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13화 : 오주 드디어 결전의 탁자를 베다
오주 드디어 결전의 탁자를 베다
노숙이 물러난 뒤에도 한동안을 홀로 앉아 있던 손권은 이윽고 몸을 일으켜 안채로 들어갔다. 워낙 중대한 결정이라 그것이 매듭지 어지지 않았으니 밥맛이나 잠자리가 제대로일 리가 없었다. 수저를 드는 둥 마는 둥하고 이부자리에도 길게 누워 있지 못했다.
그러나 낮에 공명에게 잘라 말할 때와는 달리 마지막 결단은 쉽 게 내려지지 않았다. 선택의 길이 있다는 게 손권에게는 오히려 혼 란의 원인이 되었다. 함부로 변화에 기대를 걸지 않고 아홉의 낙관 보다는 단 하나의 비관에 더 많은 배려를 보내는 그의 성격으로 보 면 조조와의 결전은 참으로 피하고 싶은 모험이었다.
자기 한 몸의 굴욕으로만 끝난다면 항복의 형식이라도 못할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역시 부형(兄)과 자신 삼대에 걸쳐 이룬 대업이 자신의 대에 이르러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이 들면 조조와의 화친은 천리만리 생각에서 멀어졌다. 거기다가 소 문으로 들은 형주 유종(劉琮)의 운명도 그에게는 섬뜩한 경계가 되 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어두운 얼굴로 뜰안을 오락가락하는 손 권을 보고 작은어머니인 동시에 이모이기도 한 오국태(吳國)가 물 었다.
“너는 마음에 무슨 걱정이 있길래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리 서성 거리느냐.”
“지금 조조는 강한까지 군사를 거느리고 와 있는데, 아무래도 우 리 강남을 엿보는 것 같습니다. 문무의 관원들을 모아놓고 의논하였 던바, 어떤 이는 싸우자 하고 어떤 이는 항복하자 하여 주장이 갖가 지로 어지럽습니다. 저도 맞서 싸우자니 힘이 모자랄까 걱정되고, 항복하자니 조조가 끝내는 지금대로 우리를 놓아두지 않을까 두렵 습니다. 그 일을 얼른 결정하지 못해 이리 마음이 무겁습니다.”
손권이 마음속의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자 오국태가 손 권을 깨우쳐주듯 말했다.
“너는 어찌 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당부한 말을 잊었느냐?”
그 말을 들은 손권은 문득 술에서 깨어난 듯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걸 한 번 더 분명하게 해주려는 오국태가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님께서 돌아가실 적에 나라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물어서 하고 바깥일은 주유에게 물어서 하란 말씀을 남기셨다. 조조에게 항 복하고 안하고는 안에서 문신들의 말 몇 마디만 듣고 정할 일이 아닌 성싶다. 어찌하여 주공근(周公瑾)을 불러들여 물어보지 않느냐?”
손권은 오국태의 말을 기꺼이 따랐다. 깜박 잊고 있었지만 주유라 면 옳은 결정을 내려줄 것 같았다. 그날로 사람을 파양으로 보내 주 유를 불러오게 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주유는 파양을 떠나 손권에게로 오고 있었다. 그곳에서 수군을 훈련하고 있다가 조조의 대군이 한수가에 이르 렀단 말을 듣고 밤길을 달려 시상으로 오는 중이었다. 조조의 뜻을 짐작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손권과 의논하려 함이었다.
손권이 사자를 미처 떠나보내기도 전에 시상에 이른 주유는 먼저 노숙을 찾아갔다. 여럿 중에서도 노숙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 그로부 터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알아둔 뒤 손권을 만나려는 생각에서였다. 노숙은 조금도 숨김없이 그간에 있었던 일을 주유에게 자세히 일 러주었다. 다 듣고 난 주유가 조용히 말했다.
“자경(敬)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 주유에게도 생각이 있소 이다. 되도록이면 그 공명이란 사람이나 빨리 만나게 해주시오. 먼 저 그를 만나본 뒤에 주공을 뵈어야겠소.”
그 말을 들은 노숙은 그 자리에서 말에 올라 공명에게로 달려갔 다. 주유가 그동안이라도 좀 쉴 양으로 몸을 편히 쉬려는데, 장소, 장 굉, 고옹, 보질 네 사람이 주유를 만나러 왔다.
주유와 손권의 사이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이라 주유가 어느 쪽을 편들지를 미리 알아두고 싶어서였다.
주유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맞아들여 자리를 마주했다. 오래 떨어져 있다가 만난 사람들끼리의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기 바쁘게 장소가 입을 열었다.
“도독께서는 이번 일이 우리 강남에 이롭고 해로운 점을 모두 알고 계십니까?”
“잘 알지 못합니다.”
주유는 자기 속마음을 조금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그 같은 어조를 아직 주유의 뜻이 굳혀지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인 장소가 은근히 끌어들이듯 말했다.
