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9장 : 구름이 고요속을 흐를 때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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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9장 : 구름이 고요속을 흐를 때 – 3화


부두의 포석 위로 자욱한 새벽 안개가 흘렀다.

밤새도록 차게 식은 포석에서 배어나오는 한기는 습한 바다의 공기를 어루만져 허공에 흰 천을 짜내고 있었다. 가장 고집센 주정뱅이도 자신이 술에 굴복했음을 시인하는 시간, 부두에 와 부딪히는 물살의 철벅거리는 소리마저 부드럽다. 그 강렬한 향취에도 불구하고 역겹지는 않은 항구의 향취는 안개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키는 한쪽 어깨에 걸린 커다란 배낭을 한번 추슬러 올린 다음 널판을 걸어내려갔다.

키와 그의 선장들 모두 배웅 같은 것은 바라지 않았다. 키는 탈퇴한다는 자신의 말에 책임지기 위해, 그리고 선장들은 이 이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서였다. 그러나 별리를 별리로 인정하지 않는 사내들은 그 순간 무수한 별리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로 한 꺼풀 안개가 덮여 있었 다.

킬리는 덱체어에 앉아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류트를 만지작거렸다. 진정한 음악가는 침묵도 음악임을 안다. 그래서 킬리는 침묵을 연주하고 있었다. 자신의 선장실에 앉아 있던 하리야는 창가에 팔꿈치를 괴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안개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가 키인지 굳이 확인하려 하지는 않았다. 트로포스는 상의를 벗은 채 의자에 앉아서는 세야의 아카나를 움켜쥐고 있었고 두캉가는 자신의 침대에 쓰러져 숙취 때문에 코를 골고 있었 다. 돌탄 선장은 밤새도록 켜둔 탓에 촛농 언덕같이 바뀐 촛불을 응시하고 있다가 입김을 훅 불었다. 촛불은 금방 꺼졌다.

키를 제외한다면, 그 시각 자신의 배에 있지 않은 선장은 한 명 뿐이었다.

키는 걸음을 멈췄다.

흰 안개로도 완전히 감출 수는 없는 검은 모습이 20피트 앞쪽에 서 있었다. 철벽 같은 검은 갑옷으로 자신을 두르고 왼손엔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 는 그 모습은 쓸쓸한 고목 같았다. 도끼는 비스듬히 내려가 땅을 짚고 있었다.

탑이 움직이는 것 같은 동작으로, 오닉스 선장은 도끼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왼손에 쥐어져 있던 그 도끼가 안개를 베어내며 둥글게 움직였다. 오닉스는 오른손으로 도끼 머리를 받아내었고 양손으로 쥔 도끼를 옆으로 약간 돌 리며 왼발을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의 마스크는 물론 아무 표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키는 그 무표정한 마스크에 짧게 감사하며 배낭을 내려놓았다.

복수를 뽑아낸 키는 그것을 쥔 오른팔을 옆으로 적당히 뿌려둔 모습으로 꼿꼿이 섰다. 오닉스의 마스크가 좌우로 조금 움직였다. 키는 고개를 갸웃 하다가 곧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비어 있는 왼손을 앞으로 내민 다음 방패나 되는 것처럼 손바닥을 펼쳤다. 오른손은 뒤로 뿌려져 천천히 고정되었 다. 오닉스의 마스크가 만족한 듯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5년 전, 이보레 열도의 어느 섬 앞바다에서도 이러했다.

그때도 해뜨기 전의 새벽녘이었다.

맨몸으로 달려나와 백사장에 무릎을 꿇고 제발 집은 쏘지 말 것을 애원하는 섬 주민들을 향해 포격을 명령하던 사트로니아의 대해적과, 레갈루스로 부터 받은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를 끌고 그를 사냥하기 위해 달려온 사략선장이 처음 만난 날에도.

안개는 돛대에서 눈물이 되어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때는 눈앞을 어지럽히는 손바닥을 노렸었다. 거리를 뺏겼고, 오닉스는 그후로 한 달 동안이나 신음하게 된 상처를 입었었다. 죽이지 않고 그토록 신음하게 만든 키를 저주하면서 오닉스가 보낸 시간들에서는 독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독기에 가장 심하게 괴로워한 것은 바로 그 자신 이었다.

오닉스는 포석을 짓밟으며 도끼를 힘껏 내려쳤다.

키는 왼손을 아래로 내려 뒤로 보내며 오른손은 위로 돌려 앞으로 내려쳤다.

