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5화 : 바뀐 깃발 돌려세운 칼끝
바뀐 깃발 돌려세운 칼끝
조조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거기 또 두 개의 붉은 해가 서로 마주보며 빛나고 있었다. 천지에 합쳐 세 개 의 해가 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강물 속에서 떠 오른 해였다. 똑바로 하늘을 향해 떠오르던 그 해가 돌연 벼락 같은 소리를 내며 진채 앞의 산 위로 떨어지지 않는가.
조조가 놀라 깨어보니 한바탕 낮꿈이었다. 장막 앞에 있는 군사에 게 시각을 물어보니 때는 오시였다.
“말을 끌어오너라.”
조조가 문득 몸을 일으키며 영을 내렸다. 낮꿈은 개꿈이라지만,
꿈의 내용이 너무도 기이한 데다 해가 떨어진 곳이 바로 건너편 산 중이라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잠시 후 말에 오른 조조는 오십여기만 이끌고 진채를 나가 꿈속 에서 해가 떨어진 산기슭으로 가보았다. 거기에 무슨 이상한 게 없 나 싶어 꼼꼼히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한 떼의 인마가 숲속에서 쏟 아져 나왔다. 앞선 사람은 금으로 된 갑옷을 걸친 데다 투구까지 금 빛으로 번쩍였다. 조조가 눈여겨보니 다름 아닌 손권이었다.
손권은 조조가 그곳에 와 있는 걸 보고도 조금도 겁먹거나 흐트 러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산비탈에서 말을 멈춘 뒤 채찍을 들어 조조를 가리키며 꾸짖듯 소리쳤다.
“승상께서는 중원에 자리 잡고 앉으시어 이미 부귀가 더할 나위 없거늘 또 무엇이 부족하시오? 어찌하여 다시 우리 강남을 침범하 셨소이까?”
“그대는 신하 된 몸으로 왕실을 섬기지 않고 있다. 나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특히 그대의 죄를 물으러 왔다.”
조조도 지지 않고 한껏 위엄을 갖추어 대꾸했다. 손권이 껄껄 웃 으며 빈정거렸다.
“그 무슨 부끄러움을 모르는 말씀이오? 승상이 천자를 끼고 제후 들을 개 몰듯 하는 것은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일이 아니오? 나는 결 코 한실을 섬기지 않으려는 게 아니외다. 다만 승상 같은 역적을 쳐 없애 나라를 바로잡으려 할 뿐이오.”
그 말에 조조는 왈칵 성이 났다. 다짜고짜로 장수들을 호령해 산 위에 있는 손권을 잡아내리라고 몰아댔다. 그러나 미처 조조의 호령 이 끝나기도 전에 한차례 요란한 북소리가 나더니 두 갈래의 군마가 산 뒤편에서 쏟아져 나왔다. 왼쪽은 한당과 주태요, 오른쪽은 진무와 반장이 이끌고 있는 삼천의 궁노수였다. 그들이 일제히 활과 쇠뇌를 퍼부으니 오뉴월에 장마 퍼붓듯 살이 날랐다.
겨우 오십 기만 끌고 간 조조는 다시 어려운 지경에 빠지고 말았 다. 급히 말을 돌려 달아났으나 승세를 탄 동오 쪽 네 장수가 곱게 놓아주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도중에 호위군을 이끌고 조 조를 찾아나온 허저를 만나 겨우 사로잡히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비록 조조는 놓치고 말았으나 이번에도 어김없는 동오의 승리였 다. 오병들은 노랫소리도 드높게 승리를 뽐내며 유수 어귀로 돌아 갔다.
한편 허저의 구함을 받아 진채로 돌아온 조조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손권은 결코 대수롭잖게 볼 인물이 아니다. 강물 속에서 떠오른 그 붉은 해에 상응하는 인물이니 뒷날 반드시 제왕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싸움에서 자신이 그런 손권을 이길 수 없다는 뜻 이 아닌가. 거기서 조조는 비로소 군사를 물려 허도로 돌아가고 싶 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오의 비웃음이 겁나 함부로 군사를 되돌릴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나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처지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양군은 다시 한 달 남짓을 맞붙어 싸웠다. 더러는 이기 고 더러는 져서 딱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려운 싸움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해가 저물고 이듬해 정월이 되었다. 봄비가 잇달아 내려 강물이 붇고 진채는 진흙탕이 되어 군사들의 어려움은 이만저 만이 아니었다.
조조는 점점 걱정이 되었다. 이제는 어느 쪽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는 여러 모사를 불러모으고 의논을 했다.
“싸움은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데 봄비가 와 군사들의 고단함과
괴로움만 커지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조조의 그 같은 물음에 모사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뒷날을 다짐하 고 이번에는 이만 물러가시지요.”
“아닙니다. 이제 바야흐로 따뜻한 봄날이 왔으니 한번 싸움을 벌 여볼 때입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결코 군사를 물리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게 서로 뜻이 다르니 얼른 결정이 날 수 없었다. 서로 네가 옳 으니 내가 옳으니 하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데 문득 사람이 와서 알렸다.
“동오에서 사자를 시켜 글을 보내왔습니다.” 조조가 글을 뜯어보니 손권이 보낸 것이었다.
‘이 몸과 승상은 한가지로 한조의 신하외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백성들을 평안케 할 생각은 않고 함부로 창칼을 휘둘러 불쌍한 목숨들을 모질게 앗고 있으시오? 결 코 어진 이가 할 일이 아닌 듯하오이다. 이제 봄이 와 물이 붙고 있 으니 그대는 마땅히 물러가야 할 것이오. 돌아가지 않으면 또 한번 적벽에서와 같은 화를 당할 것인즉, 부디 깊이 헤아려 움직이시기 바라오.’
