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11화 : 이제는 형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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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4권 – 11화 : 이제는 형주로


이제는 형주로

조조가 회군의 뜻을 말하자 좌우가 혹은 말리고 혹은 권했다. 그 래서 한참 그 일을 의논 중인데 문득 허도에 있는 순욱으로부터 글 이 왔다.


‘유비는 그동안 여남에 터를 잡고 유벽 공도의 무리와 함께 수만 의 군사를 길렀습니다. 그러던 중 승상께서 군사를 이끌고 하북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자 유벽에게 여남을 맡긴 뒤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섰습니다. 허도가 빈틈을 노려 손에 넣으려 함입니다. 지금 이곳 에 있는 군사와 저의 힘만으로는 막아내기 어려우니 승상께서는 급 히 군사를 돌리시어 이리로 돌아오도록 하십시오. 오직 승상께서 친 히 나셔야만 유비를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글을 본 조조는 놀랐다. 전부터 불안하게 여겨오던 일이 드디어 터진 것이었다.

‘유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내가 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조조는 조홍에게 군사 약간을 주어 하상(河 上)에 머물며 조조의 대군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허장성세(虛張聲勢) 를 하게 한 뒤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여남 쪽으로 달려갔다. 허도를 노리고 그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유비의 군사를 도중에서 막기 위함 이었다.

이때 유비는 순욱이 조조에게 알린 대로 관, 장두 아우와 조운(趙 雲)을 장수로 삼아 한창 허도를 향해 진병 중이었다. 군사가 겨우 양 산 부근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조조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끝까지 조조 모르게 허도를 칠 수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유비는 그토록 신속한 조조의 회군에는 적지 않이 놀랐다. 얼른 양 산 아래에 진채를 내리게 하며 관우, 장비에게 일렀다.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운장은 그 한 갈래를 이끌고 동남쪽에 다 진을 치고 익덕은 서남쪽을 맡으라. 나는 자룡과 함께 정남에 진 을 치고 조조를 맞으리라.”

이에 관우와 장비는 시킨 대로 각기 한 갈래의 군사를 이끌고 유 비 곁을 떠났다.

조조의 군사들은 유비가 진채를 다 꾸몄을 무렵 하여 그곳에 이 르렀다. 유비는 먼 길을 달려온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을 양으로 급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게 하며 군사들과 함께 진채를 나섰다. 조조도 얼른 진세를 벌이게 하는 한편 큰 소리로 유비를 불러냈다. 이제 와서 유비를 달래려 드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동안이라도 자 신의 군사들에게 숨 돌릴 틈을 주려 함이었다.

조조의 부르는 소리에 유비가 문기 아래로 말을 몰고 나왔다. 조 조가 채찍을 들어 유비를 가리키며 꾸짖었다.

“지난날 나는 너를 귀한 손으로 높게 대우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의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었느냐?”

그러자 유비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꾸했다.

“너는 한 승상이라 하나 이름뿐 실상은 나라의 큰 도적이다. 나는 한실의 종친으로 천자의 밀조를 받들어 나라를 훔치려는 역적을 치 러 왔다. 어디다가 의를 말하고 은혜를 내세우려 드느냐?”

그리고 말 위에서 지난날 천자가 의대(衣帶) 속에 감추어 동승에 게 내렸던 밀조를 꺼내 낭랑히 읽어갔다.

조조는 유비가 또 그 밀조를 꺼내 읽자 몹시 노했다. 시간을 벌어 어찌해보겠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급하게 허저를 불렀다. 

“너는 어서 나가 저 귀 큰 놈의 목을 가져오너라!”