“조조는 백만 대군을 이끌고 한상에 이르러 우리에게 격문을 보 내왔소이다. 주공께 강하에서 모여 함께 사냥을 하자는 내용이었소. 설령 이 땅을 삼키려는 뜻이 있을지 모르나 아직은 전혀 그것을 드 러내지 않고 있어 우리는 주공께 항복을 권했소. 그렇게 하여 잠시 화친이라도 맺어지면 강동이 화를 입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여겨서 였소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경이 강하로 건너가 유비의 군사(軍 師)인 제갈량을 데리고 왔소. 그는 우리의 힘을 빌려 조조에 대한 분 함을 씻어볼 양으로 우리 주공을 격동시켜 강동을 조조와의 싸움에 끌어넣으려 하고 있소이다. 거기다가 자경 자신도 곁에서 그를 도우 니 아직 주공께서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시오. 아마도 도독께 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려 이 일을 매듭지을 작정이신 것 같소이다. 그래, 도독의 뜻은 어떠시오?”
그러나 주유는 대답 대신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공들의 뜻도 모두 여기 이 자포(布)와 같소?”
“그렇습니다. 의논해본 바 일시 항복하는 체라도 하는 것이 강동을 보존하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고옹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러자 주유는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소리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실은 나 또한 항복을 생각한 지 오래다. 공들은 이만 돌아가시 오. 내일 아침 주공을 뵙고 의논을 정하겠소이다.”
장소를 비롯한 네 사람은 주유의 그 같은 대답에 힘이 났다. 이제 일은 자기들의 주장대로 매듭지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주유에게 감 사하고 물러났다.
한참 있으려니 이번에는 정보, 황개, 한당 셋을 앞세운 한 떼의 장 수들이 주유를 찾아왔다. 모두 강동의 손가(家)를 위해 피흘리며 싸운 사람들이었다. 주유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여 좋은 말로 그 들의 수고로움을 위로했다. 주유의 위로가 끝나기 바쁘게 정보가 물 었다.
“도독께서는 이 강동 땅이 오래지 않아 남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시오?”
적지 않이 격해 있는 목소리였다. 그 뜻을 짐작하지 못할 바 아니 나 주유는 짐짓 낯빛을 고치지 않고 대답했다.
“모르오이다.”
“우리는 손장군께서 창업의 기초를 다질 때부터 그 뒤를 따르며 크고 작은 싸움을 수백 번이나 치러 겨우 강동 여섯 고을의 성과 땅 을 차지할 수 있었소. 그런데도 지금 주공께서는 모사들의 말만 듣 고 조조에게 항복하려 하니 이는 참으로 부끄럽고도 애석한 일이오. 우리들은 싸우다 죽을지언정 욕을 보아가며 살지는 않겠소. 바라건 대 도독께서는 주공께 권해 군사를 일으켜 싸우는 쪽으로 계책을 정하도록 해주시오. 우리들은 다만 죽도록 싸워 더럽힘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뿐이외다.”
무장에 가까운 주유에게는 찌릿한 감동까지 주는 비장기가 서린 목소리였다. 그러나 주유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정보를 따라온 나머 지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장군들의 소견도 모두 같으시오?”
• “이 머리는 자를지언정 조조에게 항복할 수는 없소!”
그들 가운데서 황개가 나서서 손으로 이마를 치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도 입을 모아 황개와 뜻을 같이했다.
“우리도 모두 항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주유는 또 장소의 무리를 내보낼 때와 같이 그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는 체했다.
“나도 지금이 바야흐로 조조와 한바탕 결전을 치러야 할 때라 여 겼소. 항복이라니 어디 될 소리요? 그러니 장군들은 이만 돌아가주 시오. 이 주유는 주공을 뵙는 대로 장군들의 생각에 따라 의논을 정 해보도록 하겠소.”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한 입으로 두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보를 비롯한 장수들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또 제갈근과 여범을 앞세운 한 떼의 문관들이 주유를 찾아왔다. 주유는 그들도 반갑게 맞아들였다. 오랜만에 만난 예가 끝난 뒤 제갈근이 입을 열었다.
“제 아우 제갈량이 한상으로부터 와서 유예주가 우리 동오와 동맹을 맺고 함께 조조를 치고자 한다는 말을 전하기에 문무의 관원들이 모여 그 일을 의논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결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우가 바로 사신이 되어 온 터라 감히 여러 말을 하지 못 하고 다만 도독께서 오셔서 이 일을 매듭짓기를 기다려왔습니다. 도 독께서는 뜻이 어떠하신지요?”
이미 장소를 비롯한 문관들의 주장과 정보를 앞세운 무관들의 주 장을 고루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주유는 또 시치미를 뗐다. 아무것 도 아는 게 없는 양 오히려 제갈근에게 물었다.
“공론은 어떠합니까?”
“항복하면 쉽게 평안함을 얻을 수 있으나 싸운다면 지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제갈근이 들은 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주유는 가볍게 웃으며 여전 히 자신의 속마음을 밝히기를 미루었다.
“이 주유에게도 먹은 마음이 있소. 내일 모두 함께 모여 일을 매듭짓도록 합시다.”