손권은 대략 그렇게 적은 뒤 다시 뒤편에는 두 줄의 빈정거림 같은 시구를 덧붙여 놓고 있었다.
그대가 죽지 않고는 足下不死
이 몸이 편안치 않을 것이네. 孤不得安
그걸 본 조조가 문득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럴테지. 손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군.”
그러고는 동오에서 온 사자에게 무거운 상을 내림과 아울러 수하 의 장졸들에게 군사를 되돌릴 채비를 하라 일렀다. 손권의 글에 발 끈하여 미련을 떨며 버텨봤자 별 득될 게 없다는 걸 알고 짐짓 배포 넉넉하게 나온 것이었다.
조조가 여강 태수 주광(光)에게 완성을 맡기고 허창으로 돌아가 자 손권 역시 군사를 거두어 말릉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손권은 이 왕에 한군데로 뭉쳐놓은 전력을 그대로 흩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말릉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조조는 허창으로 돌아갔으나 유비는 아직 멀리 가맹관에서 돌아 오지 않았다. 조조를 막으려고 거느리고 온 군사로 비어 있는 형주 를 쳐서 빼앗는 게 어떻겠는가?”
그러자 장소가 나서서 말했다.
“구태여 군사를 움직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제게 유비가 다시는 형주로 돌아올 수 없게 할 계책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계책이오?”
“주공께서 만약 군사를 움직여 형주를 치신다면 조조는 반드시 그 틈을 타기 위해 되돌아올 것입니다. 차라리 편지 두 통을 써서 유 장과 장로에게 보내는 편이 낫습니다. 유장에게는 유비가 동오와 손 잡고 서천을 뺏으려 한다는 글을 써보내고 장로에게는 형주가 비어 있으니 어서 차지하라 이르십시오. 그러면 의심이 난 유장은 유비를 칠 것이고 욕심이 난 장로는 형주로 군사를 낼 것이니, 유비는 머리 와 꼬리가 서로 구해줄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 뒤 에 주공께서 군사를 내신다면 형주는 힘들이지 않고 얻으실 수 있습 니다.”
손권이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이에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곧 글 두 통을 닦아 유장과 장로에게로 달려가도록 했다.
이때 유비는 가맹관에 머물면서 민심을 사기에 바빴다. 날이 갈수 록 백성들은 유비를 따라, 마침내는 원래의 주인 유장을 잊을 지경 이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공명이 글을 보내왔다. 손부인이 동오로 돌아간 일과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와 유수를 치려 한다는 소 식이었다.
걱정이 된 유비가 방통을 불러놓고 물었다.
“조조가 손권을 치러 왔다니 실로 걱정이오. 조조가 이겨도 형주 를 차지하려 들 것이고 손권이 이겨도 또한 형주를 엿볼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방통은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주공께서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공명이 형주에 있으니 동오는 감히 그곳을 뺏으려 들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형주의 일을 핑계로 이곳의 일이나 풀어나가도록 하십시오. 유장에게 글을 보내 조조 가 손권을 치러 내려왔음을 알림과 아울러 손권이 구원을 청해왔다 고 하시면서 군사와 곡식을 비는 것입니다. 주공과 손권은 입술과 이 같은 사이라 구해주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장로는 기껏 제 땅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위인이라 결코 서천으로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 니, 먼저 형주로 돌아가 손권과 더불어 조조부터 쳐부수고자 한다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거기 곁들여 지금 주공께서는 군사가 적고 양식 이 모자라니 가려뽑은 군사 사만과 곡식 십만 섬만 보태달라 하시면 됩니다. 간곡히 청하시어 마다할 수 없도록 하신 뒤에 만약 유장이 군사와 곡식을 보내오면 그때 가서 다시 의논하도록 하시는 게 좋겠 습니다.”
유비는 그렇게 말하는 방통의 속셈을 얼른 알아낼 수 없었으나 말없이 따랐다. 그날로 곧 사람을 뽑아 유장에게 보낼 글을 주고 성 도로 보냈다.
성도로 가는 유비의 사자는 오래잖아 부수관을 지나게 되었다. 그 곳을 지키던 유장의 장수 양회(楊)와 고(高)는 의논 끝에 고패 는 남아서 관을 지키고 양회는 사자와 더불어 성도를 다녀오기로 결 정을 보았다. 유비만을 살피고 있던 그들이라 무언가 수상쩍은 느낌 이 든 까닭이었다.
양회와 함께 성도에 이른 사자는 유장을 만나보고 유비가 써준 글을 바쳤다. 읽기를 마친 유장이 문득 사자와 함께 들어온 양회를 보고 물었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함께 왔는가?”
양회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직 그 편지 때문입니다. 유비는 우리 서천으로 들어온 뒤로 널 리 은덕을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있는 바 그 속셈이 매우 수상쩍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번에 군사와 곡식을 달라 하니 더욱 그 속셈을 알기 어렵습니다. 결코 달라는 대로 주셔서는 안 됩 니다. 유비에게 다시 군사와 곡식을 보태주는 것은 불타는 집에 장 작을 던져 그 불길을 더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와 현덕은 형제의 정분이 있다. 어찌 돕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양회가 자못 옳게 보고 하는 말이었으나 유장은 아직도 어정쩡한 소리만 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달으며 소리 쳤다.
