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9화 : 서천엔 드디어 새로운 해가 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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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9화 : 서천엔 드디어 새로운 해가 뜨고


서천엔 드디어 새로운 해가 뜨고

장비와 마초의 싸움은 그럭저럭 백합을 넘어섰다. 그러나 승부가 나기는커녕 어느 쪽도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범 같은 장수들이로구나.”

보고 있던 유비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은근히 마초가 탐이 나면서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장비가 실수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 바람에 유비가 징과 북을 울리게 하여 장비를 불러들이니 마초도 하는 수 없이 자기 진채로 돌아갔다.

하지만 장비는 아무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잠시 말을 쉬게 한 뒤 투구도 쓰지 않고 머릿수건만 맨 채 다시 말 등에 뛰어올랐다. 그 리고 유비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관을 뛰쳐나가 마초에게 싸움을 걸었다.

걸어온 싸움을 마다할 마초가 아니었다. 장비가 부르는 소리를 듣 자마자 창을 끼고 달려 나오니 둘의 싸움은 다시 어우러졌다.

유비는 아무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장비가 실수할 때를 대비해 스스로 갑주를 두르고 관을 나갔다. 유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싸움은 백 합을 넘어섰으나 둘 다 싸울수록 더 힘이 솟 는 것 같았다. 신들린 사람들처럼 창끝을 주고받는데, 그 기세가 처 음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보다 못한 유비가 또다시 징과 북을 울리게 하여 장비를 불러들 였다. 장비가 마지못해 물러나자 마초 역시 홀로 싸울 수는 없는 노 릇이라 자기 진채로 돌아갔다. 거기다가 날도 이미 저물어 어느 쪽 도 더 싸울래야 싸울 수가 없었다.

“마초는 빼어난 장수이니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된다. 오늘은 이 만 관으로 돌아가고 내일 다시 와서 싸우도록 해라.”

까닭없이 자신을 불렀다고 불퉁거리는 장비를 유비가 그렇게 달 랬다. 그러잖아도 화가 날 대로 나 있던 장비는 유비가 또 마초를 추 켜세우며 싸움을 말리자 대들듯 소리쳤다.

“싫소! 죽으면 죽었지 나는 아니 돌아갈 테요. 다시 나가 마초 놈 과 끝장을 볼 테니 갈 테면 형님이나 가시오.”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고 있지 않으냐? 어두운데 싸움은 무슨 싸 움을 한단 말이냐?”

유비가 날 저문 걸 핑계로 장비를 달래 데려가려 했다. 그래도 장 비는 꿈쩍도 안했다.

“어두우면 어떻소? 횃불만 많이 밝혀준다면 밤이라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소!”

그렇게 뻗대면서 어떻게든 싸울 궁리만 했다.

싸움을 하다 말고 돌아온 게 마음에 안 차기는 마초도 마찬가지 였다. 자기 진채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그대로는 아무래도 견딜 수 없어 곧 말을 갈아타고 진문을 나섰다.

“장비야, 네 나와 밤 싸움을 한번 벌여보겠느냐?”

장비의 진채 앞으로 달려온 마초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장비로 보 면 마초가 때맞추어 불러준 셈이었다. 아직도 어떻게든 싸움을 말리 려 드는 유비를 끌어내리듯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그 말을 갈아타고 달려 나가며 맞고함을 질렀다.

“오냐, 좋다! 내 오늘 너를 사로잡지 않고서는 맹세코 관으로 돌 아가지 않겠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나야말로 네놈을 사로잡지 못하면 결코 진 채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마초가 그렇게 맞받으니 이제 남은 것은 불을 밝히는 일뿐이었다. 양쪽 군사가 모두 횃불을 하나씩 붙여 들자 곧 싸움터는 대낮처럼 밝아졌다.

장비와 마초는 그 불빛 아래서 그날 들어 세 번째의 싸움을 시작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 달랐다.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둘의 말 과 말이 엇걸리기를 스무 번쯤이나 했을까, 문득 마초가 힘에 부친 듯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어디로 도망가려느냐?”

장비가 그런 마초를 뒤쫓으며 소리쳤다. 얼핏 보아서는 어김없이 마초가 져서 쫓기는 것 같았지만 실은 거기에 속임수가 있었다. 아무리 싸워도 장비가 조금도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자 마초가 계략을 쓰는 중이었다.

