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8장 : 불은 바람을 부른다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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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8장 : 불은 바람을 부른다 – 3화


다벨 기사들은 언덕 아래에 쌓여 있는 인마의 시체들을 보며 모두 말이 없었다. 쓰러진 말 중에는 아직까지 힝힝거리는 놈도 있었지만 팔라레온의 총사령관과 그의 참모진들 중 살아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화살의 덤불 속에 뒹굴고 있는 시체들을 보던 기사 하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팔라레온의 하팔, 그 정도 인물의 최후 치곤 너무 비참하군요.”

휘리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기사는 다시 말했다.

“명령하셨다면 제가 나가서 그를 쓰러뜨려 장군님 앞에 무릎 꿇릴 수도 있었습니다만.”

퍽이나 공손한 어투였지만 그 속에는 뒤틀린 의미가 담겨 있었다. 휘리는 조용히 그것을 낚아 올렸다.

“내가 나가지 않고?”

“어찌 장군님께서 전 단지 그에게 무인다운 최후를 선택할 권리는 있지 않았나 생각하는 겁니다. 사병들이 이상한 생각을 할지도 모르고.”

“서 소팔라. 자네의 말은 사병들이 ‘우리 총사령관님은 혼자서 달려드는 노인의 검이 무서워 부하들에게 활을 쏘게 하고선 그 뒤에 숨어 있었다’고 말할 거란 뜻인가?”

기사 소팔라는 아무 대답 없이 휘리를 바라보았다. 휘리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이미 너희들의 눈앞에서 팔라레온 최정예 부대인 투란 군단을 깨보였다. 내가 수준 높은 살인 기술도 가졌음을 꼭 증명해야 하나?”

“예.”

휘리는 소팔라를 바라보았다. 소팔라는 씩 웃고 있었다.

“해야 됩니다. 뭐라도.”

흠칫하는 표정으로 기사를 바라보던 휘리는 곧 공모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주위에 서 있는 기사들은 보통 기사들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메르데 린 스쿨의 기사들이다.

“자네 말이 맞아. 어떻게 할까?”

기사 소팔라 옆에 있던 기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게. 서 소사라.”

서 소팔라의 동생 서 소사라는 씩 웃고는 고삐를 잡아챘다. 언덕을 달려 내려간 서 소사라는 팔라레온 참모진들의 시체 앞에 서서는 무덤덤한 얼굴 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배신자의 최후다! 그대가 모국을 배신하고 부하 장병들을 배신한 대가로 우리 사령관께서 내리실 것은 깨끗한 죽음뿐! 오오, 슬퍼하 지 마라, 팔라레온의 하팔이여! 우리 사령관께서 그대에게 내린 것은 그대가 바라던 누런 금덩어리들보다 훨씬 더 고결한 보상이니라! 그대는 이제 그대의 오욕으로 다른 선량한 이들까지 더럽힐 필요가 없음이니!”

하팔 장군의 비통하기 짝이 없는 두 번째 죽음을 보며, 휘리는 입술 사이로 새는 웃음을 억누르기 위해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이제 됐군.”

조연사는 고개를 돌려 키를 바라보았다.

“잠시만 조용해 주겠소? 그쪽이 떠드는 타입은 아닌 것 같지만 지금은 좀 조용해질 필요가 있거든.”

“알겠습니다.”

“고맙소.”

조연사는 다시 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허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키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조연사는 지금 연줄을 통해 고공의 기류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꼼짝도 하지 않던 조연사의 몸에서 그 팔만이 살아 있는 생명처럼 스르르 올라갔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잠시 멎었다.

무엇을 봐야 할지 알고 있었던 키도 자칫하면 그 모습을 놓칠 뻔했다. 미묘한 움직임, 아주 짧은, 그리고 조연사는 지금까지의 긴장된 모습과는 정반 대로 힘없이 팔을 내리더니 얼레를 빠르게 감았다. 서두르는 그 동작은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이젠 말을 해도 된다는 것을 알기에 키는 조용히 말했다.

“신경 쓴 거야!”

“…………네. 그러시군요.”

“내 판단이 틀렸단 말인가? 문제는 남해 쪽이었어. 카밀카르 필마온의 연결 고리가 최대의 문제 지점이었다고. 다른 쪽엔 신경도 쓰지 않았어. 그 런데 엉뚱하게 왜 그놈이란 말인가, 왜! 이 시점에서 더더욱 나를 미치게 만드는 건, 그놈은 계속해서 자기가 사고를 칠 거라고 공언하고 다녔었다는 점이야. 플로라. 난 지금 옷소매를 질겅질겅 씹으며 바지는 벗어버린 채 펠라론을 한 바퀴 돌고 싶은 심정이야.

