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3화 : 가름나는 한중의 주인
가름나는 한중의 주인
유비도 곁에서 공명을 거들어 말했다.
“하후연이 비록 적의 우두머리였다고는 하나 한낱 용맹만 믿는 무리에 지나지 않았소. 어찌 장합에게나 미치겠소? 만약 장합을 목 베올 수 있다면 하후연을 이겨 목 벤 것보다 열 배는 나을 것이오.”
그러자 황충이 또 분이 나서 소리쳤다.
“저를 보내주시면 반드시 장합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공명은 황충이 그렇게 나오자 못 이긴 체 조건을 달아 허락했다.
“그렇다면 조자룡과 함께 가시오.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해서 해나 가도록 하시오.”
황충도 그것까지는 마다하지 않았다. 공명은 또 장저를 불러 부장으로 황충과 함께 가도록 했다.
떠날 즈음하여 조운이 황충에게 물었다.
“조조는 이십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열 군데로 영채를 나누어 세웠다 합니다. 장군께서 주공보다 앞서 가셔서 적의 군량을 뺏는 것 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닌즉, 마땅히 거기 따른 특별한 계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어떤 계책을 쓰실 작정이십니까?”
“나를 먼저 보내주는 게 어떻소? 어찌 됐건 한번 해보리다.”
황충이 계책은 말하지 않고 앞장설 일만 내세웠다. 그러나 공을 서두르기는 젊은 조운도 못지않았다. 의논은 그만두고 앞장서기를 다투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제가 앞서갈 테니 장군께서 뒤따라오십시오.”
“내가 주장이고 그대는 부장이다. 그런데 어찌 앞장을 다투려 드는가?”
황충이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조운이 잠깐 생각하다 절충안을 내놓았다.
“저나 장군이나 모두 주공을 위해 싸우러 나왔습니다. 서로의 계 책을 견줘보아야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제비를 뽑도 록 하시지요. 거기 이긴 편이 먼저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충도 거기까지는 마다할 수 없었던지 조운의 말을 따랐다. 제비 를 뽑아 먼저 가게 된 것은 황충이었다. 황충이 싸우러 나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조운이 와서 말했다.
“이왕 장군께서 먼저 가시게 되었으니 저는 마땅히 뒤에서 도와 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장군께서 돌아올 시각을 정해두는 게 좋 겠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그 시각에 돌아오신다면 저는 군사를 묶어 놓고 움직이지 않을 것이요, 그 시각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즉시 군사를 움직여 장군께 호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의 말씀이 옳소.”
황충도 기꺼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시각을 약정한 조운은 본채 로 돌아와 부장 장익에게 일렀다.
“황한승은 내일 정오로 시각을 정하고 조조의 군량을 뺏으러 갔 다. 만약 정오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마땅히 도우러 가 야 한다. 그러나 우리 영채가 한수를 마주 보고 있어 지세가 매우 위 험하다. 만약 내가 가게 되거든 너는 이 영채를 맡아 지키되, 삼가고 조심하여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어느 쪽도 빈틈이 없는 조운의 헤아림이었다.
한편 자기 진채로 돌아온 황충도 부장 장저를 불렀다.
“내가 하후연을 목 베 장합도 간이 콩알만 해져 있을 것이다. 나 는 내일 명을 받들어 적의 군량과 마초를 뺏으러 가는 바, 이곳은 오 백 군사만 남겨 지키게 하겠다. 너도 따라와 나를 돕도록 하라. 오늘 밤 삼경에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사경에 영채를 떠나 바로 북산 발치를 들이칠 작정이다. 먼저 장합을 사로잡고 다음에 군량과 마초 를 뺏을 것이니 너는 그리 알고 채비하라.”
황충은 그렇게 이르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 새벽 사경 무렵, 황충은 앞장을 서고 장저는 뒤를 떠받치 는 형국으로 진채를 떠난 촉군은 가만히 한수를 건넜다. 황충이 북 산 아래 이르렀을 때는 동쪽에서 막 해가 뜨려 하고 있었다. 군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지키는 군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장합도 거기까지 병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황충은 됐다 싶어 군사를 움직였다. 조조편의 군사들은 촉병들을 보자마자 싸워볼 생각도 않고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곡식 위에 짚 검불과 싸릿단을 얹고 불을 질러버려라! 한 톨도남겨서는 아니 된다.”
황충이 군사들에게 그렇게 영을 내렸다. 군사들은 그 영에 따라 모두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른 풀이며 싸릿단을 곡식 더미에 얹고 막 불을 지르려 는데 갑자기 한쪽에서 함성이 일었다. 장합이 어느새 알고 달려온 것이었다.
거기서 황충과 장합의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미처 그 싸움이 판가름 나기도 전에 다시 서황이 이끄는 한 떼의 군 마가 뛰어들었다. 전갈을 들어 안 조조가 급히 서황을 보낸 것이었다. 장합만으로도 어지간하던 황충은 서황까지 덤벼들자 곧 곤란한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다. 앞뒤로 적을 맞은 꼴이 되어, 이윽고 적병 한가운데 에워싸여 버렸다. 부장 장저가 겨우 삼백 기를 이끌고 에 움을 뚫었으나 그도 멀리 가지는 못했다.