“유비는 효웅이니 그를 촉에 불러들여 오래 머물게 하고 내쫓지 않는 것은 호랑이를 방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제 다시 군사와 곡식을 보태준다면 그 호랑이 에 날개까지 덧붙여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모두 놀라 그 사람을 보니 그는 영릉군 증양 땅 사람 유파(劉巴) 였다. 그러나 유장은 그 말을 듣고도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황 권이 다시 나와 양회와 유파를 편들었다.
“두 사람의 말이 옳습니다. 주공께서는 결코 유비의 청을 들어주 어서는 아니 됩니다.”
권하는 사람은 없고 말리는 사람만 있으니 마침내는 유장도 마음 이 변했다. 겨우 늙고 힘없는 군사 사천과 곡식 일만 섬으로 유비의 청을 들어주는 흉내만 내고 유비에게는 글을 보내 적당한 핑계를 대기로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가만히 양회를 불러 전보다 한층 엄하게 부수관을 지키게 했다.
유비에게 보내는 유장의 글을 가지고 가맹관으로 간 사자는 곧 유 비를 만나보고 그 글을 바쳤다. 글을 다 읽은 유비가 버럭 성을 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적을 막아주려고 힘을 다해가며 애쓰건만 너희는 도리어 재물을 아껴 보답을 꺼리는구나! 이래서야 어떻게 군 사를 잘 부릴 수 있겠느냐?”
그렇게 꾸짖으며 편지를 북북 찢고 몸을 일으켰다. 그 기세에 놀 란 유장의 사자는 도망치듯 성도로 돌아갔다.
속으로는 일이 그렇게 되기를 기다렸으면서도 방통이 시치미를 떼고 유비에게 말했다.
“주공께서는 언제나 인의를 무겁게 여겨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편지를 찢고 성을 내셨으니 지금껏 유장에게 보이신 정은 헛것이 되 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겠소?”
유비가 곧 진정된 얼굴로 방통에게 물었다.
“제게 세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주공께서 들어보시고 그중에 하나를 고르십시오.”
방통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유비가 다시 물었다.
“그 세 가지 계책이란 무엇 무엇이오?”
“첫째는 지금 당장 날랜 군사를 가려뽑아 밤낮으로 달려 재빨리 성도를 치는 것이니, 이는 셋 중에서 가장 상계(上)라 할 수 있겠 습니다. 사람과 물자의 손실이 적고 일이 빨리 매듭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양회와 고패를 죽이고 부성을 빼앗은 뒤 성도로 짓쳐가는 것입니다. 양회와 고패는 촉의 이름난 장수들일 뿐만 아니 라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험한 관을 지키고 있어 힘으로 밀치고 지 나가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주공께서는 형주로 돌아간다는 거짓 소 문부터 퍼뜨리십시오. 그러면 그 소문을 들은 두 사람은 반가운 마 음에서라도 주공을 배웅하러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그때 그들을 사로잡아 죽이고 부성을 뺏은 다음 성도로 향하면 이는 중계 (中)가 됩니다. 세 번째는 백제성으로 물러간 뒤 밤을 틈타 형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서천은 뒷날 천천히 뺏기로 하고 한 걸음 물러 서는 것인 바 이는 셋 중에서 가장 하계(下)가 될 것입니다. 주공 께서는 이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십시오. 만약 이 세 가지 계책 중에 서 어느 것도 고르지 않고 우물거리시다가는 앞으로 반드시 큰 고단 함에 빠져 구함받을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던 유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군사(軍)께서 말씀하신 상계는 너무 촉급하고 하계는 너무 더 딘 것 같소. 중계가 빠르지도 않고 더디지도 않으니 그 편이 좋겠소.”
그러고는 붓을 들어 유장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조조가 부장 악진을 시켜 형주의 청니진을 넘보게 하고 있소. 나 의 여러 장수들이 나가 맞섰으나 당해내지 못해 내가 몸소 나가 막 아야 할 것 같구려. 얼굴을 맞대고 앞뒤를 자세히 말할 겨를이 없어 이렇게 글로써 작별을 고하는 바이오.’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가 성도에 이르자 뜻밖의 변고가 생겼다. 유비와 방통의 은밀한 속셈을 알 리 없는 장송은 유비가 갑자기 형주로 돌 아간다는 말에 애가 탔다. 다쑨 죽에 코 빠뜨리는 격이 된 유비의 회군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 급히 글 한 통을 썼다. 그리고 사람 을 시켜 막 유비에게 보내려 하는데 친형인 광한 태수 장숙(張肅)이 찾아왔다. 장송은 급히 그 편지를 소매 속에 감추고 형을 맞아들였 다. 그러나 아무리 침착한 사람이라도 그런 형편에 태연할 수만은 없었다. 장숙이 얘기를 나누면서 보니 아우가 왠지 허둥대는 기색이 있어 마음속으로 슬몃 의심이 났다. 뿐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술을 내오게 한 장송은 형에게 술을 따르면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를 저질렀다. 허둥댄 나머지 소매에 넣어두었던 편지가 땅에 떨어지 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 편지를 주운 것은 장숙을 따라온 시중꾼이었다. 우연히 그 편 지를 줍게 된 그 시중꾼은 그게 자기 주인이 떨어뜨린 것이겠거니 여겨 그대로 간직했다가 술자리가 끝나 장숙이 장송의 집을 나선 뒤 에야 장숙에게 내놓았다.
