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7화 : 무너져내리는 서천의 기둥들
무너져내리는 서천의 기둥들
장비가 떠날 채비를 끝낸 뒤 작별을 고하러 오자 공명은 당부했다.
“서천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매우 많으니 그들을 가볍게 여기고 맞서서는 아니 될 것이오. 삼군을 엄히 단속하여 가는 길에 백성들 의 재물을 노략질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오히려 가는 곳마다 백 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펴 민심을 얻도록 해야 하오. 또 장군께 서는 함부로 사들을 매질하지 않도록 하시오. 사졸들을 모질게 다 루면 그들도 장군을 위해 즐겨 싸우지 않을 것이외다. 부디 그릇됨 이 없게 하여 되도록 빠른 날에 낙성에서 다시 만나게 되길 바라오.”
어지간한 장비도 공명의 말이라면 귀담아 들었다. 틀림없이 그러 마고 다짐한 뒤 말에 올랐다. 장비는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공명 이 일러준 대로 잘 따랐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펴주고 항복하는 사람은 터럭만큼도 해치지 않았다. 그렇게 한천의 길로 밀고 올라가 파군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문득 풀어둔 세작들이 돌아와 알렸다.
“파군 태수 엄안(嚴顔)은 촉 땅의 장수로 나이는 비록 많아도 힘 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합니다. 강한 활을 잘 쏘고, 큰 칼을 주 로 쓰는데, 만 명은 혼자 당할 만한 용맹이라 일컬어질 정도입니다. 지금 성안에 버티고 앉아 항기(降旗)를 올리지 않고 있으니 한바탕 힘든 싸움을 피할 길이 없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비는 성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다 진채를 내리 고 먼저 사람을 보내 엄포를 놓게 했다.
“늙은 엄안은 어서 나와 항복해 성안에 가득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라. 공연히 버티면 성을 짓뭉개어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모 두 죽여버리리라!”
엄안은 일찍이 유장이 법정을 시켜 유비를 서천으로 불러들였다 는 말을 듣자 ‘이거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산에 올라앉은 주제에 호랑 이를 끌어들여 스스로를 지켜주게 만들려는 꼴이로구나!’하고 탄식 했다는 장수였다. 뒤에 과연 유비가 속셈을 드러내 부관을 차지하고 앉자 몹시 성난 그는 몇 번이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유비와 싸우려 했으나 자신이 지키고 있는 파군이 또한 서천으로 드는 중요한 길목 이라 함부로 비워두지 못해 그냥 주저앉아 있던 참이었다.
엄안은 장비가 군사를 이끌고 왔다는 말을 듣자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유비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주리라 다짐하 며 급히 거느리고 있던 군사 오륙천을 끌어모으고 나가 싸울 채비를 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권했다.
“장비는 장판교에서 호통 소리 한번으로 조조의 백만 대군을 쫓아버린 맹장입니다. 조조 역시 그의 소문만 듣고 몸을 피해 달아났 다니 결코 가벼이 맞서서는 아니 됩니다. 도랑을 깊이 파고 성벽을 높여 굳게 지킬 뿐, 나아가 싸우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적 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물러갈 것입니다. 거기다가 장비는 성미 가 불 같고 군사들을 심하게 매질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는 장수 입니다. 우리가 굳게 지키기만 하면 싸울래야 싸울 수 없어 울화가 치솟을 것이고, 울화가 치솟으면 반드시 가까이 있는 졸개들에게 풀 게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졸개들을 모질게 다루게 되면 적병의 마음 이 변할 것은 또한 뻔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때 틈을 보아 들이 치면 장비를 사로잡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엄안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매우 좋은 계책 같았다. 이에 모든 군 사를 성벽 위로 불러 올려 굳게 지키기만 하게 했다. 장비가 엄포를 놓으려고 뽑아 보낸 군사가 엄안이 지키는 성에 이른 것은 바로 그 런 때였다. 그날 엄안이 성벽 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유비군의 복색 을 한 군사 하나가 성문 밖에 와서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장(張)장군의 전갈을 가지고 왔다!”
엄안이 문을 열어주게 하고 그 군사를 불러들여 물었다.
“그래 그 전갈이란 어떤 것인가?”
“노(老)장군께서는 어서 항복하시어 성안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 라는 게 우리 장군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만약 버티다가 성이 깨어지 는 날이면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눈치 없이 그 군사는 장비가 하라는 대로 전했다. 듣고 난 엄안은 크게 노했다.
“장비 그 하찮은 것이 어찌 이리도 예의를 모른단 말이냐? 이 엄 안이 어떻게 역적에게 항복하겠는가! 이번에는 내가 너의 입을 빌려 내 뜻을 장비에게 전하리라.”
그러고는 그 군사의 귀와 코를 베어버린 뒤 장비에게 돌려보냈다. 그 군사가 돌아가 장비에게 울며 엄안이 한 말을 전하자 장비 또한 열화같이 성을 냈다. 이를 부드득 갈며 고리눈을 부릅뜨더니 곧바로 갑옷을 걸치고 말에 뛰어올랐다.
장비는 눈에 띄는 대로 수백 기를 끌어모은 뒤 바람같이 파군성 아래로 달려가 싸움을 돋우었다. 그러나 엄안은 얼굴도 안 비치고 성 위의 적병들만 장비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제성을 이기지 못한 장비는 앞뒤 없이 적교로 뛰어들며 성을 둘 러싼 도랑을 건너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비 오듯 화살이 쏟아져 길을 막을 뿐, 날이 저물도록 적병은 한 사람도 성을 나오지 않았다. 장비는 헛되이 기력만 소비한 끝에 분을 머금은 채 진채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장비는 날이 새기 바쁘게 다시 군사를 이끌고 성 아래로 달려가 싸움을 걸었다. 성벽에 세운 누각 위에서 장비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엄안이 말없이 활을 들어 화살 한 대를 날렸다. 화살은 보기 좋게 장비의 투구에 가 맞았다. 장비가 엄안을 손가락 질하며 악을 썼다.
