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0장 : 새장 속의 왕 – 4화
알버트 선장을 향해 노래 부르고 있던 검은 소녀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알버트 렉슬러 선장 이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물론 다림항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지만, 소녀는 자 신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단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사람만을 위해 노래해 왔다. 검은 소녀는 주춤거리며 갑판에서 일어났다.
멀리 자유호에서 물수리호를 바라보고 있던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갸웃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소녀가 왜 노래를 멈춘 거지요, 라미 님?”
바라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잔물결을 일으키던 밤바람이 그녀의 옷도 펄럭이게 만들었다. 라미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른다.”
똑바로 일어난 검은 소녀는 물수리호의 갑판 위를 죽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림항에서 그녀의 노래에 신경 쓰지 않는 유일한 사내들은 이미 갑판 아 래로 내려가 잠들었고 그래서 물수리호의 갑판은 고요했다. 천천히 한 바퀴를 돈 검은 소녀는 다시 메인 마스트를 바라보게 되었다.
알버트 선장이 그곳에 있었다. 어디로 갈 리는 없다. 돛대에 못박혀 있으니까. 검은 소녀는 한참 동안 돛대를 바라보았다. 알버트 렉슬러 선장의 무 시무시한 육신 위로 쏟아지는 달빛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검은 소녀는 다시 갑판에 앉았다. 그리고 단아한 입술을 열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다시 시작되자 데스필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침착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흥분해 버렸다. 말이 안 되는 상상이지만, 데스필드는 도스 계곡 의 싱잉 플로라들이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노래를 멈췄다는 가설을 버리기 어려웠다. 저것들이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나? 데스필드는 문득 담 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고, 이번엔 마약 없이 담배만으로 파이프를 채웠다. 정신 좀 차리고 들어야겠어.
파이프에 불을 붙인 데스필드는 차분하게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그 노랫소리가 다시 말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노래가 다시 시작되자 바스톨 장군은 만족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가만히 노래를 듣던 바스톨 장군은 갑자기 라미에게 질문했다.
“왜 해적들은 그녀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습니까?”
“이름? 글쎄. 그대가 지어보겠나, 바스톨? 그녀에게 어떤 이름이 어울리겠나?”
바스톨 장군은 라미의 대답에 약간 당혹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물수리호 쪽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쏟아지는 은청색 갑판 위에서 검은 소녀의 모 습은 검어서 잘 보였다. 노장군은 갑자기 이질감을 느꼈다. 검어서 잘 보인다는 것은 그가 알고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이 었다.
“그림자 같군요.”
“그림자?”
“예. 저 소녀의 모습은 그림자 같군요.”
“그녀를 그렇게 부르고 싶은가?”
“아니오. 이해하겠습니다. 그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겠군요.”
노장군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분명 히 다른 존재이기에.”
“나처럼?”
바스톨 장군은 라미를 돌아보았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라미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분명히 다르다.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지난 천년 동안이나 왕자의 땅을 주시하며 죄 없는 전략가들, 혹은 머리 좋은 이들로 하여금 탁상공론가 취급을 당하게끔 주의 깊게 조절해 온 존재다. 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열린 눈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그것은 너무 뻔한 사실이었다. 왕자의 땅. 그곳을 쟁취하기만 하면 대륙을 제패할 수 있다.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천년의 세월의 힘을 빌려 그들을 비웃었다. 그것이 그토록이나 당연한 일이라면, 왜 지난 천년 동안 아무도 그 땅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십년도 아니고 백년도 아닌, 자그마치 천년이다. 서른 세대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아무도 그 땅을 차지하지 않은, 그래서 대륙을 제패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철탑이나 대사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던 지식인들이나 전략가들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고 사람들은 묵묵부답인 그들을 향해 조소와 비난을 보내며 그것이 머릿속으로나 구현 가능한 지적 유희임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 들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었다.
바스톨 장군은 잠시 선배 전략가들을 동정했다. 그들이 처해야 했던 상황은 지나치게 난감했을 것이다.
오 왕자의 검이라는 말은, 사실 일종의 타협이다. 자신의 주장을 부정할 수도 없지만, 설명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그들은 그렇게 한 발 물러 나는 투의 말을 만들어내었다. 조건을 단 것이다. 그 땅을 가지기만 하면 대륙을 제패할 수 있지만, ‘시운과 재능과 행운을 가진 인간만이 그 땅을 가 질 수 있다고.
그 황당한 말이 사실과 약간의 관련이 있다면, 그들이 그것을 ‘검’이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바스톨 장군은 갑자기 의심을 느꼈다. 그들 중 일부는 대 사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래서 대사를 쓰러뜨려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의미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검’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 아닐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천년 동안의 시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시운 의 검날과 재능의 칼자루와 행운의 칼막이를 가진 검, 즉 인간으로 해석했다. 사실은…………….
“아무나 될 수 있었겠지요.”
“뭐라고 했나?”
“잠시 딴생각을 했습니다. 왕자의 땅의 주인 말입니다. 특별한 사람이었을 필요는 전혀 없었지요.”