장숙은 아우의 필체를 알아보았지만 그날의 태도가 수상쩍던 터 라 그대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엄청난 글이 담겨 있었다.
‘지난번 이 장송이 황숙께 올린 글은 작은 거짓과 틀림도 없건만, 황숙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질질 끄시기만 하고 일을 시작하지 않으십니까? 거스르면 쳐서 빼앗고 따르면 지켜주는 것은 옛사람이 귀하게 여겨온 이치가 아닙니까? 이제 큰일이 거의 이루어지려 하 는데 무엇 때문에 이곳을 버리고 형주로 돌아가려 하시는지 실로 알 길이 없습니다. 멀리서 들은 소문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잘못된 일 같습니다. 이 글을 받으시는 대로 급히 군사를 몰아 성도로 달려오 도록 하십시오. 저는 안에서 호응할 것이니 만에 하나라도 이번 일 이 잘못되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걸 읽은 장숙은 깜짝 놀랐다.
“내 아우가 집안을 아예 쑥밭으로 만들 일을 꾸미고 있구나. 이대 로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
그런 탄식과 함께 장숙은 그 밤으로 유장을 찾아갔다. 장숙이 그 편지를 바침과 아울러 아우 장송이 유비와 짜고 서천을 유비에게 바 치려 한다는 말을 하자 유장은 크게 노했다.
“내 평소에 저를 박하게 대접하지 않았거늘 제놈이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려 한단 말이냐!”
그렇게 소리친 뒤 곧 좌우를 보고 영을 내렸다.
“장송과 그 집안 노유를 모조리 잡아들여 저잣거리에서 목 베도록 하라!”
이에 장송은 그 아까운 재주를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한 채 목 없는 시체가 되고 말았다.
장송을 죽인 유장은 곧 문무의 관원을 불러 모아놓고 물었다.
“유비가 내 땅을 뺏으려 든다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제서야 마음이 급했는지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유비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서던 황권이 얼른 그 말을 받았다.
“머뭇거리셔서는 아니 됩니다. 즉시 사람을 뽑아 각처의 관애에 알리고, 군사를 보태주어 굳게 지키라 하십시오. 형주로부터 오는 것은 군사 한 사람, 말 한 필이라도 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유장도 이제는 그 말을 아니 들을 수 없었다. 곧 사람을 풀어 밤낮 을 가리지 않고 각처에 격문을 전하게 했다. 황권의 말을 그대로 옮 겨적은 격문이었다.
한편 가맹관에서 군사를 되돌린 유비는 부성을 향해 가면서 부수 관을 지키는 양회와 고패에게 사람을 보냈다.
“유황숙께서 형주로 돌아가기 전에 두 분 장군과 더불어 작별의 정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그 같은 소식을 들은 양회와 고패는 반가운 중에도 슬몃 딴생각 이 났다. 이미 그전부터 나도는 뜬소문에 속아 유비가 형주로 돌아 간다는 것은 의심 없이 믿는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나마도 유비를 그냥 보내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유비가 형주로 돌아가려고 왔다는데 어찌하면 좋겠나?”
양회가 먼저 고패의 속을 떠보듯 넌지시 물었다. 고패가 얼른 대 답했다.
“이번 기회에 유비를 아예 죽여버리세.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날카 로운 칼을 품고 찾아가 그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찔러 죽이는 게 어 떤가? 그렇게 하면 우리 주인의 큰 걱정거리를 하나 잘라 없애는 게 되네.”
“그것 참 좋은 계책일세. 실은 나도 유비를 그냥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양회도 대뜸 찬성하고 나섰다. 이에 뜻을 맞춘 두 사람은 이백여 명만 데리고 관을 나가 돌아가는 유비를 배웅하러 갔다. 유비의 심을 살까 보아 군사들은 거의 관 위에 남겨두었지만 대신 두 사람 의 가슴에는 각기 한 자루씩 날카로운 단도가 감추어져 있었다. 이때 유비는 형주로 돌아가는 양, 군사들을 모두 움직여 부수가에 이르렀다. 방통이 문득 무슨 생각이 났던지 유비를 찾아보고 말했다.
“만약 양회와 고패가 기꺼이 달려 나오더라도 이는 딴 뜻이 있어 서일 것이니 대비가 있어야 합니다. 또 그 두 사람이 오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 속셈을 헤아렸다는 증거이니 재빨리 군사를 몰아 부수관 을 뺏어야 할 것입니다. 결코 늑장을 부리시어 저들에게 방비할 틈 을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는데 홀연 한줄기 세찬 바람이 일어 말 앞에 세운 대장기 [ 字]를 쓰러뜨렸다. 좋지 않은 느낌이 든 유비가 방통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요?”
“이것은 하늘이 미리 주공을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양회와 고패 두 사람은 틀림없이 주공을 찔러 죽일 마음으로 오고 있으니 마땅히 잘 막아내야 합니다.”
방통이 한참을 살피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이에 유비는 겉옷 속에 두껍게 갑주를 껴입고 허리에는 보검을 차 만일에 대비했다.
얼마 뒤에 사람이 와서 알렸다.
“양회와 고패 두 장군께서 황숙을 배웅하러 오셨습니다.”
“잠시 군마를 쉬게 하고 그들을 맞아들이도록 하라.”
유비가 별 표정 없는 얼굴로 영을 내렸다. 곁에 있던 방통이 문득 위연과 황충을 불러 가만히 일렀다.
“태연하게 그들을 맞아들이되, 양회와 고패가 부수관에서 데려온 군사들은 한 사람도 돌아가게 해서는 아니 되오.”
