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4화 : 장강엔 다시 거센 물결이 일고
장강엔 다시 거센 물결이 일고
유비가 서천으로 들어가 가맹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소식은 오래 잖아 손권의 귀에도 들어갔다. 놀란 손권은 곧 문무 관원들을 모아 놓고 앞일을 물었다. 고옹이 일어나 말했다.
“유비가 군사를 나누어 멀고 험한 길을 떠났으니 돌아오기 또한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먼저 군사 한 갈래를 서천으로 드 는 길목으로 보내 그가 돌아오는 길을 끊어버리신 뒤 동오의 군사를 모두 일으켜 형주와 양양으로 밀고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이는 실로 그 땅을 되찾을 둘도 없는 기회이니 결코 헛되이 잃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 참 좋은 계책이오!”
손권도 속으로 그런 생각을 아니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고옹에게서 들으니 더욱 그럴듯했다. 이에 고옹을 추켜주고 다시 군사를 낼 의논을 하고 있는데 문득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이 크게 소리쳐 꾸짖으며 나왔다.
“아니 된다! 누가 이따위 계책을 냈느냐? 그자를 목 베도록 하라. 그자는 내 딸의 목숨을 해치려는 자다!”
그 소리에 놀라 모두 바라보니 그 사람은 바로 오국태부인이었다. “나는 평생에 딸 하나를 얻어 유비에게 시집 보냈다. 그런데 이제 너희들이 유비를 상대로 군사를 움직이면 내 딸의 목숨은 어찌 되란 말이냐?”
오국태부인은 한 번 더 여럿을 꾸짖고는 손권을 향했다.
“너는 아버지와 형의 기업을 물려받아 앉아서 강동 여든한 고을 을 다스리게 되었으면서도 아직도 모자란다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작은 이익으로 피붙이를 저버리려 드느냐?”
손권에게는 아버지 쪽으로 보면 어머니의 하나요, 어머니 쪽으로 보면 이모인 오국태부인이었다. 거기다가 평소에 국태부인을 깍듯 이 모시는 손권이라 그녀의 노여움을 대하자 어찌할 줄 몰랐다. 기 어드는 목소리로 오국태부인을 진정시킬 뿐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만 깜박 잊었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늙으 신 어머님의 가르치심을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러고는 뭇 관원들을 꾸짖듯 내보냈다. 손권이 그렇게 하자 오국 태부인도 더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태 도에는 두고 보겠다는 빛이 역력했다.
엉겁결에 그렇게 일을 마무리짓기는 해도 손권은 역시 천하를 다투는 한 무리의 주군이었다. 어머니 때문에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운 호기를 놓치게 된 게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고 어느 날에 형주를 얻으란 말인가…….”
그런 생각에 잠겨 말없이 찌푸리고 앉았는데 장소가 들어와 물었다.
“주공께서는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조금 전의 일을 생각하니 답답해서 이러고 있소.”
그러자 장소가 미리 생각한 게 있는 듯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 일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쉬운 길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손권이 활짝 펴지는 얼굴로 물었다.
“믿는 장수 한 사람을 뽑아 오백 군사를 이끌고 형주로 몰래 들어 가게 하십시오. 가서 군주, 손부인)께 밀서를 전하며 국태부인의 병이 위중하여 죽기 전에 따님을 한번 보고 싶어한다고 일러주게 하 십시오. 그러면 군주께서 틀림없이 따라나설 것이니 밤을 틈타 우리 동오로 모셔오게 하면 됩니다. 거기다가 군주께서 돌아오실 때 유비 의 하나 있는 자식 아두를 데려오게 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모르긴 해도 유비는 아두와 형주를 맞바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유비가 그걸 거절한다 해도 이미 군주를 모셔 오셨으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다 해도 거리낄 게 무엇이겠습니까?”
장소가 그렇게 대답했다. 손권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그것 참 좋은 계책이오! 마침 내게 주선(周善)이란 사람이 있는데 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담장을 넘고 벽을 뚫어 남의 집으로 숨어드는 재주가 뛰어났소. 또 오랫동안 우리 형님을 따라다 닌 사람이라 믿을 수도 있으니 그를 보내도록 합시다.”
손권이 그렇게 말하자 장소가 받았다.
“이 일은 결코 밖으로 새나가서는 아니 됩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그를 보내도록 하십시오.”
이에 손권은 그날로 주선을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는 군사 오백을 데리고 형주를 다녀오도록 하라. 군사들은 모두 장사치로 꾸며 배 다섯 척에 나눠 태우고 가되 배 안에는 병기 를 넉넉히 감춰두어야 한다. 몰래 형주로 들어가서는 내가 거짓으로 써준 글을 내밀고 내 누이동생을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라.”
그리고 몇 가지 주선이 형주에 이른 뒤에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명을 받은 주선은 곧 물길을 타고 형주로 가서 배와 군사들은 물 가에 놓아두고 혼자서만 성안으로 들어갔다.
“강동에서 온 사람이오. 손부인께 전할 말이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 알려주시오.”