“그래. 나를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그래. 저 프란체스코 메르데린 같은 작자라도 다섯 번째의 검이 될 수 있다. 그리고서 대륙을 제패하여 지상의 절대 권력자가 될 수 있다. 메르데린은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다.”
“그래도……… 그 천치는 약간 곤란하지요.”
바스톨 장군은 곤혹스럽다는 투로 말했고 라미는 방긋 웃었다.
“사트로니아의 침묵에 감사한다. 바스톨.”
“제가 받을 감사는 아니군요. 그것은 린타와 사트로니아가 지켜온 비밀이고, 제가 사트로니아에 속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저 역시 그 사실 을 알게 되었을 때 대단히 놀랐습니다. 오 왕자의 검이라는 것이 그런 뜻일 줄은 짐작도 못했지요.”
“그래도 그대는 지금 사트로니아를 대표하고 있다. 내 감사를 받을 수 있겠지.”
“그렇습니까. 그럼, 당신의 비밀을 지켜온 사트로니아에게 이제 대답해 주십시오. 휘리 노이에스가 다섯 번째의 검입니까?”
바스톨 장군은 약간 흥분되며 동시에 초조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트로니아는 이미 한번 실수했었다. 그것도 존폐가 위태로울 정도의 큰 실수였고, 그 대가로 사트로니아는 소제국이라는 그 영화로운 이름을 잃었다. 다시 그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지독한 고통이 필요할 것이다. 사 트로니아는 이를 갈며 두 번째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었다. 그리고 엔도를 사트로니아에 맡겼던 바스톨 장군 역시 간절한 심정으로 사트로니 아의 의지를 지지했다.
더군다나 이번 경우는 무시한다면 실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불가해한 마법을 사용했던 하이낙스의 경우와는 달리, 휘리 노이에스는 그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무기를 모으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 휘리 노이에스가 사실은 휘리 타르타니어스임도 알고 있다. 절대 실수할 수 없다.
라미는 몸을 뒤로 조금 기울여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멜바골이 화살이 하늘의 중심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녀는 맥풀린 어조로 말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흥분이 컸던 만큼 당황도 컸다. 바스톨 장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라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휘리 노이에스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럼……?”
“따라서, 네가 말한 대로 나를 쓰러뜨리는 검이 다섯 번째의 검이라면, 휘리 노이에스는 다섯 번째의 검이 아니다. 나는 그를 만난 적도 없으니까.”
바스톨 장군은 신음을 흘렸다. 하리야 선장이 이미 그런 말을 내비쳤기 때문에 바스톨 장군은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허탈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그렇기도 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에 앞서, 내가 지난 천년 동안 했어야 했을 일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당신이 했어야 했을 일이오?”
“그렇다.”
바스톨 장군은 다시 당황했다.
“어, 왕자의 땅을 정복하려는 시도를 방해해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어야 했을까? 힌트를 주지. 세상엔 전략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심가도 있다.”
바스톨 장군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생각해 보기로 했다. 상황과 가설이 종합되며, 잠시 후 그의 머릿속으로 어떤 관념이 떠올랐다. 바스톨 장군은 흠칫하며 라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떠오른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본 순간 바스톨 장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말도 제대 로 못하는 모습을 보며 라미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다, 당신은 -?”
“나는?”
라미는 말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가볍게 대꾸했다. 바스톨 장군은 컥컥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그, 그들을, 왕자의 땅의 가, 가치를 알아보고는 그것을 워, 원했던 자들을.”
“그런 자들을?”
그 다음은 말하기 어려웠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라미는 바스톨 장군을 도와주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짐작하는 대로다.”
바스톨 장군은 이제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헐떡거리고 있었다. 호흡을 가누기 위해 애쓰며 장군은 대사의 얼굴에서 죄의식, 혹은 슬픔과 같은 감정 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런 표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장군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가 했던 일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라미는 평온하게 말했다.
“자신의 고찰을 그저 타인에게 알리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려 했던 자들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는 자들은 문젯거리였지. 타인에게 왕자의 땅의 가치를 설명하는 대신, 자신이 그 가치를 이용하려 했던 자들…………”
바스톨 장군은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공포를 참아내었다. 라미의 말은 높낮이도 없이 계속되었다.
“철탑의 인슬레이버(enslaver). 나의 다른 이름이지. 나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유혹을 원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런 자들은 왕자의 땅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리고 철탑으로서 왕자의 땅을 지키던 대사는, 그런 야심 가들에겐 인슬레이버였던 것이다. 이 대비되는 두 개의 단어의 결합에 담겨 있는 의미를 곱씹어보며 바스톨 장군은 힘겹게 말했다.
“얼마나・・・・・・ 되는 숫자였습니까?”
“많았다. 어쨌든 천년의 세월이었으니까.”
바스톨 장군은 멍청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셀 수조차 없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라미는 미소를 지었다.
“나를 비난할 건가?”
“모르겠습니다.”
“비난한다는 뜻이군. 그럴 수도 있겠지. 그들 중에는 정말 뛰어난 이들도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반신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의 영웅도 있었지. 만일 그들이 다른 곳에 관심을 가졌다면, 너희들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리플리나 제부르카스, 타르타니어스 따위는 그 발을 씻을 자격조차 없는 위대한 이 름이 될 수도 있었던 이들도 있었지. 그래. 안타까운 손실이었다.”