황충과 위연은 방통의 속셈을 몰랐으나 받은 군령이라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이윽고 양회와 고패가 군사 이백을 거느리고 유비의 진채 앞에 이르렀다. 몸속에는 유비를 찔러 죽일 칼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겉으 로는 양을 끌고 술독을 지워 정성을 다한 배웅을 가장했다.
그러나 유비의 군중에는 이렇다 할 긴장이나 경계의 기색이 없었 다. 이에 양회와 고패는 자신들의 계책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믿어 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유비가 있는 장막 안도 마찬가지였다. 유비는 갑옷조차 입지 않고 방통과 단 둘이 앉아 있었다. 양회와 고패의 생각에는 언제든 한칼 에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숙께서 먼 길을 돌아가신다기에 저희들이 보잘것없으나마 술 과 안주를 마련해 특히 배웅하러 왔습니다.”
양회가 짐짓 은근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술을 따라 올렸다. 유비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저으며 말했다.
“오히려 수고하시는 것은 관을 지키는 두 분 장군이 아니시오? 이 잔은 마땅히 두 분께서 먼저 받으셔야겠소.”
상대를 조금도 의심 않는 듯한 겸양이었다. 두 사람은 그 잔을 지나치게 사양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까 봐 차례로 받아마셨다. 두사람이 모두 잔을 비운 뒤 유비가 다시 말했다.
“내게 두 분 장군과 은밀히 의논할 일이 하나 있소이다. 그밖의 사람들을 내보내야겠소.”
그러고는 두 사람이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들이 데리고 온 이백의 군사들은 모두 중군 쪽으로 몰아내버렸다.
양회와 고패는 거기서 퍼뜩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유 비가 장수들을 부르거나 군사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아니어서 잠자 코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기들 둘만으로도 유비 하나쯤은 찔러 죽일 수 있다고 믿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이었다. 양회와 고패의 졸개들이 모두 장막 밖으 로 물러나기 바쁘게 유비가 문득 그 둘을 꾸짖었다.
“나와 너의 주인은 한 집안의 형제 뻘이다. 그런데 너희 둘은 어 찌하여 서로 짜고 우리 사이의 정을 떼느냐?”
그제서야 둘은 거꾸로 유비에게 속은 걸 알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유비의 뒤를 이어 방통이 다시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무엇을 하느냐? 어서 저 두 놈을 묶지 못할까!”
그러자 언제 와 숨어 있었던지 장막 뒤에서 칼과 도끼를 든 군사 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두 사람을 꽁꽁 묶어버렸다.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묶인 두 사람을 가리키며 방통이 다시 좌우에게 명 했다.
“저놈들의 몸을 뒤져라. 반드시 흉측한 물건이 숨겨져 있을 것 이다.”
군사들이 명에 따라 양회와 고패의 몸을 뒤지니 정말로 날카로운 칼 한자루씩이 나왔다. 방통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둘을 목 베라 소리쳤다. 그러나 유비는 차마 둘을 죽일 수 없었다. 죄가 적어서가 아니라 유장과 그간 나눈 정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그걸 본 방통 이 잘라 말했다.
“저 두 놈은 처음부터 주공을 해치려 든 놈들입니다. 결코 살려둘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더욱 엄하게 도부수들을 꾸짖어 양회와 고패를 장막 앞에서 목 베게 했다. 이때 위연과 황충은 이미 양회와 고패가 데리 고 온 이백의 군사들을 한 사람 남기지 않고 잡아놓고 있었다. 유비 는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술을 나눠주면서 놀란 가슴을 다독거려주 었다.
“양회와 고패는 나와 유장 사이를 이간질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에는 날카로운 칼을 품고 와 나를 찔러 죽이려 했으므로 죽여버렸 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 너무 놀라지 마라.”
그러자 겁에 질려 있던 졸개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려 고마움을 나타냈다. 곁에 있던 방통이 그런 그들에게 덮어씌우듯 말했다.
“이제 우리는 너희들을 길잡이로 삼고 군사를 들어 부수관을 빼 앗으려 한다. 뜻대로 되면 너희 모두에게 무거운 상을 내릴 것인 바, 어찌할테냐?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겠느냐?”
이미 저희 대장 둘이 죽는 꼴을 본 그들이라 딴마음이 들 틈이 없 었다. 모두 목소리를 합쳐 시키는 대로 따르기를 다짐했다.
그날 밤이었다. 양회와 고패가 데려왔던 이백 명을 앞세운 유비의 대군은 소리 없이 부수관으로 다가갔다.
관문 아래 이르자 앞선 이백 가운데 하나가 성벽 쪽을 보고 소리쳤다.
“두 분 장군님께서 급한 일이 있어 돌아오셨다. 빨리 문을 열어라!”
성 위에서 내려다보니 어김없이 아침에 관문을 나간 자기편 군사 들이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문을 열어 그들을 맞아들이려는데 홀연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유비의 대군이 그들과 한덩어리가 되어 성안으 로 밀려들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인 데다 대장마저 없는 관 안의 군사들은 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유비는 칼에 피 한 방 울 묻히지 않고 부수관을 차지함과 아울러 그곳에 있던 모든 촉군 (蜀軍)까지 거둬들였다.
서천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험한 관문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손에 넣은 유비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잡이를 한 이백을 비롯해 그 싸움에 공이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 골고루 상 을 내린 뒤 군사를 나누어 관을 지키게 하며 그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이었다. 유비는 소를 잡고 술을 내려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함과 아울러 공청廳)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거나하게 오른 유비가 문득 방통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이 모임이 실로 즐겁지 아니하오?”