명을 받은 허저가 말을 달려 나가자 유비의 등 뒤에서는 조운이 창을 꼬나들고 말을 박차 나갔다. 말과 말이 어우러지고 허저의 큰 칼과 조운의 창이 휘황한 무지개를 뿜어냈다. 그러나 둘 다 맹장 중 의 맹장이라 서른 합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홀연 동남쪽에서 크게 함성이 울리더니 한 떼의 군마가 조조의 군사들을 향해 휘몰아 왔다. 조조가 놀라 바라보니 앞선 장 수는 청룡도에 삼각 수염을 길게 휘날리는 관운장이었다. 관공은 조조의 군사들에게 숨 돌릴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싸움을 서둘렀다.

조조는 급히 군사를 갈라 관운장을 막게 했다. 그러나 틈을 주지 않고 다시 서남쪽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떼의 인마가 사납게 몰 려왔다. 이번에는 장비였다.

두 아우가 좌우에서 조조의 군사를 짓밟아가는 걸 보자 유비도 자신의 본진을 들어 조조를 쳤다. 잠깐 사이에 계략이고 뭐고가 필 요없는 마구잡이 싸움이 되자 조조는 당황했다. 결국 그렇게 되면 먼 길을 달려와 피곤한 자기편이 불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싸움은 조조가 걱정한 대로 되어갔다. 원소와의 오랜 싸움에 지친 데다 먼 길을 달려와 피로한 조조의 군사들은 끝내 유비군의 총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얼결에 당한 대패 였다.

유비는 첫 싸움에서 크게 이긴 뒤 일단 진채로 돌아갔다. 조조도 간신히 장졸들을 수습해 진채를 유지했다. 한판 싸움에는 졌으나 전 군(軍)이 뿌리째 뽑힐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 날이었다. 전날 싸움에 재미를 본 유비는 조운을 내보내 또 싸움을 돋우었다. 그러나 어떤 명을 받았는지 조조의 군사들은 꼼짝 도 않고 진채만 굳게 지킬 뿐이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조 운은 연신 군사를 이끌고 조조군의 진채 앞으로 나가 싸움을 돋우었 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조조군은 보름이나 되도록 진채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유비는 다시 장비를 시켜 싸움을 걸어보았다. 장비가 갖은 욕설을 다 퍼붓고 모욕을 주었으나 조조의 군사들은 여전히 굳게 지킬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유비는 더럭 의심이 났다. 군사를 쉬게 하기 위함이라기엔 너무 오랜 기간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조조가 허장성세로 자 신의 대군을 그곳에 묶어놓고 다른 짓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 지 않았다.

그런 유비의 뒤통수를 치듯 날아든 게 공도로부터 날아든 급보였 다. 유비군의 군량을 나르고 있던 공도가 조조군의 공격으로 포위되 어 있다는 것이었다. 조조는 유비의 세력이 생각보다 강한 걸 알자 이번에도 군량을 노려 어떤 계기를 만들어보려는 것 같았다.

“익덕은 어서 가서 공도를 구하라!”

유비가 급히 장비를 불러 그렇게 명을 내리는데 다시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하후돈이 우리 등 뒤를 돌아 지름길로 여남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합니다.”

유비는 더욱 놀랐다.

“만약 여남을 잃는다면 우리는 앞뒤로 적을 받아 돌아갈 곳조차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 탄식하고 다시 관우를 불러 여남을 구하게 했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루도 되기 전에 또 놀라운 소식이 잇달아 날아들었다.

“하후돈은 이미 여남을 깨뜨렸고 유벽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또 유벽을 구하러 갔던 관운장은 조조의 군사들에게 포위당 해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공도를 구하러 간 장비도 포위되어 구원을 청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놀라 어찌할 줄 몰랐다. 어려움에 빠진 두 아우를 급히 구 하러 가고자 해도 조조의 군사들이 등 뒤를 칠까 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때 다시 허저가 와 싸움을 돋운다는 말이 들어왔다. 그러 나 이번에는 오히려 유비가 나갈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기다리는 보름 동안에 그렇게 처지가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실로 눈부신 조조 의 용병(用)이었다.