싸움에 진 체 쫓기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손안에 감춘 구리 철퇴 로 방심한 장비를 단번에 박살낸다는 게 마초가 생각해낸 꾀였다. 그러나 싸움터에서의 속임수라면 장비도 그리 어두운 사람이 아니 었다. 마초가 달아나니 쫓기는 해도 장비 또한 그게 거짓이라는 것 쯤은 알아차리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단단히 채비를 하고 뒤쫓는데 마초가 갑자기 몸을 틀며 손에 감추고 있던 구리 철퇴를 내던졌다. 장비가 얼른 몸을 그려 피했으나 워낙 가까이서 던진 것이라 구리 철퇴는 장비의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비는 놀란 가운데 도 퍼뜩 마초의 계략을 거꾸로 이용할 생각이 났다. 가볍게 얻어맞 기라도 한 듯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초가 말을 돌려 장비를 쫓았다. 그러나 그도 마음을 영 놓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신없이 달아나는 것 같은 장비가 돌연 활을 뽑더니 화살 하나를 쏘아 붙였다. 마초가 얼른 몸 을 틀어 피하자 화살은 마초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겨우 화살을 피하기는 했지만 마초는 장비를 더 쫓을 마음이 없 어졌다. 자신의 계략을 눈치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이용할 줄까지 아는 장비가 은근히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마초가 뒤쫓기를 그만두자 싸움은 일단 거기서 끝이 났다. 장비 역시 마초의 구리 철퇴에 어지간히 놀란 듯 진채로 돌아왔다. 그러 나 어찌 됐건 군사들의 기세에 있어서는 장비 쪽이 높았다. 유비는 그 기세를 타고 마초를 한번 몰아붙일까 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던지 몸소 진채 앞으로 나가 마초를 보고 외쳤다.

“나는 오직 인의로 사람을 대할 뿐 거짓과 속임수는 쓰지 않았다. 마맹기(馬孟起) 그대는 어서 군사를 수습해서 물러가 쉬도록 하라. 지금 기세가 높은 곳은 분명 우리 쪽이지만, 그렇다고 그 기세를 타 고 그대를 들이칠 뜻은 없다!”

그 말을 들은 마초는 뜨끔했다. 양쪽의 기세가 실인즉 유비의 말 대로인 까닭이었다. 이에 마초는 스스로 뒤를 맡아 유비가 덮치는 것에 대비하면서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멀찌감치 물러나게 했다. 유 비도 군사를 거두어 관 안으로 되돌아갔다.

다음 날이었다. 장비는 해가 뜨기 바쁘게 다시 관을 내려가 마초 와 싸우려 들었다. 슬몃 딴생각이 나 마초와의 싸움을 되도록 미루 고 싶어진 유비가 이런저런 핑계로 장비를 말리고 있는데 문득 사람 이 들어와 알렸다.

“군사께서 오셨습니다.”

면죽을 지키고 있어야 할 공명이 그리로 왔다는 게 뜻밖이라면 뜻밖일 수도 있었으나 유비는 우선 반갑기만 했다. 뛰듯이 달려나 가 공명을 맞아들이며 물었다.

“군사께서 어찌하여 이리로 오셨소?”

“제가 들으니 마초는 세상이 다 아는 범 같은 장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익덕이 그와 더불어 죽기로 싸운다면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상할 것이니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조자룡과 황한 승(黃漢, 황충)에게 면죽을 지키게 하고 저는 밤길을 달려 이리로 온 것입니다. 몇 가지 계책이면 마초를 주공의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을 듯합니다.”

공명이 담담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바로 진작부터 마음속으로 바라던바라 유비가 얼른 물었다.

“어떻게 하면 마초를 얻을 수 있겠소?”

“듣기로 동천의 장로는 자립하여 스스로 한녕왕(漢寧王)이 되려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부리는 모사 양송(楊松)은 몹시 욕심이 많고 뇌물 받기를 좋아하니 그를 잘 주무르면 길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사람을 뽑아 남의 눈에 안 띄게 한중으로 보내고 금으로 양송 을 구워삶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장로에게 글을 보내 이렇게 말하 시면 됩니다.

‘내가 유장과 서천을 두고 싸우는 것은 그대의 원수 갚음을 위한 것도 되니 그대는 결코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무리들의 말을 듣 지 마라. 이곳 일이 매듭지어지면 그대를 도와 한녕왕에 오르게 하 겠노라.’

그리고 아울러 마초의 군사를 불러들이게 하면 일은 거지반 된 것입니다. 뇌물을 먹은 양송이 또한 우리를 위해 장로를 부추겨줄 것이니 마초가 어찌 돌아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마초가 한중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바로 내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소?”

공명이 그때까지 한 말만으로는 아직 넉넉하지 않아 유비가 다시 물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초가 돌아가려 할 때 다시 알맞은 계책을 써서 우리에게 항복하도록 만들겠습니다.”

공명은 그렇게만 대답하며 빙긋 웃었다. 남은 계책이 어떤 것인지 는 모르지만 유비는 기쁨부터 앞섰다. 그때껏 공명이 꾀한 일 치고 어그러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곧 장로에게 보낼 글을 쓴 뒤 손건에게 주어 남몰래 한중으로 보냈다. 그 글과 함께 양송을 매 수할 금은과 값진 구슬을 듬뿍 주었음도 말할 나위가 없었다.