거리는 여전히 20피트였다.

키는 흐트러진 자세를 천천히 가다듬었다. 복수를 한 바퀴 돌려 칼집에 꽂아넣는 그 손길은 느긋했다. 그리고 오닉스 역시 내려찍은 도끼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배낭을 어깨에 걸친 키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닉스의 옆을 지나칠 때, 그도 오닉스도 서로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바닥의 깨어진 포석을 바라보던 오닉스는 그것을 툭 걷어찼다. 포석 조각은 몇 번 탁음을 내며 튕기다가 바다에 빠졌다. 퐁.


“뭐 한 거야?”

키는 앞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먼저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에 휘감기는 안개를 걷어내려는 것처럼, 세실은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얼굴을 드러 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라이온이 어떤 말의 고삐를 쥔 채 말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눈싸움처럼 보였고, 그래서 키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세실은 다시 질문했다.

“조금 전의 그거, 무슨 의미가 담긴 행동이지?”

“아쉬움 하나를 매장했을 뿐이다.”

“흐흐흐. 누가 이긴 거야?”

“바보나 그런 걸 따진다. 그런데 넌 이곳에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 것 같군. 뭣 때문에?”

“따라가려고. 앞장서.”

키는 세실을 똑바로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안개 속에 흩어진 빛들은 아무런 그림자도 만들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세실의 얼굴은 이상하게 보였 다.

“왜?”

“난 재밋거리를 찾아서 내 가게마저 팽개치고 테리얼레이드를 떠나왔어. 따라서 그 재밋거리가 가는 곳은 끝까지 따라가야 되는 거 아니겠어?” 

“내가 네 재밋거리란 말이지.”

“그렇게 인상 쓰지 마. 사랑하게 될 것 같으니까. 음, 말해 놓고 보니 변태 같군. 저런 꼬마에게 느낀다니 응? 이 이상한가 보지? 더 받아들이 기 쉽게 말한다면, 아직 은혜 갚음이 끝나지 않았잖아. 구울의 왕자에게서 날 보호해 줬던 것.”

“그 은혜는 이미 갚았다. 그날 아침 남해가 생긴 이래 최고의 강풍을 끌어왔을 때.”

“아,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야. 세야의, 트로포스의 지팡이가 한 일이지. 난 아직까지 해준 것이 없어.”

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세실을 노려보았지만 세실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내 신발끈을 타인을 위해 풀진 않는다. 내가 가고 싶을 때 가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것이다. 따라올 수 있다면, 그건 네 자유니까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내 신발끈을 풀려는 시도는 하지 말도록.”

“방해되는 건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신경 써주는 건 꿈도 꾸지 말란 말이지? 하하, 알겠어.”

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라이온에게 돌아가 있었고…… 그래서 다시 험악하게 찡그려졌다.

“갑판장. 도대체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이놈에게 최면을 걸고 있습니다.”

라이온은 여전히 말의 눈만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키는 아득해지는 현실 감각에 묵직한 닻 몇 개를 매달아놓고서야 말했다.

“최면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으음!의외로 정신력이 대단한 놈인데요?”

“……무슨 최면을 걸고 있는데?”

“온몸에 힘을 빼고 편안한 자세를 취해. 이제 내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넌 그것을 믿게 된다………… 네 이름은 율리아나다! 네 이름은 율리아나다! 네 이 름은 율리아나다!”

키는 문득 자신이 라이온의 첫 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라이온은 자기 배가 없지만, 만일 라이온이 자신의 배를 가지게 된 다면 그 이름은 분명히 율리아나호일 것이다. 키는 두툼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힘겹게 말했다.

“그 말의 이름을 그렇게 정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어. 그런데 웬 말인가?”

“아, 제가 타고 다닐 말이죠. 여기 이 말은 선장님이 타고 다닐 말이고, 이건 세실의 것입니다.”

세 마리의 말을 죽 돌아본 키는 다시 라이온을 돌아보았다.

“자네도 날 따라다니겠다는 건가?”

라이온은 씩 웃더니 갑자기 말에 뛰어올랐다. 안장엔 손도 대지 않는 익숙한 솜씨였고 세실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라이온은 말을 좌우로 움직 이게 하며 말했다.

“선장님은 제국의 공적 제1호입니다. 대포가 총독님 화장실까지 겨냥하고 있는 이 다림을 벗어나면 선장님은 죽은 목숨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네가 따라다니며 날 보호하겠다는 거냐?”