조조의 계략에 걸려드는 것이 두려워 진채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유비는 날이 저문 뒤에야 가만히 군사를 움직였다.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뒤 보군을 앞세우고 마군을 뒤따르게 했다. 그리고 진채는 그대로 세워두어 약간의 군사들로 하여금 계속하여 북을 울리게 함으로써 대군이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꾸몄다.

하지만 실은 그게 조조의 계략에 떨어지는 길이었다. 몇 리 가지 않아 야트막한 토산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횃불이 환하게 비치며 산꼭대기에서 큰 고함 소리가 들렸다.

“유비는 달아나지 말라! 승상께서 여기서 기다리신 지 오래다.” 

그렇게 몰리고 보니 유비에게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을 리 없었 다. 적을 헤아려보지도 않고 허둥지둥 도망칠 길을 찾기에 바빴다. 조운이 곁에 있다 유비를 안심시켰다.

“주공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만 따라오면 별일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창을 휘두르며 말을 박차 한 줄기 길을 열었다. 유비도 그 제서야 힘을 내어 쌍고검을 빼들고 조운의 뒤를 따랐다.

조운과 유비가 한편으로는 싸우며 한편으로는 힘들여 길을 앗고 있는데 허저가 뒤쫓아 왔다. 조운은 허저를 맞아 힘을 다해 싸웠다. 그때 다시 우금과 이전이 허저를 도우러 달려왔다. 그렇게 되면 조 운이 비록 죽거나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해도 유비를 보호해줄 여유 까지는 없을 게 뻔했다.

유비는 형세가 몹시 위태로운 걸 보자 황망하고 낙담하여 그저 달아날 뿐이었다. 얼마를 달리다 보니 차차 함성이 멀어졌다. 유비 는 무턱대고 깊은 산과 외진 길만 골라 홀로 말을 달렸다. 그럭저럭 날이 밝을 무렵이었다. 돌연 한쪽 산허리에서 한 떼의 군마가 달려 나왔다. 유비는 조조의 군사들이 거기까지 따라온 줄 알고 놀라 바 라보았다. 뜻밖에도 유벽이었다. 패군 천여 명에다 유비의 가솔들을 이끌고 여남으로부터 달려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손건, 간옹, 미방 등도 함께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가?”

유비가 그들에게 물었다. 세 사람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하후돈의 군세가 너무 엄청나 성에 남은 군사로는 당할 길이 없 었습니다. 이에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데 조조군의 추격이 급하더군 요. 마침 관운장께서 오셔서 겨우 이렇게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운장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는가?”

유비가 걱정스레 묻자 이번에는 유벽이 대답했다.

“지금은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이 급합니다. 운장은 다음에 다시 만나시게 될 것이니 장군께서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 십시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유비를 재촉해 일행은 다시 가늠도 없는 길을 서둘렀다. 그러나 몇 리 가기도 전에 한차례 북소리가 울리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 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앞선 장수는 전에 원소 밑 에 있었던 장합이었다.

“유비는 얼른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유비를 알아본 장합이 기세 좋게 소리쳤다. 유비는 당해낼 수 없 다 여겨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때 산꼭대기에서 붉은 기가 펄럭하 자 이번에는 등 뒤 산마루에서 다시 한 떼의 인마가 뛰쳐나왔다. 앞 선 장수는 다름 아닌 고람이었다. 역시 장합과 더불어 원소 밑에 있 다가 조조에게 항복해 온 그는 이 기회에 큰 공을 세워야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앞뒤로 적을 맞게 된 유비는 이제 달아나려야 달아날 길도 없었 다. 문득 하늘을 우러르며 크게 소리쳐 탄식했다.

“하늘은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이토록 궁색함을 겪게 하시는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구나.”

그러고는 칼을 빼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했다. 유벽이 그런 유비를 급히 말렸다.

