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6화 : 새끼 봉은 땅에 떨어지고 누운용은 하늘로 솟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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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6화 : 새끼 봉은 땅에 떨어지고 누운용은 하늘로 솟네


새끼 봉은 땅에 떨어지고 누운용은 하늘로 솟네

대장인 위연이 그 모양으로 쫓기니 나머지 졸개들은 더 말할 나 위조차 없었다. 눈사태 지듯 뭉그러져 달아나자 냉포가 이끄는 서천 의 군사들은 더욱 힘이 나 뒤쫓았다. 위연이 이끄는 유비의 군사들 이 그렇게 한 오리쯤 쫓겼을 때였다. 문득 눈앞의 산그늘에서 북소 리가 크게 울리며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서천의 또 다른 장수 등 현이 이끄는 군사였다.

“위연은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등현이 길을 끊고 서서 기세좋게 소리쳤다. 등과 배로 적을 맞게 된 위연은 더욱 당황했다. 힘으로 밀어붙일 양으로 말을 박차 앞으 로 내닫는데, 이번에는 또 타고 있던 말이 말썽을 부렸다. 급히 내닫 다가 앞발을 잘못 디뎌 풀썩 무릎을 꿇으며 위연을 내동댕이쳐버린 탓이었다.

등현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듯 말을 몰아와 그런 위연을 덮 쳤다. 창을 번쩍 들어 아직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위연을 한 번에 꿰어버리려는 듯 내질렀다. 맹장 위연도 그대로 끝나는가 싶은 찰나 시위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날아와 등현의 가슴에 박혔다.

등현이 한소리 괴로운 외침과 함께 말에서 떨어지자 뒤쪽에서 그 꼴을 본 냉포가 달려 나왔다. 냉포가 이미 정신을 잃은 등현을 구해 말 위로 끌어올리려는데 맞은편 산그늘에서 한 장수가 달려 나오며 크게 소리쳤다.

“노장 황충이 여기 있다. 쥐 같은 무리는 함부로 닫지 마라!” 그러고는 칼을 춤추듯 휘두르며 똑바로 냉포에게 덮쳐갔다. 냉포 가창을 들어 맞서보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몇 번 어울려 보기 도 전에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바빴다. 황충이 이긴 기세를 타고 냉포를 뒤쫓으니 싸움터의 형세는 금세 뒤바뀌었다.

한 장수가 말에서 떨어져 죽고 다른 장수가 쫓기는 꼴을 보고 서 천의 군사들은 갑자기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의 치솟던 기 세는 간 곳 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에만 바빴다.

위연을 구한 황충은 추격을 늦추지 않고 냉포의 진채 앞까지 휘 몰아갔다. 자신의 진채에 이르자 좀 힘이 솟는지 냉포가 다시 말 머 리를 돌려 황충과 맞섰다. 그럭저럭 여덟아홉 합은 버텼으나 아무래 도 냉포는 황충의 적수가 못 되었다. 이미 자신의 왼편 진채는 지키 기 어렵다고 여겨 그걸 버리고 오른쪽 진채로 달아났다. 등현은 죽 었지만 그 진채만은 아직 성하리라고 믿고 거기서 쫓기는 저희 편 군사를 수습해 버텨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변괴인가. 오른편 진채로 가보니 여기저기 깃발이 펄럭이는데 그게 전부 낯설었다. 냉포는 놀란 나머지 멍하니 말꼬리 를 잡고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진채 안에서 한 장수 가 말을 몰아 나왔다. 금투구에 비단 전포를 입은 유비였다. 그 좌우 로는 유봉과 관평이 뒤따르고 있었다.

“진채는 내가 이미 뺏은 지 오래다. 이놈, 어디를 가려느냐?” 

유비가 소리쳐 냉포를 꾸짖으며 항복을 권했다. 방통의 말을 따라 위연과 황충의 뒤를 받쳐주러 왔던 유비는 황충이 승세를 타고 냉포 를 뒤쫓자 얼른 길을 바꾸어 등현의 진채를 뺏어버린 것이었다.

앞뒤로 적을 맞은 냉포는 나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산비탈에 난 좁은 길 하나를 찾아 그걸 타고 낙성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는 못 갈 팔자였다. 미처 십 리도 가기 전에 홀연 복병이 나타나 냉포에게 갈퀴와 밧줄을 던져댔다. 좁은 길목에서 만난 복병이라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솟지 않고서는 벗어날 길이 없 었다. 냉포는 발버둥도 제대로 쳐보지 못하고 산 채로 붙들리고 말 았다.

냉포를 사로잡은 것은 위연이었다. 전날 밤 황충의 구함을 받고서 야 퍼뜩 정신이 든 위연은 자신이 공을 서두르다가 큰 죄를 지었음 을 알았다. 어떻게 죄를 씻을까 궁리하다가 군사를 수습한 뒤 사로 잡은 서천의 군사에게 길을 잡게 하여 그리로 갔다. 만약 황충이 냉 포의 진채를 빼앗게 되면 냉포는 틀림없이 그 길을 지나 낙성으로 돌아가리라 여겨 매복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다행히 바라던 대로 냉포를 사로잡자 위연은 이제 살았다 싶었다. 사로잡은 냉포를 꽁꽁 묶어 앞세우고 유비의 진채를 찾아갔다.

그때 유비는 서천 군사들을 상대로 한창 선심을 쓰고 있었다. 싸 움터 모퉁이에 면사기(免死旗)를 세워놓고, 아무리 적군이라도 무기 를 거꾸로 들고 갑옷을 벗어던진 자는 죽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항복하는 적군을 상하면 목을 베리라 하니 장졸들은 모두 그 명을 따랐다.

등현과 냉포를 모두 잃어버린 서천의 군사들은 항복만 하면 죽이 지 않는다는 걸 알자 모두 무기를 놓고 갑옷을 벗어던졌다. 유비가 그들에게 다시 말했다.

“너희 서천 사람들도 모두 부모와 처자는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항복하기를 원하는 자는 우리 군사로 거두어 쓸 것이요, 항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놓아줄 터이니 모두 돌아가거라.”