지름길로 한중에 이른 손건은 공명이 말한 대로 먼저 양송을 찾 아보았다. 가져간 금은과 값진 구슬들을 모두 바치고 유비가 장로에 게 보낸 글과 같은 뜻의 말을 했다. 욕심 많은 양송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손건의 말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옳아서가 아니라 굴러 들어 온 재물이 기꺼워서였다.

양송은 곧 손건을 데리고 장로 앞에 나가 갖은 말로 유비를 두둔 하며 그 뜻을 들어줘야 한다고 우겼다. 양송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 주를 쑨다 해도 믿어주는 장로였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아무래도 얼 른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유비의 글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다가 양송 에게 불쑥 물었다.

“현덕은 겨우 좌장군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나를 도와 한녕왕 에 오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그렇게만 보실 일이 아닙니다. 유비는 천자의 아재비[皇 叔]가 되는 사람이니 그만 일쯤은 주청을 드릴 수 있습니다.”

양송이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장로가 들어보니 그도 그럴 법했 다. 당장 왕호라도 받은 듯 기뻐하며, 유비가 바라는 대로 사람을 마 초에게 보내어서 군사를 물리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손건은 그래도 돌아가지 않고 양송의 집에 머물며 일이 확실하게 매듭지어지는 보려고 기다렸다.

“마초는 공을 이루기 전에는 군사를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 다. 쉬이 돌아올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장로에게는 뜻밖의 소리였다. 왕이 된다는 데 급해진 장로는 다시 사람을 보내 마초를 불렀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마초는 같은 말 만 되풀이하며 잇달아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도 꿈쩍 않았다.

그걸 본 양송이 옳다구나 하며 장로를 속삭거렸다.

“그것 보십시오. 마초는 원래 믿지 못할 위인이었습니다. 이제 군 사를 물리지 않는 것은 반드시 모반할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러고는 한편으로 사람을 시켜 유언비어를 이리저리 퍼뜨렸다. 

“마초는 서천을 빼앗아 스스로 촉왕(蜀)이 되려 한다. 그렇게 하 여 아비와 자식의 원수를 갚으려 들 뿐, 한중의 신하 노릇을 할 마음 은 없다.”

처음부터 장로에게 들어가라고 지어낸 말이라 그것은 곧 장로에 게 전해졌다. 그 소리를 들은 장로는 놀랐다. 그래도 믿을 사람은 너 밖에 없다는 듯 양송을 불러놓고 걱정스레 물었다.

“마초가 딴 뜻을 품고 있다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양송이 가장 꾀 많은 체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먼저 사람을 마초에게 보내 이렇게 이르십시오. 네가 굳이 공을 이루려 한다면, 한 달 말미를 줄 것이니 이 세 가지 일을 모두 이루 도록 하라. 첫째는 서천을 뺏는 것이오, 둘째는 유장의 목을 가져오 는 것이며, 셋째는 유비의 형주 군사를 무찌르는 것이다. 만약 이 세가지를 모두 해내면 크게 상을 내리겠으나 해내지 못할 때는 네 목 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장위(張衛)에게 군사를 주 어 가맹관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목들을 굳게 지키라 하십시오. 장위 라면 마초가 변을 일으켜도 잘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전부터 틈만 나면 마초를 해치려고 마음 먹고 있던 양송의 계책 이라 빈틈이 없었다. 왕이 될 욕심으로 마음이 급해질 대로 급해진 장로도 기꺼이 거기 따랐다. 곧 사람을 마초에게 보내 양송이 말한 세 가지를 전하게 했다.

한편 장로의 사자로부터 그 세 가지 조건을 전해 받은 마초는 크 게 걱정이 되었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었단 말이냐? 내가 무슨 재주로 한 달 안 에 그 세 가지 일을 모두 해낼 수 있겠는가!”

그렇게 탄식하고 마대를 불러 말했다.

“안 되겠다. 장로가 정히 이렇게 나온다면 군사를 물려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겠다.”

마대 또한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 이고 마초를 도와 군사를 물릴 채비에 들어갔다.

마초가 돌아오려 한다는 소문을 듣자 양송은 다시 그다음 일을 시작했다. 사람을 풀어 새로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일이었다. 

“마초가 군사를 되돌려오는 것은 반드시 딴 뜻이 있어서일 것이 다. 마초가 돌아오면 한중에는 큰 난리가 난다.”

그 말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장로의 귀에 들어갔다. 놀란 장로가 장위에게 엄히 방비하란 영을 내리니 장위는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험한 길목마다 굳게 지키며 마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마초는 오도 가도 못하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풀어놓은 사람들을 통해 마초의 그 같은 처지를 전해 들은 공명이 유비를 찾아보고 말 했다.

“이제 마초는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지경에 빠졌습니다. 제가 한번 마초의 진채를 찾아보고 세치 썩지 않은 혀로 마초를 달 래 주공께 항복하도록 권해보겠습니다.”

그러자 유비가 걱정스레 대꾸했다.