“엄안, 이 늙은것아. 내 너를 사로잡기만 하면 반드시 너의 생살을 씹으리라!”
그러나 엄안은 대꾸조차 없었다. 그날도 장비는 저물도록 헛기운 만 쓰다가 다시 군사를 되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셋째 날이 되었다. 장비는 또 군사를 이끌고 성 곁으로 가서 욕을 퍼부어댔다. 원래 파 군의 성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것이라 그 둘레에도 여러 산들이 솟아 있었다. 욕을 퍼붓다 지친 장비는 도대체 성안에서 무슨 짓들을 하 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보다 높이 솟은 산 위로 올라가 성안을 내려 다보았다.
갑옷 입은 군사들이 대오를 갖추어 성안에 숨어 있는 게 보였다. 다만 나와서 싸우려 들지 않을 뿐 싸울 채비는 그 어느 성보다 단단 했다. 백성들도 바쁘게 군사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벽돌을 쌓는다, 싸움에 쓸 돌을 나른다 법석을 떨었다. 군민이 한마음이 되어 성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려가자!”
한참을 내려다보던 장비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소리쳤다. 그리 고 욕설만으로는 성안의 군사들을 끌어낼 길이 없다 생각했는지 새 로운 영을 내렸다.
“마군은 모두 말에서 내리고 보군은 땅바닥에 앉아 놀아라! 다만 적이 오면 금세 맞싸울 마음의 채비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성안의 적군을 얕잡아봐도 너무 얕잡 아보는 듯한 짓거리였지만 성안에서는 끝내 개새끼 한 마리 얼씬하 지 않았다. 장비는 다시 쓸데없는 욕질로 목만 쉬어 자기 진채로 돌아갔다.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온 장비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하루종일 소리 질러 욕해봐도 저쪽에서 나오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답답한 가슴으로 머리를 쥐어 짜다 문득 한 가지 좋은 꾀가 떠올랐다. 장비는 장수 하나를 불러 군 사쉰 명 가량을 딸려주며 말했다.
“너는 지금 이들을 데리고 성 아래로 가서 다시 엄안에게 욕을 퍼 부어라. 엄안은 너희 머릿수가 적은 걸 보고 군사를 내보낼 것인데 그때는 그냥 우리 쪽으로 도망쳐 오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남은 장졸들에게는 진채 안에 가만히 머물러 있되 언제든 적이 오면 맞을 수 있는 채비를 갖추게 했다. 일종의 유인책이었다. 명을 받은 쉰 명 안팎의 군사들은 곧 성 아래로 달려가 욕설을 퍼 붓기 시작했다. 그동안 장비는 진채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엄안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소용이 없 었다. 그날뿐만 아니라 그 뒤로도 이틀간이나 더 군사를 보내 욕을 퍼붓게 했건만 엄안은 끝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에 장비는 다시 머리를 쥐어짜듯 하여 계교 하나를 더 생각해냈다.
“군사들을 모두 흩어 나무를 베고 말먹이 풀을 뜯어오게 하라. 그 리고 아울러 성을 지나쳐 갈 샛길이 있는지 찾아보라.”
장비가 장수들을 불러 그렇게 영을 내렸다. 장졸들은 장비의 속셈 도 모르면서 시키는 대로 따랐다.
한편 성안에 있는 엄안은 며칠씩이나 장비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마음에 의혹이 일었다. 엿새나 연이어 악을 쓰며 싸움을 걸던 장비라 갑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 데 대한 의혹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엄안은 눈치 빠른 군사 여남은 명을 골라 장비의 군사들로 꾸미 게 한 뒤 성 밖으로 내보냈다. 나무하고 풀 베는 장비의 군사들 틈에 끼어 허실을 탐지하게 할 작정이었다.
산속으로 들어간 엄안의 군사들은 별 탈 없이 장비의 군사들 틈 에 끼어 일하다가 해 질 무렵 한 덩어리가 되어 진채로 돌아갔다. 장 비가 장막 안에서 발을 굴러가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엄안 이 하찮은 늙은것이 나를 분통이 터져 죽게 할 작정이구나!” 장비의 짜증 섞인 호통이 장막 밖에까지 들려 나왔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장비를 달랬다.
“장군께서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며칠 새에 한 가닥 샛길을 찾아냈는데, 파군을 거치지 않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길을 알고 있었다면 왜 진작 내게 일러주지 않았느냐?” 듣고 난 장비가 버럭 성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에 겁을 먹 었는지 여럿이 입을 모아 대꾸했다.
“길은 찾았으나 아직은 미심쩍은 데가 있습니다. 지금 사람을 풀어 자세히 살펴보게 하는 중입니다.”
그러자 장비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일이란 꾸물대다가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오늘 밤 이경에 밥지어 먹고 삼경에 달 뜨거든 모두 떠나도록 하자! 사람은 하무를 물고 말은 방울을 떼어 조용히 빠져나가면 엄안 제까짓 것이 어찌 알겠느냐? 내가 앞장서서 길을 열 것이니 너희들은 차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몰아대어 그 일을 진채 안의 모 든 장졸들에게 알리게 했다.