‘가르쳐줘도 모르는 바보’라는 팻말을 등에 붙이고!”

물끄러미 법황을 바라보던 플로라는 물통의 물을 조금 찰박거리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그럼 전 그레이엄에게 법황 성하께서 앞으로 추기경들이 착용해야 할 공식 법복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다고 말하지요.”

퓨아리스 4세는 흥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좋아. 흥분해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

퓨아리스 4세는 벌떡 일어나 벽으로 걸어갔다. 집무실의 긴 벽에는 대륙 전도가 걸려 있었다. 다벨 공국 쪽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법황은 다시 으르릉거리기 시작했다.

“포 없는 포병이라니, 기발해. 말 없는 기병, 검 없는 보병, 활 없는 궁병은 전부 어불성설이지. 따라서 포 없는 포병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하지만 휘리 노이에스는 대포가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않았어. 정말 똑똑하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성하.”

플로라는 차분히 대답하면서도 속으론 한숨을 쉬었다. 또 한 명 늘었구나. 하이낙스, 키 드레이번에 이어, 이젠 휘리 노이에스인가. 왜 세상엔 자기 잘난 맛에 우리 법황님을 괴롭히는 몹쓸 남자들이 이렇게 많은 걸까. 그때 그녀에게 약간 짜증 섞인 법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플로라는 되묻지는 않았다.

“록소나뿐이군요. 하지만……”

“하지만?”

“가장 움직이기 힘든 것 또한 록소나입니다.”

퓨아리스 4세는 신음으로써 동의의 의사를 표시했다.

오 왕자의 땅에서 다벨에 대한 견제 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은 록소나다. 대륙에서 가장 처치 곤란한 기사들을 배출해 온 나라인 록소나는 마왕(王) 빌레스가 통치하는 중부의 강국이다. 하지만 동시에 록소나는 대륙에서 가장 많은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나라와 국경을 마 주 대하고 있는 나라는 다벨, 팔라레온, 다케온, 라트랑, 레모, 바이스라, 페인 제국의 일곱. 다벨과 팔라레온을 제외하더라도 다섯이 남는다. 빌레스 국왕이 이웃의 불을 꺼주러 가고 싶다 하더라도 자기 집 뒤가 불구덩이라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믿어볼 건 마왕뿐이군.”

“하지만 팔라레온은 어디에도 구조 요청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 때문에 침묵하고 계시잖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다벨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만.”

“다섯 번째의 검이 나타나지 않았다면야 얼마든지 그렇겠지.”

법황의 무거운 음색을 들으며 플로라는 살짝 몸을 떨었다.

“휘리가 정말 다섯 번째의 검일까요. 그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곤 하던 이가 그런 존재이리라고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모든 자들이 주춤하고 있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노릇이지 않은가, 플로라? 모든 자들은 메르데린 공작을 비웃어 왔고 가수를 보 낸 그 처사에 대해선 포복절도하고 있어. 그 때문에 침략을 당한 팔라레온까지도 창피스러워할 뿐 정말 진지한 대응은 하지 않고 있어. 하지만 다 틀 렸어. 지금은 다섯 번째의 검을 막기 위해 모두가 움직여야 할 시점이야. 하나씩, 하나씩. 좋아. 내가 앞장서겠어. 법황이 나섰는데도 그들이 지금처 럼 가가대소하고 있을 수 있는지 기대해 보지.”

“그럼, 다벨에 성무 금지 처분을 내리실 건가요?”

“그래. 그걸로 마왕을 충동시켜 보지.”

성무 금지 처분을 당한 국가는 법황청의 적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록소나의 빌레스 국왕 역시 다벨을 적국으로 간주해야 할 것 이다. 책상을 향해 걸어온 법황은 다시 한번 의자를 박살내었다는 사실에 대해 슬퍼해야 했다. 종이와 펜과 책상이 있어도 의자가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인가. 법황이 새로이 발견한 이 사실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여전히 지도를 바라보고 있던 플로라가 말했다.

“성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의자 대용으로 쓸 게 없나 주위를 둘러보던 법황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뭔가, 플로라?”