손부인의 거처에 이른 주선은 문을 지키는 군사에게 말했다. 그 전갈을 받은 손부인은 재촉하듯 주선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시 집 간 아낙에게 친정 쪽의 사람이란 항상 반가운 손님이게 마련이지 만, 방금 유비가 멀리 서천으로 떠난 뒤라 그 적막감이 더욱 주선을 반겨 맞아들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부인을 만난 주선은 소매에서 글 한 통을 꺼내 올렸다. 국태부인이 위독하다는 거짓말이 담긴 글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손부인은 친정 어머니의 목숨이 오늘내일 한다는 말에 눈물부터 흘 렸다.
“그래, 그대는 무슨 일로 이렇게 몸소 찾아오셨소?”
울면서도 그저 편지 한 장 전하는 일이라면 주선 같은 사람이 직 접 올 리 없다는 데 퍼뜩 생각이 미친 손부인이 문득 물었다. 주선이 때를 놓치지 않고 대답했다.
“국태께서는 병이 위중해지시면서부터 아침저녁으로 오직 부인만 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만약 부인께서 더디 가셨다가는 생전에 서로 만나뵙게 되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태께서는 외 손자의 얼굴도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보기를 원하고 계시니, 부인께 서는 이번에 아두 아기씨까지 데리고 가셔서 할머니와 손자도 만나 보게 하십시오. 저는 부인께서 강동으로 가시는 길을 조금이라도 편 케 하고자 특히 이렇게 왔습니다.”
“하지만 황숙께서는 지금 군사를 이끌고 멀리 나가 계시오. 내가 강동으로 가려면 그전에 사람을 시켜 군사(軍師)에게 알린 뒤에라야 갈 수 있소.”
유비가 없으면 제갈공명에게라도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뜻이었 다. 주선이 그런 손부인을 보고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만약 제갈량의 대답이 ‘먼저 황숙께 알려 황숙의 말씀이 있어야 만 배를 내어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나오면 어쩌시겠습니까? 국 태께서는 오늘내일 하시는데 부인께서는 이곳에서 한가하게 기다리 시고만 있을 작정이십니까?”
“그래도 말하지 않고 떠났다가는 반드시 그들이 길을 막고 보내주지 않을 것이오.”
손부인이 아직도 얼른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시집가기 전의 남자 못지않게 씩씩하던 기상은 간 곳이 없었다. 주선이 다시 손부인을 부추겼다.
“물가에는 제가 거느리고 온 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한 나절 안에 강동까지 갈 수 있습니다. 얼른 수레에 올라 성 을 나가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듣자 손부인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나뿐인 늙은 어 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데 누군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손부인은 곧 수레를 불러 일곱 살 난 아두를 데리고 올랐다. 수레 뒤 에는 주선을 비롯한 서른 명 남짓의 군사들이 각기 칼을 차고 말에 올라 따랐다.
형주성을 빠져나간 손부인 일행은 곧 동오의 배와 군사들이 기다 리는 물가로 달렸다. 부중 사람들이 그 일을 알고 공명에게 알리려 할 무렵 손부인은 벌써 사두진에 이르러 기다리고 있던 배에 오른 뒤였다.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자 주선은 신이 났다. 얼굴에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며 힘차게 영을 내렸다.
“닻을 올려라! 어서 돌아가자.”
그 말에 분주히 닻을 거둔 군사들이 배를 막 동오 쪽으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문득 강 언덕에 한 장수가 나타나 크게 소리쳤다.
“배를 잠시 멈추어라! 부인께 드릴 말씀이 있다.”
모두가 놀라 돌아보니 그 장수는 조운이었다.
주선이 손부인과 몰래 만나 동오로 돌아갈 일을 꾀하고 있을 때 조운은 마침 초소를 돌아보느라 성안에 없었다. 그러다가 손부인 일 행이 성을 나간 뒤에야 돌아와 그 소리를 들었다. 크게 놀란 조운은 미처 군사를 모을 틈도 없이 너댓 명만 뒤딸린 채 말 위에 뛰어올라 바람같이 강가로 달려 나온 길이었다.
조운을 알아보지 못한 주선이 긴 창을 짚고 자못 위엄을 떨치며 소리쳤다.
“너는 누구길래 감히 주모(母, 주군에 짝 되는 호칭)의 앞길을 막고자 하는가?”
그러고는 졸개들을 재촉해 배를 띄우게 하는 한편 감추어둔 무기 를 꺼내들고 뱃전에 줄지어 서게 했다.
바람은 알맞고 물살은 빨라 동오의 배들은 거침없이 강남을 바라 고 흘러내려 갔다. 그런 배들을 강을 따라 뒤쫓으며 조운이 거듭 소 리쳤다.
“부인께서 가실 때 가시더라도 저의 한마디만 듣고 가십시오.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도 주선은 들은 체를 않고 노 젓기만을 재촉했다. 십여 리나 그렇게 뒤쫓던 조운은 문득 강가 여울목에 고기잡이 배 한 척이 비 스듬히 매여 있는 것을 보았다. 조운은 말을 버리고 얼른 그 고기잡 이 배에 올랐다. 뒤따르던 군사들 중에 두 사람이 따라 올라와 노를 잡았다.