장비의 군사들 틈에 섞여 있던 엄안의 군사들도 그 소리를 들었 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장비의 속셈도 모르고 큰 기밀을 낚았다 고 믿은 그들은 곧 성안으로 돌아가 엄안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듣 고 난 엄안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내 벌써 알았지. 장비 그 하찮은 것이 어찌 끝내 참아낼 수 있겠 는가? 제가 샛길로 이곳을 지나쳐가려 한다니 틀림없이 양식과 치 중은 뒤에 세울 것이다. 내가 뒤를 들이쳐 그걸 뺏고 길을 막아버린 다면 제까짓 것이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이냐? 잘됐다. 그 꾀 없는 촌 놈은 이제 내 계책에 떨어졌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 장졸들에게 영을 내렸다.
“오늘 밤 이경에 밥 지어 먹고 삼경에는 성을 나간다. 먼저 그 샛 길로 가서 나무와 풀숲이 무성한 곳에 숨어 기다리되 장비가 지나갈 때는 그냥 보내주도록 하라. 적을 들이치는 것은 그다음 곡식과 치 중을 실은 수레가 그 길로 들어설 때이다. 북소리가 나거든 한꺼번 에 뛰쳐나가 적을 쓸어버려라!”
그 같은 엄안의 영은 어김없이 시행되었다. 그날 밤 엄안의 군사 들은 배불리 밥 지어 먹고 갑옷 투구를 갖춰 쓴 뒤 조용히 성을 빠 져나왔다. 그리고 미리 정한 곳에 흩어져 숨은 채 장비의 군사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엄안도 비장(裨將) 여남은을 데리고 몸소 성을 나왔다. 거꾸로 장 비를 쳐부수게 되었다는 기쁨이 그의 유별난 조심성을 무디게 한 탓 이었다. 자기편 군사들이 숨어 있는 곳에 이르자 그 역시 말에서 내 려 숲속에 몸을 감췄다.
그럭저럭 삼경이 되자 장비의 군사들이 그 샛길을 지나가기 시 작했다. 들은 대로 장비가 맨 앞에서 장팔사모를 비껴든 채 말을 몰 고 있었다. 딴에는 숨소리마저 죽이려고 애쓰는 빛이 역력했다. 엄 안의 군사들은 미리 받은 군령대로 그런 장비를 그냥 지나가게 버려 두었다.
오래잖아 기다리던 수레의 행렬이 뒤를 이었다. 그걸 본 엄안은 이때다 싶었다.
“북을 울려라!”
엄안이 나직이 영을 내리자 갑자기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사 방에서 복병이 일어났다.
그런데 벌 떼같이 일어난 복병들이 막 장비의 군사들을 덮치려 할 때였다. 홀연 등 뒤에서 한소리 큰 징소리가 나며 한 떼의 군마가 엄안의 복병들을 덮쳤다.
“늙은 도적은 달아나지 마라! 내가 여기서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누군가가 내지르는 고함 소리에 엄안이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한 장수가 앞서 달려오는데 표범의 머리에 고리눈을 하고 장팔사모 를 비껴든 채 새까만 말을 타고 있었다. 틀림없이 장비였다. 조금 전 에 자기 눈으로 장비가 지나가는 걸 본 엄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사방에서 징소리가 나며 얼마인지도 모를 대군이 쏟아져 나오니 더욱 기가 막혔다.
이미 장비가 눈앞으로 다가들어 칼을 휘두르기는 했으나 이미 엄 안의 손발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걸 알아챈 장비는 첫 합부 터 짐짓 빈틈을 보였다. 거기에 속은 엄안은 한칼로 장비를 베어버 릴 듯 힘차게 칼을 내리쳤다. 퍼뜩 몸을 젖혀 피한 장비가 그대로 엄 안에게 다가들더니 엄안의 갑주 끈을 잡고 덥석 말 등에서 들어올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엄안이 땅바닥에 떨어지자 장비의 군사들이 벌떼처럼 그를 둘러 쌌다. 그리고 갈고리와 올가미를 던져 금세 엄안을 멧돼지 옭듯 꽁 꽁 얽어 놓고 말았다.
처음 그 길을 앞장서서 열고 간 장비는 실은 생김이 비슷한 졸개 를 그렇게 꾸민 가짜였다. 장비는 자신이 그 길로 파군을 지나쳐가 려 한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엄안이 그대로 성안에 죽치고 있을 리 없다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엄안이 북소리로 군호(軍號)를 삼을 것 까지 짐작하고 자신은 징소리로 군호를 삼을 정도로 치밀하게 계책 을 짜 엄안을 사로잡게 되었다.
사방에서 적병이 밀려드는 데다 대장까지 사로잡히는 걸 보자 서 천군사들은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태반이 갑옷을 벗어던지고 창 자루를 거꾸로 잡으며 항복의 뜻을 나타냈다.
장비는 기세를 타고 군사를 휘몰아 파군성으로 달려갔다. 그곳 역 시도 엄안이 사로잡힌 것을 알자 이렇다 할 싸움 없이 문을 열고 항 복했다. 장비는 군사들에게 엄명을 내려 함부로 백성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방을 써 붙여 군민을 모두 안심시켰다.
오래잖아 군사들이 오랏줄에 묶인 엄안을 끌고 왔다. 그때 장비는 대청 높직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끌려온 엄안은 결 코 그런 장비에게 무릎을 꿇으려 들지 않았다. 장비가 성난 눈길로 그런 엄안을 내려보다가 이를 북북 갈며 물었다.
“이미 내가 이곳에 이르렀는데도 너는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고 감히 내게 맞서려 하였는가?”
그래도 엄안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장비를 노 려보며 꾸짖었다.