“선생은 제게 팔다리같이 요긴하고 가슴이나 배처럼 중한 분이시 오. 만약 마초를 찾아갔다가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제가 다 헤아려둔 바가 있습니다. 걱정 말고 기다리시면 반드시 마초를 데려와 주공 앞에 무릎 꿇게 하겠습니다.”

공명은 그렇게 장담하며 굳이 마초를 찾아가려 했다. 그러나 유비 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거듭 공명을 말리며 보내주지 않 았다. 유비가 워낙 붙들며 놓아주지 않자 공명은 얼른 떠날 수 없었 다. 그래저래 며칠이 지났을 때 문득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조(趙)장군께서 추천하는 글과 함께 선비 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유비가 그 선비를 불러들여 보니 다름 아닌 이회(李恢)였다. 건녕 유원(元)사람으로 자를 덕앙(德昻)으로 썼는데 그동안 유장 밑에 서 일하다가 이번에 조자룡에게 투항한 사람이었다.

유비는 이회가 서천에서 벼슬살이 할 때 유장이 유비를 불러들이 려 하자 그가 나서 말린 일을 알고 있었다. 그걸 꾸짖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로 돌아선 까닭이 궁금해서 물었다.

“내가 듣기로 공은 전에 유장에게 나를 불러들이지 말라고 권했 다 했소. 그런데 이제 무슨 까닭으로 나에게 돌아서시었소?”

이회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없이 대답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깃들이고 밝은 신하는 주인을 골라 섬긴다 했습니다. 제가 전에 유장에게 그렇게 권한 것 은 신하 된 사람으로서의 정성을 다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 유장 은 그걸 듣지 않았으니 그가 망할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비해 이제 장군은 우리 촉 땅에 널리 어지심과 덕을 베풀고 계십니다. 따라서 반드시 뜻하신 바를 이루실 것이라 믿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유비가 들어보니 세력을 따라 철새처럼 옮겨다니는 하찮은 무리와 는 뜻이 달라 보였다. 이에 새삼 공경하는 몸가짐을 취하며 물었다.

“선생께서 이렇게 오신 것은 반드시 제게 도움을 주시려 함인 줄 알고 있소이다. 이제 어떻게 저를 도와주시겠소?”

“지금 마초는 오도 가도 못할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다행 히 제가 농서에 있을 때 그와 한번 사귄 적이 있기에 그를 찾아가 장군께 항복하도록 달래보고 싶습니다. 장군의 뜻은 어떠십니까?” 

이회가 별로 망설이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곁에 있던 공 명이 그런 이회를 보고 말했다.

“그것 참 고마운 말씀입니다. 마침 저를 대신해 마초를 찾아갈 사 람을 구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마초를 만나 어떻게 달랠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이회는 공명의 귀에 대고 한동안 무어라고 소리 죽여 말 했다. 듣고 난 공명은 몹시 기뻐하며 그날로 이회를 마초에게 보냈다.

마초의 진채에 이른 이회는 먼저 자신의 이름부터 디밀게 했다. 이회란 사람이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자 마초는 대뜸 중얼거렸다. 

“나는 이회가 매우 말 잘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 이제 틀림없이 나를 달래러 왔을 것이다.”

그러고는 군사 스무 명을 불러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칼과 도끼를 들고 장막 뒤에 숨어 있거라. 내가 ‘베어라!’ 하고 소리치거든 단숨에 달려 나와 그자를 다져진 고깃덩이로 만들 어버려야 한다.”

옛정 같은 것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은 매서운 영이었다. 오래잖아 부름을 받은 이회가 마초의 장막으로 들어왔다. 어찌 보면 호랑이 굴이라도 그보다 더한 호랑이 굴이 없는 셈이건만 조금도 두려워하 는 기색이 없었다.

자리에 꼿꼿이 앉아 그런 이회를 맞아들인 마초는 첫마디부터 꾸짖듯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왔는가?”

“오늘은 특히 세객이 되어 공의 마음을 돌리게 하려고 왔소이다.”

이회가 서슴없이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마초는 일순 아연했으나 곧 차갑게 내뱉었다.

“지금 내 칼집에는 금세 갈아둔 보검이 들어 있다. 그대가 세객으 로 온 것은 좋지만, 만약 그대의 말이 조금이라도 이치에 어긋나면 그대의 목으로 내 칼날을 시험해볼 것이다!”

그러나 이회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장군은 화가 코앞에 미쳤는데도 큰소리만 치시는구려! 장군이 내 목에 그 칼을 시험하기 전에 자신의 목을 먼저 시험하게 될까 두 렵소이다.”

“화라니? 내게 무슨 화가 닥쳤단 말이냐?”

이회의 말이 너무 당돌해 마초는 화낼 것도 잊고 그렇게 묻기부 터 먼저 했다. 이회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변설을 쏟 아놓았다.