항복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항복하지 않는 자까지 살려서 보 내준다니 실로 놀라운 너그러움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감격한 서천 군사들의 함성은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그런 유비의 진채에 먼저 이른 것은 황충이었다. 황충은 그 곁에 진채를 내리기 무섭게 유비에게 달려가 말했다.

“위연이 군령을 어기고 공을 서두르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볼 뻔했 습니다. 마땅히 그 목을 베어 장졸들에게 널리 군령의 무거움을 보 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밝혔다. 듣고 난 유비도 성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곧 사람을 보내 위연을 급히 불러오게했다.

잠시 후 나타난 위연은 냉포를 사로잡은 일을 앞세워 유비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 뜻밖의 공로에 유비의 성난 기색이 일시에 풀어 지며 황충을 돌아보고 말했다.

“비록 위연은 큰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냉포를 사로잡은 공 또한 적지는 않소. 아무래도 이 공으로 앞서 지은 죄를 씻어주어야겠소 이다.”

그러고는 위연을 보고 엄하게 일렀다.

“위연은 듣거라! 군령을 어긴 죄는 목 베어 마땅하나 여기 계신 노(老)장군의 말씀이 하도 지극해 이번만은 용서한다. 이후 다시는 이번과 같은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아울러 노장군께 감사함을 잊 지 마라.”

마치 황충이 힘써 말리는 바람에 위연을 용서해준다는 투였다. 유 비의 눈부신 용인술(用人術)이었다. 자신의 공을 가로채려 하다가 일을 망친 위연을 오히려 황충이 나서서 변호해주었다니 누군들 황 충의 너그러움에 감격하지 않겠는가. 그 말을 들은 위연은 진정으로 뉘우치며 황충에게 잘못을 빌었다.

황충은 황충대로 감격이 컸다. 나이도 잊고 젊은 위연을 탄해 험 구함으로써 유비에게 옹졸함을 보였는데도, 유비는 없는 말을 지어 내 가며 자신의 너그러움을 드러내 위연으로 하여금 마음에서 우러 난 잘못을 빌도록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또 무거운 상까지 내려 자신이 세운 공은 공대로 추켜주니 황충은 위연에게 느꼈던 노여움을 아니 잊을래야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자칫 사이가 틀어져버릴 뻔한 두 사람을 그렇게 화해시킨 유비는 곧 사람을 시켜 냉포 를 끌어오게 했다. 냉포가 장막에 이르자 유비는 몸소 냉포에게 다 가가 그 묶인 끈을 풀어 주고 술을 내리며 달랬다.

“그대는 이제 내게 항복함이 어떤가.”

냉포가 얼른 대답했다.

“황숙의 어지심에 기대 죽음을 면했는데 어찌 항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낙성에 있는 유괴와 장임도 불러와 항 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저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벗들이라, 내가 돌아가서 권하기만 하면 당장 달려와 항복하고 낙성을 들어 황숙께 바칠 것입니다.”

한 나라에서 이름깨나 있는 장수의 항복 치고는 너무도 무게가 없었다. 거기다가 딴사람까지 끌어들여 항복을 하도록 만들겠다고 나서는 게 이상했으나, 유비는 기뻐해 마지않았다. 새 옷과 안장을 내리고 말을 주어 낙성으로 돌아가게 했다.

“저 사람을 놓아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한번 몸을 빼내 가면 다시 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위연이 보다 못해 유비를 말렸다. 그래도 유비는 냉포를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만히 웃으며 오히려 위연을 안심시키려 들었다. 

“내가 인의로 사람을 대접하면 그 사람도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 이다.”

하지만 결국 맞게 본 것은 위연 쪽이었다. 낙성으로 돌아간 냉포 는 장임과 유괴를 만나 항복을 권하기는커녕 엉뚱한 큰소리만 쳤다.

“내가 잡히다니 무슨 소릴, 무더기로 덤벼들기에 여남은 놈 때려 죽이고 말을 뺏어 빠져나왔지.”

사로잡혔다가 유비가 놓아줘서 돌아왔다는 말은 쏙 빼고 그렇게 둘러댄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싸움은 진 싸움, 성 밖에서 서로 호 응하러 나간 이만의 장졸 가운데 냉포 혼자 덜렁덜렁 돌아왔으니 유 괴로서는 황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유장은 크게 놀랐다. 역시 유괴처럼 황망하여 여 럿을 불러놓고 대책을 물었다. 유장의 맏아들 유순(劉循)이 나서 말 했다.

“제가 먼저 군사를 이끌고 낙성으로 가서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유장이 대견하면서도 마음 놓이지 않는다는 듯 여럿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미 내 아들이 가겠다고 나섰지만 곁에서 도울 사람이 있어야 겠소. 누가 마땅하겠소?”

유장의 물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다시 한 사람이 나섰다. 유장이 보니 사돈간이 되는 오의(吳懿)란 사람이었다. 유장이 미덥다는 표 정으로 두말 없이 허락했다.

“사돈 어른께서 저 아이를 도와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 니다. 그런데 부장으로는 누구를 데려갔으면 좋겠습니까?”

“오란(吳蘭)과 뇌동(同)이 좋겠습니다.”

오의가 미리 생각해둔 게 있는 듯 그렇게 두 사람을 댔다. 이에 유 장은 오의에게 오란과 뇌동 및 군사 이만을 주고 아들 유순을 도와 낙성을 지키도록 보냈다.

성도에서 보낸 구원병이 이르자 유괴와 장임은 반갑게 그들을 맞아들이고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듣고 난 오의가 문득 두려운지 여럿을 보고 물었다.

“군사가 성안에 이르면 막아내기 어렵소. 여러분에게는 어떤 고견이 없으시오?”

해놓은 거짓말이 있어 공연히 급해진 냉포가 얼른 나섰다. 