“너희들은 의롭지 못하게 우리의 주군을 침범한 자들이다. 이곳에 는 목이 잘리는 장수는 있을지언정 항복하는 장수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장비는 더욱 성이 났다. 좌우를 둘러보며 엄안을 끌 어내다 목 베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엄안도 지지 않고 그런 장비를 마주 꾸짖었다.
“이 역적 놈아, 베려면 빨리 벨 것이지 웬놈의 성질은 그리 부리느냐?”
그런 엄안의 목소리는 씩씩하기 그지없었고, 얼굴에도 두려워하 는 그늘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걸 본 장비는 돌연 마 음이 변했다. 사나이다운 사나이를 만났다는 기분 때문일까, 조금 전까지의 분노가 문득 기쁨으로 바뀐 것이었다.
“모두 물러나라!”
장비가 앞뒤 없이 소리쳤다. 그리고 모두 영문 모를 얼굴로 그 갑 작스런 호령에 몰려 물러나자 몸소 계단 아래로 내려가더니 엄안을 묶은 줄을 풀어주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이 옷을 가져오게 하 갈아입히더니 엄안을 대청 가운데 있는 높은 자리에 앉히고는 넙죽 절을 했다.
“그동안 말이나마 욕보임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너무 꾸짖지 말아주십시오. 실은 저도 평소부터 장군께서 호걸스런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장비가 그렇게 나오니 아무리 철석 같은 엄안이라 해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로소 자신이 속절 없이 장비에게 졌음을 깨닫고 마음에서 우러난 항복을 했다. 뒷사람이 그런 엄안을 찬양하여 읊 었다.
머리터럭 희도록 서촉에 살았으되 白居西蜀
맑은 이름은 온 나라를 떨쳐 울렸네. 清名震大邦
충성된 마음 밝은 달과 같고 清名震大邦
드높은 기상 장강을 말 듯하네. 忠心如皎月
차라리 목 잘려 죽을지언정 浩氣捲長江
어찌 무릎 꿇어 항복할 수 있으리. 寧可斷頭死
파주 땅의 나이 든 장수 安能屈膝降
하늘 아래 그 짝을 찾을 수 없구나. 巴州年老將 天下更無雙
장비는 엄안의 항복을 받았으나 조금도 예를 잃지 않았다. 좋은 말로 늙은 엄안의 씁쓸한 마음을 어루만져준 뒤에 가르침을 청하듯 물었다.
“이 장아무개는 운이 좋아 파군을 지날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만 앞으로 남은 길을 생각하니 막막합니다. 어떻게 하면 서천으로 드는 수고로움을 줄일 수 있겠습니까?”
엄안이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싸움에 진 장수로서 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보답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말이나 개의 수고로움이라도 장군을 위 해서라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활을 쏘고 창칼을 휘두 르는 일이 없이 바로 성도를 향해 가는 길도 있을 듯합니다만……”
“어떤 길입니까?”
장비가 반가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엄안이 다시 한번 말이 없다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리로 주욱 가면 낙성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까지 있는 관과 험 한 길목을 지키는 일은 모두 이 늙은이가 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거기 있는 모든 관군들도 제가 다스려왔으니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이 늙은이를 앞장세워 주십시오. 가는 곳마다 그곳을 지키는 장졸들 을 달래 모조리 장군께 항복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어제까지 서천의 든든한 기둥의 하나였던 엄안은 드디어 서천을 뒤집는 지렛대로 변해버린 셈이었다. 장비는 그 말을 듣자 고마워해 마지않았다. 곧 엄안으로 하여금 전부를 맡게 하고 자신은 후부가 되어 그 뒤를 따랐다.
과연 엄안의 말은 어김이 없었다. 엄안은 가는 곳마다 그곳을 지 키는 장졸들을 불러내 모두 장비에게 항복하도록 만들었다. 간혹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자가 있다면 엄안이 차분하게 타일렀다.
“내가 이미 이렇게 항복했는데 하물며 너희겠느냐? 공연히 귀한 목숨 버리지 말고 항복하여 새 길을 찾으라.”
그러면 모두 어김없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게 마련이었다. 덕 분에 장비는 이렇다 할 싸움 한번 없이 낙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재 촉할 수 있었다.
한편 공명은 형주를 떠날 때 이미 유비에게 사람을 보내, 모두 낙 성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유비도 그리로 오라는 기별을 보냈다. 유비 는 그 기별을 받자마자 여럿을 모아놓고 의논했다.
“지금 공명과 익덕은 길을 나누어 서천으로 쳐오고 있는 바, 낙성 에서 서로 만나 함께 성도로 들어가려 한다. 물과 뭍으로 칠월 스무 날에 형주에서 떠났다니 이제 낙성에 당도할 때가 되었다. 우리도 속히 군사를 움직여 그리로 가야겠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황충이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장임이 매일처럼 와서 싸움을 걸었으나 우리가 성안에서 나가지 않은 까닭에 적군은 우리를 얕잡아보고 있을 것입니다. 상대편을 얕 잡아보게 되면 마음이 풀어지고, 마음이 풀어지면 모든 일에 준비가 없게 마련이니, 오늘 밤 군사를 나누어 적의 진채를 급습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밝은 대낮에 싸움을 벌이기보 다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유비도 그 같은 황충의 말이 그럴듯했다. 이에 그 말을 따라 군사 를 세 길로 나누어 장임의 진채를 야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황충은 왼편 길을, 위연은 오른편을, 그리고 유비는 가운데를 맡기로 하고 세 갈래 군마는 일제히 장임의 진채를 향해 떠났다. 과연 장임의 진채는 야습에 대한 아무런 준비 가 없었다. 유비의 군사들이 물밀듯 밀어닥쳐 불을 지르자 뜨거운 불길이 하늘로 치솟는 가운데 장임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 날 뿐이었다.