“내가 듣기로, 남을 아무리 잘 헐뜯는 사람이라도 월(越)의 서자 (西子, 미인 서시)가 아름답다는 것만은 가릴 수가 없고, 남을 아무리 잘 추켜세우는 사람이라도 제(齊)의 무염(無鹽, 무염녀. 제나라 무염현 에 살았다는 몹시 못생긴 여자)이 못생겼다는 것은 감출 수 없다 하였소 이다. 한낮이 되면 해는 기울기 시작하고 달도 가득 차면 다시 줄어 드는 게 세상의 변함없는 이치가 아니겠소? 지금 장군은 천하를 호 령하는 조조와는 아비 죽인 원수 사이가 되었고, 또 농서의 사람들 에게도 이를 갈 만한 한을 품게 하였소. 앞으로는 형주의 군사를 물 리쳐 유장을 구하지 못했으며, 뒤로는 장로의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되었소이다. 이제는 사방을 둘러봐도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장 군 한 몸뿐이니 참으로 딱한 일이오. 만약 다시 저 위교(渭橋)에서 조조에게 져 쫓길 때나 기성을 양부(楊)의 무리에게 잃을 때와 같 은 꼴을 당하게 된다면 무슨 낯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시겠소?”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마초의 가슴을 찔러오는 것 같은 말이었다. 그제서야 마초도 허세를 버리고 머리를 수그리며 이회에게 매달리듯 말했다.

“공의 말씀은 모두가 지극히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이 마초는 지금 가려 해도 갈 길이 없소이다.”

그러나 이회는 서두르지 않고 한 번 더 마초의 기를 꺾었다. 

“공께서 참으로 내 말을 들으시려 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장막 뒤 에 도부수는 감춰두셨소?”

진작부터 짐작했던 일이지만 그 말의 효과는 매우 컸다. 이회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있던 마초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죄 없는 도부수들만 꾸짖어 물리쳤다. 이회는 그제서야 문득 정색을 하며 마 음속에 감추고 있던 말을 쏟아놓았다.

“유황숙께서는 예를 다해 선비를 공경하니 반드시 그 뜻하신 바 를 이루실 것이오. 나는 그 때문에 일찍이 섬기던 유장을 버리고 그 분께로 갔소이다. 더구나 공의 선친께서는 지난날 유황숙과 함께 역 적을 쳐 없애기로 맹세한 적도 있는데 공은 어찌하여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찾아가지 않으시오? 유황숙께 의지하면 위로는 선친의 원수 를 갚고 아래로는 공명을 이룰 수도 있지 않겠소?”

그 말을 듣자 마초는 캄캄하던 눈앞이 일시에 환해지는 것 같았 다. 그 자리에서 이내 마음을 정하고 그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양백 을 불러들여 한칼에 목을 잘라버렸다. 전에 마초가 장로의 사위 되 는 걸 훼방놓은 죄에다 또 그의 형 양송에 대한 미움까지 곁들여진 것이지만, 그보다는 양백을 죽임으로써 다시는 장로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한다는 뜻이 컸다.

마초가 양백의 목을 받쳐들고 이회와 함께 관 앞으로 가서 항복을 청하자 유비가 몸소 나와 귀한 손님을 받는 예로 맞아들였다. 마 초는 더욱 감격하여 스스로 유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제 밝은 주인을 만났으니, 마치 두꺼운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 늘을 우러르는 듯합니다.”

서량의 야생마가 드디어 고삐를 잡힌 셈이었다.


그런데 유비가 마초를 얻게 된 경위에 대해서 정사의 기록은 좀 다르다. 조조에게 쫓긴 마초가 장로에게 간 것과 장로가 마초를 사 위 삼으려 한 것까지는 옳으나 그다음은 순전히 공명의 지략을 추키 기 위한 구성인 듯하다. 손건을 보내 양송을 뇌물로 구워삶은 일이 며 장로를 부추겨 마초를 궁지에 몰아넣은 부분은 정사에 없을 뿐더 러, 항복도 양백의 참소 때문에 갈 곳이 없어 저족氐族)의 부중으로 도망간 마초가 스스로 밀서를 보내 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쨌든 마초를 얻게 된 유비는 힘이 전보다 곱절이나 솟았다. 곽 준과 맹달에게 다시 가맹관을 맡기고 나머지 장졸은 모두 성도를 치 는 데로 돌렸다. 양송의 집에 머물며 마초가 한중으로 돌아올 수 없 도록 일을 꾸미던 손건도 이때는 이미 몸을 빼내 유비의 진중으로 돌아와 있었다.

면죽에 이르니 조운과 황충이 반갑게 유비를 맞아들였다. 유비가 여럿과 더불어 다시 성도를 뺏는 일을 의논하는데 문득 사람이 달려 와 알렸다.

“의 장수 유준(劉晙)과 마한(馬)이 군사를 이끌고 왔습니다.”