“저도 세실처럼 은혜 갚음이 있거든요. 제 경우엔 받아야 되는 거지만, 어쨌든 그러려면 선장님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세실은 라이온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거라면 이곳에 있는 편이 나을 텐데. 하리야의 건국 사업에 동참한다면…

“아니오. 난 선장님께 받을 겁니다. 그게 더 재미있을 것도 같고.”

“결국 네놈도 깨어 있는 정신의 절반쯤은 재밋거리를 찾는 데 쓰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 아니냐?”

라이온은 대답 대신 낄낄 웃기만 했다. 잠시 후 키는 라이온이 자신의 말이라고 했던 말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배낭을 안장에 묶기 시작했다. 세실은 황급히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배낭을 다 묶은 키는 말에 오른 다음 라이온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 전에 라이온이 먼저 말했다.

“선장님 신발끈은 걱정 마십쇼.”

키는 아무 말도 없이 말을 출발시켰다. 그래서 세실과 라이온은 황급히 그 뒤를 따라야 했다.


어느 쪽이냐면, 데스필드는 타인의 곤란을 즐길 줄 아는 올바른 가학 취미를 가진 쪽이었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일그러진 얼굴의 두 성직자를 보며 방긋방긋 웃을 수도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그 얼굴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파킨슨 신부는 핸드건을 꺼내어 그것을 점검하는 척했다.. 그 포구가 가끔 데스필드를 향하곤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주장하는 얼굴로. 데스필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핸솔 추기경은 신음처럼 말했다.

“록소나가…………, 당신 말이 옳았군.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하오?”

“아아. 음. 우라질! 그 대포 점검 언제까지 할 거요!”

콰앙! 데스필드가 말을 끝내자마자 핸드건이 불을 뿜었다. 날아간 포탄은 데스필드 뒤쪽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를 절반쯤 날려버렸다. 땅바닥에 주저 앉은 데스필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를 딱딱 부딪혔고 그런 그의 머리와 어깨 위로 나뭇잎과 나뭇가지의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저 멀리 밭에서 일하고 있던 이들은 기겁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천둥의 조짐은 발견하지 못했고 그래서 어리둥절해했다.

파킨슨 신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발이었어. 갑자기 놀라게 하니까 그렇잖아, 데스필드. 미안하군.”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를 존경하게 되었고, “하, 하하. 오발? 아, 그러셨군요. 네네.” 신부의 말을 믿는다는 투로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러곤 겸손하 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쓰며 농부들에게 들었던 말을 또박또박 전달했다.

“물론 록소나가 단독으로 다케온을 쳤다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이 있을지 몰라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데요. 타이밍이 너무 잘 맞거든. 팔라 레온의 정복자 당신이 보낸 편지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면, 누구든 당신이 의미를 못 찾아내었다고 생각하지 그 서신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는 않을 테니까.”

“옳은 말이오, 데스필드 군. 휘리 노이에스는 아무 말이나 적어보내었어도 상대방을 긴장시킬 수 있었을 거요. 보내는 행위가 중요할 뿐 내용은 아 무 상관이 없는 서신이라면…………, 그렇다면 무의미한 내용을 써대며 장난을 칠 수도 있었겠지.”

“장난? 그럴 거요. 어쨌든 그 서신은 다케온 백작 당신의 눈꺼풀을 뒤집는 효과는 충분했소. 반 달 만에 팔라레온을 쓸어버린 당신이 보낸 편지라면 그게 ‘음메음메 삐약삐약 개굴개굴’로만 점철된 내용이라도 받는 당신을 질겁하게 할 수는 있을 테니까. 그래서 백작 당신은 팔라레온 접경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켰고…………… 록소나가 북쪽으로부터 쳐들어갔지. 마왕 당신과 휘리 당신이 건배하는 모습을 본 당신은 아무도 없지만, 그 건배가 이루어 졌다는 데에는 모든 당신들이 찬성할 것 같은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소.”

핸솔 추기경은 자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 속에 빠져들었다. 데스필드는 그쯤에서 아껴두었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어쨌든 본인은 그런 것에 크게 관심 없소. 당신들이 사태를 이해하길 원했기에 꺼낸 말이었지요. 그럼 충분히 이해했을 테니 말하겠는데, 다음 패 스는 도스 계곡이오.”

“뭐야?”