결국 제갈근을 비롯해 함께 찾아왔던 사람들 또한 주유의 속뜻을 모르는 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있으려니 또 한패의 사람들이 주유를 보러 왔다. 여몽과 감 녕을 앞세운 젊은 장수들이었다. 주유는 그들도 반갑게 맞아들이고 앞서와 다름없이 속을 떠보았다. 어떤 이는 항복하자 하고 어떤 이 는 싸우자고 뻗대는데 모두 나름대로 근거를 내세웠다. 그들이 시끄 럽게 서로의 주장을 펴는 걸 듣고 있던 주유가 이윽고 말했다.
“여기서 이러니 저러니 여러 말로 떠들 건 없소이다. 내일 주공을 모시고 함께 모여 결정하면 될 것이오.”
그렇게 되니 여몽을 비롯한 젊은 장수들도 하릴없이 주유 앞을 물러났다. 주유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연신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위기를 만나서도 확고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의지의 오만 인지 또는 혼란되어 우왕좌왕하는 동료들에 대한 비웃음인지 모를 냉소였다.
노숙이 공명을 데리고 주유를 보러 온 것은 여몽, 감녕의 무리가 나가고도 한참 뒤였다. 주유는 중문까지 나가 그들을 맞아들였다. 예를 마치고 주인과 손님이 각기 자리를 정해 앉은 뒤 노숙이 먼저 주유에게 물었다.
“이제 조조가 무리를 모아 남으로 밀고 내려오니 화친하자는 쪽 과 싸우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어 주공께서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장군의 뜻을 한번 듣고 결정을 내리시려는 바, 장 군의 뜻은 어떠하십니까?”
그러자 주유는 앞서 동오의 문무 관원들을 만날 때와는 전혀 달 리 대답했다.
“조조는 천자의 이름을 빌고 있으니 그 군사에 맞서서는 안 될 것 이오. 거기다가 그 세력까지 커서 가볍게 맞서 싸울 수도 없소이다. 다시 말해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이고 항복하면 평안할 것이오.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내일 주공을 만나뵙고 급히 사자를 보내 항 복을 받아들이게 할 작정이외다.”
뜻밖의 말에 노숙은 놀라 입이 절로 벌어졌다. 다 생각이 있다더 니 그게 겨우 항복하자는 뜻이었던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격한 목소 리를 냈다.
“공근의 말씀이 틀렸소. 강동의 기업은 이미 삼대를 지난 것이거 늘 어찌 하루 아침에 남에게 내줄 수 있겠소? 지난날 백부, 손책 의자)께서 돌아가실 때 바깥일은 장군께 당부하시는 말씀을 남기셨 소. 강동은 이제 장군을 의지하기를 태산 의지하듯 하여 나라를 보 전하려 하는데 장군께서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실 수 있단 말이오? 무 슨 까닭으로 겁쟁이들의 의견을 좇아 이 땅을 역적에게 들어다 바치 려 하는 거요?”
그러나 주유는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차게 들릴 만큼 낮고 또렷하게 노숙의 말을 받았다.
“강동 여섯 고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숨붙이가 깃들이고 있소. 그런데 이 땅에 싸움을 끌어들여 그들의 목숨을 해친다면 원 망도 모두 내게로 돌아오지 않겠소? 그 때문에 항복하는 계책을 주 공께 권하기로 결정한 것이오.”
“그렇지 않소. 장군 같은 영웅이 있고 또 적을 막기 좋은 지세의 험난함이 우리 동오에는 갖추어져 있소. 조조는 결코 쉽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리라!”
노숙이 한층 결기 어린 목소리로 주유의 말을 받았다.
그래도 주유는 여전히 제 뜻만을 고집했다. 따라서 자리는 한동안 주유와 노숙의 입씨름으로 이어졌다. 공명은 소매에 손을 집어넣고 차게 웃으며 그런 주유와 노숙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선생은 어찌하여 웃고만 계시오?”
주유가 문득 그런 공명을 자기들의 얘기에 끌어들였다.
“양은 다른 사람을 웃은 게 아니라 바로 자경이 세상 형편에 어두운 걸 웃었소이다.”
제갈량이 그렇게 대답했다. 노숙이 들으니 또 알지 못할 소리였 다. 마땅히 자기를 편들어줄 줄 알았던 공명이 자기더러 오히려 세 상 물정에 어둡다니 기막히지 아니한가. 이에 이번에는 공명에게 따 지듯 물었다.
“선생은 무슨 까닭으로 오히려 나를 시무)에 어둡다 하십니까?”
“공근께서 조조에게 항복하려는 것이 심히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 이외다.”
제갈량이 눈 한번 깜박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노숙이 기가 막혀 입만 벌리고 있는데 주유가 넉살좋게 공명의 말을 받았다.
“공명은 실로 시무를 아는 분이오. 틀림없이 나와 뜻이 같겠소이다.”
원래 주유가 노린 것은 노숙이 아니라 공명이었다. 이번에는 자신 이 공명을 격동시켜 볼 양으로 겉과 속이 엇나가는 소리를 짐짓 해 대는데 공명은 걸려들지 않고 노숙만 핏대를 세우고 있어 할 수 없 이 제 쪽에서 공명을 끌어들여본 것이었다. 하지만 공명이 걸려들기 는커녕 오히려 자기를 편들고 나서니 은근히 속이 켕겼다.