유비는 그런 병들을 전에 없는 기세로 몰아붙였다. 촉병들은 부 관을 버리고 낙성을 향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하지만 그 총중 에도 먼저 낙성으로 달려가 장임의 패전을 전한 군사가 있었다. 급 보를 받은 낙성의 장수들은 곧 군사를 내어 쫓겨오는 장임과 그 군 사들을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밤새껏 장임을 몰아대던 유비는 낙성의 군사들이 나와 그를 구해 가자 더 쫓기를 멈추고 도중에서 진채를 내렸다. 무리하게 뒤쫓다가 혹시라도 낭패가 있을까 걱정해서 그리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날이 밝은 뒤에야 곧바로 낙성으로 가성을 에워싸고 들이치기 시작했다. 장임은 전날 밤 크게 혼이 난 까닭인지 군사들을 성안에 묶어놓 고 움직이지 않았다. 유비가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굳게 성문을 닫 고 지킬 뿐이었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공성전을 벌였으나 워낙 든 든한 성이라 쉽지 않았다.
그럭저럭 사흘이 지나갔다. 나흘째 되던 날 유비는 또 한차례 호 된 공격을 퍼부었다. 자신은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서문을 들이치 고, 황충과 위연은 동문을 두들겨 부수게 했다. 남문과 북문을 비워 둔 것은 적군이 그리로 빠져나가 봤자 달아날 길이 없는 까닭이었 다. 남문 일대는 모두 험한 산길이요 북문 쪽은 부수가 길을 막고 있었다.
이때 장임은 성안에 가만히 앉아 유비가 하는 양을 냉정하게 살 피고 있었다. 유비가 서문 쪽으로 말을 타고 오락가락하며 몸소 장 졸들을 몰아대고 있는 게 보였다. 한쪽은 높고 든든한 성에 의지해 지키고 다른 쪽은 그걸 뛰어넘어 빼앗으려 하는 판이라 아무래도 더 힘든 쪽은 정해져 있게 마련이었다. 진시부터 미시까지 쉴 새 없는 공격을 퍼붓고 나니 유비 쪽의 인마는 하나같이 지친 기색을 드러 냈다.
그걸 본 장임은 서촉에서 으뜸가는 지장답게 한 가지 좋은 계책 을 떠올리고 오란과 뇌동을 불렀다.
“그대들은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북문으로 나가 동문을 치 고 있는 위연과 황충을 등 뒤에서 덮치도록 하라. 나는 남문으로 나 가 서문을 치고 있는 유비를 덮치리라.”
장임은 그렇게 영을 내린 뒤 다시 성안에 남은 장수들에게 일렀다. “그대들은 성안에 남은 군사들과 백성들을 모조리 성벽 위로 데 리고 나가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게 하라. 적이 우리가 남문과 북 문을 나가는 걸 눈치챌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서둘러 한 갈래 군사를 몰아 성을 나갔다.
한편 힘을 다해 서문을 들이치고 있던 유비는 붉은 해가 서쪽 하 늘로 기우는 걸 보자 그날도 성을 뺏기는 글렀다 싶었다. 이만 군사 를 물리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후군부터 먼저 물러나라고 영을 내 렸다.
그런데 명을 받은 군사들이 막 몸을 돌리려 할 즈음, 문득 한쪽 성벽 위에서 크게 함성이 일었다. 군사들은 물론 유비까지도 영문을 몰라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다시 함성이 일며 남문 쪽에 서 한 갈래 인마가 쏟아져 나와 서문 쪽으로 덮쳐왔다. 바로 장임이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장임은 모든 걸 제쳐놓고 오직 유비만을 목표로 말을 몰았다. 너 무도 갑작스런 일인 데다 하루 종일 고된 싸움으로 지쳐 있는 유비 의 군사들은 이내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이때는 황충과 위연도 유비 를 도와줄 형편이 못 됐다. 그들도 오란과 뇌동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아 앞뒤를 가릴 정신조차 없는 판국이었다.
급한 김에 유비가 몸소 칼을 빼어 맞섰으나 장임이 싸움으로 단 련된 무장이라 유비가 당해낼 수 없었다. 유비는 몇 번 창칼을 부딪 는 체하다가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황망중에 잡은 길이라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산비탈에 난 좁은 길로 유비가 천방지축 말을 닫는데 장임이 놓치지 않고 바 짝 뒤쫓았다. 유비는 혼자요, 장임은 몇 기를 거느리고 있어 위태롭 기 짝이 없는 형국이었다.
뒤돌아볼 틈도 없이 말을 채찍질해 내닫던 유비가 한군데 산모퉁 이를 돌아설 때였다. 문득 맞은편 산길에서 한 갈래 인마가 앞을 가 로막았다. 그 또한 장임의 군사로만 여긴 유비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괴롭게 부르짖었다.
“앞에는 숨어 있는 적병이요, 뒤에는 쫓아오는 적병이로구나! 하 늘이 나를 망하게 하시려는도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시는도다!” 하지만 유비의 지나친 속단이었다. 적의 복병인 줄만 알고 있던 군사들 속에서 한 장수가 달려 나오는데 바로 장비였다.