조운은 손부인이 앉아 있는 큰 배를 뒤쫓아 급히 고기잡이 배를 몰았다. 조운이 뒤쫓아오는 걸 본 주선이 졸개들에게 소리쳤다.
“활을 쏘아라!”
곧 화살이 까맣게 조운이 탄 고기잡이 배를 뒤덮었다. 그러나 조운이 뱃전에 서서 창대로 쳐내니 화살은 모두 배 밖으로 튀겨나가 물 위에 떨어졌다.
그사이 두 배의 사이는 두어 길로 좁혀졌다. 주선의 졸개들은 활 과 화살을 버리고 창을 들어 다가오는 조운을 향해 함부로 찔러댔 다. 조운이 문득 창을 버리고 허리에 찼던 청홍검(靑虹劍)을 빼들었 다. 일찍이 조조가 자랑하던 천하의 명검으로 당양 장판(長)의 싸 움에서 조운의 손에 들어온 물건이었다.
조운이 그 청홍검을 들어 한차례 후리니 눈부신 칼빛과 함께 그 를 향해 찔러오던 오병(吳兵)들의 창날이 모두 잘려 나가며 절로 길 이 열렸다. 조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차례 용을 씀과 함께 작은 고깃배에서 뛰어올랐다.
이어 커다란 새처럼 손부인이 탄 큰 배에 뛰어내리는 조운을 보 자 오병들은 모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감히 앞을 막을 생각을 못하고 길을 내주니 조운은 곧바로 뱃전 쪽으로 갔다.
아두를 품에 안고 있던 손부인이 그런 조운을 보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어찌 그대는 이토록 예를 모르는가?”
조운이 얼른 칼을 감추고 목소리를 낮추며 되물었다.
“주모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어찌하여 군사께는 알리지 않으셨 습니까?”
“어머님께서 병환이나 위독하시다기에 친정으로 다니러 가는 길이오. 하도 급해 군사께는 알릴 겨를이 없었소.”
손부인이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꾸했다. 조운이 지지 않 고 부드러운 가운데도 따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문병을 가신다면 무슨 까닭으로 작은 주인을 데리고 가십니까?”
“아두는 내 아들이오. 형주에 두고 가면 돌보아줄 사람이 없기에 데려가는 것이오.”
“아니 되십니다. 우리 주공께서는 일생에 자식으로 작은 주인 단 한 분만을 두셨을 뿐입니다. 그 까닭에 저는 당양의 장판파에서 조 조의 백만대군 사이를 오가며 작은 주인을 구해냈던 것입니다. 그 런데 이제 부인께서 남의 땅으로 데려가시겠다니 어찌 이치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둘러댄 손부인의 말에 조운의 목소리가 문득 높아졌다. 성정이 거 센 손부인도 가만있지 않았다. 문득 성난 얼굴로 조운을 소리쳐 꾸 짖었다.
“그대는 한낱 장하(下)의 무부(武)에 지나지 않거늘, 어찌 감 히 주인의 집안일까지 참견하려 드느냐?”
그래도 조운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자질구레한 시비 가리기는 피하고 제 할 말만 했다.
“부인께서 가시는 것은 말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작은 주인만은 남겨두고 가십시오.”
손부인이 한층 기색을 엄하게 그런 조운을 꾸짖었다.
“너는 함부로 길을 막고 내 배 위로 뛰어올랐으니 모반할 뜻이라도 있다는 것이냐?”
하지만 조운은 완강하기가 산악 같았다.
“만약 작은 주인을 넘겨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비록 만 번 죽는 한 이 있더라도 결코 부인을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손부인도 말로는 조운을 더 어찌해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워낙 대가 센 여자라 순순히 아두를 내놓으려 들지 않았다.
“무엇을 하느냐? 어서 앞을 막아 아기씨를 보호하지 못하겠느냐?”
손부인이 문득 곁에 있는 계집종들에게 소리쳤다. 무예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항시 창칼을 들고 있는 그네들로 하여금 조운을 막게 할 심산이었다. 손부인의 매서운 영에 계집종들이 우르르 뛰어나와 손부인과 아두를 둘러쌌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조운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려 계집종들을 헤치고 손부인의 품 으로부터 아두를 빼앗았다. 마치 자루에서 과일 집어내듯 거침없는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아두를 빼앗아 품은 것까지는 좋았으 나 조운은 곧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강변으로 오르고 싶었으나 물 한가운데 있는 배 위라 돕는 사람이 없이는 될 일이 아니었고, 칼을 휘둘러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억센 손부인이 기를 쓰고 달려들 것을 생각하니 그도 차마 못할 일 이었다.
“에이, 못난 것들. 어서 아두를 되찾아오지 못할까?”
손부인이 성을 이기지 못해 발을 구르며 계집종들을 몰아댔다. 계집종들이 손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병장기를 쥐고 머뭇머뭇 조운 에게 달려들었으나 조운이 한 손으로는 아두를 품듯 감싸안고 한 손으로는 청홍검을 치켜들며 눈을 부라리니 아무도 덤벼들 생각을 못했다.