‘역시 녹록한 무리가 아니로구나……’
주유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노숙이 뒤늦게야 공명에게 대들었다.
“공명, 그대가 어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이오?”
적지 않이 분이 오른 목소리였다. 그러나 공명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주유를 보고 제 할 말만 했다.
“조조는 매우 군사를 잘 부려 천하에 그를 당해낼 사람이 없소. 지난날 여포, 원술, 원소, 유표 등이 감히 그에게 맞섰으나 지금은 모 두 조조에게 멸망당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소이다. 다만 유예주 혼 자만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강한 조조와 맞서 싸우다가 지금은 강하 에서 외로운 몸이 존망조차 기약 없이 되어 있을 뿐이오. 그런데 이 제 장군께서는 조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니 넉넉히 처지를 보 전하고 또 부귀도 잃지 않게 되겠소이다. 나라가 바뀌고 망하는 거 야 천명에 달린 것이니 굳이 애석해할 게 무엇이겠소?”
거꾸로 주유를 격동시키는 소리였다. 주유가 맘에 없이 항복하기를 주장하는 체했다 해도 그 말을 듣고는 불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먼저 성난 소리를 내지른 것은 주유가 아니라 노숙이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그대는 우리 주인에게 역적 앞에 무릎 꿇는 욕을 권할 작정이었던가!”
정작 노리는 주유는 가만히 있는데 노숙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자 공명은 생각을 달리했다. 예삿말로는 주유를 격동시킬 수 없다 여 겨 진작부터 주유를 겨냥하고 마련해 간 모진 말을 슬며시 꺼냈다.
“꼭히 그렇게 생각하실 건 아니외다. 어리석으나마 내게 한 계책 이 있으니 그대로 따라만 주신다면 구태여 양을 잡고 술을 걸러 차 려 받들고 땅과 인수를 바치러 강을 건너실 필요가 없소. 사자 한 사 람을 뽑은 뒤 조각배에 두 사람만 싣고 강을 건너가게 하시오. 조조 가 만약 그 두 사람만 얻게 된다면 그의 백만 대군은 절로 갑옷을 벗고 기치를 싸말아 물러날 것이외다.”
대답은 노숙을 보고 한 것이었으나 과연 먼저 나선 것은 주유였 다. 주유는 공명의 그 엄청난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급한 물음을 던지고 말았다.
“그 두 사람이 누구요? 누구기에 그 두 사람만을 써도 조조의 군 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오?”
“강동으로 보면 그 두 사람이 간다 해도 큰 나무에서 잎새 하나 떨어지고 너른 창고에서 좁쌀 하나 집어내는 격밖에 되지 않을 것이 오. 그러나 조조가 얻으면 크게 기뻐하여 반드시 군사를 돌릴 사람 들이지요.”
공명은 얼른 두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아니하고 그렇게 주유의 궁금증만 돋우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두 사람이 누구누구란 말씀이오?”
주유가 한층 달아 공명에게 거듭 물었다. 그제서야 공명은 못 이 긴체 대답했다.
“양이 융중에 있을 때 조조가 장하河)에다 새로 동작대(銅雀 臺)란 대를 쌓았다는 말을 들었소. 몹시 크고 화려하게 치장한 누대 인데 그 안에는 천하의 미녀들을 가려뽑아 채웠다 했소. 조조가 원 래 여자를 좋아하는 무리라 있을 법한 일이기는 하지만 특히 그 일 을 말씀드리는 것은 이곳 강동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조는 오래전부터 강동의 교공喬公)에게 두 딸이 있어 큰 딸은 대교(大喬)요, 작은 딸은 소교(小喬)라 불리는데, 한가지로 고기가 물 에 잠기고 기러기가 모랫벌에 내려앉는 것 같은 자태에 달이 빛을 잃고 꽃이 오히려 부끄러워할 만한 얼굴을 지녔다는 말을 들어왔다 하오. 그래서 서원(誓願)하기를 나의 큰 바람 하나는 사해(四海)를 쓸어 제업(業)을 이루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강동 교공의 두 딸을 얻어 동작대에 두고 만년을 즐기는 일이니, 이 둘만 이루어진다면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였다는 것이오. 지금 조조는 비록 백 만의 무리를 이끌고 강동을 노려보고 있으나 실은 그 두 여인을 얻 고자 함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교공을 찾아 천금을 주고 그 두 딸을 사서 조조 에게로 보내지 않으시오? 조조는 그 두 여인만 얻으면 원래 마음속 에서 구하던바를 다 얻은 셈이라 반드시 군사를 돌려 물러갈 것이외 다. 이것은 바로 지난날 범려(范蠡, 월왕 구천의 모신)가 오왕(吳王)에 게 서시(西施, 월의 미녀)를 바친 것과 같은 계책이니 되도록이면 빨 리 시행하도록 하시오.”
공명은 그래 놓고는 능청스레 주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유 또 한 손책이 죽어가면서 강동의 바깥일을 맡긴 사람, 공명의 몇 마디 말에 바로 걸려들지는 않았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 겉으로는 별다른 기색 없이 공명에게 물었다.
