보았다. 그를 찾아보고 조 조의 일을 알아보려 했지만 장요 또한 병을 핑계로 나와 보지도 않 았다.

‘이는 틀림없이 조승상이 나를 보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 다. 하지만 이미 떠나기로 작정했는데 어찌 다시 머물 수 있으랴’ 관운장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거처로 돌아와 글 한 통을 썼 다. 직접 만나 작별을 고하는 대신 조조에게 남기는 글이었다.


‘관우는 젊을 적부터 황숙을 섬겨 죽고 살기를 함께하기로 맹세했 으니 하늘과 땅이 그 맹세의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지난날 하비성 이 떨어질 때 승상께 제가 세 가지 소청을 드린 바 있었는데 승상께 서는 은혜를 베풀어 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알아보니 옛 주인은 원소 의 군중에 있다 합니다. 지난날의 맹세를 생각해서라도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승상께서 새로 베풀어주신 은혜가 크나 잊기 어 려운 것은 지난날 황숙께 입은 은혜입니다. 이에 특히 글을 올려 작 별을 고하오니 엎드려 빌건대 부디 밝게 헤아려주십시오. 아직 다 갚지 못한 은혜 다른 날 갚게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쓰기를 마친 관운장은 사람을 승상부로 보내 그 글을 조조에게 바치게 했다. 그리고 조조로부터 받은 금은은 일일이 봉해 창고에 넣어두게 하고 한수정후의 인(印)은 당상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두었다.

“이제 두 분 형수님께서도 수레에 오르십시오.”

집 안팎 비질까지 깨끗이 끝난 뒤에야 관운장은 두 부인에게 그 렇게 청했다. 그리고 자신도 청룡도를 쥔 채 훌쩍 적토마에 뛰어올 랐다. 전부터 관운장을 따르던 군사들도 두 부인이 탄 수레를 호위 하며 그런 관운장을 따랐다.


『연의에서 가장 정채精) 있는 부분은 종종 정사에 없거나 지 은이가 꾸며낸 부분이 된다. 그런데 이 대목만은 정사에 일치하면서 도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천자 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조조의 정성을 다한 후대와 이미 손에 넣 은 것이나 다름없는 부귀와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무릎 꿇을 땅 한치 없이 남의 식객 노릇이나 하고 있는 옛 주인을 찾아 관우 는 멀고 험한 길을 떠나고 있다.

뒷날 사람들은 흔히 관우를 그릴 때 등 뒤에 세우는 청룡도와 함 께 손에 책 한 권을 들게 했다. 그 책은 바로 공자가 지어 난신과적 자들의 가슴을 서늘케 했다는 『춘추(春秋)』이다. 관우는 일생 그 책 을 지니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되풀이 읽었다고 하는데 명분을 존 중하고 대의를 앞세우는 그의 정신은 바로 거기서 길러진 것임에 틀 림이 없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그런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 유비를 찾아 떠나는 이 대목이 된다. 진정 아름답고 드높은 『춘추』의 향내였다. 아니, 관우 그는 『춘추』를 일관하는 정신의 한 살아 숨쉬는 화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