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5화
“이건…… 기발한데……
라스는 홀린 표정으로 서류와 책더미에 코를 박은 모습이었다. 침대에 다리를 올린 채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슈마허는 힐끗 고개를 들어 라스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라이온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는 이제 아물고 있었다. 아직 정상적으로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슈마허는 고통을 참아내며 빨리 제 몸을 만들기 위해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 그를 충실히 간호하던 그의 감방 동료 라스는 갑자기 라이온으로부터 이상한 부탁을 받고는 저렇게 책더미 만 뒤지고 있는 것이다. 슈마허는 침대에 도로 앉아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로드 라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응? 어, 그래. 말해 보시오. 서 슈마허.”
슈마허는 못마땅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라스의 정수리를 향해 말했다. 라스는 고개도 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로드 라스, 로드께서는 그 미친 놈으로부터—슈마허는 라이온을 이렇게 불렀다. 그놈이 생각해 낼 법한 이상한 조사 임무를 받으셨기에 함내를 자유로이 오가실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뭔가 떠오르시는 바가 없습니까?”
“아, 미안해요. 내가 서 슈마허 생각도 하지 않고 너무 흥겨워하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군. 하지만 나도 이 상황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
슈마허는 신음을 내뱉고 싶었지만 다시 한번 꾹 참았다.
“아뇨. 로드 라스. 저는 지금 로드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로들의 동태나 노잡이들의 분위기를 여쭙고 싶은 것입니다.”
라스는 그제서야 머리를 들어 슈마허를 쳐다보았다. 슈마허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라스를 마주보았다.
“어떻습니까. 이 배의 선원들의 동향은? 혹 엘리엇 선장을 만나보셨습니까? 해적들의 경계 태세는 어떻습니까?”
라스는 한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었다. 솔직히 책을 덮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라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서 슈마허. 탈출을 생각하는가 본데, 여긴 바다 한가운데이고 우리는 적수공권의 지경이오. 해적들의 경계? 대단치 않소.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가 어디로 달아나지는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밤이면 저 노래에 취해 잠들고 낮이면 하품을 생산하는 것이 전부요. 내게 이렇 게 쉽게 배 안에서의 거동의 자유를 준 것을 보면 모르겠소? 혹여, 만에 하나 이 레보스호를 점거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자유호에 계신 공주 님은 쉽게 인질이 될 것이오. 혹 다른 수단이라도 떠오르시오?”
슈마허는 이를 갈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이 선단은 지금 북서쪽을 향하는 것 같은데, 정확히 해상의 어느 지점인지 알 수 없겠습니까?”
“아, 그거라면 도와줄 수 있겠군요. 내일 저녁이나 모레 아침 정도면 우린 미노 만에 다다를 것 같소.”
슈마허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미노 만? 해안가라는 말이겠군요?”
라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해안가요. 그런데 당신은 미노 만이라는 이름에서 다른 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거요?”
“다른 것? 유명한 장소입니까?”
“하긴 당신은 선원이 아니지. 그렇다 하더라도 대륙의 아홉 불가사의 중 하나이기도 한 미노 만을 어떻게 모를 수 있는 거요?”
“저는 그런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약간 딱딱하게 대답하는 슈마허를 보며 라스는 순간적으로 카밀카르 기사단의 ‘모범생’이었던 서 슈마허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 다. 라스는 빙긋 웃었다.
“혹시 다섯 수레와 한 권이시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슈마허의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보며 라스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라스가 한 말은 ‘다섯 수레에 달하는 무기를 배워 익혔고, 소지한 책은 그 무기 목록 한 권’이라는 길다란 뜻의 농담이다. 라스는 선선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경 쓰실 말은 아니오. 그래, 미노 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흐음. 선원들은 미노 만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오.”
“어떻게 부릅니까?”
“그들은 그곳을 대드래곤의 성지라고 부르지. 그리고 내가 조사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에 관련된 것들이고.”
1024년 전, 대륙은 한 불요불굴의 사내에 의해 무릎을 꿇고 마침내 제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기실 몇십 년 전부터 열국의 왕은 한 사내의 강권 아래 사고 전환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마침내 그들과 동격인 왕이 아닌 그들 위의 황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 씬 전인 1055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대륙의 정신적 지배자인 법황이 자신과 동격의 권한을 가진 한 명의 인간을 인정하기까지는 31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오랫동안 인내한 황제는 마침내 기회를 포착했다. 황제에게 가벼운 조롱을 보낸 사내가 법황 직할령인 펠라론으로 도망친 것이다. 이 이름도 남지 않은 역사적인 사내는 황제의 행진을 구경하다가 황제의 마차를 향해 그다지 품위 있지는 않은, 그러나 역사적인 손짓을 했다고 한다. 이 사내가 황 제의 충복이라는 주장은 지금까지도 끈질지게 전해져 내려온다.