엄안과 함께 낙성으로 달려오던 장비가 그 산길로 접어든 것은 얼마 전이었다. 문득 숲 저편에서 보얗게 먼지가 이는 걸 보고 장비 는 자기편과 촉병 사이에 싸움이 붙은 것임을 짐작했다. 이에 말을 박차 달려오다가 운좋게도 장임에게 쫓기는 유비를 만나게 되었다. 장비는 유비에게 인사말을 건넬 틈도 없이 장임과 맞붙었다. 다 잡게 된 유비를 놓치게 된 장임이라 안타까움 섞인 그 솜씨가 자못 볼만했다. 천하의 장비와 어울려서 여남은 합이나 승패 없이 버티었 다. 그러다가 엄안이 대군을 이끌고 당도하자 비로소 장임이 몸을 돌려 달아났다.
장임이 성안으로 쫓겨 들어가 적교를 걷어올릴 때까지 몰아댄 뒤 에야 되돌아온 장비가 유비를 찾아보고 말했다.
“군사께서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시느라 아직 이곳에 이르지 못 하신 것 같소. 내가 가장 먼저 왔으니 으뜸가는 공도 내가 차지하게 되었구려.”
그런 장비의 말투에는 은근히 으스대는 빛이 있었다. 그러나 유비 는 대견하기만 했다. 솥뚜껑 같은 장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산길이 거칠고 험한데 네가 무슨 수로 적병의 방해를 받지 않고 먼길을 이리 빨리 올 수 있었느냐?”
“오는 길에 마흔너댓 곳이나 관애가 있었지만 여기 계신 엄안 장 군의 공으로 털끝만 한 힘도 들이지 않고 지나왔소.”
장비가 한층 자랑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엄 안을 궁금히 여기는 유비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얘기를 끝낸 장비가 엄안을 불러 유비에게 보이자 유비가 다시 한번 엄안의 공을 치하했다.
“노(老)장군이 아니었던들 내 아우가 어찌 이곳에 이렇게 쉬 올 수 있었겠소? 모두가 장군의 공이오.”
그러고는 입고 있던 황금 사슬갑옷[鎖甲]을 벗어 엄안에게 입혀 주었다. 엄안도 감격하여 절하며 감사했다.
“술을 내오너라. 오랜만에 아우를 만났고 또 새로이 엄장군을 얻 었으니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유비가 문득 좌우를 보고 영을 내렸다. 그러나 미처 그 술자리가 벌어지기도 전에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황충과 위연 두 장군이 오란, 뇌동과 싸우는데 다시 성안에서 오 의와 유괴가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된 황, 위 두 분 장군께서는 마침내 적을 당해내지 못하 고 동쪽으로 쫓겨가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장비가 유비를 재촉했다.
“군사를 두 길로 나누고 달려가 어서 구해야겠소. 빨리 갑시다!”
유비가 그걸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곧 군사를 나누어 장비에게는 왼편을 맡기고 자신은 오른쪽을 맡아 앞으로 밀고 나갔다.
유비와 장비가 구원을 온 것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오의와 유괴 였다. 황충과 위연을 몰아붙이다가 문득 등 뒤에서 함성이 일자 얼 른 군사를 물려 성안으로 숨어버렸다. 그러나 한창 신이 나서 황충 과 위연을 쫓고 있던 오란과 뇌동은 그럴 틈이 없었다. 앞만 보고 내닫는 사이에 유비와 장비가 나타나 뒤를 끊어버렸다. 거기다가 황충 과 위연이 되돌아서 치고 들자 둘은 일이 이미 글러버린 것을 알았 다. 자기들을 적진 속에 버려두고 성안으로 달아나버린 오의와 유괴 를 깊이 원망하며 이끌고 있던 군사들과 더불어 항복하고 말았다. 오란과 뇌동이 비록 큰 장수는 아니나 그런 대로 부릴 만은 한 사 람들이었다. 유비는 기꺼이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 군사들을 거둬들인 뒤 낙성 부근에 진채를 내렸다.
한편 모처럼 좋은 때를 만났다 싶어 군사를 몰고 성을 나갔다가 오란과 뇌동 두 장수만 잃고 되쫓겨 들어온 장임은 걱정이 컸다. 이 대로 가다가는 성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오의와 유괴가 찾아와 말했다.
“지금 형세가 매우 위태로우니 한바탕 죽기로 싸워 적을 물리쳐 야겠소. 한편으로 사람을 성도로 보내 주공께 위급을 알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알맞은 계교를 써서 적을 막아보도록 합시다.”
오란과 뇌동을 버리고 자기들만 성안으로 도망쳐 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자못 결연한 표정이었다. 거기에 힘을 얻은 장임이 다시 한 꾀를 내놓았다.
“좋소. 이렇게 해봅시다. 내일 내가 군사 약간을 이끌고 나가서 싸 움을 걸었다가 거짓으로 져서 성 북쪽으로 쫓겨가겠소. 그때 성안에 서 다시 한 갈래 군사들이 뛰쳐나와 나를 뒤쫓는 적을 두 동강 내어 버린다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자 오의가 그 말을 받아 바로 결단을 내렸다.
“유장군은 공자를 도와 성을 지키고 계시오. 내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장장군의 계책을 도와보겠소.”
유장의 장인 되는 오의가 그렇게 나오니 의논은 그대로 정해지고 말았다.
다음 날이었다. 장임은 수천의 인마만 이끌고 함성을 지르며 성을 나가 싸움을 돋우었다. 보고 있던 장비가 말에 펄쩍 뛰어올라 장임 을 맞으러 달려 나가더니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어울렸다. 두 사람 의 말이 엉겼다 떨어지기 열 번이나 했을까, 문득 장임이 힘이 달린 다는 듯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비는 신이 났다. 성을 끼고 달아나는 장임을 한 창에 꿰어놓을 듯한 기세로 뒤쫓았다. 그때 갑자기 성안에서 오의가 한 떼의 군사 를 이끌고 쏟아져 나와 장비의 뒤를 덮쳤다.