이때 주선은 배 뒷전에서 키를 잡고 있었다. 조운이 이러지도 저 러지도 못하고 섰는 걸 보자 문득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옳다. 조운까지 데려가자. 제놈이 아두를 품고는 강물에 뛰어내릴 수 없을 것이니 이대로 배를 강동으로 몰고 가면 그야말로 돌 하나 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홀로 중얼거리며 배를 그대로 물살에 맡겨버렸다. 빠른 물 살에 순풍까지 겹쳐 배는 거침없이 강동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뱃전에 아두를 품고 서 있는 조운은 속이 탔다. 그러나 외손바닥 이 소리를 낼 수 없듯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천하의 조자 룡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다만 아두를 지키기만 하며 배와 함께 동 오로 흘러갈 뿐이었다.
조운의 처지가 정히 위급해졌다 싶을 때였다. 홀연 강 아래쪽 포 구에서 여남은 척의 배가 가로로 한 줄 죽 늘어서서 앞을 막았다. 깃 발이 휘황하게 나부끼고 북소리가 요란하게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배들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동오의 계책에 빠지고 말았구나!’
그 배들을 동오에서 보낸 배들로 본 조운이 속으로 그렇게 탄식 하고 있는데 문득 앞선 배의 뱃전에 긴 창을 낀 장수 하나가 나타나 소리쳤다.
“형수님께서는 조카를 남겨두고 가십시오!”
목소리에 생김을 보니 틀림없는 장비였다. 장비 역시 이곳저곳 초소를 돌아보다가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동오로 갔다는 소식을 들 었다. 그러나 그대로 뒤쫓아봤자 이미 늦다고 여긴 그는 급히 유강 구(江口)로 말을 달려와 그 좁은 물길에서 동오의 배들을 붙들고 자 길을 끊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선은 장비까지 칼을 빼들고 배에 오르는 걸 보자 마음이 급했 다. 키고 뭣이고 다 팽개쳐둔 채 칼을 빼들고 달려 나왔다. 그러나 주선은 원래 장비의 적수가 못 되었다. 장비는 한칼에 주선을 베어 죽인 뒤 그 목을 잘라 손부인 앞에 내던지며 엄포를 놓았다. 어지간 한 손부인도 일이 그쯤 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장비에게 말했다.
“아주버님께서는 또 어찌 이리 무례하십니까?”
“형수님은 우리 형님을 무겁게 여기지 않으시고 이제 사사로이 친정으로 돌아가려 하시는데, 그건 예에 있는 일입니까?”
장비가 막보는 말투로 퉁을 놓았다. 드디어 손부인도 사정조가 되었다.
“어머님께서 병환이 깊어 몹시 위태롭다고 합니다. 아주버님, 만 약 형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가는 내 일을 그르칠 것 같아서 길을 서둘렀을 뿐이지 몰래 달아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어 이 나를 보내주시지 않겠다면 나는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고 말겠습니다!”
손부인이 그렇게까지 나오니 장비도 더는 몰아댈 수 없었다. 저만 큼 서 있는 조운에게로 다가가 가만히 의논했다.
“만일 부인을 몰아세워 정말로 강물에 빠져 죽기라도 한다면 이는 신하된 사람의 도리가 아닐세. 아두를 찾았으니 부인과 배는 가도록 버려두는 게 어떻겠나?”
조운도 달리 마땅한 방책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비 는 손부인을 바라보며 자못 점잖게 말했다.
“우리 형님은 대한의 황숙이십니다. 형수께서는 부디 그분에게 욕 됨을 끼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떠나가시더라도 우리 형 님의 은의를 생각하셔서 되도록이면 빨리 돌아오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조운과 아두만 자기편 배로 옮기고 동오에서 온 다섯 척의 배는 손부인과 함께 가도록 버려두었다. 형주를 되찾기 위한 동오의 절묘한 계책은 막판에 와서 장비와 조운에 의해 다시 한번 어긋나버린 셈이었다.
장비와 조운은 아두를 무사하게 되찾은 공을 서로에게 돌리며 흐 뭇한 마음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미처 몇 리 가기도 전에 이 번에는 형주의 수군을 모두 끌어모은 듯이나 많은 배들을 만났다. 동오 전체와 한바탕 수전을 벌이더라도 아두만은 되찾으리라 벼르 고 나선 공명이 이끌고 온 배들이었다.