“결코 가볍게 목숨을 버리셔서는 아니 됩니다. 제가 죽기로 싸워 길을 앗아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말을 박차고람에게로 달려갔다. 그렇지만 가상스런 것은 의기와 충성일 뿐 유벽의 무예는 고람을 따르지 못했다. 고람 과 창칼을 맞댄지채세에 이르기도 전에 유벽은 고람의 한칼에 찍혀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곁에 있던 사람들 중에 유일한 무장(武將)이랄 수도 있는 유벽이 그 모양으로 죽는 걸 보자 유비는 더욱 창황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에 칼 을 뽑아들고 다가오는 고람을 기다렸다. 이제는 고람을 막아줄 만한 장수가 자기 곁에는 아무도 없는 만큼 스스로 싸워 목숨을 지킬 작 정이었다.

그때 홀연 고람의 뒤쪽이 어지러워지더니 한 장수가 군사들을 흩 어버리며 뛰쳐나왔다. 똑바로 고람을 향해 말을 달려간 그 장수가 번듯 창을 쳐들었다 내지르는가 싶자 고람이 몸을 뒤집으며 말 아래 로 떨어졌다. 단창에 고람을 꿰어버린 솜씨가 여간 아니었다.

천 길 낭떠러지를 굴러내리다 굵은 나뭇가지를 잡아쥔 듯 유비가 놀란 중에도 반가운 눈길로 보니 그 장수는 바로 조운이었다. 허저 와 이전, 우금 세 장수의 포위를 뚫고 주군을 구하러 그곳까지 달려 온 것이었다. 유비는 조운을 보자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조운은 그 대로 이리저리 말을 달리며 창을 휘둘러 고람의 군사들까지 흩어버 린 뒤에야 유비 곁으로 달려왔다.

그때 앞에 있던 장합이 군사를 몰아 덮쳐왔다. 조운은 다시 장합 과 어울렸다. 장합 또한 조운의 적수가 못 돼 간신히 서른 합을 버티 고는 말을 돌려 달아났다. 승세를 탄 조운은 그대로 장합을 뒤쫓으 며 그 졸개들을 짓밟았다. 그러나 장합의 군사들이 좁은 산어귀에 의지해 지키는 바람에 길을 뚫고 나가기가 어려웠다.

조운이 한창 길을 앗기 위해 이리 받고 저리 치고 있을 때 저편에 서 문득 함성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바로 관우와 관평, 주창이 이끄는 삼백 군사이었다. 조운과 관우가 양쪽에서 힘을 합쳐 몰아치자 장합의 군사들도 마침내 견뎌내지 못했다. 병목 같은 산어 귀를 내놓고 달아나니 유비의 군사들은 간신히 위태로운 지경을 벗 어나 험한 산비탈에 진채를 내렸다. 겨우 한숨을 돌린 유비가 관우 를 불렀다.

“관우는 익덕을 찾아보도록 하게. 자네와 같은 날 공도를 구하러 간 뒤로 소식이 없네.”

문득 장비가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걱정이 되기는 관우도 마찬가 지여서 그는 유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장비를 찾으러 나섰다. 이때 장비는 참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었다. 원래 공도를 구 하러 떠났던 장비가 목적한 곳에 이르니 이미 공도는 하후연에게 죽 음을 당한 뒤였다. 화가 꼭뒤까지 치솟은 장비는 하후연을 들이쳐 내쫓고도 속이 안 풀려 계속 뒤쫓다가 오히려 악진이 이끄는 군사들 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관우가 장비의 소식을 들은 것은 바로 그 포위를 간신히 뚫고 나온 장비의 졸개들에게서였다.

관운장은 질풍같이 군사를 몰아 장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리고 힘을 다해 악진을 들이치니 마침내 악진은 포위를 풀고 달아나 버렸다. 장비를 구해 유비에게로 돌아가자 유비가 두 아우를 잡고 울며 말했다.

“하늘이 아직 이 유비를 버리시지는 않은 모양이다. 너희 둘이 모두 성하니 내 무슨 걱정이 있으랴!”