“떠도는 말을 어찌 다 믿겠소? 조조가 이교(喬, 대교와 소교)를 얻 고 싶어 하는 다른 증거가 있다면 대보시오.”
“조조의 아들 중에 식(植)이 있는데 자를 자건(子建)이라 쓰며 제 법 문장을 이루었소. 조조는 일찍이 식에게 명해 「동작대부(銅雀臺 賦)」를 쓰게 한 적이 있는 바 그 속에 바로 저희 집안이 천자의 집안 이 되는 것과 이교 얻기를 서원한 게 있소이다.”
공명의 그 같은 대답에도 주유는 여전히 아무런 내색 없이 묻기만을 거듭했다.
“그 「동작대부」인가 뭔가 하는 부를 공은 외고 있소?”
“그 문장이 하도 화려하고 아름답기에 사랑하게 되어 일찍부터 외워두고 있소이다.”
“주유의 속마음을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공명 또한 대수롭지 않은 일 말하듯 그렇게 한가로운 대답을 했다. 그리고 주유가 한번 들려 주기를 청하자 목소리를 가다듬어 읊기 시작했다.
밝은 임금을 좇아 노닐음이여 從明后以嬉游兮
높은 대에 오르니 정취 더욱 즐겁다. 登層臺娛
태부 넓게 열려 있음이여 見太府之廣開兮
성덕이 황송함을 본다. 觀聖德之所營
높이 세운 문 불쑥 솟아 있고 建高門之嵯峨兮
두 대궐 푸른 하늘에 뜬 듯하다. 浮雙闕平太情
중천에 서서 황홀하게 보니 立中天之華觀兮
서성부터 공중누각이 잇대었구나. 連飛閣平西城
장수의 긴 흐름을 끼고 臨漳水之長流兮
멀리 동산의 과일 영그는 걸 바라본다. 望園果之滋營
두 대를 좌우에 벌려 세우니 立雙臺於左右兮
옥룡과 금봉일세. 有玉龍與金鳳
이교를 동남에서 끌어와 攬二喬於東南兮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기리라………… 樂朝夕之與……………
공명이 거기까지 읊어갔을 때였다. 주유가 더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조 이 늙은 역적 놈이 너무 나를 욕뵈는구나!”
주유는 불길이 이는 눈길로 조조가 있는 북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원래 조식의 「동작대부에는 ‘두 다리[二橋]를 동서에 놓아 잇고 [連二橋於東西兮]인 것을 공명이 ‘교씨(喬) 집 두 딸을 동남에서 끌 어와서’로 슬쩍 바꾸고 그다음에는 생판 없는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기리라’는 구절까지 집어넣은 것이었다. 일부러 남의 글까지 바꾼 것으로 보면 분명 그걸로 노린 게 있었으나 공명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고 주유의 속을 한 번 더 뒤집어놓았다. 놀란 얼굴로 일 어나 주유를 말리며 능청스레 묻는 것이었다.
“지난날 흉노족이 자주 국경을 침략하니 한의 천자는 공주를 그 우 두머리에게 시집 보내며까지 화친을 했소이다. 그런데 장군은 어 찌하여 지금 한낱 백성의 두 딸을 가지고 이토록 애석해하십니까?”
그러자 주유가 버럭 소리 질러 대답했다.
“공은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시오. 대교는 곧 돌아가신 손백부 손책)의 부인이시고 소교는 바로 이 주유의 아내 되는 사람이다.”
바로 공명이 노린 것이 그것이었다.
강동의 대단찮은 선비까지 출신 내력을 훤히 알고 있는 공명이 어찌 손책과 주유의 그 유명한 혼사를 모르겠는가.
다만 알면서 그 일을 가지고 주유를 격동시키려 들기에는 민망한 구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 효력도 줄어들까 싶어 짐짓 모르는 체했을 뿐이었다.
“양이 참으로 그걸 알지 못하고 잘못 어지러운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실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갈량은 펄펄 뛰는 주유에게 거짓으로 두렵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죄를 빌었다. 그러나 주유가 워낙 성이나 제갈량을 의심할 틈이 없었다. 이를 갈며 다만 조조를 한할 뿐이었다.
“내 맹세코 그 늙은 역적 놈과는 한 하늘을 이지 않으리라!”
그런 주유를 보고 마음을 놓은 제갈량이 한 번 더 성난 범의 콧등 을 튀겼다.
“그렇지만 그와 싸우고 안 싸우고의 결정은 나라와 백성들에게 아울러 몹시 크고도 무거운 관련이 있습니다. 세 번 생각하시어 뒷 날에 뉘우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나는 죽은 손백부로부터 뒷일을 당부받은 사람이오. 어찌 조조 따위에게 몸을 굽혀 항복할 까닭이 있겠소? 다만 지금까지 항복을 말해 온 것은 여럿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서였을 따름이외다. 나는 이미 파양호를 떠날 때부터 북으로 치고 올라갈 마음을 먹고 있었 소. 비록 칼과 도끼가 머리에 떨어진다 해도 이 뜻은 변함이 없을 것 이오. 바라건대 공명도 한 팔의 힘을 빌려주시어 함께 조조를 깨뜨 리도록 합시다.”