한참 정신없이 달아나는데 문득 한 떼의 인마가 달려 나와 길을 막았다. 조조편의 장수 문빙이 이끄는 군사였다. 거기다가 등 뒤에 서 다시 한 떼의 조조편 군사들이 쏟아져나와 끝내는 장저마저 조 조의 군사들에게 철통같이 에워싸이고 말았다.
이때 조운은 자기편 진채에서 황충이 돌아오기만을 초조하게 기 다렸다. 그러나 황충은 미리 약정한 정오가 되어도 돌아올 줄 몰랐다. 조운은 황충에게 무슨 좋지 못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곧 갑옷 투구를 걸치고 말에 올랐다. 삼천 인마와 더불어 황충을 도우러 떠나면서 조운은 다시 한번 장익을 불러 일렀다.
“너는 다만 굳게 지키기만 하면 된다. 영채 양벽에 활과 쇠뇌를 있는 대로 내다놓고 뜻 아니한 적의 내습에 대비하도록 하라.”
그리고 바람같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오래잖아 한 떼의 조조군이 조운의 길을 막았다. 앞선 장수는 문빙의 부장 모용열이었 다. 모용열이 상대가 누구지도 모르고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다가 조 운의 한 창에 꿰어 말 아래 떨어지자 조조의 군사들은 그대로 쫓겨 달아났다.
조운은 그들을 뒤쫓다가 또 한 떼의 군마와 부딪쳤다. 이번에는 초병이란 조조의 장수였다.
“우리 촉의 군사들은 어디 있느냐?”
조운이 초병에게 소리쳐 물었다. 초병이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이미 다 죽었다. 너도 목을 보태려고 왔느냐?”
그 말에 조운은 크게 노했다. 갑자기 말을 박차 역시 한 창에 초병 을 찔러 죽였다. 대장이 죽자 졸개들도 뻔했다. 거미 새끼처럼 흩어 지는 그 뒤를 쫓아 조운은 똑바로 북산 아래 이르렀다.
멀지 않은 곳에 황충과 그의 군사들이 장합과 서황의 군사들에게 에워싸여 허덕이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나 모 두들 몹시 지쳐 있었다. 조운은 한 소리 큰 외침과 함께 말을 박차 두껍게 에워싼 조조군을 뚫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좌로 부딪고 우로 찔러가는 조운의 모습은 마치 아무도 없는 곳을 홀로 내닫는 것처럼 보였다. 창을 휘둘러 온몸을 보호하니 흰창날은 마치 배꽃이 춤추며 떨어지는 것 같았고,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는 그의 몸 또한 정월 눈발이 이리저리 휘날리는 것만 같았다. 그 놀라운 조운의 무예에 장합과 서황도 놀라 싸울 마음이 없었 다. 감히 나가 맞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조운은 황충을 구 해 내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달아났다.
장합과 서황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조운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조운이 가는 곳마다 절로 길이 열려 두터운 에워쌈도 아 무런 쓸모가 없었다. 높은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본 조조가 놀라 물 었다.
“저게 누군가?”
“저것은 상산의 조자룡입니다.”
곁에 섰던 장수들 가운데 하나가 조운을 알아보고 그렇게 대답했다. 조조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지난날 당양 장판의 영웅이 아직도 변함 없이 남아 있구나!”
그러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 영을 내렸다.
“조자룡은 무서운 장수다. 그가 이르거든 결코 가볍게 맞서지 말라!”
조운을 잡지 못하더라도 아끼는 장수나 상하지 않아야겠다는 뜻에서였다.
거기 힘입어 조운은 무사히 황충을 구해낼 수 있었다. 겨우 에움 을 벗어났다 싶을 때 한 군사가 동남쪽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쪽 적이 두껍게 에워싼 곳이 있는데, 틀림없이 부장 장저일 것 입니다.”
그 말을 들은 조운은 본채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동남쪽으로 뚫 고 들어갔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상산 조운’이라 크게 쓴 깃발만 펄럭일 뿐 아무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지난날 당양 장판에서 그 의 용맹을 본 조조의 군사들이 서로에게서 그걸 전해 듣고 모두 깃 발만 보고도 달아나버린 까닭이었다. 그 바람에 조운은 이번에도 큰 어려움 없이 장저를 구해냈다.
조운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먼저 황충을 구해내고 다시 장저까지 구해 가도 자기편 장수들이 감히 앞을 막지 못하는 걸 보 자 조조는 발끈 화가 났다.
조금 전 스스로 내린 영도 잊고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조운을 이대로 놓아 보내서는 아니 된다. 그를 뒤쫓아 사로잡으라.”
그리고 몸소 앞장서 조운을 뒤쫓았다.