“이 부근에는 부강(江)이 흐르는데 물살이 매우 빠릅니다. 한편 앞에 있는 적의 진채는 산 발치에 자리 잡고 있어 매우 낮은 땅이 됩 니다. 제게 군사 오천만 주시면 그들에게 괭이와 삽을 들려 먼저 가서 부강의 물을 끊고 그 물로 유비의 군사를 모조리 쓸어버리겠습니다.” 

오의가 들어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이에 냉포에게 군사 오천을 주 어 먼저 강물을 끊으러 보내고, 다시 오란과 뇌동에게도 한 갈래 군 사를 나누어주어 그런 냉포의 뒤를 받쳐주게 했다. 명을 받은 냉포 는 이번에야말로 공을 세워볼 기회라 생각하고 군사들에 앞장서 강 물을 끊는 데 쓸 기구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한편 유비는 그때 부성에 가 있었다. 위연과 황충에 각기 진채 하 나씩을 맡기고 자신은 방통과 더불어 앞일을 의논하기 위해 돌아간 것이었다. 유비가 방통에게 낙성의 소식을 전하며 다음 계책을 짜고 있을 때 문득 사람이 와서 알렸다.

“동오의 손권이 한중의 장로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고 서천 을 치라고 부추겼다 합니다. 이에 장로는 군사를 이끌고 가맹관 쪽 으로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가 놀란 얼굴로 방통을 보며 물었다.

“만약 가맹관을 잃으면 우리는 돌아갈 길이 끊기는 셈이 되오. 그리 되면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게 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나 방통은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곁에 있는 맹달에게 슬쩍 그 일을 떠넘겼다.

“공은 촉 땅 사람이니 이곳 지리는 훤히 알고 있으실 거요. 가맹 관으로 가서 그곳을 한번 지켜보시지 않겠소?”

맹달도 걱정 않기로는 방통이나 다름없었다. 그쯤이야 큰일도 아 니라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제가 천거하는 사람 하나와 같이 가서 지키게 해주신다면, 만에 하나라도 관(關)을 잃으실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요?”

유비가 반색하며 물었다. 맹달이 대답했다.

“일찍이 형주 유표 밑에서 중랑장을 지냈던 사람입니다. 남군 지 강이 고향인데 이름은 곽준霍峻)이요, 자는 중막(仲邈)이라 쓰지요.” 

유비는 곽준을 본 적이 없지만 맹달이 그토록 장담하는 것으로 보아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곧 사람을 보내 곽준을 불러오게 한 뒤 맹달과 함께 가맹관을 지키도록 보냈다.

가맹관을 막는 일이 그렇게 풀리자 방통은 남은 의논을 내일로 미루고 유비 앞을 물러나왔다. 방통이 거처로 돌아와 잠시 쉬려는데 문득 사람이 와서 일렀다.

“군사를 찾아와 꼭 뵙겠다는 손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색을 말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미루어 여느 손님은 아닌 듯했다. 여기저기 벌여둔 일이 많아 인재가 아쉬운 때라 방통은 몸소 마중을 나갔다. 그 사람은 키가 여덟 자에 생김이 매우 우람 했다. 머리를 짧게 끊어 목덜미까지 풀어내린 데다 옷차림은 몹시 너저분했지만 짐작대로 예사 인물 같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누구신지요?”

한참을 살피던 방통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공손하게 물었다. 그러 나 그는 대답도 없이 성큼성큼 당 위로 올라오더니 거기 있는 침상 위에 벌러덩 누웠다. 방통은 그런 손님의 행티가 매우 괴이쩍어 두 번 세 번 같은 물음을 되풀이했다.

“조금만 기다리게나. 나는 그대와 더불어 천하의 큰일을 얘기하러 왔네.”

이윽고 그 손님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눈 아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투였다. 방통은 더욱 이상했으나 함부로 그를 대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살피다가 좌우를 향해 명했다.

“무엇을 하는가? 귀한 손님이 왔으니 어서 술과 밥을 내오너라.” 

우선 대접을 극진히 하며 그 하는 양을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무 언가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을 지녔기에 감히 그렇게 나올 수 있 으리라 짐작한 까닭이었다.

잠시 후 상다리가 휘도록 푸짐한 음식이 나왔으나 손님은 조금도 겸양하는 기색이 없었다. 제 것 제 먹는다는 듯 거침없이 먹어대는 데 그 먹성이 또한 엄청났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입에 쏟아넣어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 술항아리마저 깨끗이 비운 뒤 다시 침상으로 가 벌러덩 누워버리는 것이었다.

방통의 궁금증은 더 커졌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는데 도통 입을 열지 않을뿐더러, 더 딱한 것은 그 사람이 누군지조차 모른다는 점이었다.

“법효직(法直)을 모셔오너라.”

한참을 궁리하던 방통은 문득 사람을 보내 법정을 불러오게 했다. 법정은 서천 사람이니 어쩌면 그 낯 모를 손님을 알아볼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서였다.

방통의 갑작스런 부름을 받은 법정은 무슨 일인가 싶어 급하게 달려왔다. 방통은 법정을 문밖에 나가 맞은 뒤 찾아온 손님의 생김 새며 행동거지를 자세히 일러주고 혹시 그런 사람을 아는지 물었다. “그렇다면 팽년(彭年)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법정이 그렇게 말하며 그 손님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러나 법정이 살펴보기도 전에 상대편이 먼저 법정을 알아보았다. 

“효직은 그간 별일이 없었는가?”

그때껏 평상에 누웠었던 그 손님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법정에게 소리쳤다. 법정도 그를 잘 아는 듯 반갑게 인사말을 나누었다. 방통 이 그런 법정에게 물었다.

“그럼 효직이 잘 아는 분이시오?”

“그렇습니다. 이 친구는 광한 사람으로 이름은 팽양(彭)이요, 자 는 영년(年)이라 씁니다. 촉 땅의 호걸인데 바른 말을 하다가 유장 의 노여움을 사서 머리터럭이 잘린 채 남의 종노릇을 한 적이 있지 요. 지금 머리칼이 짧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선비로서 머리칼을 잘리고 남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죽음에 버금가는 형벌이었다. 유장으로부터 그런 형벌을 받았다면 그에 대한 앙심이 어떠할지는 절로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반드시 유장에게는 해롭고 우리 주공에게는 이로운 일을 하러 온 사람이겠구나.’