여럿 중에서 조운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 가서 그 두 놈을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유비가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말 위에 뛰어올랐 다. 유비는 그런 조운을 굳이 막지 않고 남은 장수들과 더불어 성위 로 올라가 마초를 대접하는 잔치를 열었다.

그런데 미처 그 잔치가 자리도 다 잡기 전에 조운이 되돌아와 목 둘을 바쳤다. 바로 촉장 유준과 마한의 목이었다. 조운의 그같이 번 개 같은 솜씨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마초였다. 조운의 소문은 일찍 부터 들어왔으나 그토록 놀라운 솜씨를 지녔을 줄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자신의 솜씨도 자랑하고 싶었다.

한편 조운에게 두 대장을 잃고 성도로 되쫓겨 들어간 촉의 군사 들은 유장을 찾아가 그 끔찍한 소식을 전했다. 유비군의 힘과 기세 를 전해 들은 유장은 크게 놀랐다. 굳게 성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는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이 와서 알렸다.

“성 북쪽에 마초의 구원병이 이르렀습니다.”

아직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한 걸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유장은 왠지 선뜻 성문을 열고 마초를 맞아들이고 싶지 않아 우선 북쪽 성벽 위로 올라가 살펴보았다. 과연 마초가 아우 마대와 말 머 리를 나란히 하고 서 있다가 성벽 위를 쳐다보며 크게 소리쳤다.

“유계옥(玉)은 잠시 얼굴을 내미시오. 내가 꼭 드릴 말씀이 있 소이다.”

“나는 여기 있소! 마맹기는 내게 어떤 가르침을 내리려 하시오?”

유장이 얼른 대꾸하며 성벽 가로 몸을 옮겼다. 마초가 채찍을 들어 그런 유장을 가리키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원래 장로의 군사를 빌려 이곳 익주를 구해주려고 왔소이 다만,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장로는 양송이 참소하는 말만 믿고 오히려 나를 해치려 들기에 나는 그만 유황숙께 항복하고 말았소. 공께서도 항복하시어 성안의 뭇 생령들이 쓸데없는 고초를 겪지 않 게 해주시오. 만일 어지러운 말에 홀려 고집을 부리신다면 내가 먼 저 성을 공격하겠소이다!”

유장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유비 하나만도 당 해내기 어려운데 자기를 구하러 온 줄 알았던 마초까지도 유비와 한 편이 되어 엄포를 놓고 있는 까닭이었다. 놀란 유장은 얼굴이 흙빛 이 되어 성벽 위에 혼절해 쓰러졌다.

곁에 있던 여러 벼슬아치들이 얼른 그런 유장을 업어다 자리에 뉘었다. 잠시 후 다시 깨어난 유장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모두 내가 밝지 못해 생긴 일이니 이제 와서 뉘우친들 무엇하랴. 차라리 성문을 열고 항복하여 성안의 백성들이나 구하는 편이 옳으 리라.”

곁에 있던 동화(董和)가 문득 격한 말투로 마음 약한 주인을 말렸다.

“성안에는 아직 삼만의 군사가 있고, 돈과 베며 양식과 말먹이 풀 도 일 년은 버텨낼 만합니다. 그런데 항복이라니요? 당치않은 말씀 입니다.”

그러나 유장은 이미 뜻을 굳힌 듯했다.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리 부자가 촉을 다스린 지 스무 해가 넘었건만 백성들에게 이 렇다 할 은덕을 베풀지 못했소. 거기다가 지금은 유비와 삼 년에 걸 친 싸움으로 죽은 이의 뼈와 살이 들판을 덮고 있으니 이는 모두 내 죄라 할 것이외다. 그래놓고 내가 어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소? 차라리 항복하여 백성들이나 괴로움을 면하게 해주는 편이 옳을 것 같소이다.”

유장이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짓자 듣고 있던 벼슬아치들도 모두 솟는 눈물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유장 못지않게 그들도 대세는 이 미기운 걸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때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나오더니 눈물을 거두며 결연히 말했다.

“주공의 말씀이 바로 하늘의 뜻에 맞습니다. 부디 그대로 시행하시어 이 땅의 뭇 백성을 구하십시오.”

모두 그 사람을 보니 그는 파서 서충국 사람 초주(周)였다. 초주는 자를 윤남(南)이라 썼는데 일찍부터 천문에 밝아 사람 들 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하늘의 뜻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유장이 슬픈 중에도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물었다. 초주가 아는 대로 일러주었다.

