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3장 : 악마의 밤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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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3장 : 악마의 밤 – 2화


“산적은 아닙니다. 이 비싼 무기들을 다 내버려두고 갔군요.”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건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오스발이 아니라 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오스발은 등을 돌리 고 서 있는 공주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이 불쌍한 사람들도 산적 같지는 않군요. 손톱을 다듬은 것이라든지 단정한 두발 상태하며, 어쨌든 굉장한 행운입니다.”

율리아나는 그녀가 보게 될 것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파란 달빛 속에 드러누워 있는 시체들을 본 순간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시체들 은 모두 네 구였고 모두 칼에 찔린 상태로 죽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목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발은 그 모 습을 보며 행운이 어쩌니 하는 말만 하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간신히 말했다.

“이, 이 외로운 시, 시체들에게 조, 조의를 표하게 되, 된 거요?”

“아니오. 이 사람들의 옷가지와 무기 말입니다.”

“예?”

그 순간 율리아나의 등뒤로부터 무언가 무거운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오스발의 조금 거칠어진 숨소리도. 율리아나는 그가 시체로 부터 옷을 벗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오스발은 그녀의 뒷모습을 흘끔 바라보고는 도와달라는 말을 포 기했다. 오스발은 입을 꽉 다문 채 그 작업을 계속했고 율리아나는 혼절하지 않기 위해 아무 말이나 꺼내었다.

“왜, 누가, 뭣 때문에 이런 일을 했을까요?”

“공주님을 돕고 싶어서는 아니겠지요. 영차!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산적은 아닐 겁니다. 원한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이크, 속 옷 바람으로 테리얼레이드에 들어가는 난처한 상황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자, 공주님? 이게 제일 칫수가 작은 거 같군요. 입으세요.”

율리아나는 머뭇거리며 몸을 돌린 다음, 오스발이 내미는 옷을 바라보았다. 검고 큰 옷으로 가죽바지와 속셔츠, 그리고 커다란 모직 셔츠과 부츠였 다. 율리아나는 그 옷에 묻어 있는 굉장한 피와 복부 근처에 생긴 구멍을 보며 순간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다. 가까스로 자신을 억누른 율리아나가 그 옷을 받아들자 오스발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율리아나는 셔츠의 무게에 놀라며 말했다.

“이 셔츠 무겁네요. 안에 든 것이 뭐죠?”

“그건 셔츠가 아닙니다. 갑옷이죠. 셔츠 안쪽에 수백 개의 쇠판을 촘촘히 붙인 겁니다. 브리갠딘이라고 합니다. 저희 선단의 두캉가 선장님이 그런 옷을 입으시곤 해서 압니다.”

칫수가 작다고 해도 건장한 남자의 옷, 게다가 갑옷인지라 공주에겐 컸다. 율리아나는 한참 남는 바짓자락을 거창한 부츠 안으로 밀어넣느라 악전고 투한 끝에 조금 진정한 모습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물론 도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스발 역시 혼자서 시체를 다 뒤진 다음 율리아나에게 건넨 것과 비슷한 갑옷 하나를 뒤집어쓰며 말했다.

“제국 최고의 무법 도시에 가까워졌다는 실감이 드는군요.”

“테리얼레이드 말이군요.”

“예. 그리고 그런 실감을 느낀 이상, 옷 이외에 다른 것도 챙겨야겠군요.”

“다른 것?”

오스발은 아무 말 없이 그 ‘다른 것’을 율리아나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율리아나는 손에 든 커다란 롱 소드를 바라보며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들고 있어봐야 누가 덤비면 집어던지고 도망칠 거예요.”

“그걸 들고 있으면 덤빌 사람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될 겁니다. 그거면 충분하죠. 저도 칼은 쓸 줄 모릅니다.”

오스발 역시 커다란 롱 소드를 챙기며 싱긋 웃었다.

시체로부터 수거한 갑옷과 칼로 무장하고 그들의 배낭까지 뒤져낸 두 사람은 잠시 주저하다가 시체를 향해 사과한 다음 그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힘만으로 그들을 매장해 주기는 힘들었고, 또 금방이라도 이런 짓을 해놓은 자들이 다시 되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율리 아나는 죽은 이의 배낭에서 찾아낸 딱딱한 빵을 손에 든 채 한입씩 베어물며 걷느라 걸음이 느렸지만 며칠 만에 조리된 음식을 먹게 된 그녀의 심정 을 이해한 오스발은 재촉하는 것을 삼갔다.

“옷이나 칼보다는 이 지저분한 빵이 정말 저를 행복하게 만드는군요. 미칠 것 같네요.”

“예……”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얼굴이군요.”