그제서야 장비는 속은 걸 알았다. 급히 군사를 되돌리려 하는데 이번에는 달아나던 장임이 돌아서서 덤볐다. 눈깜짝할 사이에 장비 가 오히려 두터운 포위망에 갇혀버려 오도 가도 못할 신세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어지간한 장비도 그 지경이 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겹겹 이 둘러싼 적병 가운데서 이놈 치고 저놈 찌르며 갈팡질팡하고 있는 데 문득 강변 쪽에서 한 갈래 군사가 적병을 헤치며 다가왔다. 지옥 에서 부처를 만난 기분으로 장비가 멀거니 구경하는 사이에 앞선 장 수 하나가 창을 끼고 말을 박차 오의와 맞붙더니 이내 오의를 사로 잡고 적병을 흩어버렸다.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다름 아닌 조운이 었다.
“군사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장비가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물었다. 한바탕 싸운 다음이건만 조운은 숨결 한 가닥 흐트러짐이 없이 대답했다.
“벌써 이곳에 이르셨습니다. 아마도 지금쯤은 주공을 만나뵙고 계실 것이오.”
이어 두 사람도 사로잡은 오의를 앞세우고 진채로 돌아갔다. 또다 시 계교가 틀어진 장임도 하는 수 없이 동문으로 되쫓겨 들어갔다. 진채로 돌아온 장비와 조운이 공명을 보러 가니 간과 장완(蔣 琬)이 먼저 나와 맞았다. 장비가 말에서 내려 군막 안으로 들어가자 공명이 놀라움을 이기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장군이 어떻게 먼저 이곳에 이르렀소?”
유비가 곁에 있다가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딴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그때껏 장비가 엄안을 풀어준 일조차 말할 틈 이 없었던 것 같았다. 듣고 난 공명이 문득 유비에게 경하를 드렸다.
“이제는 장장군께서 지모를 쓰실 줄 아시니, 실로 주공의 크신 복 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때 조운이 사로잡힌 오의를 끌고 들어왔다. 유비가 그런 오의를 보고 부드럽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항복을 하겠느냐?”
“이왕 사로잡힌 바 되었으니 항복을 아니하고 어쩌겠습니까?”
오의가 순순히 그렇게 대답했다. 유비는 몹시 기뻐하며 몸소 오의를 풀어주었다. 공명이 조용히 오의에게 물었다.
“성안에는 어떤 자들이 남아 지키고 있느냐?”
“유계옥의 아들 유순)이 유괴와 장임의 도움을 받아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유괴는 그리 대단한 인물이 못 되지만 장임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담이 크고 지략도 뛰어나니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오의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먼저 장임을 사로잡은 뒤에야 낙성을 뺏을 수 있겠구나!”
공명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시 오의를 보고 물었다.
“성 동쪽에 걸려 있는 저 다리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느냐?”
“금안교(金雁橋)라고 합니다.”
그러자 공명은 아무 말도 없이 말에 오르더니 다리 부근으로 가 서 성을 둘러싼 개울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계책을 세우기 전에 지 형을 살펴보기 위함인 듯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어떤 결정을 얻었는 지 진채로 돌아오기 바쁘게 황충과 위연을 불러들여 영을 내렸다.
“금안교에서 오륙 리 떨어진 곳은 개울 양쪽 언덕이 모두 띠풀과 갈대밭이니 군사를 숨길 만하였다. 위연은 창든 군사 일천 명을 데 리고 왼쪽에 숨었다가 말을 타고 있는 장수들만 죽여라. 또 황충은 칼과 도끼를 든 군사 일천을 거느리고 오른쪽에 숨었다가 말만 골라 찍어버리도록 한다.”
그리고 이어 장비를 불렀다.
“위연과 황충에게 쫓긴 장임은 반드시 산 동쪽의 작은 길로 달아 날 것이니 장익덕은 일천 군사를 이끌고 그 뒤에 숨었다가 장임이 오거든 사로잡도록 하시오.”
그다음은 조운이었다. 장비에 이어 불려온 조운에게 공명이 다시 영을 내렸다.
“자룡은 금안교 북쪽에 매복해 있다가 내가 장임을 꾀어 장임이 다리를 지나거든 곧 그 다리를 끊어버린 뒤 군사들을 북쪽으로 옮기 도록 하라. 마치 에워쌀 듯한 형세를 지어 장임이 감히 북쪽으로 달 아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장임이 남쪽으로 달 아나게 되면 바로 나의 계책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일일이 할 일을 일러준 뒤 공명은 스스로 적을 꾀어내러나갔다.
이때 낙성에는 유장이 새로이 내려보낸 두 장수 탁응과 장익이 들어와 촉군의 기세가 조금 되살아나 있었다. 거기에 힘을 얻은 장 임은 장익에게 유괴와 함께 성을 지키라 하고 자신은 탁응과 더불어 성을 나왔다. 자신은 앞서고 탁응은 뒤에서 호응하게 군사를 두 갈 래로 나누어 싸움다운 싸움을 벌여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장임은 그리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무엇이 급한지 공명 이 대오도 갖추지 못한 군사를 휘몰아 금안교를 건너오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말로 듣던 그 제갈공명과 똑바로 맞붙게 되니 아무리 간 이 큰 장임이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턱대고 몰아나가는 대신 진세를 벌이고 공명을 기다렸다.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탄 공명이 윤건에 깃털 부채를 든 채 군사들 사이에서 나왔다. 곁에는 백여 기가 제법 위엄을 갖추고 벌려 서 있 었으나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조조는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도 내 이름을 듣자 바람에 흩어지 는 가랑잎처럼 달아났다. 그런데 너는 어떤 물건이기에 아직도 항복 을 않느냐?”