속으로 그렇게 헤아린 방통은 전보다 한층 더 극진하게 팽양을 대접하며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떤 가르침이 있어 저희를 찾아오셨습니까?”

“나는 당신들 수만 군사의 목숨을 구해주려고 특별히 찾아왔소. 유황숙을 뵙고 다 말씀드리겠소이다.”

팽양이 그런 엄청난 소리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법정은 급히 유비 에게 그 말을 전했다. 수만 군사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말에 놀란 유 비가 만사를 제쳐놓고 팽양을 불러들였다.

“지금 나의 수만 군사가 위태롭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서로 처음 보는 예가 끝나기 무섭게 유비가 물었다. 팽양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황숙께서는 낙성 근처에 나가 있는 앞 진채에 얼마간의 군마를 나누어두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위연과 황충이 진채 하나씩을 맡아 거기 있습니다만……” 

유비가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팽양이 나무라듯 말했다. “황숙께서는 장수 된 이로서 어찌하여 지리(地理)도 알지 못하십 니까? 낙성 근처에 나가 있는 앞 진채는 부강을 곁에 두고 있습니 다. 만약 적이 강물을 그리로 끌어대고 다시 군사를 풀어 앞뒤를 막 아버린다면 황숙의 수만 대군은 단 한 사람도 살아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제서야 유비도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진을 치는 데 가장 중요한 지리를 살피지 않았던 것이다. 팽양이 다시 그런 유비에게 덧 붙여 말했다.

“지금 강성(星, 북두성)이 서쪽에 있고 태백(太白星, 금성)은 이 곳을 쬐니 반드시 불길한 일이 있을 듯합니다. 부디 모든 일에 신중 을 기하십시오.”

당장 빠져 있는 위태로움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앞날의 일까지 살펴 미리 경계할 바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유비는 고마운 느낌을 이기지 못해 넙죽 엎드려 절하고 그날부터 팽양을 막빈(幕賓)으로 삼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위연과 황충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새 로운 영을 전하게 했다.

“아침저녁으로 순찰을 엄히 하여 적이 강물을 끊지 못하게 하라. 이 일을 게을리했다가는 그곳의 어느 누구도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 울 것이다.”

영을 받은 황충과 위연은 의논 끝에 두 사람이 각기 하루에 한 번 씩 순찰을 돌되 만약 적을 만나면 서로 힘을 합치기로 결정을 보았다. 한편 모든 준비를 마친 냉포는 황충과 위연이 그렇게 대비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비 바람이 몹시 이는 것을 보고 군사 오천을 몰아 강가로 나갔다. 바람 소리에 자기편의 행군이나 삽질 괭이질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가 묻히리라 여겨 그날 밤을 고른 것이었다.

냉포가 막 군사를 풀어 강물을 끊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뒤편에서 함성이 크게 일었다. 그제서야 적이 미리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고 놀란 냉포는 급히 군사를 몰았다.

마침 그날 밤 순찰을 돌던 것은 위연이었다. 위연이 황황히 물러 나는 냉포를 뒤쫓으며 몰아대니 서천의 군사들은 저희끼리 얽혀 밟 혀 죽는 자가 칼맞아 죽는 자보다 더 많았다.

냉포는 뒤 한번 돌아봄이 없이 달아났으나 그도 끝내 빠져나가지 는 못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는데 어느새 위연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냉포가 창을 들어 맞서보았지만 몇 번 엇갈리기도 전에 냉포는 다시 한번 위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서천 쪽에서 오란과 뇌동 두 장수가 그런 냉포를 도우려고 나왔 으나 그도 소용이 없었다. 유비 쪽에서도 황충이 기별을 받고 나타 나 오란과 뇌동의 군사들을 여지없이 두들겨 부숴버린 까닭이었다. 위연은 사로잡은 냉포를 끌고 부관의 유비에게로 갔다. 냉포를 본 유비가 성난 얼굴로 꾸짖었다.

“나는 너를 인의로 대해 놓아 보냈거늘, 네 어찌 감히 나를 저버 렸느냐? 이번에는 너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러고는 곧 냉포를 끌어내 목 베게 하는 한편 위연에게는 큰 상 을 내렸다. 하지만 위연에 못지않게 고마운 것은 팽양이었다. 그의 귀띔은 낙성에 나가 있는 군사들을 위태로움에서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장을 사로잡아 목 벨 수 있게 했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그 고마움을 나타내는 뜻으로 크게 잔치를 열어 팽양을 대접했다. 그런데 한창 잔치가 무르익었을 무렵이었다. 홀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형주에 계신 제갈군사께서 마량을 보내 글 한 통을 올려왔습니다.”

이에 유비는 곧 마량을 불러들이고 물었다.

“형주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형주는 평안하니 주공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량은 그렇게 대답하고 품안에서 제갈공명이 써준 편지 한 통을 꺼내 바쳤다. 유비가 뜯어보니 대략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양이 간밤에 태을수(太乙數)를 셈해보니 올해는 계해년(癸亥年)이 라 강성이 서쪽에 있고, 또 건상(乾象, 천문)을 보니 태백성이 낙성 어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으뜸되는 장수의 신상에 흉한 일 은 많고 길한 일은 적으리라는 조짐이니 부디 모든 일에 살피고 삼 가는 마음을 지니시어 가볍게 나서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잖아도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걱정하던 유비는 그 글을 읽자 마음이 달라졌다.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마량에게 말했다.

“자네는 먼저 형주로 돌아가 나도 이만 형주로 돌아갈 작정이더 라고 공명에게 전하게. 서천을 뺏는 일은 가서 다시 의논해보는 게 좋겠네.”

그러나 방통은 달랐다. 공명의 글을 훑어본 뒤에 속으로 생각했다. ‘공명은 내가 서천을 뺏어 홀로 공을 세우게 되는 걸 걱정하고 있구나. 그 때문에 이런 글을 보내 막으려고 한다…………’

그대로 밀고 나가면 어렵지 않게 서천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는 그로서는 당연히 해봄직한 의심이었다.