유장에 대한 의리나 천하의 이목 따위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하 는 소리였다. 어쩌면 그게 유비가 늘상 말해온 인의의 한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통이 정색을 하고 그런 유비를 나무랐다.
“남의 나라를 치고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이의 군사 부리는 법도가 아닙니다.”
그러자 유비가 성난 소리로 방통을 꾸짖었다.
“내가 듣기로 지난날 주(周)의 무왕도 주왕(紂王)을 쳐부수고 음 악을 지어 그 공을 기렸다 했다. 그렇다면 무왕이 포악한 주()를 친 것도 어진 이의 군사 부림이 아니란 말인가? 그대의 말이 어찌 이토록 이치에 맞지 않는가? 듣기 싫으니 어서 물러나라!”
술이 취한 탓인지, 아니면 애써 일을 그렇게 꾸며놓고도 드러내놓 고 기뻐하는 것을 나무라는 모사의 위선에 역정이 난 것인지는 모르 지만 어쨌든 대단한 폭언이었다. 그러나 방통은 무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인의 에 얽매인 유비의 우유부단함이 그렇게라도 덜어진 게 기꺼웠는지 도 모를 일이었다.
유비도 좌우의 사람들에게 부축되어 후당으로 돌아갔다. 밤이 깊 도록 코를 골고 난 뒤 겨우 술에서 깨어난 유비에게 곁에 있던 사람 들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일러주었다. 듣고 난 유비는 크게 뉘 우쳤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그것도 평소 스승처럼 대하던 방통 을 꾸짖어 내쫓았으니 그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옷을 갈아입고 당에 오른 유비는 방통을 모셔 오게 한 뒤 전날의 잘못을 빌었다.
“어제는 내가 술이 취해서 말이 지나쳤던 것 같소. 부디 마음에 껴듣지 않으셨기 바라오.”
그러나 방통은 별 표정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유비가 거듭 빌었다.
“어제 한 말은 순전히 내 실수였소이다. 크게 잘못되었소.”
그제서야 방통이 입을 열었다.
“잘못이야 제게도 있습니다. 군신이 함께 실수를 했는데 어찌 주공만의 잘못이었겠습니까?”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는 대꾸였다. 비로소 유비도 마음을 놓 고 마주 웃으며 전과 다름없이 방통을 대했다.
한편 유장은 믿었던 양회와 고패가 유비에게 죽음을 당하고 부수관이 떨어졌단 말을 듣자 크게 놀랐다.
“일이 정말로 이리 될 줄은 몰랐구나!”
그렇게 한탄하며 급히 문무 관원들을 불러모아 유비의 군사를 막 을 계획을 의논했다. 이번에도 황권이 앞장을 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속히 군사를 낙성으로 보내시어 이곳에 오 는 데 목줄기가 되는 길을 막아버리도록 하십시오. 유비가 아무리 날랜 군사와 사나운 장수를 거느리고 있다 해도 그곳을 지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장은 그 말을 따라 유괴, 냉포, 장임, 등현 네 장수에게 군사 오 만을 주며 말했다.
“그대들은 밤낮을 가리지 말고 낙성으로 달려가 유비를 막으라.”
이에 네 장수는 그날로 군사를 일으켜 성도를 떠났다.
낙성으로 가는 중에 유괴가 나머지 세 장수에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금병산(錦山) 속에 한 이인이 있어 도호(道號)를 자허상인(人)이라 하는데 사람의 죽고 사는 것과 귀하게 되고 천해지는 걸 모두 안다고 하네. 마침 오늘 우리가 바로 그 금병산 을 지나가게 되니 한번 그 사람을 찾아가 세상일을 물어보는 게 어 떤가?”
밤을 낮처럼 달려가야 할 급한 행군길에 자못 엉뚱한 소리가 아 닐 수 없었다. 장임이 그런 유괴의 말에 퉁을 놓았다.
“대장부가 군사를 이끌고 적과 싸우러 가면서 어찌 산야에 숨어 사는 사람을 찾아 그런 한가로운 짓거리를 하려는가?”
그래도 유괴가 우겨댔다.
“아닐세. 옛 성인이 말하시기를 지극한 정성으로 도를 닦으면 앞 날의 일도 알 수 있다 하였네. 그럴 만큼 고명한 이가 있다면 그에게 앞일을 물어 길한 일은 따르고 흉한 일은 피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러자 나머지 세 장수도 귀가 솔깃해 유괴의 말을 따르기로 했 다. 한시가 바쁜 행군길에 장수 되는 자들이 그 모양이니 유장의 운 은 이미 다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행군을 멈추게 한 네 장수는 오십여 기만 거느리고 금병산 에 이르러 지나가는 나무꾼에게 길을 물었다. 나무꾼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높은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그곳에 자허상인의 거처 가 있는 모양이었다.
네 장수가 헐떡이며 산꼭대기로 올라가니 과연 깨끗한 암자가 하 나 있었다. 상인(上人)을 시중드는 듯한 아이 하나가 집 앞에 나와 서 있다가 그들 네 장수를 맞아들이며 이름을 물었다. 네 장수가 차 례로 이름을 대자 아이는 그들을 암자 안으로 인도했다.
자허상인은 골풀로 짠 돗자리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네 사람은 엎드려 절한 뒤에 앞일을 물었다. 자허상인이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빈도(道)는 산야에 숨어 사는 쓸모없는 늙은이외다. 그런 일을 어찌 알 수 있겠소?”