조조가 저만큼 조운을 따라잡았을 때는 조운이 이미 자기 진채로 접어든 뒤였다. 조운의 부장 장익이 조운을 맞아들이는데 그 뒤로 자욱이 티끌이 이는 게 보였다. 그게 조조가 뒤쫓아온 것임을 안 장 익이 조운을 보고 말했다.
“뒤쫓는 적병이 가깝습니다.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진채의 문을 닫고 적루(樓, 성이나 진채 주변에 세운 망대)에 올라 적을 막게 하십 시오.”
그러자 조운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진채의 문을 닫지 말라. 그대는 내가 저 당양 장판에서 말 한 필 창 한 자루로도 조조의 팔십삼만 대군을 지푸라기 본 듯한 걸 모르는가? 지금은 군사도 있고 장수도 있는데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리고 오히려 활과 쇠뇌를 든 군사들을 진채 밖에 파둔 구덩이 로 내몰며 영을 내렸다.
“영채 안의 깃발을 모두 거두고 북과 징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라.”
거꾸로 조조의 군사들을 영채 가까이로 끌어들이려는 것 같은 배 치였다. 그 자신만 말 한 필에 창 한 자루로 영문 밖에 서 있는 게 그 어느 때보다 도전적이었다.
가장 앞서 조운을 뒤쫓아온 조조 쪽의 장수는 서황과 장합이었다. 날은 이미 저물어오는데 조운의 진채 가까이 이르러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상당한 군사가 있으리라 여겨지는 진채 안은 깃발 이 모두 내려지고 북소리 한번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진채의 문은 활짝 열려 있고 그 바깥에는 조운 혼자서만 말 한 필에 창한 자루로 우뚝 서 있지 않은가.
어찌 보면 허세를 부리는 것도 같고 어찌 보면 일부러 허술하게 보여 자기들을 꾀어들이려는 것도 같아 서황과 장합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에 둘은 감히 밀고 들어가지 못하고 조조가 오기만 을 기다렸다. 그러나 뒤이어 그곳에 이른 조조는 그들과 달랐다. 조 운이 많지 않은 군사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 단정하고 장졸들을 재 촉했다.
“모두 앞으로 나아가라! 어서 적의 진채를 휩쓸고 조운을 사로잡으라!”
그 소리에 힘을 얻은 장졸들이 큰 함성과 함께 앞으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조운이 그래도 꿈쩍 않고 버티고 섰자 더럭 겁이 나는지 이내 몸을 돌려 뒤로 쫓겨왔다.
보고 있던 조운이 문득 창을 들어 가볍게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진채 밖 흙구덩이 속에서 갑자기 활과 쇠뇌의 살이 조조군을 향 해 쏟아졌다. 때는 이미 어두워지고 있어 촉군이 많은지 적은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촉군이 대수롭지 않을 줄로만 여기고 장졸을 몰아댔던 조조는 그 뜻밖의 반격에 덜컥 겁이 났다. 조운이 허세를 부려본 게 아니라 오 히려 자기들을 꾀어들이려 했다고 믿고 그 먼저 말 머리를 돌려 달 아나기 시작했다. 조조가 그 모양이니 그 군사들도 뻔했다. 적의 세 력을 알아보려고도 않고 모두 되돌아서서 달아나기 바빴다.
달아나는 조조의 등 뒤에서 갑자기 함성이 일며 북과 피리 소리 가 요란해졌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촉군이 거꾸로 조조군을 뒤 쫓기 시작했다. 조조의 군사들은 서로 밀치고 짓밟으며 한덩이가 되 어 한수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운은 추격을 늦추지 않아 강물에 빠져 죽은 자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조조는 급했다. 이제는 싸움이고 뭐고 제 한목숨 건지기에도 바빠 정신없이 북산 쪽으로 내닫는데, 다시 두 갈래의 군마가 앞을 가로 막았다. 유봉과 맹달이 미창산 쪽 길을 따라 내려오며 조조의 군량 과 마초를 모조리 불사르고 다시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이미 미창산 쪽의 군량과 마초가 없어졌다면 북산으로 옮긴 얼마 안 되는 군량과 마초 또한 별 뜻이 없었다.
이에 조조는 북산까지 버리고 황급히 남정으로 되돌아갔다. 서황 과 장합도 또한 조조의 본채를 지켜내지 못하고 목숨만 건져 달아나니 고스란히 조운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조조의 본채를 뺏은 데 다 거기 있던 병기와 물자며 북산의 군량과 마초까지 얻고 큰 승리 를 거둔 조운과 황충은 곧 그 기쁜 소식을 유비에게 알렸다. 공명과 더불어 한달음에 한수가로 달려온 유비가 조운의 졸개를 잡고 물 었다.
“조운이 어떻게 싸우던가?”
그러자 그 졸개는 조운이 황충을 구하고 조조를 무찌른 일을 본 대로 전했다. 듣고 난 유비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산 앞뒤의 험한 길을 바라보다가 문득 공명을 보고 말했다.