이때 다시 군사 하나가 달려와 급한 목소리로 알렸다.

“조조의 대군이 뒤쫓아 오고 있습니다.”

이에 놀란 유비는 손건으로 하여금 늙은이와 아이들을 보호해 먼저 떠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관, 장두 아우와 조운을 데리고 뒤 에 처져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 달아나는 방법으로 조조의 추격을 면 했다.

조조는 유비가 멀리 달아나버린 걸 알자 군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떻게든 유비를 사로잡아 뒷날의 걱정거리를 없애려 했 는데도 끝내 놓쳐버린 게 분했다.

이에 조조는 사방으로 군사를 풀어 유비의 자취를 쫓게 했다. 이때 유비는 비록 조조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났으나 남은 군사는 겨우 천 명도 되지 못했다. 그 몇 달 유벽 공도의 무리와 더불어 애 써 길러놓은 수만의 군사가 조조와의 한 싸움에 산산조각이 나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아까워할 틈도 없이 달아나는데 문득 앞에 큰 강이 하나 가로막았다. 부근에 사는 주민을 불러 물어보니 한강 (漢江)이라는 대답이었다.

유비는 거기서 잠시 군사를 쉬게 하기로 하고 진채를 내렸다. 조 조가 쫓아오기에는 너무 멀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때 이미 유비의 이 름은 궁벽한 그곳까지도 알려져 있었다. 주민들은 말로만 듣던 유황 숙이 이른 걸 알고 양고기와 술을 바쳐 위로했다.

유비는 그 고기와 술로 물가 모래벌 위에 술자리를 벌이고 장수 들과 함께 마셨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유비가 문득 어두운 얼굴로 탄 식했다.

“자네들은 모두 한 나라의 임금을 도울 만한 재주를 가졌으되 불 행히도 이 유비는 그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되네. 오히려 궁색한 내 운수가 자네들에게까지 미쳐 이제는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 으니 참으로 자네들을 그르칠까 두려울 뿐이네. 그런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고 밝은 주인을 찾아가 공명을 취하지 않는가?” 

때가 때인지라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소매로 얼굴을 가 리며 울었다. 생각하면 유비를 따른 이래로 고달프기만 했던 신세도 한탄스러웠지만, 그 못지않게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주는 유비가 야 속스럽기도 했다.

그때 관우가 일어나 항변하듯 유비에게 말했다.

“형님의 말씀은 옳지 못합니다. 지난날 고조께서 항우와 천하를 다툴 때에 여러 번 그에게 졌으나, 구리산(九里山)싸움에서 한 번 이기심으로써 사백 년 기업을 열 수 있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에게 매양 있는 일이거늘 형님께서는 어찌 스스로 크신 뜻을 낮 추고 계십니까?”

실로 헌걸찬 관우의 말이었다. 그 말에 좌중은 처연한 가운데도 생기를 되찾았다. 손건이 관우의 말을 받듯 한 의견을 내놓았다. 

“일의 성패란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반드시 상심하실 까닭은 없 습니다. 마침 형주가 여기서 멀지 않으니 그리로 가보는 게 어떻겠 습니까? 유경승(劉景升)은 그곳에 앉아 아홉 주에 세력을 펴고 있는 데 군사는 강하고 양식은 넉넉합니다. 거기다가 또 그는 주공과 마 찬가지로 한실의 종친이 되는 바 어찌 이럴 때 가서 의지해보지 않 으십니까?”

하지만 유비로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본심이야 어떠했 건 자신이 처음에는 공손찬의 부장(副將)으로 알려졌다가 다시 여포에게로 옮겨가고, 또 조조 아래 있다가 원소에게로 옮겼다는 게 다른 사람 눈에 좋지 않게 여겨질 건 뻔했다.

“그가 나를 받아줄지 걱정이오.”

유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걱정은 돼도 달리 갈 곳도 없는 처지 라 당장은 손건의 말에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 건이 자신 있게 말했다.

