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3장 : 악마의 밤 – 13화
“기분이 이상하군.”
파킨슨 신부는 테리얼레이드 방향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낮 동안의 기나긴 여정을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쳐버린 율리아나 공주는 오스발이 만들어준 잠자리에 들어가 잠든 지 오래였다.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 그리고 오스발 세 명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앉아 다른 이들의 정적으 로 자신의 정적을 감추며 앉아 있었다. 파킨슨 신부가 갑자기 입을 열자 데스필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교회가 걱정된다는 식의 말을 하려는 거요, 신부님 당신? 설마 그렇진 않을 거 같은데. 지금 이 순간 테리얼레이드에 교회는 없고 교회터만 남 아 있을 거라는 데 본인은 뭘 걸어도 좋을 거 같소만.”
“글쎄. 나도 그건 알고 있네. 다만 기분이 이상해. 상당히 불길한 기분이 드는군. 그런데 교회가 파괴되는 것보다 더 불길한 일이 뭔지 모르겠군. 으 음.”
파킨슨 신부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모처럼 찾아온 대화의 시간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데스필 드는 오스발을 바라봤다.
“발 당신, 노예였다고?”
“그렇습니다.”
“아아, 어려워할 것 없수.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몰라도 테리얼레이드 사람들은 그런 것 신경 안 써. 귀족 당신이든 노예 당신이든, 에, 신부님 당신, 용서하쇼. 설령 신부님 당신이라도 칼로 찌르면 죽는 건 똑같아.”
파킨슨 신부는 쓰게 웃어버렸지만 오스발은 점잖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보복은 다르겠지요.”
“뭐요?”
“노예를 죽이면 아무 처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귀족을 죽이면 국사범으로 처형되겠죠. 하물며 신부를 죽였다면………….. 신부님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 신부 살해라면, 본인이 기억하기로도 꽤 되는걸?”
오스발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분들은 모두 순교자로 추서되었죠.”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가 동시에 이채로운 눈빛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스발은 모닥불 끝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눈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말했다.
“살해자의 목적이 한 인간의 말살이라면 신부의 경우는 살해할 수 없습니다. 미개인이나 이교도들이 신부님의 육신을 죽일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 분들은 모두 순교자가 되지요. 이 경우 살해자는 오히려 신부님들에게 영생을 부여한 것 같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는 논법이군.”
“아, 죄송합니다. 비꼬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데스필드는 정수리를 벅벅 긁어대다가 말했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군. 하지만 본인에게 물어본다면, 죽고 나서 무덤에 금칠해 줄 바엔 살아서 금화 한 닢 받는 것이 훨씬 행복하겠다고 말 하겠어.”
오스발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라도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경우와 다른 분들의 경우는 다릅니다. 신부님들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까.”
“원한다고?”
“예. 죽기를 원하는 자를 죽이는 것이 살해가 될 수 있을까요?”
밤이 그 자체의 농밀한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별들이 구름 뒤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기를 몇 차례. 모닥불은 작게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아직 꺼지지는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장작을 부러뜨리며 저녁 기도를 읊조리고 있었고 나무 우듬지에 기대어누운 데스필드는 그런 신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장작을 던져넣은 파킨슨 신부는 잠든 오스발을 돌아보며 기도하던 음조 그대로 말했다.
“노예이길 원하는 자를 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모욕이 될 수 있을까?”
“어라? 신부님 당신, 왜 갑자기 앵무새 흉내를? 뭐, 원래 신부님 당신네들은 신의 앵무새라고 하지만.”
데스필드의 이죽거림에도 불구하고 파킨슨 신부는 잠든 오스발을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주먹만은 그 의 몸과 따로 떨어진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민첩하게 움직여 데스필드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의 주먹을 살짝 피한 다음 다시 말했다.
“아까 발 당신이 했던 말을 조금 바꾼 거잖습니까?”
“그래. 저 전직 노예 친구가 하고 싶었던 말은 혹시 그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혹시 자네 노예의 정의가 뭔지 아나?”
데스필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욕적이군요! 본인을 그렇게 똑똑한 놈으로 보다니. 당연히 모릅니다.”
“……자비로우신 신이여, 부디 이 시련을 이겨낼 힘을 주소서. 이 빌어먹을 악마의 사생아 녀석아, 잘 들어라. 노예는 인권이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권은 인격을 유지 발전시킬 권리고.”
“흐음. 인격은 뭐냐고 물어볼 차례인 거 같군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사람만의 고유하고 보편적인 성격이다. 물론 이런 논법은 교회가 인정하는 논리는 아니다만, 대개의 나라의 법전은 이런 논법을 따르지.”
“신부님 당신은 본인에게 어떤 복음을 주시려는 겁니까?”
“뭐가 사람다운 거냐?”
아무렇게나 대답하려던 데스필드는 문득 입을 닫고는 파킨슨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데스 필드를 바라보며 자신이 진지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씀해 보슈. 하시고 싶은 말이 뭔데요?”
“나는 뭐가 사람다운 것인지를 말하지는 않겠다. 내 대답이 네녀석의 귓구멍을 조금이라도 파고들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을 생각해 보거라. 만약 사람을 버린 자라면, 인격이 없다 해도, 그것을 유지 발전시킬 인권이 없다 해도 뭐 불편할 것이 있겠느냐? 노예라 해도 뭐 불편할 것이 있겠느냔 말이다.”
데스필드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 은 더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깊이 생각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어느 놈 당신이 사람을 버린단 말입니까.”
“그래… 어느 놈이 그러겠냐.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다.”
파킨슨 신부는 뜻밖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안도하며 말할 수 있었다.
“이만 주무쇼, 신부님 당신. 유령 당신도 당신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사람들 주위를 떠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버리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