“자룡은 그 한 몸이 모두 간덩이인 모양이구려!”
뒷사람도 시를 지어 그런 조운을 찬양했다.
지난날 장판에서 싸울 적 昔日戰長坂
그 위풍 조금도 줄지 않았네. 威風猶未減
적진을 뚫어 영웅됨 드러내고 突陣顯英雄
에워싸여 오히려 용감함을 보이네. 被圍施勇敢
귀신이 울부짖고 鬼哭興神號
하늘과 땅이 놀라네. 天驚並地慘
상산의 조자룡 常山趙子龍
한 몸이 모두 간덩이로구나. 一身都是膽
이에 유비는 조운의 공을 기려 그를 호위장군(虎威將軍)으로 삼고, 그 싸움에 낀 장졸들을 두루 위로한 뒤, 크게 잔치를 벌여 저물도록 즐겼다. 하지만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잔치가 채 파하기 도 전에 문득 급한 전갈이 왔다.
“조조가 다시 대군을 야곡 쪽의 길로 내려보냈습니다. 한수를 되찾을 작정인 듯합니다.”
그러자 유비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조조는 이번에 와도 별수 없을 것이다. 한수는 반드시 내가 차지하리라!”
그러고는 군사를 이끌고 한수 서쪽으로 가서 조조를 맞이했다. 조조는 서황을 선봉으로 삼아 이번에는 결판을 내겠다는 듯 싸움을 서둘렀다.
한 사람이 조조 앞에 나와 청했다.
“제가 이곳 지리를 잘 압니다. 서장군을 도와 유비를 깨뜨려보겠습니다.”
조조가 그를 보니 파서 암거 땅 사람 왕평(平)이었다. 조조는 기 뻐해 마지않으며 왕평을 부선봉으로 삼아 서황을 돕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정군산 북쪽에 머물면서 서황을 한수로 먼저 보냈다.
한수에 이른 서황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모두 한수를 건너 진채를 벌이도록 하라!”
곁에 있던 왕평이 그런 서황을 일깨워주었다.
“만약 물을 건너 진을 쳤다가 급하게 물러나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는 어찌하시렵니까?”
“옛적에 한신도 물을 등 뒤로 하고 진을 친 적이 있다. 이른바 죽 을 땅에 서게 된 뒤에야 오히려 살 수가 있다는 이치가 아니겠는가?”
서황이 그렇게 결연히 대답했다. 왕평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날 한신은 적이 꾀 없음을 알고 그 계책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장군께서는 황충과 조운의 생각하는 바를 모두 헤아릴 수 있으십니까?”
그래도 서황은 듣지 않았다. 위세로 왕평을 억누르며 제 고집을 세웠다.
“그렇다면 그대는 보군을 데리고 이곳에서 적을 막으며 내가 마군과 더불어 적을 쳐부수는 걸 구경이나 하라.”
그러고는 곧 부교를 놓게 하고 강을 건넜다.
그걸 안 조운과 황충이 유비를 찾아보고 말했다.
“저희 두 사람이 각기 거느린 군마만 이끌고 가서 조조의 선봉을 깨뜨려버리겠습니다.”
유비가 그걸 말릴 까닭이 없어 조운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군 사를 이끌고 갔다. 가면서 황충이 조운에게 말했다.
“서황은 용맹만 믿고 온 자이니 꾀를 써야겠소. 잠시 싸움을 받아 주지 않다가 해 질 무렵 적이 피곤해지거든 우리들이 군사를 나누어 두 길로 들이치도록 합시다. 그러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을 것이오.”
“좋은 책입니다. 그렇게 하지요.”
조운도 기꺼이 황충의 말에 따랐다. 이에 둘은 진채와 목책을 든 든히 하고 서황이 싸움을 걸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과연 서황은 진시부터 촉군의 진채 앞에 나와 싸움을 돋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촉군은 신시(申時, 오후 네 시경)가 되도록 꿈적도 않았다.
“모두 적진을 향해 활과 쇠뇌를 쏘아라.”
이윽고 지친 서황이 군사들에게 그런 영을 내렸다. 서황의 군사들 이 어지럽게 활을 쏘아대는 걸 보고 있던 황충이 문득 조운을 보고 말했다.
“서황이 군사들에게 활과 쇠뇌를 쏘게 한 것은 군사들을 뒤로 물 리려는 뜻임에 틀림이 없소. 그 틈을 타서 들이치는 게 좋겠소.”
그 같은 황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과연 조조군의 끄트머리가 수런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때다. 북을 크게 울리고 모두 앞으로 나아가라!”
황충이 그렇게 소리치며 군사를 이끌고 왼쪽 길로 내달았다. 조운 도 오른쪽 길을 잡아 군사들을 이끌고 앞으로 짓쳐나갔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황충과 조운이 한꺼번에 뛰쳐나와 좌우로 들 이치니 서황이 비록 맹장이라 해도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크게 뭉 그러져 달아나기 바빴다. 하지만 한수를 등지고 친 진이라 물러나기 조차 쉽지 않았다. 촉군에게 몰려 한수에 빠져 죽은 군사만도 그 수 를 헤아릴 길 없을 정도였다.