“제가 먼저 가서 달래보겠습니다. 반드시 유경승이 멀리 경계 밖 까지 나와 주공을 맞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비로소 유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허튼소리를 하는 손건이 아님을 잘 아는 유비가 마음이 놓인 것이었다.

유비의 허락을 받은 손건은 밤새 말을 달려 형주로 갔다. 유표가 있는 곳에 이르러 보기를 청하니 유표가 허락했다.

“그대는 현덕을 따르는 사람인데 무슨 일로 이곳에 오게 되었소?”

손건을 불러들여 그렇게 묻는 유표는 이미 예순에 가까운 늙은이 였다. 강하팔준(江夏八俊)의 한 사람으로 한때는 범 같은 손견까지 죽일 만큼 위세를 떨쳤으나 그도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유 비에 대한 감정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 이 되는 난세라고는 해도 유표는 아직 유비와는 창칼을 맞댄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다같이 한실의 종친이라는 것에서 온 막연한 친근감 이 있을 뿐이었다.

손건이 목청을 가다듬어 대답했다.

“우리 유사군(劉使君)께서는 천하가 다 아는 영웅으로 비록 군사 는 약하고 장수는 적으나 기울어지는 사직을 잡으시려는 뜻만은 어느 누구에게도 못지않으십니다. 이에 여남의 유벽과 공도는 전부터 친히 지낸 사이가 아니면서도 우리 사군의 뜻을 받들어 목숨까지 내 던졌던 것입니다. 더구나 명공과 우리 사군은 다같이 한실의 피를 받은 종친들이니 기우는 사직을 함께 붙드는 것은 누가 보아도 당연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저는 새로이 조조에게 져서 강동의 손 권에게 의탁하려는 사군을 말려놓고 이리로 달려온 것입니다. 친한 이를 곁에 두고 멀리 있는 낯선 이에게 의지하러 가는 것은 옳지 않 을 뿐더러 장군께서는 어진 선비를 예로 대하셔서 천하의 물이 동으 로 모이듯 뭇 선비들이 형주로 모인다는 말을 이미 듣고 있었기 때 문입니다. 남에게도 그러하실진대 하물며 동종(同宗)간인 우리 사 군께이겠습니까? 그랬더니 우리 사군께서는 특히 저를 뽑아 먼저 명공을 찾아뵙고 그 명을 받들라 하셨습니다. 부디 깊이 헤아리시어 이번 일이 저희 사군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명공께도 좋은 기회가 되 도록 하십시오.”

손건의 말이 끝나자 유표가 기꺼운 얼굴로 대답했다.

“유현덕은 내 아우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오. 오래전부터 한번 만 나고자 하였으나 어찌된 셈인지 인연이 닿지 않았을 뿐이외다. 이제 다행히 이리로 온다니 실로 기쁘기 짝이 없소.”

물론 유표가 유비를 반긴 데는 인간적인 호감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난세의 군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피치 못할 정 치적 배려도 있었다. 조조가 원소의 힘을 다한 공격을 받고서도 오 히려 큰 승리를 거뒀다면 북방은 이미 조조의 손아귀에 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남쪽이 아니겠는가.

남쪽이라면 손꼽을 만한 세력으로는 자신과 강동의 손권이 있다. 그러나 조조가 먼저 칼끝을 들이댈 곳은 일의 이치로 보나 지리로 보 나 틀림없이 형주일 것이다. 이때 유비 같은 인물을 받아두면 적지 않이 도움이 된다. 비록 세력은 크지 않으나 그래도 지금 천하에서 감히 조조에게 맞서고 있는 그가 아닌가. 그게 유표의 생각이었다. 그때 유표의 장수인 채모()가 유비를 헐뜯어 말했다. 