“조금 전 록소나뿐이라고 말씀드렸던 것, 취소하고 싶습니다만.”

“음? 취소라니. 다른 자가 있단 말인가?”

“좋은 솜씨이십니다.”

조연사는 헐떡이며 되물었다.

“왜?”

“얼레를 한참 동안 감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짐작했습니다. 꽤 연 가까운 곳에서 끊으신 거겠죠.”

“그랬던 모양이오. 아이쿠, 이런 젠장. 이거 너무 짧게 끊어서, 어, 아무래도 바다에, 실을 빠뜨리겠는데? 이이이익!”

조연사는 정말 죽을힘을 다해 얼레를 감으며 투덜거렸다. 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실의 구속에서 풀려난 연은 끝없이 작아지 고 있었다. 계속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놓치기 쉬운 모습이었다.

연줄은 다행히도 충분히 짧아진 상태에서 땅에 떨어졌다. 한숨을 돌린 조연사는 한 손으로 얼레를 감으며 두 팔을 번갈아 휘둘렀다.

“어깨 빠질 뻔했네. 휴우.”

잠시 후 조연사는 얼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땅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키에게 연이 어디쯤 있냐고 물어본 다음 그와 함께 연을 바라보았다. 연은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키는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코트와 화분을 들어올렸다.

“좋은 구경 감사드립니다.”

“뭘.”

조연사는 하늘만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저건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 저거? 다림 수도원의 원장인 도리언 신부님을 위해서였소.”

키는 잠시 조연사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은 화분을 들고 있었고 왼손은 복수의 칼자루 위에 얹혀 있었다. 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친척 되십니까?”

“아니. 하지만 내 연에 축복을 해주곤 했고 일주일마다 한번씩 좋은 말씀도 해주셨던 분이라서. 수도원의 수도사님들은 해적이 무서워서 장례도 대 충 치러버렸잖소. 그래서 나라도………… 아니, 그냥 내 식대로 작별 인사나 해볼까 싶어서.”

키는 한참 동안 말없이 조연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잘 가시오, 키 선장. 좋은 하루 되시게.”

키는 조연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예, 노인장도.” 그리고 키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언덕을 내려가는 키의 발걸음은 빨랐다. 그에겐 할일이 있었다.

퓨아리스 4세는 약간 초조해하는 얼굴로 비서관에게 말했다.

“그레이엄. 이건 내 견해지만, 내 집무실에 질베르트의 가구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성하. 이건 제 견해입니다만, 가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때려부수는 이는 얼마 없을 듯합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좀 저렴한 가구로 바꾸란 말이야.”

그레이엄은 근엄한 얼굴로 고려해 보겠다고 말한 다음, 부서진 의자의 잔해를 치워들고는 근엄한 동작으로 문을 나섰다. 풀죽은 표정으로 비서관 그 레이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퓨아리스 4세는 문이 닫히자마자 눈을 희번덕거리며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보다못한 플로라가 손을 들어올렸다. 

“뭔가, 플로라?”

“성하. 이건 제 견해입니다만, 때려부술 가구를 찾으시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설마. 방금 그레이엄에게 그렇게 혼났는데.”

그렇게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씀하시면 호소력이 적지 않을까요.”


퓨아리스 4세는 한숨을 내쉬곤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가 찾고 있던 것, 즉 질베르트의 걸작 의자는 방금 전 그 자신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음 을 깨달은 법황은 늘 그랬듯이 책상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법황은 창 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미친 자식이 왜 그랬을까.”

“로드 메르데린 말씀이십니까.”

“프란체스코 메르데린! 텅 빈 머릿속에 전투마의 말똥만 그득해서 마구간 같은 악취를 풍겨대는 그 남부 촌놈 말이다!”

플로라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일 것이다. 플로라는 다시 법황을 돌아 보았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사오니, 어휘 선택에 약간 신경을 쓰셔도 좋지 않을까요.”

“예. 성하. 팔라레온의 서쪽에.”

퓨아리스 4세는 다시 지도를 바라보았다. 팔라레온 서쪽을 바라보던 퓨아리스 4세는 곧 한 지명 위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의 눈이 번득였다.

“다림?”

“예. 성하.”

“그 친구는 성직자를 살해했어. 다루기가 정말 곤란한데.”

“하지만 록소나의 빌레스 국왕과는 달리 그는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4,000명의 부하들과 함께. 그리고 성하께선 다벨에 성무 금지 처분을 내리신다 하셨습니다.”