죽기로 싸워 겨우 죽을 구덩이를 빠져나온 서황은 물 건너 영채 로 돌아가자마자 애매한 왕평을 잡고 꾸짖었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편 군세가 위태로운 걸 보고서도 구해주지 않았느냐?”
“만일 제가 구하러 갔더라면 이영채나마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물을 건너지 말라고 말씀 드렸는데도 듣지 않으시더니 이 같은 낭패를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왕평이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서황은 더욱 성이 났다. 제 잘못을 잊고 왕평이 대드는 것만 괘씸해 펄펄 뛰며 왕평을 죽이려 했다. 서황의 두 번째 실수였다.
서황의 억지에 앙심을 품은 왕평은 그날 밤 조조군의 영채 여기 저기 불을 놓았다. 군사들이 놀라 허둥거리는 가운데 서황까지도 황 충과 조운이 쫓아온 줄 알고 놀라 영채를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왕평은 그 북새통을 틈타 한수를 건넌 뒤 조운을 찾아가 항복해 버렸다. 조운은 왕평을 반가이 맞아 유비에게로 데려갔다. 왕평은 유비를 만나 찾아온 경위를 밝힘과 아울러 한수의 지리를 자세히 일 러주었다. 듣고 난 유비가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왕자균(均, 왕평의자)을 얻었으니 한중을 차지하기도 어려움이 없겠구나!”
그리고 왕평을 편장군으로 삼은 뒤 향도사로서 촉군의 길잡이가
되게 했다.
한편 조조에게로 쫓겨간 서황은 제 잘못은 쑥 빼고 왕평의 배반 만 몇 배나 부풀려 조조에게 일러바쳤다. 조조는 믿고 보낸 왕평이 유비에게 투항해버렸다는 소리를 듣자 크게 노했다. 몸소 대군을 이 끌고 한수에 있는 진채를 뺏으려고 달려왔다.
조운은 많지 않은 군사로 조조의 대군을 막아내기 어렵다 여겨 한수 서쪽으로 물러났다. 이에 양군 사이에 강물이 가로놓이게 되어 잠시 싸움의 불길이 멎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는 계속되지 못할 평온이었다. 곧 유비가 공명과 더불어 그곳에 이르러 지세를 살피며 싸움 채비에 들어갔다.
공명은 한수 상류에 있는 토산 하나를 눈여겨보았다. 군사 천여 명은 넉넉히 숨길 만한 산이었다. 거기서 싸움의 실마리를 풀어보기 로 작정한 공명은 영채로 돌아오자마자 조운을 불러 일렀다.
“그대는 군사 오백을 뽑아 그들에게 모두 북과 피리를 나누어주 고 함께 그 토산 발치에 숨어 있으라. 해질녘이나 밤이 되어 우리 영채에서 포향이 울리거든 포향 한 번에 북 한 번을 울리되, 나가 싸 우지는 말라.”
조운은 아무 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조운을 떠나보낸 공 명은 높은 산에 올라 무언가를 가만히 엿보기만 했다.
다음 날이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그곳에 이르러 싸움을 돋우 었다. 그러나 촉의 영채에서는 군사 한 사람이 달려 나오는 법도, 화 살 하나 나는 법도 없었다. 아무리 격해 있는 조조지만 영채에 틀어 박혀 지키기만 하는 적을 함부로 밀어붙이기는 어려웠다. 한나절을 집적이다가 별수 없이 군사를 물렸다.
그런데 그날 밤이 이슥해질 무렵이었다. 공명은 조조의 영채에 여 기저기 등불이 켜지고 화톳불이 이는 걸 보자 조조의 군사들이 쉬려 함을 알았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크게 포를 놓게 하였다.
포향을 들은 조운이 다시 군사들을 시켜 북을 울리고 피리를 불 게 했다. 촉군의 진채와 강물 위쪽에서 포향과 북소리가 번갈아 울 리자 조조군은 놀랐다. 적이 밤에 자기편 영채를 기습하려는 줄 알 고 모두 무장을 갖추어 뛰쳐나왔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소리뿐 적이라 할 만한 것은 개미새끼 한 마리얼씬 안 했다.
속은 줄 안 조조군은 다시 각자의 군막으로 돌아갔다. 투구와 갑 주를 벗고 다시 쉬려는데 촉군의 진채에서 또 포향이 울렸다. 그리 고 물 위쪽 토산에서도 북과 피리 소리가 나며 함성이 올랐다.