공명은 장비와 조운이 이미 아두를 빼앗아오는 걸 보자 기뻐해 마지않았다. 아두를 굳이 데려가려는 동오의 속셈을 누구보다 훤히 알아볼 수 있는 그였기에 장비와 조운이 더욱 대견스러웠다. 강가에 배를 대고 그들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해 형주성으로 돌아오면서 거듭 그들의 공을 치하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맹관으로 글을 보내 그곳 에 있는 유비에게 손부인이 강동으로 돌아간 일을 알렸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한 가지 앞뒤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은 유비와 손부인의 금실이다. 그 얼마 전 오빠인 손권을 저버리듯 하 고 유비에게 빠져 동오를 떠난 손부인이 이제는 손권을 위해 유비를 저버리듯 동오의 계책이 이루어지게 해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 다. 거짓 편지에 속았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변화가 얼른 수긍 이 가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정사에 의지하는 편이 온당할 것 같다. 원래 유비와 손부인의 결혼은 동오 쪽에서 발벗고 나선 정략의 일부였다. 유비에 대한 정책에서 동오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 져 있었는데, 그 결혼은 『연의에서처럼 강경파인 주유가 꾸민 계책 이 아니라 온건파인 노숙이 유비를 회유하기 위해 주장하고 나선 것 이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손부인과 유비의 결합은 처음부터 무리한 데가 많았 다. 먼저 손부인은 아버지 손견이 일찍 죽은 데다가 국태부인으로 보면 둘도 없는 외동딸이라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자랐다. 유비와의 첫날밤 부분에서 제법 그럴듯하게 미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손부인 이 항시 무장한 계집종들을 데리고 다니며 사내처럼 칼쓰기를 좋아 하였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인데, 유비는 못내 그런 점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거기다가 버릇 없이 자라 오만 하고 거센 성정은 더욱 유비와의 화합을 방해했을 것이다.
한편 유비는 유비대로 손부인에게 탐탁스럽지 못할 점이 또한 여 럿이었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의 나이 차이로 손부인은 꽃 다운 이십대였는 데 비해 유비는 이미 오십대였다. 또 유비는 끝내 아들로는 아두 하나만을 가지고 그 뒤로는 자식을 못 가진 것으로보아 그때 이미 남성으로서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음에 틀림이 없 다. 거기다가 자라면서 보고 겪은 오라버니의 기업(基業)에 비해 유 비의 그것은 손부인에게는 거의 초라하게까지 느껴졌을 것이다. 그 리하여 이래저래 유비와 형주에 정을 못 붙이고 있는데 손권의 간곡 한 편지가 온 것이라면 이 사건에서 본 손부인의 태도는 아무런 무 리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간신히 동오로 돌아간 손부인은 오라버니 손권을 만나자 마자 조운이 아두를 뺏어간 일이며 장비가 주선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듣고 있던 손권이 분을 이기지 못해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이제 내 누이가 돌아왔으니 유비는 이미 내 친척이 아니다. 주선 의 원수를 갚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는 곧 문무 관원들을 불러모아 형주를 칠 의논을 시작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일어나 한참 군사를 일으킬 의논들을 하고 있는 데 문득 급한 전갈이 그곳으로 날아들었다.
“조조가 사십만의 대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난번 적벽 싸움의 원수 갚음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에 크게 놀란 손권은 형주 칠 일을 잠시 제쳐놓고 조조를 막을 일부터 의논했다. 갑자기 싸울 상대가 바뀌어서인지 의견은 구구각 색이었다. 그때 다시 사람이 와서 알렸다.
“장사 장굉이 몸이 아파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이제 그 병이 깊었 는지 주공께 슬픈 글을 올려왔습니다.”
손권이 그 글을 받아 뜯어보니 곧 죽음을 준비하는 글이었다. 구절 구절 충성으로 가득한 가운데 한 구절 특히 손권의 눈길을 끄는
데가 있었다.
‘…. 제가 살피건대 말릉)은 그 산천에 제왕(王)의 기운이 서려 있는 땅입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어 만 세를 이어갈 기업의 바탕으로 삼으십시오……………..’
어찌 보면 그걸 권하기 위해서 병든 몸을 돌보지 않고 붓을 든 것 같았다. 읽기를 마친 손권은 소리내어 울며 여럿을 둘러보고 말 했다.
“장자강
내게 말릉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권하고 있구 이려.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을 내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고는 말릉의 이름을 건업(業)으로 고침과 아울러 돌로 든든 한 성을 쌓게 했다. 한 나라의 근거가 되는 도읍을 옮기는 일이 쉽지 않건만 그토록 쉽게 결정하는 것으로 보아 손권도 전부터 생각한 바 가 있었던 듯했다.
손권의 그 같은 결정에 곁들여 여몽이 한 가지를 더 권했다.
“조조의 군사들이 쳐내려 올 것에 대비해 유수 물 어귀에 둑벽을 쌓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물길 위쪽에서 적을 들이치고 맨발로 적의 배에 뛰어들면 될 것인데 둑은 무엇 때문에 쌓는단 말씀이오?”
물 위의 싸움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여몽이 찬찬히 대꾸했다.
“군사를 부리는 데는 우리 편에 이로운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수도 있소이다. 또 싸움에 있어서는 아무리 능한 사람이라도 싸움마다 이길 수는 없지요. 갑자기 적을 만나 보졸과 기병이 함께 어울려버 리면 어느 겨를에 물 위로 나가며 배 위로 뛰어든단 말이오?”
“그렇소. 사람이 멀리 헤아리지 않으면 반드시 걱정거리가 가까이 이른다 하였소. 자명(明, 여몽의 자)이 멀리 내다본 것 같소.”
손권도 그렇게 여몽을 편들고 그날로 군사 몇 만을 뽑아 유수 어 귀에 둑벽을 쌓게 했다.