퓨아리스 4세는 미간을 찡그린 채 지도를 노려보았다.

“죄 있는 자로 하여금 죄 있는 자를 치게 하여 죄는 모두 죽이고 사람은 모두 구하라…………. 나쁘진 않아. 하지만 어떻게 접촉하지? 핸솔이 그곳에 있 었지만 현재로선 생사도 알 수 없고.”

플로라는 천천히 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는 법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신비스러운 미소를 보던 퓨아리스 4세는 갑자기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카밀 카르의 배에 실려 있던 어떤 보물. 플로라는 웃으며 말했다.

“성하. 그에겐 도스의 아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제 곧 눈을 뜰 것 같습니다.”


세실은 눈밑을 비비며 갑판으로 올라왔다. 초저녁 마지막 햇살들이 배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배들에서는 진홍빛 하늘을 배경으로 선원들의 실 루엣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지만 레보스호에는 선원들이 별로 없었다. 세실은 그 조용한 갑판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잠시 그곳에 앉아 자신이 발견 한 사실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조용한 갑판을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 그녀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세실은 마스트 저편에서 뻗어나온 다리를 보며 미소 지었 다.

“그 다리는 제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사내의 다리 같군.”

키는 고개를 조금 내밀어 세실을 돌아보고선 다시 마스트에 기대었다. 세실은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키는 마스트에 기대어 앉은 채 눈을 감고 햇살 을 쬐고 있었다. 세실 때문에 석양이 가리자 키는 눈을 찡그렸다.

“내 햇살을 막고 있다. 마법사.”

“당신 선장이잖아. 왜 엉뚱한 배에 앉아 있는 거지?”

“자유호에서 이렇게 앉아 있으라고?”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이 앞갑판에 앉아 있다면 선원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난처해하겠는가. 세실은 치마를 펼치며 키의 옆에 앉았다. “옜다, 햇살 가져가라.”

“고맙군. 당신은 여기서 뭐하고 있었나?”

“책 좀 볼 일이 있어서. 라이온에게 허락받고 들어온 거니 안심해. 당신은 여기서 뭐하고 있지?”

‘햇살 쬐고 있다’고 대답할 성질의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키는 실눈을 뜨고 세실을 바라보았다. 석양 속에 그녀의 얼굴은 불그스름했다.

“당신이 말하는 ‘여기’는 다림인 것 같군.”

“다림은 계속 다림으로 있는 거야? 아니면 노스윈드국이 되나?”

“나라 하나 세우는 것이 과부 개가시키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착각하는 작자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그런 말이 있긴 있었군. 당신 의향은 어때, 키 드레이번? 기회 아냐? 당신도 죽을 때까지 해적질만 하고 살 수는 없을 텐데.”

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침묵이 세실을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 키는 대답했다.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나, 마법사?”

세실은 간단히 대답했다.

“열면, 다시는 닫을 수 없지.”

키는 눈을 떴다. 세실은 차분한 얼굴로 키를 보고 있었다. 키의 메마른 입술이 부지불식간에 움직였다.

“끊어진 연줄은 다시 이을 수 없지.”

세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경 쓰지 마시오. 마법사.”

“우헷? 너 나 공경할 마음 생긴 거니?”

“….사라졌다.”

세실은 심술궂게 웃어대었고 키는 다시 미간을 찡그렸다.

“듣기 싫으니, 웃으려면 다른 곳에 가서 웃어. 방해된다.”

“방해? 무슨?”

“해가 진다.”

키는 이상한 대답을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껌벅거리던 세실은 곧 키의 말을 이해했다. 세실 역시 해가 지면 노스윈드 선단의 해적들의 얼굴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꾸는 노랫소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한 채 일몰의 시간을 지켰다.

빠르게 어두워진 물빛 위로 별들이 가라앉았다. 바람은 밤의 향기를 나르고 항구 저편에서는 불빛들이 봄꽃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세실은 아무 소 리도 들을 수 없었다. 사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세실은 안타까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방해해서 미안한데, 난 그거 들을 수 없어. 여자라서. 들리는 대로 설명 좀 해주겠어? 자유호 쪽이야?”

“아니.”