공명이 문득 깃털 부채를 들어 장임을 가리키며 꾸짖었다.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세에 비해 터무니없게 들리는 큰소리였다. 장 임이 말 위에서 차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사람들은 제갈량이 군사를 부리는 데는 귀신 같다더니 모두 헛 소리로구나. 이름만 높았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고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창을 쓰윽 쳐들어 휘저었다. 그걸 군 호로 장임의 군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밀고 나갔다.
그 엄청난 기세에 질렸는지 공명의 장졸들은 한번 제대로 맞서 보지도 않고 뒤돌아 내빼기 시작했다. 공명도 수레를 버리고 말에 올라 그런 군사들 틈에 섞였다.
어지간한 장수면 그것이 자신을 유인하는 계책임을 알아볼 것이 언만, 그 무슨 패신에 홀렸는지 장임은 그만 깜빡했다. 그저 신이 나 서 금안교를 건너 물러나는 공명을 뒤쫓기에 바빴다.
장임과 그 군사들이 막 금안교를 건넜을 때였다. 돌연 함성이 일 며 오른쪽에서는 유비가, 왼쪽에서는 엄안이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마주쳐 나왔다.
장임은 그제서야 자신이 공명의 계책에 빠진 줄 알았다. 급히 금 안교로 물러나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조운이 다리를 끊어버린 뒤였 다. 장임은 다시 북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북쪽 언덕에는 어느새 조운이 군사를 벌려 세운 채 가로막고 있었다. 길이 막힌 장 임은 하는 수 없이 말 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개울을 끼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륙 리나 달렸을까, 갈대가 무성한 곳에 이르렀을 때 홀연 위연이 갈대숲 속에서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위연의 군사들은 모두 긴 창을 들었는데 오직 말 탄 장졸들만 노려 찔러댔다.
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한 곳에 황충이 칼과 도끼를 든 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 이번에는 말다리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장 임의 마군은 모조리 땅바닥에 떨어져 죽거나 사로잡히는 신세로 변 했다. 믿고 있던 마군이 그 모양이 되니 뒤따르던 보군이 어찌 감히 나갈 수 있겠는가.
이에 다급해진 장임은 겨우 수십 기만 이끌고 가까운 산길로 접 어들었다. 졸개들을 모두 버리다시피 하며 찾아든 길이었지만 실은 거기가 바로 범 아가리였다. 언제 와 있었는지 장비가 불쑥 나타나 길을 막은 까닭이었다.
놀란 장임이 급히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 은 뒤였다. 장비가 천둥 같은 고함 소리를 내지르며 우르르 덮쳐 단 숨에 장임을 사로잡아버렸다.
장임을 따라왔던 촉장 탁응도 그때는 이미 장임의 편이 아니었다. 장임이 계책에 빠져 허둥대는 걸 보자마자 탁응은 조운에게 가서 항 복해버렸다. 성을 나왔던 촉의 장졸들은 한판 싸움으로 모조리 유비 의 손아귀에 떨어져버린 셈이었다.
유비가 항복한 탁응에게 상을 내리고 있을 때 장비가 사로잡은 장임을 끌고 들어왔다. 유비는 그런 장임을 달래볼 양으로 물었다.
“촉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바람에 쓸리듯 항복하였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았는가?”
장임이 눈을 부릅떠 유비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충신이 어찌 두 주인을 섬기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대는 천시(天時)를 너무 모르는구나. 이제 어떠냐? 항복하면 그대를 무겁게 쓰겠다.”유비가 더욱 마음이 끌리는지 한 번 더 장임을 달랬다. 그러나 장
임의 뜻은 이미 정해진 모양이었다. 한번 곰곰 생각해보는 법도 없 이 내뱉었다.
“지금 항복한다 해도 뒷날에는 다시 내 본인을 따를 것이다. 아 무 소용없으니 차라리 나를 어서 죽여라!”
그래도 유비는 차마 장임을 죽이지 못했다. 어떻게든 달래 제 사 람으로 만들어보려고 애썼지만 장임은 소리 높여 유비를 꾸짖을 뿐 항복하려 들지 않았다. 곁에 앉아 있던 공명이 보다 못해 유비에게 나직이 권했다.
“아무래도 그의 청을 들어주어 아름다운 이름이나 지키게 해주는 편이 낫겠습니다. 장임을 목 베도록 하십시오.”
그러고는 아직도 망설이는 유비를 대신해 무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장임을 끌어내 목 베도록 하라!”
그 역시 장임을 죽이기가 못내 아까웠으나, 섣불리 살려주었다가 아직도 많이 남은 서천의 장수들이 모두 장임을 따를까 두려워 그같 이 결단을 내렸다.
장임이 죽은 뒤에도 유비는 애석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시체를 거두어 후하게 장례를 치러준 뒤 금안교 곁에 묻고 빗돌을 세워 그 충성을 기렸다. 그러나 유장의 서천으로 보면 장임의 그 같은 죽음 은 엄안의 항복에 이어 또 하나의 든든한 기둥이 무너져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날이었다. 유비는 엄안과 오의를 비롯해 항복한 촉의 장수들을 모두 앞장세워 낙성으로 갔다.
“빨리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그리하면 성안의 모든 목숨을 건질수 있을 것이다.”
엄안은 성안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우두머리 격인 유괴 는 항복은커녕 온갖 욕설과 꾸짖음으로 항복한 장수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참지 못한 엄안이 가만히 화살을 뽑아 시위에 얹었을 때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