‘신의 대행인인 법황의 권위를 인정하여 펠라론에는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겠으나, 중대 범죄자가 펠라론 이외의 다른 지역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 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잠정 조처’라는 이름으로 취해진 황제의 조처는 70만의 제국 군대를 동원하여 법황의 직할령인 신성 펠라론의 국경을 완전히 둘러싸는 것이었다. 이 인상적인 시위에 대하여 법황 역시 품위 있는 항복을 보내어왔다. ‘그의 허물이 비록 많으나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신 아래 그 또한 당신의 형제인즉, 제국의 황제에게 아우의 허물을 용서하는 형의 관용을 바라겠소’라는 내용의 법황이 보낸 5매짜리 서신에서, 기실 가장 중요 한 대목은 ‘제국의 황제’라는 호칭 하나뿐이었다. 법황이 공식 서한에서 이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제국과 황제는 동시에 법황으로부터 인정받았고, 황 제는 즉각 제국 군대를 후퇴시켰다. 그래서 시니컬한 역사학자들은 농담 삼아 제국을 ‘편지 한 장으로 성립된 유사 이래 최대의 정치 집단’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농담은 사실 농담도 되지 못한다. 비록 황가나 제국이나 법황은 인정하지 않지만, 제국이 성립된 정확한 시기를 추적하려면 법황의 서신이 황제에게 도달한 날로부터 238년을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제국력 238년,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는 제국을 상대로 미노 만은 자신의 영 토라는 주장을 피력했다. 한 야사는 당시 황제가 라오코네스의 전갈을 가져온 전령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어대었다고 전한다.
라스의 설명을 듣던 슈마허는 이 대목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어째서 선황제께선 그렇게 기뻐한 거지요? 황제의 제국 일부를 드래곤에게 뺏기는 것인데?”
라스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봐요, 서 슈마허. 한 청개구리가 세상을 상대로 이건 나의 제국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하겠소? 그 청개구리를 찾아가서는 ‘죄송합니다. 다른 곳은 당신의 제국일지 모르겠지만 저곳만은 제 집으로 인정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부탁하겠소? 아마도 밟아버릴 기분도 들지 않아 그냥 코웃 음을 칠 거 아니오. 여기서 청개구리와 당신을 선황제와 라오코네스로 바꿔보시오. 제국의 일부를 잃는 것은 중요치 않소. 대드래곤, 위대한 라오코 네스가 제국으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인정받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오. 대드래곤이 황제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가 황제를 자신과 동격으로 봐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오.”
슈마허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은 노대신을 즐겁게 만들었다. 라스는 마치 자신이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며 말했다.
“그래서 황제는 즉각적으로 라오코네스의 주장을 수용했소. 물론 미노 만을 라오코네스에게 하사한다는 식은 불가능했지. 하사라는 표현을 섣불리 사용함으로써 라오코네스의 비위를 건드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제국과 라오코네스 사이에 오간 협정 문서는 상당히 모호한, 정치 문건에는 잘 쓰 이지 않는 용어들로 점철된 문서가 되었소. 하지만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렇소. 미노 만은 라오코네스의 것. 그 외에는 전부 황제의 것. 양자는 이 에 동의함.”
“아하 그렇습니까.”
슈마허는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대신이자 법학자이기도 했던 라스는 신이 나서 말했다.
“물론 당시의 법학자들은 라오코네스와의 협정의 많은 부분에서 골머리를 아파해야 했던 모양이오. 이것을 동등한 지위를 가진 두 개의 정치 집단 의 탄생이라고는 볼 수 없거든. 라오코네스의 영토는 전혀 정치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니까. 그건 차라리 생물학적인 영토였소. 따라서 비록 당시 법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는 그러했지만, 그것을 라오코네스 하나의 법인체를 유일한 구성원으로 하는 정치 집단으로 보는 것은 사실 무리가 많……”
“죄송합니다만 어려운 이야기는 좀 넘어갔으면 합니다. 제 관심 분야가 아닙니다.”
“아, 좋소. 어쨌든 이 이상한 협정의 결과로 제국의 신민은 라오코네스의 영토인 미노 만에 출입할 수 없게 되었소. 그리고 800년이 흘렀고, 결국 아 무도 갈 수 없기에 거꾸로 갈 필요가 없는 땅, 전혀 유명하지 않은 땅인 미노 만이라는 것이 우리 시대에 남게 된 거요. 서 슈마허가 미노 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역시 당연하지.”
슈마허는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떠오른 생각에 슈마허는 계면쩍음도 잊은 채 달려들 듯이 말했다.
“아니, 그럼 이 선단은 법적으로 출입 불가인 지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설마 해적들이 준법 정신에 투철할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실 텐데?”
“그게 아닙니다! 미노 만이 법적으로 출입 불가인 지역이라면, 거기에서 탈출하더라도 어떤 조력을 구하기가 어렵잖습니까. 아무도 없는 땅일 테니 까요.”
라스는 다시 한번 실소했다. ‘역시 다섯 수레와 한 권이군. 이토록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떠올리는 것이 고작 그것인가’에 해당하는 표정을 잠깐 지 어보인 라스는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렇진 않아요. 미노 만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골디란 강을 만나게 됩니다.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테리얼레이드가 나오지요.”
“예? 그 무법 지대 말입니까? 이런! 그럼 키 드레이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