이때 허도에 있는 조조는 날로 위엄과 복록이 더해졌다. 사람의 운세가 성하게 되면 아첨하는 무리가 따르게 마련인지 조조도 예외 는 아니었다. 군사를 일으켜 적벽 싸움에서 입은 수모를 씻으려는 조조 앞에 장사 동소가 들어와 말했다.
“예부터 이제까지 두루 살펴도 신하 된 사람으로서 승상만큼 공 이 높으신 분은 없을 듯합니다. 비록 주공(周公)이나 여망(呂望, 강태 공)이 되살아난다 해도 승상께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몸을 씻기[櫛風雨, 풍우에 시달림] 삼십여 년, 흉악 한 무리를 비질하듯 쓸어 없애 백성들에게 해로움을 끼치지 못하게 하고 쓰러져가는 한실을 다시 일으켰으니 어찌 다른 신하들과 더불 어 재상의 자리에 나란히 앉으실 수 있겠습니까? 승상께서는 마땅 히 위공(公)의 자리로 나아가심과 아울러 구석(錫)을 더해 받으 심으로써 세우신 공덕을 기림받으셔야 합니다.”
실로 아첨이라도 너무한 아첨이었다.
구석이란 무엇인가. 구석이란 공이 있는 제후에게 내리는 특전이다.
그 첫째는 타고 다니는 말과 수레에 나타난다. 나아감과 물러남 에 절도가 있고 그 나다님에 위엄을 띠게 하고자 걷는 것을 수레로 대신하게 하는데, 수레는 큰 길 작은 길을 달리하고 수레를 끄는 말 과 소도 천자나 왕의 행차 때와 비슷한 격식에 따랐다. 황금 수레[ 輅]와 융로, 전차) 각 한 대, 검은 말 두 쌍과 누런 말 여덟 마리 이다.
둘째는 의복에 있어서의 특전이다. 그 말[言]이 곧 문장을 이루고 그 행동이 곧 법이 되므로 의복을 내려 그 덕을 나타내는데, 이때의 의복은 곧 왕의 예복이었다. 곤룡포, 면류관에 붉은 신[赤鳥] 등이다. 셋째는 악현(樂縣)이었다. 그 훌륭한 점은 남에게 본보기가 되고 안으로는 어짊[仁]을 품게 하고자 사용할 수 있는 가무와 음곡을 내 려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는데, 이때에도 규모와 기준은 천자나 제후 의 예에 따랐다. 헌현(縣, 악기를 삼 면으로 벌여 놓고 연주하는 것) 음 악과 육일佾, 여섯 명씩 여섯 줄로 늘어서서 추는 춤) 춤이 그러하다. 넷째는 거처하는 집이었다. 붉은 대문과 나무 기둥에 붉은 칠을 한 집을 내려 다른 신하들과의 구별을 뚜렷이 한 것으로 보통 주호 (朱戶)라 불렀다.
다섯째는 궁궐 안에서 있게 마련인 행동 제한의 완화였다. 예를 지키면서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칼을 차고 전상에 나아갈 수 있는 등 특전을 주었는데 보통 그것을 납폐(納)라 했다.
여섯째는 호분(虎賁)이라 하여 궁중을 지키는 군사들을 뽑아 사사로이 호위로 쓸 수 있는 특전이었다. 용맹함을 겉으로 드러내고 의를 지킴에 굳세라는 뜻으로 호분 삼백 명을 주어 비상시에 대비케했다.
일곱째는 궁시(弓矢)라 하여 안으로는 어질고 밖으로는 치우치지 말라는 뜻으로 붉은 활과 붉은 살, 검은 활과 검은 살을 내리는데 이 는 또한 마음대로 역적을 칠 수 있는 권한을 나타내기도 했다.
여덟째는 부월(斧鉞)로 왕의 의장에 쓰는 금도끼 은도끼를 내리 는데, 이는 또한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죄 되지 않는 특전이었다. 아홉째는 거창) 규찬(圭)이라는 제사를 지낼 때의 특전으 로 그 부모를 제사하는 데 신에게 올리는 향기로운 술과 종묘에서 쓰는 옥으로 깎은 제기를 쓸 수 있게 하였다.
한나라 조정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버린 지 오래인 조조라 신하 로서는 거의 불경에 가까운 구석을 자신에게 내리게 해야 한다는 동 소의 말이 그렇게 귀에 거슬릴 리 없었다. 오히려 흐뭇한 기분으로 모두가 나서서 일을 밀고 나가기만 바라는데 문득 시중(中) 순욱 이 일어나 말했다.
“아니 됩니다. 승상께서는 원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기울어가는 한실을 붙드셨습니다. 마땅히 처음의 충성스럽고 곧은 뜻을 지키시 어 겸손하게 물러날 줄 아는 절도를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군사는 덕으로 백성을 사랑할 것인즉 구석 같은 특전으로 위세를 뽐내는 것 은 온당치 못합니다.”