“제가 밤에 하늘을 살펴보니 뭇별들이 촉군으로 모이고 있었습 니다. 그중에 한 큰 별이 있는데, 그 빛이 밝기가 마치 보름달 같은 게 틀림없이 제왕의 별이었습니다. 거기다 일 년 전부터 이곳 아이 들이 부르는 노래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만약 새밥을 얻어 먹으려거든[要吃新飯] 선주가 오기를 기다려 보세須待先主來]’

바로 오늘 이 같은 일을 하늘이 미리 아이들의 입을 빌려 알리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천도를 거슬러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이미 항복할 뜻을 굳힌 유장은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표정이 없 었으나 전부터 유비와 싸우기만을 권해온 황권과 유파는 몹시 노했 다. 둘이 한꺼번에 칼을 빼들며 초주를 목 베려 했다. 유장이 오히려 그런 두 사람을 말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들어와 급한 소식을 알렸다.

“촉군 태수 허정(靖)이 성을 빠져나가 유비에게 항복해버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유장은 더욱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는 게 그 무엇보다 괴로웠다. 참지 못 한 유장이 크게 소리내어 울며 부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그날의 항 복 논의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유장에게 이런 전갈이 들어왔다. “유황숙이 막빈 간옹을 보내왔습니다. 지금 성 아래 와서 문을 열 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유장은 곧 성문을 열고 간옹을 맞아들이게 했다. 간옹은 수레에 앉아 성문을 들어오는데 대군의 위세를 등에 입어서 그런지 그 태도가 자못 거만했다.

문득 한 사람이 칼을 빼들고 소리 높여 간옹을 꾸짖었다.

“하찮은 무리가 제 뜻대로 일이 되니 눈앞에 사람이 안 보이는 모양이로구나. 네 어찌 감히 우리 촉 땅 사람들을 얕보려드느냐?”

그 소리에 놀란 간옹이 얼른 수레에서 내려 그 사람을 맞고 보니 다름 아닌 진복(秦)이었다. 광한 면죽 사람으로 자를 자칙(이라 쓰는데 간옹과는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간옹이 진복을 보고 웃 으며 말했다.

“내가 현형(兄)이 여기 계신 줄 몰랐구려. 부디 너무 허물하지 마시오.”

목소리는 태연했으나 아무래도 간옹의 기가 한풀 꺾인 것만은 틀 림없었다. 진복과 함께 성안에 들어가 유장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 였다. 거만한 기색은 조금도 없고 그저 좋은 말로 유비의 관대한 성 품과 넓은 도량을 전하고 서로 해칠 뜻이 없음을 밝힐 뿐이었다.

유장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이미 마음 먹은 대로 항복을 결정 했다. 간옹을 후하게 대접하며 그 밤을 지낸 뒤, 이튿날 일찍 태수의 인수(印)며 거기 따른 여러 가지 문서와 장부를 싸가지고 간옹과 더불어 수레에 올랐다.

유장이 성을 나와 항복하러 오고 있다는 말을 들은 유비는 몸소 진채를 나와 유장을 맞아들였다.

“내가 인의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가 없었네. 너무 섭섭하 게 여기지 말게.”

유비는 유장의 손을 움켜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간곡히 말했다. 구 경하는 사람들은 물론, 당장 기업을 빼앗기게 된 유장까지도 가슴이 뭉클할 만큼 진정 어린 말이었다. 인수와 문서들을 거두어들인 뒤에 도 유비의 그 같은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유장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성안으로 들어가는데 조금도 오랜 싸움 끝에 항복받은 사람을 대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유비가 성도 성안으로 들어가자 백성들이 성문까지 몰려나와 향 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맞아들였다. 새로운 주인의 환심을 사려는 난세의 계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유비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큰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유비가 공청廳)에 이르러 당에 오르자 촉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몰려와 당 아래 엎드렸다. 그러나 황권과 유파만은 문을 닫아걸고 집에 들어앉아 끝내 유비를 찾아보려 아니했다. 두 사람의 그 같은 태도에 유비의 장수들은 모두 성이 났다. 둘다 죽여버려야 한다면서 칼을 빼들고 나섰다. 놀란 유비가 엄히 영을 내렸다.

“누구든지 황권과 유파를 해치면 그 삼족을 모두 죽여 없앨 것이다.”

비록 방향은 다르지만 그 둘의 충성을 높이 산 까닭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유비는 몸소 황권과 유파의 집을 찾아가 자신과 함께 일하기를 권했다. 그렇게 되자 황권과 유파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장의 충신으로 죽을 생각을 버리고 다시 나왔다. 어느 정도 성안이 가라앉자 공명이 유비에게 말했다.

“이제 서천은 평정되었습니다만 한 땅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습 니다. 유장을 형주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이제 막 촉군을 얻었는데 어찌 유장을 멀리 보낼 수 있겠소?”

유비가 얼른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그렇게 대꾸했다. 공명이 굳은 표정으로 몰아붙이듯 말했다.

“유장이 자신의 기업을 잃어버린 것은 모두 그 마음이 너무 약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공께서 또한 아낙네 같은 어지심으로 일을 맺고 끊지 못하시니 이 땅이 오래가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유비도 공명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크게 잔치를 열어 유장을 위로한 뒤 조용히 말했다.