“저 역시 태을수를 셈해보아 강성이 서쪽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 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공께서 서천을 얻게 되시리라는 걸 나타내 는 것일 뿐 주공께 흉한 일이 있으리란 뜻은 아닙니다. 또 저 역시 천문을 보아 태백성이 낙성 어름을 쬐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만 마 찬가지로 그게 반드시 우리에게 흉한 일이 있으리란 뜻은 아닌 듯합 니다. 먼저 촉장 냉포를 사로잡아 목 벴으니 그 흉조는 이미 풀렸다 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공께서 쓸데없는 걱정으로 일을 중도 에 그만두셔서는 아니 됩니다. 되도록 빨리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서천을 차지하도록 하십시오.”

방통이 유비를 잡고 그렇게 두 번 세 번 권했다. 마음 내키지 않아 하던 유비도 방통이 그렇게 나오자 곧 생각을 바꾸었다. 군사를 형 주로 되돌리는 대신 앞으로 내몰아 서천 뺏는 일을 서둘렀다.

황충과 위연은 유비가 방통과 더불어 대군을 이끌고 이르자 반갑 게 진채 안으로 맞아들였다. 방통은 자리를 잡고 앉기 바쁘게 법정 에게 물었다.

“앞으로 나가 낙성에 이르는 데 작은 길이 몇이나 있소?”

법정이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아는 대로 일러주었다. 유비가 품속에서 전에 장송이 그려준 지도를 꺼내 맞춰보니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법정이 그 가운데 두 갈래 길을 짚으며 설명했다.

“이 산 북쪽에 있는 것은 큰 길인데 바로 낙성의 동문에 이르게 됩니다. 또 이쪽 남쪽에 있는 산속에 난 작은 길은 낙성 서문에 이르게 되지요. 두 길 모두 군사가 나아가기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방통이 유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위연을 선봉으로 삼아 남쪽에 있는 소로로 나아가겠습니다. 주공께서는 황충을 선봉으로 삼아 산 북쪽의 큰 길로 나아가십시오. 양쪽 모두 낙성에 이르면 그때 힘을 합쳐 한꺼번에 낙성을 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유비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던지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받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고 좁고 험한 길도 자 주 다녔소. 내가 남쪽 소로로 갈 테니 군사께서 북쪽 큰 길로 나아가 도록 하시오. 군사께서 낙성 동문을 들이치고 내가 서문을 맡으면 되지 않겠소?”

유비는 창칼을 못 다루고 말타기에도 능하지 못한 방통이 험한 산길로 가는 게 아무래도 걱정되었다.

“아닙니다. 큰 길은 반드시 적이 군사를 내어 막을 것이니 싸움을 많이 겪은 주공께서 군사를 이끌고 나가셔야 합니다. 제가 소로로 나가는 편이 옳습니다.”

방통이 그렇게 우겼다. 얼핏 들어서는 그럴듯한 말이었으나 유비 는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한 번 더 방통의 마음을 움직여볼 양 으로 꿈 얘기까지 꺼냈다.

“아무래도 군사께서 좁은 산길을 가시는 게 마음에 걸리는구려. 어젯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쇠막대기로 내 오른편 팔을 후려쳤는데 꿈에서 깬 지금까지도 아직 아픔이 느껴지오. 이번에 나서 는 길이 좋지 않을 조짐 같아 실로 걱정이오.”

“장사가 싸움터에 나간 이상 죽지 않으면 다칠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까짓 꿈속에 있었던 일로 어찌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방통은 조금도 꺼려하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유비가 이번 에는 공명의 글을 핑계로 댔다.

“내가 이렇게 걱정하는 것은 공명이 보낸 글 때문이기도 하오. 차 라리 군사께서는 돌아가 부관이나 지키시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방통이 어이없다는 듯 껄껄거리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지나치게 공명에게 홀리셨습니다. 그 사람은 저 혼자 서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게 싫어 그 같은 편지로 주공을 걱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마음에 걱정이 있으면 꿈속에도 나타나는 법, 그런 꿈이 흉한들 걱정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 방통은 간과 뇌를 땅에 쏟고 죽게 되더라도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주공께서도 다시는 여러 말씀 마시고 어서 나아가기나 하십시오.”

방통이 그렇게 나오니 유비도 더는 우길 수가 없었다. 그날로 전 군에 영을 내려 오경 무렵에 밥 지어 먹고 날이 밝을 무렵에는 낙성 으로 출발하도록 했다.

다음 날 새벽 선봉을 맡은 황충과 위연이 먼저 떠나고, 유비가 방 통과 더불어 다시 한번 낙성에서 만날 일을 약정하려는 때였다. 문 득 방통이 탄 말이 헛것을 보았는지 발을 잘못 디뎌 방통을 땅바닥 에 떨어뜨렸다. 놀란 유비가 말에서 뛰어내려 방통이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잡고 살피며 물었다.

“군사께서는 어째서 이토록 보잘것없는 말을 타고 다니시오?” 

“이 말을 탄 지 오래됩니다만 이 같은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말이 싸움에서 헛것을 보게 되면 탄 사람의 목숨을 앗게 되는 수 도 있소이다. 내가 탄이 흰 말은 매우 길이 잘 들어 군사께서 타셔 도 만에 하나 잘못되는 법은 없을 것이오. 이 시원찮은 말은 내가 타 도록 하겠소.”

유비가 그렇게 말하며 방통이 타고 있던 말에 훌쩍 올라탔다. 뜻 아니하게 유비와 말을 바꿔타게 된 방통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주공의 두터운 은혜에 실로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만 번 죽는다 한들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고마움을 나타내고 말에 올라 미리 정한 길로 군사를 이 끌고 나아갔다. 유비는 그만 일로 죽음까지 들먹이는 방통이 새삼 마음에 걸렸지만 싸움터로 나서는 길이라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방 통의 뒷모습을 보며 부디 아무 일 없기를 빌고 자신의 길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낙성을 지키고 있던 오의는 냉포가 강물을 끌어 적군을 몰 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유비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죽었다는 소식 을 듣자 크게 놀랐다. 곧 남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머지않아 밀 어닥칠 유비를 막을 방어책을 물었다. 가장 지략이 나은 장임이 나 서서 말했다.