조조의 군사들은 더 쉴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적군이 밀려들까 봐 뛰쳐나왔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적군은커녕 화살 한 개 날 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거듭되고 보니 조조의 군사들은 밤새껏 쉴 수 가 없었다. 눈 한번 붙여보지 못하고 날이 밝았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연거푸 사흘이나 잇달아 벌어졌다. 사흘 밤이나 눈 한번 제대로 붙여보지 못하고 놀라 허둥거리던 조조는 제 풀에 겁을 먹고 진채를 뽑아 삼십 리나 물렸다. 넓은 벌판에 진채를 벌여 촉군의 야습에 대한 우려를 덜기 위함이었다.
“조조가 병법은 제법 알아도 속임수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조조가 물러나는 걸 보고 공명이 빙긋 웃으며 유비에게 말했다. 유비는 조조가 물러난 만큼 앞으로 나가 한수 건너에다 물을 등지고 진을 쳤다.
“자, 이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영채를 다 엮은 뒤 유비가 다시 공명을 불러놓고 물었다. 공명이 미리 생각해둔 듯 가만히 계책을 일러주었다. 듣고 난 유비는 무릎 을 치고 기뻐하며 거기에 따르기로 했다.
한편 조조는 유비가 물을 건너 배수진을 치는 걸 보자 마음속으로 크게 의혹이 일었다. 어찌 됐건 그 속셈을 알고 싶어 싸움을 거는 글을 유비에게 보냈다.
“내일 싸워 결판을 내자고 전하시오.”
글을 가지고 온 사자에게 공명이 유비를 대신해 그렇게 대답해 보냈다.
다음 날 양쪽의 군사는 오계산(五界山) 아래에서 만났다. 둥그렇 게 마주 보고 진을 친 뒤 조조가 먼저 말을 몰아 문기 아래로 나왔 다. 그 좌우에는 용봉을 수놓은 깃발이 삼엄하게 벌여 서고 북소리 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유비는 어디 있는가? 유비는 나와서 내 말을 들으라!”
북소리가 세 번 크게 울린 뒤에 조조가 그렇게 유비를 불러냈다. 유비는 유봉과 맹달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왔다. 조조 는 유비를 채찍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유비, 너는 어찌하여 은혜와 의리를 잊고 조정의 뜻을 거스르는 역적이 되었느냐?”
“나는 대한의 종친으로서 천자의 조칙을 받들어 역적을 치고자 할 따름이다. 너야말로 위로 황후마마를 해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천자 의 수레와 의장을 멋대로 쓰고 있으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유비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오히려 조조를 그렇게 꾸짖 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발끈 성이 났다. 앞뒤 재보지도 않고 서 황을 불러 소리쳤다.
“서황은 무얼 하는가? 어서 저 귀 큰 역적 놈의 목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유비도 유봉을 내보내 서황을 맞게 했다.
유비는 서황과 유봉이 맞붙는 걸 다 보지도 않고 얼른 말 머리를 돌려 진채 속으로 숨어버렸다. 유봉도 곧 자신이 서황을 당해내지 못함을 알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부쩍 힘이 난 조조 가 저희 편 장졸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 앞으로 나아가라! 유비를 사로잡는 자는 서천왕으로 삼으리라.”
그 소리에 조조편 장졸들이 한꺼번에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내 달았다. 촉병들은 그런 조조군의 기세에 밀려 진채를 버리고 한수 쪽으로 달아났다. 길 위에는 그들이 버린 병장기와 마필이 가득 널 려 있었다.
조조의 군사들은 좋아라 길 위에 버려진 것들을 주워 챙기기 시 작했다. 그걸 본 조조가 급히 징을 쳐 군사들을 거두게 했다. 되돌아 온 장수들이 분하다는 얼굴로 조조를 보며 물었다.
“저희들이 막 유비를 잡아들일 판인데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군사를 두셨습니까?”
“나는 두 가지 의심스러운 게 있다. 하나는 유비가 한수를 등지고 진을 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군사들이 군에서 쓰는 물자와 마필 을 이토록 많이 버려둔 것이다. 되도록이면 빨리 군사를 물려라. 결 코 땅에 떨어져 있는 적병들의 물건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조조는 그렇게 대답하고 큰 소리로 영을 내렸다.
“함부로 길에 떨어진 것을 줍는 자는 목을 베리라. 어서 빨리 물 러나도록 하라!”
하지만 그 같은 결정이 바로 공명이 노리던 바였다. 조조의 명을 받든 그 군사들이 막 물러나려 하는데 멀리서 그걸 살피던 공명이 문득 깃발을 번쩍 들어올리게 했다. 미리 유비와 함께 짜둔 대로였다. 유비가 그 깃발을 보기 무섭게 중군을 휘몰아 조조 쪽으로 짓쳐 들고, 그 왼쪽에서는 황충이, 그리고 오른쪽에서는 조운이 또한 각 기 군사를 몰아 조조를 덮쳐왔다.
대쪽을 쪼개는 듯한 기세로 몰려드는 촉병들을 맞자 그러잖아도 조조의 급작스런 후퇴령에 흔들리던 조조의 군사들은 그대로 뭉그 러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조의 지나친 헤아림이 오히려 자기 장졸 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준 까닭이었다.