어둠 속에서 돌아온 키의 대답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실은 키의 목소리에서 그런 것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수리호 쪽…………. 굉장한 노랫소리군. 휘리 노이에스라도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물수리호 쪽? 왜 그곳이지? 당신 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 낮에 옮겨두었다고 대답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키는 대답하는 대신 벌떡 일어났다. 세실이 당황해서 따라 일어나는 사이에 키는 뱃전으로 휘적휘적 걸어가서는 검푸른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선 키 큰 그림자가 되었다. 세실은 그의 곁으로 걸어가 섰고 그때서야 선단 전체가 발칵 뒤집힌 것처럼 소란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용한 곳이라고는 물수리호와 레보스호뿐, 노스윈드 선단 전체가 떠들썩했다. 그리고 항구에 떠 있는 다른 배들도 마찬가지였다.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고 돛에는 선원들의 그림자가 어지러이 교차했다. 세실은 기막힌 심정으로 항구를 돌아보았다. 항구에서도 소란이 일고 있었다. 횃불 들이 일렁거렸고 그 중 몇 개는 용감하게도 해적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기도 했다.

“이런, 젠장. 도대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궁금해 미치겠군. 왜들 저러는 거야?”

“새장의 문을 열었지.”

키의 대답은 이상했다. 잠시 후 세실은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키는 물수리호 쪽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 이제 네가 겪을 일은 전부 너의 책임이다. 싱잉 플로라.”

세실은 더 참지 못하고 키의 팔을 건드렸다.

“무슨 말이야, 키 드레이번!”

한참 후에야 키 드레이번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몰라. 나는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 설명은 오히려 당신에게………… 듣고 싶은데.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가 뭔가………… 이상 해. 어제까지와 아주 달라. 난 오늘 낮 그것을………… 알버트 선장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저런 노랫소리를 내고 있어. 도대체 저 노 랫소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세실은 가슴이 덜컥했다. 그녀는 다른 시간의 다른 장소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떨리는 목소리마저 비슷했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단 말인가?

“이런 맙소사, 리포밍이군!”

“뭐?”

고개를 돌리는 키를 향해 세실은 황급하게 질문했다.

“당신은 왜 그녀를 알버트 선장에게 보내었지?”

“그녀? 그녀는………… 싱잉 플로라를 말하는 건가? 나는 알버트 선장이………… 그것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알버트가 어떻게 그런 의사를 표시했냐고 물어 본다면…… 역시 할말이 없지만, 난 그렇게 느꼈고………… 그래서 오늘 낮에 싱잉 플로라의 화분을………… 물수리호에 가져다놓았다.”

세실은 이마를 짚으며 푸념처럼 말했다.

“쳇. 고맙다고 해야 되나? 이번엔 내 남자가 아니군.”

“뭐라……………고?”

“그런 게 있어! 어떻게 난 두 번이나 그 꼴을 보는 거지?”

평소의 키였다면 이미 세실에게서 충분한 대답을 그녀가 반길 리는 없는 수단을 꺼리낌없이 동원해 가며 ・끌어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는 지 금 세실은 듣지 못하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고 그 노래는 그를 극도로 혼란시키고 있었다. 그에겐 세실과 대화를 나누는 것마저 벅찬 일이었다. 세 실은 키의 그런 상태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침울하게 말했다.

“조금 뒤로 물러나. 자칫하면 바다에 빠질 거야. 농담이 아냐. 당신 같은 뱃사람이라도 위험해.”

세실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키의 팔을 뒤로 잡아당겼다. 키는 엉거주춤하게 물러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세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실은 물수리호를 쏘아보며 말했다.

“굉장한 일이 일어날 거야.”

소란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결국 제14시 무렵 돌탄 선장과 오닉스 선장이 부두로 내려서야 했다. 배에서 내린 두 선장은 부둣가에 조그맣게 모닥 불을 피워놓곤 누구든 의문 사항이 있으면 설명해 주겠다는 태도로 항구 저편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아무도 노스윈드 선단 근처로 다가오지 않게 되 었다. 제16시 무렵 다가온 다림시의 관리들 역시 돌탄 선장과 오닉스 선장의 모습을 흘끔 바라보고는 그대로 항구 근처의 주점으로 직행해 버렸다. “연봉 깎으라고 그래! 난 저 귀신 같은 놈들하고 5분도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 없어. 우우웃! 저 소리,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군.”