먼저 공명을 격동시켜 무언가를 얻어보려던 처음의 뜻은 깨끗이 잊고 깨끗이 속마음을 드러내는 주유의 말이었다. 분노가 지나쳐 주 유가 오히려 차게 가라앉는 걸 보고 공명도 더는 말과 뜻을 비틀지 않 았다. 문득 엄숙한 얼굴로 주유를 바라보며 진정 섞어 말을 받았다. “장군께서 버리시지 않는다면 개나 말의 힘일지라도 아끼지 않겠 습니다. 머지않아 적을 내쫓을 계책을 듣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내일 주공을 들어가 뵈옵고 곧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겠소.”
주유는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다짐해 밝히고 공명과 노숙을 내보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날이 밝기 바쁘게 손권은 문무의 관원들이 기 다리는 대청으로 나가 당에 올랐다. 왼편으로는 장소와 고옹을 비롯 한문관 삼십여 인이 늘어서고 오른편으로는 정보와 황개를 비롯한 무관 삼십여 인이 늘어섰는데 한결같이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엄숙 하게 칼을 찬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오래잖아 주유가 들어와 손권에게 예를 하자 손권은 주유에게 위 로의 말부터 건넸다. 주유는 손권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바로 현 안에 들어갔다.
“요사이 듣자니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한상에 이르러 이곳에 항 복을 권하는 글을 보내왔다는데, 거기에 대해 주공의 뜻은 어떠하십 니까?”
그러자 손권은 자신의 뜻을 밝히기에 앞서 조조에게서 온 격문을 가져다 주유에게 보여주었다. 다 읽고 난 주유가 차갑게 웃으며 말 했다.
“늙은 역적 놈이 우리 강동에는 사람이 없는 줄로 여기는구나. 어 찌 감히 이토록 우리를 깔본단 말이냐!”
“그렇다면 장군은 어찌했으면 좋겠소?”
주유의 태도를 보고 손권이 도리어 물었다. 그러나 주유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주공께서는 그동안 문무의 관원들과 의논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연일 이 일을 의논했으나 어떤 이는 항복하자 하고 어떤 이는 싸 우자 하여 한가지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소. 그 때문에 공근을 불 러 단번에 결정을 지으려는 것이오.”
“항복을 권하는 이들은 누구누구였습니까?”
주유는 뻔히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장자포를 비롯한 몇 사람들이 그리 뜻을 밝혔소.”
그러자 주유는 이번에는 장소를 돌아보며 전날 이미 들은 까닭을 한 번 더 물었다.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항복을 주장하게 된 까닭을 들려주시오.”
“조조는 천자를 끼고 사방을 치는데 움직일 때는 반드시 조정을 받는다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거기다가 또 근래에는 형주를 얻어 위 세가 더욱 커졌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원래 우리 강동이 조 조에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장강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형주가 조조에게 떨어짐으로써 그 장강을 조조와 나누게 되고 크고 작은 싸움배도 천 척이 넘게 그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조조 가 뭍과 물로 군사를 몰아오는데 어찌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잠 시 항복을 하고 뒷날을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
하지만 장소에게 뜻밖인 것은 그 말에 대한 주유의 대꾸였다. 전 날의 그 은근함은 간 곳 없이 날선 목소리로 주유가 말했다.
“실로 미덥지 못한 선비의 소리구려! 강동은 나라를 연 이래 이미 삼대가 지났소이다. 어찌 하루아침에 삼대의 공업(功業)을 없애버린 단 말씀이오?”
“이 계책 말고도 달리 길이 있단 말이오?”
듣고 있던 손권이 슬몃 장소를 대신해 주유에게 되물었다. 주유가 대쪽을 쪼개는 듯한 기세로 말했다.
“조조가 비록 이름은 한의 승상이나 실은 한의 흉악한 도적입니 다. 그에 비해 주공께서는 군사를 부림에 귀신 같고 영웅의 재질을 갖추신 데다 부형께서 남겨주신 기업에 의지하고 계십니다. 군사는 날래고 양식도 넉넉한데 어찌하여 떳떳하게 천하를 주름잡으며 나 라를 위해 난폭한 무리를 없애려 하지는 않으시고 오히려 역적에게 항복한단 말씀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지금 조조는 비록 많은 군사 를 이끌고 왔다 하나 여러 가지로 병가)에서 꺼리는 일들을 많 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북쪽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 마등과 한수가 근심거리로 남아 있는데도 오래 남쪽을 치고 있는 것이 그 첫째요, 북쪽 군사는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데 말[馬]을 버리고 배에 의지해 동오와 싸우려드는 게 그 둘쨉니다.