“모두 남정으로 물러나라. 저기 가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으리라!”
급해진 조조가 그런 영을 내렸으나 공명의 손길은 이미 거기까지 뻗어 있었다. 남정으로 가는 다섯 갈래 길이 모두 일부러 지른 듯한 불로 막혀 있는 것이었다. 위연과 장비의 짓이었다. 엄안이 낭중으 로 오자 그에게 그곳을 맡기고 그들 둘은 길을 나누어 조조가 없는 남정을 빼앗아버렸다.
깜짝 놀란 조조는 얼른 말머리를 바꾸어 양평관으로 달아났다. 유 비는 대군을 몰아 그런 조조를 뒤쫓으며 남정, 포주에까지 이르렀 다. 원래 조조에게 속했던 땅이라 놀란 백성들을 안심시킨 다음 유 비가 공명에게 물었다.
“조조가 이번에 와서 이토록 쉬 싸움에 지고 만 까닭은 무엇이오?”
그러자 공명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조조는 사람됨이 의심이 많습니다. 비록 병법에 능하다 해도 의 심이 많으면 싸움에 지기 쉽습니다. 저는 이번에 조조의 그 의심을 건드려 이길 수 있었지요.”
“이제 조조는 물러나 양평관을 지키고 있소이다만 형세는 이미 매우 외롭소, 선생은 앞으로 어떻게 그를 물리치려 하시오?”
유비가 다시 그렇게 물었다. 공명은 그것도 이미 생각해둔 게 있는 듯했다.
“제가 벌써 헤아려둔 바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 장비와 위연을 불러 알렸다.
“두 분은 곧 군사를 이끌고 두 길로 나누어 조조에게로 곡식이 가지 못하도록 길을 끊으시오.”
그런 다음 다시 황충과 조운을 불러 영을 내렸다.
“두 분은 역시 군사를 이끌고 두 길로 나누어 조조가 있는 양평관 사방의 산에 불을 지르시오.”
이에 네 장수는 각기 길잡이를 데리고 명을 받은 대로 하기 위해 떠났다.
이때 조조는 양평관으로 물러나 있으면서도 군사를 풀어 사방을 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했다. 형편을 살피러 나갔던 군사 하나가 문득 돌아와 알렸다.
“병들이 멀고 가까운 샛길을 막고, 마른 풀과 나무를 베어다 불 을 질러 모조리 태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들은 어디 있는지 전 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조조가 들으니 괴이쩍었다. 싸움을 거는 것도 아니고 사방의 샛길 만 태우며 숨어 있다니 알 수 없는 수작이었다. 그런데 다시 이번에 는 딴 군사가 와서 알렸다.
“장비와 위연이 군사를 나누어 우리 편의 군량을 뺏어가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조조는 공명의 뜻이 대충 짐작이 갔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둘러선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나가서 장비와 맞서보겠는가?”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허저가 씩씩한 목소리로 나섰다. 조조는 기꺼이 허락하고 그에게 일천 군마를 주어 양평관으로 들어오는 군량과 말먹이 풀을 맞아오 게 했다.
군량을 운반해 오던 해량관은 다른 사람도 아닌 허저가 직접 군 사를 이끌고 오자 몹시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허저는 조조가 가 장 아끼는 장수로서 언제나 곁에 두고 부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장군께서 이곳에 오지 않으셨다면 군량을 양평관으로 보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해량관은 한시름 놓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수레에 싣고 있던 술과 고기를 내어 허저에게 올렸다. 마침 목이 컬컬한 데다 자기를 믿고 기뻐하는 해량관의 모습이 기분 나쁠 리도 없어 허저는 서슴없 이 잔을 비웠다. 몇 잔 기울이다 보니 이번에는 술이 술을 불러 허저 는 뜻하지 아니하게 몹시 취해버렸다.
“자, 이제 떠나자. 수레를 움직여라!”
거나해진 허저가 이윽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해내고 그렇게 소리쳤다. 해량관이 말렸다.
“날이 이미 저문 데다 앞에 있는 포주 땅은 산세가 매우 험합니다. 밤길로는 지나가기가 어려우니 내일 밝은 날 떠나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허저는 꼭뒤까지 오른 술기운으로 더욱 기고만장해져 목 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 나는 홀로 만 명을 당해낼 만한 용맹이 있는 사람이 다. 누가 두려워 가지 못하단 말인가? 더구나 오늘밤은 달이 밝아 수레를 몰고 가기에 꼭 좋지 않은가?”
그러고는 말을 타고 앞장서서 군사들을 이끌었다. 해량관도 더는 그런 허저를 말릴 수 없어 말없이 뒤를 따랐다.
밤이 이경 무렵 되었을 때 군량을 실은 수레와 군사들은 포주로 가는 길에 이르렀다. 이제 반쯤 왔다 싶은데 갑자기 움푹한 산 그늘 에서 북소리 피리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한 떼의 군마가 길을 막 았다.