“그 사람들의 정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갑옷이나 무기도 그렇지만, 음식을 가지고 다녔다는 점에서 산적은 아닙니다. 그리고 습격한 쪽 역시 아 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으니 산적이 아닙니다. 단순한 범죄가 아닌 뭔가 복잡한 이유가 있는 살해인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로선 그 사람들의 정체를 알 도리가 없잖아요.”

“사실 있습니다.”

“예?”

“그 사람들의 짐에서 서류 같은 것을 찾아내었거든요. 아침이 되면 보여드리지요. 지금은 저 시체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군 요.”

“저도 그래요. 다 먹었어요. 어서 가요!”라고 말하면서도 율리아나 공주는 다시 건육 한 덩어리를 꺼내어 으적거리며 씹기 시작했다. 오스발은 그 모 습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밤새도록 걸었던 율리아나는 새벽이 다가오자 그자들의 정체고 뭣이고 간에 오래간만에 부른 배를 끌어안고 자야겠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오스발은 묵묵히 서류를 내밀었다. 크게 하품을 한 율리아나는 종이를 받아들고는 먼저 눈을 비빈 다음 소리 내어 읽었다. 아니, 읽으려 했다.

“무슨 일입니까?”

오스발은 파랗게 질린 공주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정신없이 서류를 읽어내렸다. 페이노 를 읽을 줄 알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오스발은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율리아나는 곧 오스발을 위해 소리 내어 읽었다. 

“근계(謹啓). 통탄스러운 소식을 알려드리게 된 점,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딜비움 그랜다이 레보라 아크 리 바레린 길리데아 율리아나 카밀카르 공주께서 귀 기사단으로의 여정중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노스윈드’드레이번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신이여, 이건 우리나라에서 필마온 기사단으로 보내는 서신이에요!”

공주는 외교용 문건을 수놓는 화려한 외교 용어들을 대충 생략하며 그 골자만을 읽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서신은 카밀카르의 외무대신이 필마온 기 사단에 보내는 것으로서 키 드레이번의 습격 당시 레보스호와 함께 있던 배 중 달아났던 두 척의 배의 선장들로부터 보고받은 것들을 토대로 하여 정 황을 설명한 내용이었다. 카밀카르의 외무대신은 현재 공주의 생사가 불명확하며 이에 남해에 대한 필마온 기사단의 수색을 요청하는 것으로 서신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서신의 마지막에 있는 카밀카르의 문장을 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든 율리아나는 오스발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행운이라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군요.”

“예?”

“그렇다면 그 시체들은 카밀카르의 전령들이었을 겁니다. 조금만 더 일찍 그들을 만났더라면 공주님께서는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귀국하실 수 있었 을 겁니다. 겨우 몇 시간 차이였는데, 유감스럽군요.”

“아아! 그런데 이상해요.”

오스발은 묻는 시선을 보내었고 율리아나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그 사람들이 전령이라면 내가 알아보지 못할 까닭이 없잖아요. 제복을 입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을 보면 알겠지만 여기엔 신분 을 나타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야 비밀리에 서신을 전달하기 위해 위장한 것이겠죠. 카밀카르의 공주가 해적에게 납치당했다는 창피스러운 사실을 제국 사람들에게 숨기려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하나 더 이상할게요.”

“이상하세요.”

“누가 카밀카르의 비밀 전령을 죽인 거죠? 당신은 산적이 아닐 거라고 했고 나 또한 찬성. 내가 찬성해 주니까 기쁘죠? 어쨌든 그렇다면 한 가지 이 유밖에 남지 않는걸요.”

“뭔가요?”

“전령을 죽이는 것은 대개 전갈이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 가능성도 채택하기 어려운 것이, 이렇게 서신이 남아 있잖아요. 전갈의 도달을 막기 위해서라면 서신은 당연히 챙겨갔을 텐데요.”

“그렇군요. 정말 이상하군요.”

두 사람은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결국 이 사태를 설명해 내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산적들이 카밀카르의 비밀 전령들을 습격했으나 그들이 비밀 전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놀라서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도망갔다는 좀 억지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물론 실제로 산적들은 정치적 문제에 휘말릴 것 같으면 줄행랑을 놓기에 그 점에는 이상한 면이 없다. 그것이 억지스러운 까닭은 –

“그들의 주변에는 산적처럼 보이는 시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비밀 전령이라면 최소한 기사들일 텐데, 카밀카르의 기사가 네 명이라면 그 주위에 도 몇 명의 산적들이 쓰러져 있어야 정상일 텐데요. 산적들이 시체를 다 수거해 간 것일까요?”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기다리던 오스발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고, 그리고 한숨을 쉬며 그 녀를 눕혔다. 공주는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최소한 배고파하는 얼굴은 아니라는 점이 오스발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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