순욱은 조조가 처음 몸을 일으킬 때부터 허도에 자리 잡고 앉을 때까지 가장 많이 재주와 지모를 빌려준 모사였다. 그러나 먼저 죽은 곽가와는 달리 그는 조조 개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를 통해 한실을 되세우려는 뜻에서 힘을 다해왔다. 따라서 조조가 차차 딴 뜻 을 키워가자 그는 조조의 측근에서 밀려난 상태였는데 이제 입바른 소리를 하고 나섰다.
순욱의 말을 들은 조조는 갑자기 모두가 알아볼 만큼 불쾌한 낯 빛이 되었다. 그러나 워낙 옳은 말인 데다 순욱이 또한 자신에게는 잊지 못할 공신이라 맞대놓고 면박을 주지는 못했다. 그때 동소가 다시 나서 맞섰다.
“어찌 한 사람의 뜻이 여럿의 바람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 기 있는 다른 모든 사람의 뜻도 들어보셔야 할 것입니다.”
조조의 눈치를 보고 한 약삭빠른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미 조조의 불쾌해하는 얼굴을 보았는지라 굳이 딴소리를 하려 들지 않 았다. 이에 모두 동소의 말을 따라 천자께 상주하니 조조는 곧 위공 (魏)에다 구석을 더해 받게 되었다.
“내 일찍이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구나!”
조조가 위에다 구석을 더해 받았다는 소문을 듣자 순욱은 그렇 게 탄식했다. 지난날 그런 조조를 도와 힘을 아끼지 않은 것을 후회 함과 아울러 이제 거침없어진 조조가 앞으로 노릴 것이 걱정되어 나 온 탄식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그 탄식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다시는 그 자신을 돕지 않으리라는 순욱의 결의로 들은 것이 었다.
진작부터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순욱을 은근히 노여워하고 있 던 조조는 거기서 자신의 마음을 굳혔다. 순욱이 자기를 저버리고 해치려 들 리는 없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싸늘한 비웃음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순욱의 그 같은 태 도가 다른 사람에게 번지는 것도 가슴속에 남 몰래 품고 있는 야망 에는 해롭기 짝이 없었다.
건안 십칠년 시월, 드디어 대군을 일으킨 조조는 강남으로 내려가 기에 앞서 순욱에게 함께 갈 것을 명했다. 이미 자신을 위해 꾀를 빌 려 주지 않을 줄 알면서도 굳이 순욱을 데려가려는 뜻은 뻔했다. 따 라가지 않으려 들면 명을 어긴 죄를 묻고, 따라나서면 어지러운 싸 움터에서 적당한 구실을 붙여 순욱을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이미 조조를 따라다니며 함께 일해오기 삼십 년, 순욱이 그 같은 조조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조조를 따라나서는 체하다가 수춘에 이르러 병을 핑계삼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조조는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어느 날 순 욱이 시름에 잠겨 있는데 문득 조조로부터 사자가 달려와 꾸러미 하 나를 전했다. 풀어보니 음식을 담는 그릇이었는데, 조조가 친필로 뚜껑을 봉한 것이었다.
순욱은 불길한 느낌을 누르며 봉함을 뜯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그릇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순욱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이내 조조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이제 그대가 먹을 것은 없다. 내가 그대에게 보낼 것은 이 빈 그 릇과 같은 옛정의 껍질뿐이다!’
순욱의 귀에는 그 같은 조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먹을 것이 없다면 죽는 길뿐이지 않은가. 순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미리 마련해두었던 독을 꺼내 마셨다. 그때 그의 나이 쉰이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힌 것은 조조를 잘 못 본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말라진다는 바닷물 같은 인간의 권력욕에 대한 자신의 무지였다. 뒷사람이 그런 순욱의 죽음을 슬퍼하며 노래했다.
순욱의 재주 천하를 울렸으되 文若才華天下聞
가엾게도 발 잘못 디뎌 권문을 찾았네. 可憐失足在權門
뒷사람들 한가로이 장량에 비기나 後人漫把留侯比
죽을 때는 오히려 한신에게 부끄럽구나. 臨歿無顏見漢君
일은 자신이 뜻한 대로 되었지만 조조 또한 마음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순욱의 아들 운이 발상(喪)과 함께 부음을 전하자 이 를 받은 조조는 뉘우치고 괴로워해 마지않았다. 뉘우침은 자신이 너 무 급하게 순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데 대한 것이요, 괴로움은 자 신의 야망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조차 이해받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데서 온 것이었다.
조조는 순욱을 두텁게 장례지내주게 하고 경후(敬侯)란 시호를 내 려 순욱의 넋을 위로했다.
그러는 사이 강남으로 내려간 조조의 대군은 어느새 유수에 이르 렀다. 조조는 조홍을 뽑아 선봉으로 삼고 삼만 철갑군을 주며 먼저 강변을 살펴보게 했다.
“강을 따라 수없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데 어느 곳에 적병이 모여 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잠시 후 조홍에게서 그런 기별이 왔다. 그 말에 조조는 마음놓고 쳐내려가지 못하고 스스로 군사를 몰아 조심스레 나아가다 유수구 에 이르러 진을 쳤다.
“우선 적의 형세부터 정확히 알아두어야겠다.”