그래도 유괴는 물러나지 않고 두 번 세 번 청했다. 이에 자허상인 은 동자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이른 뒤 여덟 구로 된 글을 써서 유괴에게 건네주었다.
왼쪽에는 용 오른쪽엔 봉 거느려 左龍右鳳
서천으로 날아드네. 飛西川
새끼 봉은 땅에 떨어져도 鳳雛墜地
누운용은 하늘로 솟는구나. 臥龍昇天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음은 一得一失
하늘의 정한 이치 天數當然
때를 보아 움직여서 見機而作
죽음길에나 들지 않도록 하라. 勿喪九泉
서촉의 앞날뿐만 아니라 그들 네 사람의 운수까지도 싸잡아 말하 고 있는 글귀였다. 그러나 유괴는 그걸 알아듣지 못하고 또 물었다.
“우리 네 사람의 운수는 어떻습니까?”
자허상인이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한 운수는 피하기 어렵소이다. 그걸 구태여 물어서 무엇 하겠소?”
그래도 유괴가 거듭 물었으나 자허상인은 두 눈을 꽉 감고 자는 듯 응답이 없었다. 네 장수는 하는 수 없이 금병산을 내려왔다. 유괴 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지 걱정스레 말했다.
“선인의 말이니 아니 믿을 수가 없소. 끝의 두 구절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구려.”
“다 미친 늙은이의 헛소리요. 그 말을 들어 무슨 득이 있겠소?”
장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유괴에게 핀잔을 주며 말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럭저럭 낙성에 이른 네 장수는 인마를 나누어 험한 길목에 배 치하고 유비를 막을 채비에 들어갔다. 유괴가 다시 나서서 다른 셋 에게 말했다.
“낙성은 성도를 지키는 담벼락과 같으니 이곳을 잃으면 성도 또 한 보존하기 어렵네. 우리 네 사람이 의논해서 두 사람은 안에서 성 을 지키고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진을 치도록 하는 게 어떻겠나? 성 앞에 있는 산기슭이 험하니 거기에 의지해 두 채의 진을 벌여 두 면 적병이 함부로 이 성을 넘보지 못할 것이네.”
그러자 냉포와 등현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나가서 진채를 세워보겠소.”
의논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절로 일이 풀린 셈이었다. 유괴는 몹시 기뻐하며 냉포와 등현에게 군사 이만을 나누어주고 성에서 육십 리 떨어진 곳에서 따로이 진채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자신과 장임은 남은 삼만을 이끌고 낙성을 지키면서 그들과 안팎에서 호응하기로 했다.
그 무렵 부수관의 유비는 방통과 더불어 낙성을 칠 의논을 하고 있었다. 홀연 사람이 와서 알렸다.
“유장이 네 장수를 뽑아 보냈는데, 그중 냉포와 등현은 이만의 군
사를 이끌고 성 밖 육십리 되는 곳에 두 개의 큰 진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낙성을 치기 전에 우선 냉포와 등현의 진채부터 두들겨 부숴야 할 판이었다. 유비가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누가 앞장서서 첫 공을 세워보겠는가? 가서 그 두 적장의 진채를 뺏어볼 사람은 나서라.”
“이 늙은이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미처 유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늙은 장수 황충이 팔을 걷어붙 이며 나섰다.
“장군께서 먼저 낙성으로 가셔서 냉포와 등현의 진채를 빼앗아주 신다면 반드시 큰 상을 내려 보답하겠소.”
유비가 그렇게 선뜻 허락했다. 황충은 남보다 먼저 공을 세울 기 회를 얻게 되자 몹시 기뻤다. 그날로 자신이 이끄는 군사들을 정돈 하고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황충이 유비를 작별하고 막 떠나려 하 는데 문득 한 장수가 나와 소리쳤다.
“황(黃)장군께서는 이미 나이가 적지 아니하신 터에 어떻게 이 힘 든 길을 떠나려 하십니까?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한번 가보았으면 합니다.”
유비가 보니 그는 다름 아닌 위연이었다. 황충이 불끈해 위연을 나무랐다.
“내가 이미 휘하의 군사들에게 장령(將)을 내렸는데 자네가 왜 나서는가? 감히 내 공을 뺏어보겠다는 뜻인가?”
“장군께서는 늙으셔서 뼈와 살이 이미 전처럼 말을 듣지 아니할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 냉포와 등현은 둘다 촉(蜀) 땅의 이름난 장수 로서 한창 혈기가 성한 젊은 것들이라 합니다. 혹시라도 장군께서 그들을 사로잡지 못하시게라도 된다면 주공의 큰일을 그르쳐버릴 게 아니겠습니까? 그 때문에 제가 그 일을 대신하려고 나선 것일 뿐 달리 나쁜 뜻은 없습니다.”
위연이 그렇게 대꾸했다. 말투는 한껏 공손했으나 말뜻에는 황충 의 늙음을 얕보는 데가 많았다. 황충이 버럭 성을 내며 소리를 질 렀다.
“너는 내가 늙었다 늙었다 하는데, 어떠냐? 나하고 무예라도 한번 겨루어볼 작정이냐? 내 비록 나이를 좀 먹었다 해도 너쯤은 몇 수 가르쳐줄 수 있다!”
위연도 지지 않았다.
“그거 좋지요. 주공께서 보고 계시는 데서 무예를 겨루어 이기는 편이 가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황충의 부아를 돋우었다. 그 말을 들은 황충은 더 참을 수 가 없었다. 계단 아래로 우르르 달려내려가 젊은 군교 하나를 보고 소리쳤다.