“성 동남쪽에 있는 산모퉁이로 한 줄기 소로가 있는데 매우 중요 한 길목이외다. 내가 군사 한 갈래를 이끌고 그곳을 틀어막을 테니 여러분들은 성이나 굳게 지키고 계시오.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 되오.”

그때 문득 유비가 군사를 나누어 오고 있다는 급한 소식이 들어 왔다. 길게 의논할 겨를이 없는 오의는 거의 요행을 바라는 심경으 로 장임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장임은 곧 군사 삼천을 이끌고 먼저 산속 소로로 달려가 매복한 채 유비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래잖아 선봉 위연이 이끄는 군사들 이 그곳을 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선봉이니 모두 보내주어라. 우리는 더 기다리다가 중군을 잡아야 한다.”

장임은 그런 영을 내려 군사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방통이 이끄는 본진이 숲속의 소로에 이르렀다. 장임의 군사들이 흰 말을 타고 다가오는 방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흰 말을 타고 오는 자가 유비임에 틀림없습니다.”

전에 싸움터에서 유비가 그 말을 타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어 하는 소리였다. 유비가 방통에게 준 말은 그만큼 남의 눈에 잘 띄는 백마 였다.

유비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 장임은 군사들의 말을 그대로 믿 었다. 뜻밖에도 적의 우두머리를 잡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군사 들에게 가만히 영을 내렸다.

“포향이 울리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유비를 쏘도록 하라.” 

이때 군사를 재촉해 나가던 방통은 머리를 쳐들어 길 앞을 살피 고 있었다. 문득 길은 좁은 산골짜기로 접어드는데 양쪽 등성이에는 나무와 풀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것도 절기는 아직 늦여름에서 초가 을 사이라 잎이 무성해 그 속에 무엇이 숨었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적이 매복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지세로 보였다. 선봉을 맡은 위연이 별 탈 없이 지나간 곳이어서 마음놓일 법도 하건만 왠지 방통은 그 골짜기가 꺼림칙했다. 그곳에 어려 있는 살 기 같은 것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이곳이 어디냐?”

방통이 문득 고삐를 당기며 물었다. 군사들 가운데 근래 항복한 촉병 출신 하나가 대답했다.

“이곳의 땅 이름은 낙봉파(落鳳坡)라 합니다.”

그러자 방통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내 도호(號)가 봉추鳳雛)인데 이곳이 낙봉파라면 어찌 되는 것 이냐? 나에게 결코 이로울 수 없는 땅이다. 모두 어서 물러나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갑자기 산 언덕에서 한소리 포향 이 울리며 메뚜기 떼 덮치듯 화살이 쏟아졌다. 모두 방통을 향해서 만 날아드는 화살이었다. 장임의 삼천 군사가 백마를 과녁 삼아 활 을 쏘아댄 때문이었다.

아무리 천하의 봉추선생이라지만 쏟아지는 화살비야 어찌 피해낼 수 있겠는가. 가엾게도 방통은 끝내 어지럽게 나는 화살 아래 죽으 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서른여섯이었다. 저 자허상인(紫虛上人)이 예언한 대로 봉황은 다 자라기도 전에 땅에 떨어지고[鳳雛墜地]만 셈이었다.

방통을 유비라고만 믿고 있던 장임은 그가 고슴도치같이 온몸으로 화살을 받고 말에서 떨어지자 힘이 부쩍 났다. 뒤이어 삼천 군사를 휘몰아 유비군의 앞뒤를 막고 들이쳤다. 좁은 계곡에 갇혀 나아 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게 된 유비군은 이리저리 쫓기다가 태반이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앞서 가다 겨우 그곳을 빠져나오게 된 군사 몇이 나는 듯 달려가 위연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위연은 군사를 돌려 본진을 구하려 했 으나 산길이 좁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을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장임이 위연이 돌아서는 길을 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리 높은 곳에 숨겨놓은 군사로 위연의 머리 위에도 화살비 를 퍼붓게 한 까닭이었다.

위연은 당황했다. 외마디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군사들 사이를 몰 이꾼에게 몰린 멧돼지 모양 내닫고 있는데 항복한 지 얼마 안 되는 촉병 출신의 군사 하나가 권했다.

“아무래도 낙성 쪽으로 밀고 나가 큰 길로 들어서는 게 좋겠습니다.” 

위연은 달다 쓰다 가릴 겨를이 없었다. 우선 쏟아지는 화살비나 피 해보자는 생각으로 앞장서서 길을 열고 낙성 쪽으로 밀고 나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뜻 같지가 못했다. 겨우 좁은 계곡을 빠져나왔는 가 싶자 홀연 앞에서 티끌이 자욱하게 일며 또 한 떼의 군마가 나타 났다. 낙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 오란과 뇌동이 이끄는 촉의 군사였다. 위연이 그들과 싸우려 할 때 다시 등 뒤에서 장임이 덤벼들었다. 앞뒤로 적을 받은 위연은 곧 새까맣게 둘러싼 적병 한가운데 갇혀버 리고 말았다. 위연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나 워낙 적이 두텁게 에 워싸고 있어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쯤일까. 갑자기 오란과 뇌동의 후군(軍)이 어 지러워지는가 싶더니, 그들 두 적장이 한꺼번에 그곳을 구하러 달려 갔다. 누군가 자기편이 왔음을 짐작한 위연은 힘이 부쩍 났다. 기세 를 타고 오란과 뇌동을 뒤쫓는데, 문득 적병을 헤치고 한 장수가 나 타나 소리쳤다.

“문장, 위연의 자)은 걱정 마라. 내가 특히 그대를 구하러 왔노라!”