파킨슨 신부가 기성을 올렸다. 하지만 핸솔 추기경은 체념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필드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설명했다.

“원래 계획은 동쪽으로 해서 안팔로 계곡을 건너 바이스라로 가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어렵소. 록소나를 가로지를 순 없단 말이오. 전시라서 삼엄 하기 이를 데가 없을 것이 뻔한 데다가 예하 당신께서 문제요. 따라서 북쪽으로 해서 도스 계곡을 넘어 페인으로 들어갈 계획이오.”

파킨슨 신부는 핸솔 추기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추기경 예하가 왜 문제라는 거냐?”

“록소나에 들어가면 붙들릴 가능성이 높소. 전쟁을 일으킨 이상 약간이라도 유력한 당신은 모조리 억류할 테니까. 특히나 예하 당신은 펠라론의 유 력 인물이자 성하 당신의 측근이오. 성무 금지 처분을 받은 다벨과 손을 잡은 록소나로서는………… 참 반가운 인질 당신이지. 물론 대접이야 깍듯하겠지 만 어디로도 못 가게 할걸? 좋은 대접 받으며 놀고 싶다면야 록소나 내부로 어정어정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젠장, 정체를 숨기면?”

“이런 촌구석에서야 가능할지 몰라도 중앙으로 가면 어렵소. 말했잖소. 전쟁 때문에 경계가 삼엄할 거라고. 여행하는 당신들은 모조리 감시할 거요. 대번에 들킬걸.”

핸솔 추기경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필드 군의 말이 옳아요. 파킨슨 신부. 마왕에게 노출된다면 아무리 빨라도 몇 달은 붙잡혀 있어야 될 거요. 자칫하면 무슨 봉변을 당할 수도 있 고. 그럴 수는 없지.”

핸솔 추기경의 말에도 불구하고 파킨슨 신부는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넌 패스파인더잖아. 안 들키고 지나갈 패스를 못 찾냐?”

“물론 찾아내었지. 도스 계곡을 지나 페인 제국으로, 이후 펠라론까지 직행. 전에도 말했듯이, 도스 계곡만 제외한다면 그게 더 빠른 패스요.”

파킨슨 신부는 바로 그 도스 계곡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너무 걱정 마쇼, 신부님 당신. 그곳에 들어가서 싱잉 플로라를 캐어오는 당신들도 있잖습니까? 다 괜찮을 겁니다.”

“넌 가봤냐?”

“아니, 한번도.”

“……왜?”

“죽기 싫어서.”

뻔뻔하게 대답한 데스필드는 히죽 웃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추억을 떠올렸다. ‘유리 당신, 본인을 격파해 대었을 때 느낀 쾌감이 이런 거였어? 의외 로 재미있네, 그래. 껄껄껄.’ 하지만 파킨슨 신부의 입장에선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나도 죽기 싫어, 이 자식아. 한번 더 생각해 보자. 꼭 그쪽으로 갈 필요가 있을까?”

“신부님 당신. 참으로 안타깝지만 다른 쪽은 없는걸요. 사실 본인과 당신들은 전쟁 한가운데 갇혀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다른 대안은 없어요. 빨리 도스를 넘는 것이 훨씬 낫지. 아, 그리고 ‘그쪽’이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이 좋을 텐데.”

“응? 무슨 말이야?”

“여기가 바로 도스 계곡이거든.”

핸솔 추기경과 파킨슨 신부는 경악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완만한 능선들이 겹쳐진 구릉과 약간의 산,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위로 점점이 흩어진 농가들과 밭뿐이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었고, 그래서 두 성직자는 도스 계곡이라는 이름과 이 땅을 연결시 키기가 어려웠다. 두 성스러운 이들은 데스필드에게 묻는 눈초리를 보내었다.

“아아. 보통 말하는 도스 계곡, 그러니까 대륙의 9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도스 계곡은 좀더 들어간 곳이오. 한 사나흘 정도 더 걸어가면 된다더군. 하지만 여기도 도스 계곡이오. 이젠 좀 안심하시겠지요?”

데스필드의 설명이 끝나자 두 성직자는 안심하기는커녕 지금까지 보아온 풍경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인적 드물고 외로운 산 야, 누리끼리한 밭에서는 작물은커녕 잡초도 제대로 자라지 않을 것 같고 쟁기질을 하는 농부들은 무덤 파는 인부처럼 보였다. 성직자답게 두 사람은 그런 심정을 솔직히 고백했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더욱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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