앞선 장수를 보니 장팔사모에 고리눈을 부릅뜬 장비였다. 장비는 이 말 저 말 하는 법도 없이 다짜고짜로 사모를 휘두르며 허저에게 로 덮쳐갔다.
허저 또한 겁내지 않고 칼춤을 추며 장비를 맞았다. 그러나 워낙 술에 취해 손발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몇 합 부딪기도 전에 장 비의 한 창을 어깻죽지에 받고 몸을 뒤집으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군사들은 힘을 다해 그런 허저를 구해냈으나 싸움은 이미 결판난 셈이었다. 군량이고 뭐고 생각할 틈도 없이 제 한목숨 구해 달아나 기에 바빴다. 장비는 그런 조조의 군사들을 멀리 쫓아버린 뒤에 수 레와 거기 실린 군량을 모조리 뺏어가버렸다.
한편 여럿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건진 허저가 돌아오자 그를 본 조조는 크게 노했다. 허저의 실수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너무도 자기를 얕잡아보고 함부로 몰아대는 유비에 대한 분노였다. 조조는 의자에게 영을 내려 허저의 상처를 돌보게 하는 한편 스스로 대군을 몰아 유비와 결판을 내려고 덤볐다.
유비 또한 기다렸다는 듯 군사를 끌고 나와 양군은 다시 한번 정 면으로 부딪쳤다. 서로 마주 보며 둥근 원을 친 가운데 유비가 먼저 유봉으로 하여 금말을 내게 했다. 성난 조조가 그런 유비에게 욕설 을 퍼부어댔다.
“이 짚신 팔던 어린 놈아, 너는 언제나 수양아들을 앞세워 덤비는 구나. 우리 황수아(黄鬚兒)가 오기만 하면 네놈의 수양아들은 다져 진 고깃덩이가 되고 말 것이다.”
황수아, 즉 수염 누런 아이란 제 둘째 아들 창을 가리키는 말이었 다. 조조가 자기를 찍어 욕하자 유봉은 몹시 성이 났다. 창을 끼고 말을 박차 똑바로 조조에게 덤벼들었다.
“서황은 어디 있는가? 어서 저 어린 놈의 목을 가져오라!”
조조가 그렇게 소리치자 서황이 달려 나가 유봉을 맞았다. 하지만 성나 내닫기는 해도 유봉은 이미 제갈공명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다. 몇 합 힘차게 부딪다가 힘이 모자란다는 듯 갑자기 말 머리를 돌려 내빼기 시작했다.
조조는 그게 계책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오른 기세를 외 면할 수 없었다. 군사를 몰아 앞으로 밀고 나갔다. 그런데 병의 진 채 앞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사방에서 포향이 터지고 북소리와 피리소리가 요란해졌다.
그러잖아도 너무 손쉬운 승리에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조조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틀림없이 강한 복병이 있을 것이라 여겨 급하게 영을 내렸다.
“어서 물러나라, 적의 계책이다!”
실은 그같이 재빠른 변환이 바로 공명이 노린 바였다. 기세 좋게 밀려든 조조의 군사들이라 그 급작스런 명에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적을 보지도 못하고 저희끼리 밟혀 죽고 다친 자만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거기다가 병이 다시 덮치니 조조군의 낭 패가 어떠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조조는 겨우 추격을 뿌리치고 양평관으로 되돌아왔으나 그곳도 안전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양평관 안으로 들었다 싶어 한숨을 돌리 려는데 뒤쫓던 병이 어느새 양평관 아래 이르러 무서운 기세로 몰 아대기 시작했다. 동문에 불이 붙었다는 전갈이 오는가 하면서 문쪽 에서 함성이 일고 남문에서 불길이 솟는가 하면 북문 쪽에서는 북소 리가 사람의 혼을 뺐다.
어지간한 조조도 그쯤 되니 덜컥 겁이 났다. 자칫하면 산 채로 붙 들릴 것 같아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양평관을 버리고 달아났 다. 병들은 그런 조조 뒤를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얼마를 달아났을까, 어디서 달려왔는지 장비가 갑자기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조조의 길을 막았다.
돌아보니 등 뒤에서 조조를 쫓아오고 있는 것은 조운이었다. 조조는 눈앞이 아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포주 쪽에서 황충이 한 갈 래 군마를 이끌고 덮쳐오는 게 아닌가 그때만 해도 조조에게는 적지 않은 인마가 있었건만 일이 그 지경이 되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싸움은커녕 조조를 보호하며 길 을 앗아 달아나기에도 벅찼다.
조조가 겨우 촉의 세 갈래 군마를 모두 떨쳐버리고 야곡 계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앞쪽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일며 또 한 떼 의 군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만약 저 군마 또한 적의 복병이라면 이제는 나도 끝장이로구나!”
조조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는 한중의 땅덩 이를 다투는 게 아니라, 목숨마저 오락가락하는 판이 돼버린 까닭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