위연이 반갑게 쳐다보니 바로 늙은 황충이었다. 위연은 곧 황충과 힘을 합쳐 적을 쳐부수기 시작했다. 거꾸로 앞뒤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 오란과 뇌동은 이내 무너져 달아났다. 위연과 황충은 그런 적을 쫓아 똑바로 낙성까지 밀고 나갔다.

성안에서 보고 있던 유괴가 오란과 뇌동을 구하려고 대군을 이끌 고 쏟아져 나왔다. 황충과 위연은 둘 다 선봉이라 원래가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끈 데다, 위연은 또 장임에게 적지 않은 군사를 잃어 유괴 의 대군을 당해낼 길이 없었다. 다시 밀리게 된 판에 용케 유비가 나 타나 별 어려움 없이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유비는 우선 어지럽게 흩어진 전열부터 가다듬을 양으로 일단 군 사를 진채로 돌렸다. 그런데 겨우 진채에 이르기 바쁘게 장임의 군 마가 좁은 산길에서 쏟아져 나왔다. 뿐만 아니었다. 등 뒤에는 어느 새 유괴와 오란, 뇌동이 이끄는 대군이 바짝 뒤쫓아오고 있었다.

유비가 죽었다는 소리라도 들었는지 촉군의 기세는 전에 없이 대 단했다. 유비는 그곳의 진채를 지키기 어렵다고 보아 한편 싸우면서 한편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부관으로 돌아가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긴 기세를 탄 적은 쉴 틈 없이 뒤쫓아왔다. 전날 밤부터 서둔 유 비군은 사람과 말이 한가지로 지쳐버렸다. 마음속에는 되돌아서서 한바탕 싸움을 벌일 뜻도 있었으나 몸은 그저 앞만 보며 달아날 뿐 이었다.

그때 다행히도 관을 지키던 유봉과 관평이 좌우에서 삼만군을 이 끌고 쏟아져 나왔다. 관 안에서 푹 쉬고 난 뒤라 힘과 생기가 넘쳐흐 르는 군사들이었다.

이번에는 장임이 그 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봉과 관평은 그런 장임을 이십 리나 두들겨 쫓고 많은 마필을 뺏 어 돌아왔다.

유비가 방통이 끝내 보이지 않는 것을 안 것은 부관 안으로 돌아간 뒤였다.

“군사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유비가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물었다. 황충은 물론 위연까지도 아직 방통이 죽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방통을 따라갔다가 낙봉파에 서 겨우 목숨을 건져 나온 군사 하나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군사께서는 말과 함께 적의 난전 아래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방통이 죽은 낙봉파 쪽을 보고 통곡한 뒤 그 넋을 달랠 제단을 마련케 했다. 다른 장수들도 한결같이 통곡해 마 지않았다. 황충이 문득 눈물을 거두고 말했다.

“이번에 군사를 잃으셨으니 장임이 이를 알면 틀림없이 이곳 부 관을 치러 올 것입니다. 적지 않이 상한 데다 기마저 꺾인 군사로 승세를 탄 적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사람을 형주로 보내 제갈군사를 이리로 모셔오는 게 낫겠습니다. 그분과 더불어 다시 서천을 뺏을 계책을 세우도록 하십시오.”

나이값을 하는 소리였다. 거기다가 그런 황충의 헤아림이 옳다는 것은 오래잖아 드러났다. 유비가 아직 대답을 않고 있는데 군사 하 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알렸다.

“장임이 군사를 이끌고 관 아래 이르러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그 같은 소식에 유비보다 장수들이 더 노했다. 황충과 위연이 함께 일어나며 소리쳤다.

“제가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제가 나가 저 버릇없는 장임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유비가 오히려 그런 두 사람들을 말려 주저앉히며 말했다.

“이번에 져서 우리 군사들의 날카로운 기세가 적지 않이 꺾여 있 으니 가벼이 나가 싸워서는 아니 되오. 마땅히 굳게 지키면서 제갈 군사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오.”

그러자 황충과 위연도 더는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 속을 누르고 유비의 명을 받들어 굳게 성을 지킬 뿐이었다

유비는 관평을 불러 글 한 통을 써주며 말했다.

“너는 형주로 가서 군사께 이 글을 올리고 이곳으로 모셔오도록 하라.”

명을 받은 관평은 그 밤으로 말을 달려 형주로 갔다. 유비는 관평 이 돌아올 때까지 스스로 부관을 맡아 굳게 지킬 뿐 나가 싸우지 않 았다.

때는 칠월 칠석 무렵이었다. 형주의 공명은 명절을 그냥 넘길 수 없어 칠석날 밤에 잔치를 열고 여러 관원들과 더불어 술잔을 나누었 다. 주군이 군사를 이끌고 서천에 나가 있으니 술자리의 얘기는 절 로 서천의 일이 중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은 유비를 걱정하고 혹은 서천을 얻은 뒤를 생각하며 기대에 차 얘기를 나누는데 문득 서쪽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지는 게 보 였다. 크기가 북두성만큼이나 되는 별이었는데 떨어지며 흘리는 빛 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공명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더니 갑자기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내어 울었다.

“슬프구나, 사원(元)이여, 가슴 아프다, 봉추여………….”

곁에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공명을 진정시키며 까닭을 물었 다. 공명이 흐느낌 섞어 대답했다.

“내가 일전에 헤아려보니 올해는 강성이 서쪽에 있어 군사에게 이롭지 못했소. 거기다가 천구(天狗, 재물을 맡은 별 이름 또는 그 달의 흉 한 귀신)가 우리 군을 범하고, 태백성이 낙성에 있기에 나는 주공께 글을 올려 모든 일에 삼가고 조심하라 말씀드렸던 것이오. 그런데도 일은 잘못되고 말았구려. 서쪽에 있는 그의 별이 졌으니 틀림없이 방사원은 죽었소이다. 누가 일이 이리 될 줄 생각이나 하였겠소. 이 제 주공께서는 팔 하나를 잃으셨소······”

그리고 다시 소리내어 통곡했다. 관원들은 모두 놀랐으나 하도 엄 청난 소리라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들에게 공명이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

“며칠 안으로 곧 소식이 올 것이오. 아아, 이 일을 어찌할꺼나………… “

그렇게 되니 잔치가 제대로 될 까닭이 없었다. 내온 술도 다 비우 지 못하고 한결같이 무거운 가슴으로 흩어졌다.