“가서 내 칼을 가져오너라. 내 오늘 위연의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봐야겠다.”
그러면서 위연을 노려보는 품이 정말로 한바탕 드잡이질을 벌이려는 심사 같았다. 유비가 그런 황충을 급히 말렸다.
“아니 되오. 이제 내가 군사를 이끌고 서천을 뺏으려 함에 있어 믿는 것은 오직 두 분 장군의 힘이오. 만약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면 한쪽이 반드시 상할 것인즉,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나의 큰일은 그 르쳐지고 말 것이오. 제발 두 장군은 다투지 말고 속을 푸시오.”
그때 곁에 있던 방통이 나섰다.
“그대들 두 분께서는 서로 다투실 필요가 없소. 지금 냉포와 등현 은 따로 영채를 세우고 있다 하니 두 분 장군은 각기 한 영채씩을 맡아 치면 될 것이오. 으뜸가는 공은 먼저 적의 영채를 빼앗은 쪽에 게 돌리면 될 일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두 사람도 구태여 서로 다툴 까닭이 없었다. 이에 황충 은 냉포의 영채를 맡고, 위연은 등현의 영채를 맡아 각기 군사를 이 끌고 떠나기로 결정을 보았다. 하지만 방통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 지 않은 듯했다. 황충과 위연이 떠난 뒤 유비에게 권했다.
“저 두 사람이 가는 길에 서로 다툴까 두렵습니다. 주공께서 몸소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가시어 저들의 뒤를 받쳐주도록 하십시오.”
유비도 마음이 아주 놓이지 않던 터라 그 말을 따랐다. 방통을 부 성에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은 유봉, 관평과 더불어 오천 군 사를 거느리고 황충과 위연을 뒤따르기로 했다.
한편 자신의 진채로 돌아온 황충은 곧 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오늘 밤 사경쯤에 밥 지어 먹고 오경에는 떠날 채비를 마치도록 하라. 날이 새는 대로 떠나리라!”
위연을 의식해서 다분히 서두는 기색이 있는 영이었다. 그런데 위연은 그런 황충보다 한술 더 떴다. 가만히 사람을 풀어 황충이 언제 떠나는가를 알아본 뒤 자신이 이끄는 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우리는 오늘 밤 삼경쯤에 밥 지어 먹고 사경쯤에는 떠날 수 있도 록 하라. 날이 샐 무렵 해서는 등현의 영채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모든 걸 황충보다 한 경씩 앞당긴 영이었다. 군사들은 들은 대로 채비에 들어갔다. 모두 배불리 먹고 말은 방울을 떼었으며 사람은 하무[枚, 소리를 못 내게 입에 무는 나뭇가지]를 물었다. 그리고 깃발은 말고 갑옷은 싸매, 어두운 밤에 소리 없이 적의 진채를 들이칠 수 있 게 했다.
그럭저럭 삼경이 되었다. 위연은 군사들을 재촉해 길을 떠났다. 그런데 길을 반쯤 갔을 무렵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냥 현의 진채만 쳐들어서는 내 능력이 그리 돋보이지 않을 것이다. 먼저 냉포의 진채부터 들이쳐 이긴 뒤에 다시 등현의 진채 를 두들겨 부숴야겠다. 그렇게 되면 두 곳을 빼앗은 공이 모두 내 것 이 될 게 아닌가?’
위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 위에서 가만히 영을 내렸다.
“군사들은 모두 왼편 산그늘로 붙어라. 냉포의 진채부터 먼저 빼 앗으리라!”
이에 위연의 군사들은 처음에 맡은 등현은 제쳐놓고 냉포 쪽부터 먼저 덮쳐갔다. 희끄무레 날이 밝아올 무렵에는 냉포의 진채가 저만 치 보이는 곳까지 이를 수 있었다. 위연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잠 시 군사를 쉬게 했다. 군사들은 좋아라 북과 징과 기치 창칼을 모두 세워놓고 초저녁부터 서두르느라 지친 팔다리를 쉬었다.
하지만 냉포라고 경계도 없이 잠만 자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미리 풀어논 군사들이 곧 위연이 온 것을 알아 냉포에게 전했다. 냉포는 놀라는 대신 오히려 위연을 사로잡을 온갖 채비를 하고 말에 올랐 다. 그리고 한소리 큰 북소리에 맞추어 삼군을 몰고 한꺼번에 쏟아 져 나오니 기습은 오히려 위연이 당하는 꼴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건만 위연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침없 이 말을 박차고 달려 나가 냉포와 맞붙었다. 냉포도 또한 촉에서는 이름깨나 날리는 장수라 둘의 싸움은 서른 합에 이르도록 승부가 가 려지지 않았다.
이때 냉포의 군사들이 길을 나누어 위연의 군사를 덮쳤다. 눈 한 번 제대로 붙여 보지 못하고 밤길을 달려온 위연의 군사들은 사람과 말이 함께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거기다가 갑작스런 기습을 받고 보니 견딜래야 견딜 재간이 없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뒤돌아서 내 빼기 바빴다.
냉포와 싸우던 위연도 등 뒤의 진채에서 나는 어지러운 함성을 들었다. 아무래도 자기편 군사들이 적을 당해내지 못하고 쫓기는 것 같자 그 또한 절로 기가 꺾였다. 한칼질로 냉포를 주춤 물러나게 만 든 뒤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