“계옥(玉)은 이제 재물과 가솔들을 수습해 남군 공안(公安)으로 옮겨가도록 하게. 진위장군의 인수를 내릴 터이니 거기서 잠시 쉬는 게 좋겠네.”

말은 그럴듯해도 유장으로 보면 귀양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유장은 그날로 길을 떠나 공안으로 갔다.

유장이 떠나간 뒤 유비는 스스로 익주목(益州牧)이 되어 항복한 문무 벼슬아치들에게 모두 후한 상을 주고 벼슬을 높였다. 엄안을 전장군으로 삼고, 법정은 촉군 태수, 동화는 장군중랑장, 허정은 좌 장군장사, 방의(龐義)는 영중사마, 유파는 좌장군, 황권은 우장군으 로 삼았다. 그밖에 오의(吳懿), 비관(費觀), 이회, 팽양(彭), 탁응(卓 膺), 이엄, 오란, 뇌동, 장익, 진복, 초주, 여의(呂義), 곽준, 등지(鄧芝), 양흥, 주군(群), 비위(費禕), 비시(費詩), 맹달 등에게도 각기 공에 맞는 상과 벼슬을 내리니 이때 유비가 쓴 서촉 사람은 합쳐 예순 명 이 넘었다.

유비는 또 원래부터 거느리고 있던 형주, 양양의 사람들에게도 벼 슬과 상을 내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전과 다름없이 군 사 한 자리만 지켰으나, 관우는 탕구장군 한수정후(漢壽侯)가 되 고, 장비는 정로장군 신정후(侯)가 되었다. 조운은 진원장군, 황 충은 정서장군이 되었으며 위연은 양무장군, 마초는 평서장군이 되었다. 그밖에 손건, 미축, 간옹, 미방, 유봉, 관평, 주창, 요화, 마량, 마 속, 장완, 이적 등도 한 사람 빠지지 않고 벼슬이 올랐다. 그리고 관 우에게 황금 오백 근은 천근에 오십만 전(錢)과 촉에서 난 좋은 비단 천 필을 보냈으며 다른 문무 관원들에게도 등급을 나누어 골고 루 상을 내렸다.

유비는 군사와 백성들도 잊지 않았다. 소와 말을 잡고 술을 빚어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창고를 열어 주린 백성들에게도 골고루 나 누어주니 군민 모두가 기뻐하였다. 서천의 새 주인으로서 흠뻑 인심 을 쓴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익주가 대강 안정되자 유비는 다시 땅과 집으로 눈 을 돌렸다. 성도의 이름난 저택이며 논밭을 자기가 거느린 벼슬아치 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려는 생각이었다. 원래의 임자가 따로 있으 니 모두 힘으로 빼앗아야 하는 어긋난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싸움 에 이긴 편의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다. 조운이 그런 유비를 말렸다. 

“익주의 백성들이 오랜 싸움을 겪는 동안에 그 집과 땅은 모두 비 다시피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흩어진 백성들을 되돌아오게 하여 마음 놓고 생업에 매달릴 수 있게 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땅과 집을 빼앗아 벼슬아치들에게 사사로이 상으로 내리는 것은 옳 지 못합니다.”

유비의 뜻대로 되면 자신에게도 집과 땅이 돌아올 것이건만 조운 은 먼저 민심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비는 그런 조운이 기특했다. 기 꺼이 그 말을 따라 성도의 땅과 집을 거둬들이려던 것을 중지했다. 그다음 유비가 손댄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바탕이 될 법령과 조규(條規)였다. 유비는 그 일을 제갈공명에게 맡기면서 특히 당부했다.

“나라의 여러 법령 가운데 으뜸은 죄벌을 다스리는 형률일 것이 오. 착한 사람은 마음놓고 살 수 있고 악한 자는 두려움을 품게 모든 죄는 무거운 벌로 다스리도록 하시오.”

그러자 곁에 있던 법정이 공명을 보고 말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조(高祖)께서는 법을 줄여 단 세 구 절만 남겼으나 백성들은 모두 그 덕에 감복했습니다. 바라건대 군사 께서는 형벌을 너그럽게 하시어 백성들의 바람에 어그러짐이 없도 록 하십시오.”

그러나 공명은 법가에 기운 사람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다른 둘은 모르시는구려. 지난날 진(秦)이 법 을 거칠고 모질게 써서 백성들은 모두 그걸 원망하고 있었기에 고조 께서는 너그러움과 덕으로 그 법을 줄이셨소.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그때와 같지 않소이다. 유장이 어둡고 약해 덕으로 다스리지도 못하 면서 그 형벌마저 위엄이 없어 군신의 도리가 차차 어지러워졌던 것 이오. 총애하는 자만 벼슬을 높이니 벼슬이 높아질수록 남을 해치 고, 무턱대고 따르는 자에게만 은덕을 베푸니 은덕을 받는 자는 거 만해졌소. 유장이 망한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외다.” 그런 다음 문득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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