며칠 뒤였다. 관운장과 더불어 서천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사 람이 들어와 관평이 온 것을 알렸다. 관원들은 며칠 전에 들은 말이 있어 관평이 서천에서 달려왔다는 소리만 듣고도 모두 놀랐다. 그러 나 더욱 놀라운 것은 관평이 공명에게 올린 글이었다.


‘지난 칠월 초이렛날 방통군사께서 돌아가셨소. 낙성을 치러 가다 낙봉파에서 촉장 장임의 매복에 걸려 어지러운 화살 아래 숨을 거두 신 것이오…….’


거기 씌어 있는 그런 내용은 며칠 전 공명이 말한 그대로였다. 공 명이 다시 통곡하고 다른 벼슬아치들도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지 않 는 이가 없었다.

한참 뒤에 공명이 눈물을 거두고 말했다.

“이미 주공께서 부관에 갇히시어 오도 가도 못할 지경이시라면 이 양이 아니 가볼 수 없소.”

“군사께서 가신다면 형주는 누가 지키겠소? 형주는 매우 중요한 땅이니 또한 가볍게 버려두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듣고 있던 관우가 그런 걱정을 했다. 공명이 이미 마음속으로 정 해둔 게 있는 듯 망설임 없이 말했다.

“주공의 글 가운데는 누구에게 형주를 맡기라는 말이 뚜렷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나는 이미 주공의 뜻을 알고 있소.”

그러고는 그 자리에 있는 관원들에게 유비의 편지를 보인 뒤에 말했다.

“주공께서는 이 글에서 형주를 내게 맡기시고 마음대로 사람을 뽑아 쓰라고 하십니다만, 특히 관평을 보내신 것으로 보아 뜻은 운 장께 중임을 맡기시려는 것 같소. 운장께서는 저 복사꽃 핀 동산[桃 園]에서 맺은 의를 잊지 마시고 힘써 이 땅을 지켜주시오. 결코 가볍 게 여길 일이 아니니 공은 모름지기 근면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해 야 할 것이오.”

의논이랄 것도 없는 군령(軍令)이었다. 관우도 자기밖에는 달리 형주를 맡아 지킬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번 사양하는 법 도 없이 승낙했다. 그런 관우의 표정에는 왠지 비장한 각오가 어려 있었다.

공명은 곧 크게 잔치를 열고 그 자리를 빌려 관우에게 형주 태수 의 인수를 물려주었다.

“이제 형주의 모든 일은 오직 장군 몸에 달렸소.”

공명이 인수를 물려주면서 뒷일을 당부하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 다. 관우가 굳은 얼굴로 자신의 결의를 밝혔다.

“대장부가 이왕에 무거운 책임을 맡았으니 목숨이 남아 있는 한 저버려서는 아니 될 것이오.”

공명은 관우가 목숨부터 먼저 걸고 나서는 게 까닭없이 불길했다. 이미 나온 말이라 어찌할 수 없으나 굳이 못 들은 체 다른 말을 꺼 냈다.

“만약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다면 어찌하시겠소?”

“힘을 다해 맞서겠소이다.”

관우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공명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조조와 손권이 한꺼번에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때는 어찌하겠소?”

“군사를 나누어 싸우지요.”

그러자 공명이 관우를 깨우쳐주듯 말했다.

“만약 운장께서 그렇게 하시면 이 형주는 위태로워지고 말 것이 오. 이제 내가 여덟 자 글귀를 드릴 테니 장군께서는 언제나 그걸 마 음에 새겨두시오. 그렇게 하는 것만이 형주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이외다.”

“그 여덟 자를 말씀해보시오.”

“거조조(曹操) 동화손권(東和孫權).”

평소와는 달리 겸허하게 받아들이려는 관우에게 공명이 시구를 읊조리듯 그 여덟 자를 일러주었다. 북으로 조조와는 싸우고, 동으 로 손권과는 화친하라는 뜻이었다. 관우가 잠깐 생각하다 다짐하듯 말했다.

“군사의 그 말씀 가슴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남달리 자부심이 강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않는 관우였으나 상대가 공명인 때문인지, 아니면 형주가 너무도 중요한 땅인 까닭인지 한마디 묻는 법도 없이 공명의 뜻을 받아들였다. 관우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일을 그르치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 하던 공명은 그 같은 관우의 다짐에 약간 마음이 놓였다. 형주의 일은 관우에게 맡기기로 하고 문관으로는 마량, 이적, 상랑, 미축을, 그 리고 무장으로는 미방, 요화, 관평, 주창을 남겨 관우를 돕게 했다.

대강 형주의 일이 마무리되자 공명은 다시 서천으로 갈 군사를 일으켰다. 먼저 날랜 병마 일만을 가려뽑아 장비에게 주며 말했다. 

“장군은 파주를 휩쓴 뒤 낙성 서쪽으로 나가도록 하시오. 먼저 이 르는 자가 으뜸가는 공을 차지할 것이오.”

다음은 조운이었다. 공명은 그에게도 한 갈래 군사와 배를 내주며 일렀다.

“자룡은 소강을 거슬러 올라가 낙성으로 가라. 역시 먼저 이르는 자에게 으뜸가는 공이 돌아가리라.”

그런 다음 자신은 간옹, 장완 등과 더불어 군사 일만 오천을 이끌 고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장완은 공명이 형주에서 새로 찾아낸 사람이었다. 영릉 상향(湘 鄕)이 고향으로 자를 공염(公)이라 쓰는데, 일찍부터 형양 지방에 서 학문과 재주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때는 공명 밑에서 서기 일을 보고 있었다.

공명은 장비, 조운과 같은 날 군사를 일으켜 서천을 향했다. 저자 허상인이 일찍이 말한 바 ‘누운용은 하늘로 솟네[臥龍昇天]’란 구절 은 그 출발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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