대군이 그럭저럭 진채를 벌이고 자리를 잡아갈 무렵 그렇게 생각 한 조조는 장졸 백여 명만 이끌고 가까운 산언덕으로 올라갔다. 강 물 위를 보니 오군 싸움배들이 가로세로 줄을 맞추어 가지런히 떠 있는데 다섯 가지 빛깔의 깃발이 펄럭이는 사이로 군사들이 든 창검 이 삼엄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손권은 그중 가장 큰 배 위에 푸른 일산을 받쳐 쓰고 앉아 있었다. 그런 손권의 좌우에는 문무의 벼슬아치들이 양편으로 시립해 있는 게 보였다.
“아들을 낳으려면 손권쯤은 되어야지. 유표의 자식들은 돼지새끼 나 강아지와 다름없지.”
손권의 당당한 모습을 가리키며 조조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의 말
을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조조는 동오의 계략에 빠져들고 있었다. 조조가 정신 없이 강 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한소리 포향이 들리더니 벌려섰던 동오의 싸움배들이 일제히 조조군 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뿐만 아니었다. 유수 입새에 있던 둑벽 뒤에서도 한 떼의 인마가 달 려 나와 조조군을 덮쳐왔다.
그같이 갑작스러운 오병(吳兵)들의 습격에 조조의 군사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겁부터 먹었다. 보졸, 마군 할 것 없이 뒤돌아보며 달아나기 바빴다. 몇몇 장수들이 그들을 꾸짖어보았지만 아무도 멈추려들지 않았다.
높은 데서 그 꼴을 본 조조는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 몰라 발만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수천의 기마(騎馬)가 산기슭에 서 솟아난 듯 조조를 향해 몰려왔다. 앞선 말 위에는 한 사람의 장수 가 앉아 있는데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이었다.
“손권이다! 손권이 나타났다!”
조조의 군사들이 그 장수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손권 스스로 한 갈래의 군마를 이끌고 조조를 치러 나온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손권이 푸른 일산을 받치고 배 위에 앉아 있던 것을 보았던 조조는 손권의 그처럼 재빠른 움직임에 깜짝 놀랐다. 그 또한 군사들이나 다름없이 달아날 궁리부터 먼저 했다.
“이놈 조조야, 어디로 가려느냐?”
조조가 말 머리를 돌리려 할 때 문득 한소리 외침과 함께 동오의 장수 한당과 주태가 말을 휘몰아 덤벼들었다. 조조의 등 뒤에 섰던 허저가 칼춤을 추며 마주쳐 나가 그 둘과 맞섰다. 조조는 그 틈을 타 고 몸을 빼쳐 가까스로 진채로 돌아갔다.
허저는 한당과 주태 두 장수를 맞아 서른 합이 넘도록 버티다가 조조가 안전하게 몸을 빼냈다고 생각될 무렵에야 말 머리를 돌렸다. 조조는 진채로 돌아온 허저에게 무거운 상을 내림과 아울러 다른 장 수들을 꾸짖었다.
“장수란 자가 적을 마주하고 있다가 먼저 달아나 우리 군사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놓다니!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모조리 목을 베리라!”
하지만 조조의 낭패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삼경 무렵 이었다. 갑자기 진채 밖에서 함성이 크게 일었다. 놀라 말에 오른 조 조가 사방을 돌아보니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는 가운데 오병들이 물 밀듯이 진채로 몰려들고 있었다. 뜻밖의 야습이었다.
그러잖아도 낮의 싸움에서 잔뜩 기가 죽어 있던 조조의 군사들은 이번에도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당하기만 했다. 날이 밝은 뒤에 간신히 군사를 수습하고 보니 진채는 오십 리나 뒤로 밀려나 있었다. 두 번씩이나 싸움에 져 쫓긴 조조는 마음이 울적했다. 그러나 그 래도 내색했다가는 장졸들의 사기를 떨어뜨릴까 보아 짐짓 한가롭 게 병서를 읽고 있는데 정욱이 들어왔다.
“승상께서는 병법을 잘 아시면서 어찌 ‘군사를 부리는 데 신속함 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을 잊으셨습니까? 이번에 승상께서 겪고 계 시는 어려움은 순전히 그 때문입니다. 승상께서 군사를 일으키셔 놓 고도 쓸데없이 날짜를 끈 까닭에 손권은 방비를 든든히 할 수 있었 습니다. 유수 어귀에 둑벽을 쌓아 막고 있으니 이토록 들이치기가 어렵게 되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허도로 돌아가는 게 좋을 성싶습니다. 가서 따로이 좋은 계책을 세운 뒤에 다시 강남 을 엿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인즉 옳았으나 조조는 차마 그런 정욱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일껏 대군을 일으켜 와놓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조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정욱은 하릴없이 조조 앞을 물러나왔다. 하지만 조조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침상에 엎드려 이런 궁리 저런 궁리로 뒤척거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조는 문득 수만 마리의 말이 일시에 내닫는 듯한 거센 물결 소리에 눈을 떴다. 대강 한가운데서 붉은 태양이 솟 아오르며 눈부신 빛을 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