또 한창 추운 겨울철에 군사를 움직여 군마를 먹이고 재우는 데 쓰이는 풀이 없는 게 그 셋째요, 멀리 중원의 군사를 남쪽의 강호로 끌고 와 기후 풍토와 물이 맞지 않은 까닭에 병이 많이 날 것이니 그것이 넷째입니다. 조조는 이와 같은 군사를 부리는 사람이면 누구 나 꺼릴 일을 한꺼번에 몇 가지나 어기고 있습니다. 비록 데리고 온 군사가 많다 해도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니 주공께서 조조를 사로잡 을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오늘입니다. 이 주유에게 정병 수천만 주신 다면 그들과 더불어 하구로 나아가 주공을 위해 조조의 대군을 깨뜨 려 보이겠습니다.”
실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요 땅을 뒤집을 듯한 배포였다. 그리고 동시에 손권이 은근히 애태워 기다리던 대답이기도 했다. 드디 어 마음속에 뚜렷한 결단을 얻은 손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조 그 늙은 역적 놈이 한을 없애고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앉으 려 마음 먹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두 원씨와 여포, 유표 그리고 이 몸 이 두려워 감히 그러지 못했다. 이제 다른 영웅들은 모두 죽고 오직 이 몸만 남았으되 맹세코 이 몸은 그 늙은 역적과 함께 살기를 바라 지 않으리라! 마땅히 조조를 쳐야 한다고 말한 경의 말은 바로 이 몸의 뜻과 같다. 경은 실로 하늘이 이 몸에게 내리신 사람이다!”
“저는 이미 주공을 위해 한바탕 혈전을 다짐했으니 만 번 죽더라 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두려운 바는 주공께서 지나친 의 심으로 결단을 정하시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주유가 손권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쐐기를 박았다. 그러자 손권 은 차고 있던 보검을 뽑아 앞에 놓인 탁자[]모서리를 베며 소리 쳤다.
“문관이든 무장이든 두 번 다시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말을 꺼내 는 자는 이 탁자처럼 될 줄 알라!”
행동으로 자신의 매서운 결의를 보여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보검을 주유에게 넘겨주고 조조를 맞아 싸울 장렬(將列)을 정했다. 곧 주유를 대도독으로 삼아 전군을 거느리게 하고 정보를 전부도독, 노숙은 찬군교위(贊軍校尉)로 삼은 것이었다.
“문무를 막론하고 명을 어기는 자는 이 칼로 베시오.”
그 같은 손권의 영과 함께 보검을 받은 주유는 곧 여러 벼슬아치를 돌아보며 엄숙히 말했다.
“나는 주공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깨뜨리려 한다.
여러 장수와 벼슬아치들은 모두 내일 아침 강가의 군영으로 나와 영 을 받들도록 하라. 늦거나 어기는 자가 있으면 칠금령(禁)과 오 십사 참(斬)의 법에 따라 처단하리라!”
그런 다음 손권에게 감사하고 몸을 일으켜 부중을 나가니 나머지 문무의 벼슬아치들도 그 서슬에 눌려 입도 한번 떼보지 못하고 흩어 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살펴보고 싶은 것은 동오가 조조에게 항전하 기로 결정하는 데 제갈량이 한 정사에서의 역할이다.
제갈량이 손권의 결의를 다져준 것은 정사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고 노숙과의 관계도 대강은 맞다. 그러나 동오의 여러 선비들과 차례로 설전을 벌여 그들을 굴복시킨 것이나 이교의 일로 주유를 격 동시킨 것은 모두 『연의』를 지은 이가 꾸며낸 듯하다. 제갈량을 미 화하고 과장하려는 의도는 넉넉히 알 만하나 주유쯤이 되면 아무래 도 억울할 성싶다. 주유가 원래 용렬한 위인이 아닌데 제갈량의 몇 마디 말에 격해 국가의 대사를 감정에 따라 결정한 것으로 되고 만 까닭이다. 실상 동오의 항전, 한 걸음 더 나아가 적벽(赤壁)싸움의 빛나는 승리는 주유에게 으뜸가는 공이 돌아가야 함을 밝힌다면 그 의 넋이라도 위로가 될까.
어찌 됐건 조조와 맞서 싸우는 것으로 동오의 국론을 결정한 주 유는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공명을 청해 들였다. 이제는 한편이 되어 싸우게 된 그와 더불어 앞일을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공명이 오자 주유가 먼저 의논을 꺼냈다.
“오늘 부중에서 여럿의 논의는 이미 하나로 모아졌소. 바라건대 조조를 깨뜨릴 좋은 계책이 있거든 들려주시오.”
“손장군의 마음이 아직 굳혀 있지 않은 듯하니 아직 계책을 결정하기 어렵겠소이다.”
마땅히 자신의 말을 듣고 기뻐할 줄 알았는데 공명이 그렇게 대 답하자 주유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주공의 마음이 아직 굳혀 있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마음속으로 아직 조조의 군사가 많음을 겁내 혹시 적은 군사로 당해내지 못할까 의심하고 계실 것이오. 장군께서 조조의 군사가 실 상은 대단치 않음을 일러주시어 그분의 의심부터 먼저 풀어주도록 하시오. 그런 뒤라야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오.”