“아니 됩니다. 유비는 먼저 여포를 따르다가 다시 조조를 섬기고 또 요즈음에 와서는 원소에게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사람도 끝까지 섬기지 않았으니 그 믿지 못할 사람됨을 넉넉히 알 만합니 다. 만약 이제 명공께서 그를 받아들이신다면 조조는 반드시 큰 군 사를 이리로 보낼 것이니 형주는 곧 원치 않은 싸움에 말려들고 말 것입니다. 이는 명공뿐만 아니라 형주의 백성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 이 못됩니다. 먼저 손건을 목 베 조조에게 바치도록 하십시오. 그리 하면 조조는 주공을 두터이 대접할 것이며 아울러 형주의 백성들도 죄 없이 도륙됨을 면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름대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차피 조조와 천 하를 다툴 힘이 없을 바에야 일찌감치 조조와 화친해 일신이나 보존 하자는 생각이었다. 손건이 정색을 하고 꾸짖듯 채모의 말을 받았다.

“이 손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그러나 지난 일을 들먹여 우 리 사군을 헐뜯으니 할 말은 해야겠소이다. 우리 유사군께서는 충심 으로 나라를 위하는 분이니 조조나 원소, 여포 따위와는 비할 인물 이 아니외다. 전에 잠시 그들을 따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 그들이 불의, 불충함을 알고는 이내 떠났던 것이오. 더구나 이제 우리 사군께서는 형주의 유장군께서 한조의 후예로 동종이 됨을 믿고 천리를 달려 의지하러 온 것이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근거 도 없이 헐뜯는 말로 어진 이를 이토록 시기하시오?”

그러자 채모의 말에 잠깐 섬뜩했던 유표가 이내 원래의 생각으로 돌아가 도리어 채모를 꾸짖었다.

“이미 내 뜻은 정해졌으니 여러 소리 말라. 너는 나를 어찌 보고 그리 함부로 떠드느냐?”

이에 채모는 부끄러움과 아울러 한을 품은 채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대는 먼저 가서 유현덕에게 내 뜻을 전하시오. 나도 채비가 되 는 대로 그를 마중하러 가겠소.”

유표는 다시 그렇게 이르며 손건을 보내고 자신도 몸소 성 밖 삼 십 리까지 나와 유비를 맞았다.

간혹 유비를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 중에는 그가 끊임없이 친구 와 적을 바꾸는 걸 들어 그 교활이나 반복무쌍함을 나무란다. 실제 로도 그것이 꼭 주종 관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비는 일생을 통해 적어도 대여섯 번은 의지했던 사람을 배반에 가까운 형식으로 버리 고 있다. 그러나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는 누구에게나 반갑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점이다. 여포가 겨우 주인 을 두 번 바꾸고 표리부동한 사람으로 가는 곳마다 배척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유비의 오고 감이 그와는 달랐으리라는 짐작은 가능하 다. 다시 말해 조조나 원소, 여포 등과 맺었던 관계는 떠나도 배신을 따질 수 없을 만큼의 어떤 동맹 관계거나, 아니면 유비가 떠나도 비 난받을 쪽은 언제나 상대방이었다는 뜻이 아닐는지. 그리하여 새로 맞는 쪽으로 보면 그의 과거에 대한 꺼림칙한 감정보다는 오히려 그가 이끄는 집단의 유별난 결속력이 반가웠던 것이 아니었는지. 성 밖까지 나와 자신을 맞는 유표에게 유비는 더할 나위 없이 공 손한 태도로 예를 올렸다. 유표는 더욱 마음이 흡족하여 역시 유비 를 상빈(上)으로 두텁게 대했다. 유비는 예가 끝난 뒤 다시 관우와 장비, 조운, 간옹 등을 불러 차례로 유표에게 절을 올리며 보게 했 다. 몇 안 되지만 유표는 범 같은 그들을 보자 자신까지 든든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날 유비와 나란히 성안으로 들어온 유표는 그 일행 모두에게 집과 노비를 내어주고 성안에서 함께 살게 했다. 이에 고단했던 유 비의 일행은 형주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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