그리고 선단 내에서는 하리야 선장이 절정에 달한 인기를 감당하지 못해 당황해해야 했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조용히 성전을 읽고 있던 하리야 선장은 페가서스호로 꾸역꾸역 승선하는 다른 배의 해적들을 보곤 어이가 없는 얼굴이 되었다. “제군들. 각자의 배로 돌아가도록…………. 이보라구, 라 이온 갑판장! 자네 이 배에서 뭐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그랜드파더호의 킬리 선장은 덱체어에 앉아서 밤새도록 류트를 뜯어서 휘하 선원들을 진정 시켰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탁월한 음감과 청음 능력을 원망해야 했다.

제20시. 그때까지도 물수리호는 다른 배에서 보낸 어떤 신호에도 응답이 없었다. 일몰인 제13시부터 친다면 7시간 동안의 완전 침묵이었다. 결국 누군가가 그곳에 올라가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키와 세실이 물수리호를 향해 보트를 저었다.

보트를 뱃전에 가져다댄 두 사람은 갑판 위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지만 물수리호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오지 않았다. 키는 세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 히 사다리를 올랐다. 물수리호의 갑판에 오른 키가 본 것은 시체 같은 얼굴을 한 채 모여앉은 물수리호의 선원들의 모습이었다. 뒤따라 올라온 세실 은 흠칫하며 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물수리호의 선원들 전원이 메인 마스트를 중심으로 둥글게 앉아 있었다.

불빛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달빛이 그들의 얼굴을 잘 비춰주고 있었다. 푸르스름하고 음영 짙은 얼굴들.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메인 마스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스윈드 선단의 이 이질적인 선원들의 모습에 익숙했던 키마저도 불쾌할 정도의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키는 메인 마스트를 바라보았다.

알버트 선장의 찢어지고 헝클어진 모습은 언제나와 같았다. 그 앞에는 오늘 낮에 키가 직접 가져다놓은 싱잉 플로라의 화분이 놓여 있었다. 가까이 서 듣는 노랫소리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색정적이었다. 키는 아득해지는 현실 감각을 되찾기 위해 복수의 칼자루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때 그의 어깨 한쪽이 가벼워졌다.

세실이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어쩌면 알버트 선장과 물수리호의 선원들을 보고 질려버린 세실이 키에게 부축받길 원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세실은 키의 겨드랑이에 파고들어 그의 상체를 붙잡았다. 키는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 속에서 가까스로 세실의 목소리를 구분해 내었다.

“알버트 ‘네일드’ 렉슬러, 다시 봐도 섬뜩하군.”

“알버트 선장의 모습이나 당신의 모습이나 똑같잖은가?”

“뭐라고?”

“당신의 그 젊고 건강한 얼굴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모르는 건 바보들이지. 마법사 세실리아. 오히려 당신의 모습이 더 끔찍한 것일 수도 있잖 은가.”

세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키를 놓았다. 세실에게서 풀려난 키는 화물 선적용 윈치로 걸어가서는 그 위에 앉았다. 상처 입은 표정으로 키를 보던 세 실은 별 도리 없다는 몸짓을 해보이곤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물수리호의 선원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키는 쉰 목소리로 말 했다.

“이상은 없는 것 같군.”

세실은 황당한 표정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 꼴이 아무 이상이 없는 꼴이냐고 묻고 있었지만 키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실은 다른 질문을 꺼내었다.

“노래, 지금도 들리나?”

“들린다.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지?”

“몰라. 지루한 밤이겠군.”

“어떻게 지루하다는…………… 아, 당신은 들리지 않지.”


퓨아리스 4세는 굳은 얼굴로 질문했다.

“키 드레이번인가?”

“예?”

“리포밍이 다시 일어난다는 말이잖아. 너는 하이낙스에 의해 리포밍되었지. 그렇다면 다림의 그 꽃은 키 드레이번에 의해 리포밍되는 건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진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습니다, 성하.”

플로라는 법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법황은 혼란스러워하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다시 벽에 걸린 지도를 쳐다보았다. 법황은 지도의 다림 방향을 바라보며 혼자말처럼 질문했다.

“이건 중요한 거야, 플로라, 하이낙스는 제국을 뒤엎었어. 키 드레이번에게 제국의 공적 제1호라는 호칭 이외에 하이낙스와의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난 그를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어. 그걸 알아야 해. 키 드레이번이 싱잉 플로라를 리포밍시킨 건지를 말이야. 이해하겠나?”

“그녀가 깨어나는 대로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하지만………… 그일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나, 응?”

“전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성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나도 보진 못했어. 네 말이 맞군.”

법황은 의미가 불분명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깨어나면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거지?”

“그럴 수 있습니다, 성하.”

“언제쯤 깨어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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