공명은 마치 손권의 속을 들여다보고 온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비록 차고 있던 칼까지 내어주며 자신의 결단을 밀어준 손권이었으 나 주유도 공명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미심쩍은 것이 있었 다. 결국 조조와의 결전을 내세운 것은 주유 자신이었으며, 손권은 행동으로 뒷받침했으나 얼굴에는 어딘가 한 가닥 어두운 기색이 있 었던 걸 그제야 떠올렸다.
“선생의 말씀이 옳은 듯하오. 내 먼저 주공을 뵈온 뒤에 돌아오겠소.”
이윽고 주유는 그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
주유가 손권을 보러 가니 손권이 의아로운 얼굴로 맞으며 물었다.
“공근이 저물어 찾아온 걸 보니 반드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구 려. 그래, 무슨 일로 오시었소?”
“내일 군사와 말을 내려 하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서 왔습니다. 주공께서는 아직도 마음속에 의심을 품고 계시지 않으 신지요?”
주유가 공명에게 들었다는 표정 없이 손권에게 바로 물었다. 손권 이 머뭇거리다 털어놓은 듯 말했다.
“실은 조조의 군사가 많아 우리의 적은 군사로 당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오. 그밖에야 달리 무슨 의심나는 일이 있겠소?”
그러자 주유가 밝게 웃으며 손권을 안심시켰다.
“바로 이러실 것 같아 제가 특히 주공을 뵈러 온 것입니다. 아는 대로 그 걱정을 풀어드리지요. 주공께서는 조조가 보낸 격문을 보신 까닭으로 거기서 말한 대로 군사가 백만이 되는 줄만 믿고 계십니 다. 그 참과 거짓을 다시 한번 헤아려보시려고는 않으시고 걱정하고 두려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가만히 헤아려보면 조조가 중원에서 이끌고 온 군사 는 기껏해야 십오륙만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도 이미 오래 지친 군사 들입니다. 또 원씨를 멸망시키고 얻은 군사가 있다 하나 역시 칠팔 만을 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 조조를 믿고 따르지 아니합니다. 무릇 오랫동안 지쳐 있는 군사와 주인을 믿고 따르지 않는 군사는 비록 그 수가 많다 해도 크게 두려워할 바가 못 됩니다. 이 주유에게 군사 오만만 주신다면 넉넉히 깨뜨릴 수 있으니 바라건대 주공께서 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국 조조는 기껏해야 이십만 남짓의, 그것도 성치 않은 군사를 몰고 온 것에 지나지 않은 셈이었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야 있겠지 만 그 말을 듣자 손권은 적이 마음이 놓였다.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유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공근의 말을 들으니 마음속의 의심이 눈 녹듯 스러지는구려. 자 포를 비롯한 무리는 헤아림이 모자라 이 몸의 바람을 크게 저버렸으 나 오직 장군과 자경 두 사람만이 내 마음을 알아주었소. 장군은 자 경, 정보와 아울러 어서 군사를 가려 뽑아 조조를 맞으러 나아가시 오. 나는 이어 군사와 말을 더 뽑고 군기(軍器)와 양식을 넉넉히 마 련하여 장군의 뒤를 받치리다.
만일 장군이 거느린 전군이 싸움에서 뜻대로 되지 않거든 얼른 되돌아와 이 몸이 거느린 군사와 합치도록 합시다. 그때는 이 몸이 스스로 앞장서 조조와 결판을 낼 것이오. 이 몸에게 다시는 아무런 의심이 없을 것이니 장군은 부디 마음 놓고 싸우도록 하시오.”
낮에 탁자 모서리를 쪼갤 때보다 더 확고한 손권의 태도였다. 그 제서야 안심한 주유는 손권에게 감사하고 그 앞을 물러나왔다. 그러 나 막상 손권을 안심시키고 나자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명이었다.
‘공명은 가만히 앉아서도 우리 주공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실로 놀라운 안목이요, 나를 한 수 앞지르는 재주다. 그러나 그는 결국 유 비의 사람, 오래잖아 반드시 우리 강동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우 리 손에 들어와 있을 때에 죽여버리는 게 낫겠다.’
주유의 생각은 이윽고 그렇게 돌아갔다. 그러나 혼자서는 바로 공명을 죽일 수 없어 먼저 노숙을 불러들이고 의논했다. 밤중에 불려온 노숙은 주유로부터 공명을 죽여야겠다는 말을 듣자 펄쩍 뛰었다.
“아니 되오. 아직 조조를 깨뜨리기도 전에 공명 같은 어진 선비를 죽여서는 크게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오. 그를 돌려보내 우리를 돕 게 해야 하오.”
“하지만 그가 돌아가 유비를 돕게 되면 뒷날 반드시 우리 강동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외다.”
주유가 다시 그렇게 자기 뜻을 고집했다. 그러자 노숙은 문득 목 소리를 낮추어 달래듯 말했다.
“지금 우리 막빈으로 와 있는 제갈근은 바로 그의 친형이오. 그를 시켜 공명을 달래 함께 동오를 섬기게 한다면 그 아니 묘하겠소?”
주유도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공명을 죽이려는 것이 사 감(感)에서가 아니라 강동을 위해서였던 만큼 그를 살려 강동에 도움이 되도록 할 길이 있다면 구태여 죽일 까닭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