바스톨 장군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왕자의 땅에 관심을 가질 만한 자들이었다면 그만한 역량을 갖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라미 의 몸을 바라보았다. 저 속에 그들이 있단 말인가?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을 뿐 혼자서 역사에 기록된 위인들 수십 명에 필적할 자들이, 단지 금지된 욕망을 가졌기 때문에… 뱀의 먹이가 되었다고?
“당신이 해왔던 일이 무엇인지는 알았습니다.”
바스톨 장군의 목소리에는 거친 울림이 섞여 있었다.
“이제, 설명해 주십시오. 휘리 노이에스가 다섯 번째의 검일 수도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너는 조금 전 아무나 왕자의 땅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했다. 그래, 휘리 노이에스 역시 지난 천년 동안 나를 찾아왔던 이들과 같은 인물 일 테고, 그 역시 왕자의 땅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이전의 인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점?”
“내가 계속해서 오 왕자의 땅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너희들이 휘리 노이에스를 주목하기 훨씬 전에 그를 찾아내어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 타났을 때 나는 오 왕자의 땅을 감시할 수가 없었다.”
“왜지요?”
“키 드레이번 때문에.”
느닷없이 나온 이름에 바스톨 장군은 약간 당황했다. 키 드레이번 때문이라니? 그러나 다음 순간 바스톨 장군은 철탑에서 보았던 연을 생각했다.
‘다림으로 오라, 키 드레이번.’그것은 완전한 명령이었다. 주인이 그 노예에게 하는 듯한 말투.
바스톨 장군은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그가, 당신을 쓰러뜨렸습니까?!”
“그렇다. 그가 다섯 번째의 검이며, 천년 만에 나를 쓰러뜨린 무사이며, 오 왕자의 땅을 지키던 철탑을 정복한 자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오 왕자 의 땅을 감시하지 못했고, 그래서 휘리 노이에스를 놓쳐버렸다.”
“복수, 그렇군요. 브라도 경의 복수가…….”
그 순간 바스톨 장군은 마음속으로 일생의 라이벌을 향해 무수한 욕설을 퍼부어대었다. ‘이 덜떨어진 늙 은이야. 검을 빼앗긴 것만으로도 무사로서는 죽어 마땅할 일이다만, 네 검을 빼앗아 간 그 해적놈이 그 검으로 한 일을 좀 봐라!’ 그가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는 동안에도 라미의 말은 차분하게 이어졌다.
“이제는 휘리 노이에스를 조용히 처리할 수가 없지. 그는 너무 유명해져 버려서. 일이 참 우습게 되었다고 해야 될까.”
“우습다고요?”
바스톨 장군은 황당하다는 투로 되물었지만 라미는 실제로 밝게 웃었다.
“그래. 전략가들이 자기 위안 삼아 했던 말. 그게 그만 사실이 되어버렸지.”
“그 말씀은.”
“시운, 재능, 행운. 휘리 노이에스에겐 시운이 있었지. 프란체스코 메르데린이라는 얼간이가 모든 전쟁 준비를 마쳐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에겐 재능도 있다. 실제로 일어나자마자 팔라레온을 정복한 재능은 놀라운 재능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겐 행운도 있었다. 키 드레이번이 나 를 무력화시켰을 때 일어났다는 것. 확신할 수 없지만, 그 역시 야심을 가졌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도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거의 내 근처에 까지 왔을 테지. 하지만 그가 나에게 도착하기 직전에 키 드레이번이 나를 쓰러뜨렸기에 그는 살아날 수 있었겠지. 말이라는 것, 말이 가진 힘이라는 건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나 바스톨 장군은 전혀 재미있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넓은 들판 곳곳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불길의 높이는 사람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매캐하게 솟아오른 연기 때문에 밤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불길 주위의 밝은 땅 위로는 가끔 끔찍한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졌다. 오가는 병사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비틀거리고 있었고 간혹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판 한쪽의 언덕 위에서, 바탈리언 남작은 땅에 엎드린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밤하늘을 태워버리기로 작정한 것 같군.”
남작의 옆에 엎드려 있던 오스발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남작이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입을 열었다.
“승전 축하연입니까?”
“그렇긴 한데 저건 좀 너무하군.”
“너무하다고 하셨습니까?”
“저건 축하가 아니라 광란이라고 해야겠군. 자네 아까부터 노랫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 그래. 나도 못 들었어. 저 정신나간 모닥불도 그렇고, 도저히 이성이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없군. 저건 마치……….”
갑작스러운 외침에 남작의 말이 끊어졌다. “크아아악!” 이번의 외침은 확실히 비명이었다. 그러나 장작불 주위의 그림자들 중 그 소리에 동요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남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포로를 괴롭히고 있군. 고문하는 건가?”
오스발은 ‘고문이오? 살해였던 것 같은데요?”라고 되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남작 역시 자신이 했던 말을 곧 취소했다.
“아냐, 죽이고 있는 거야. 제기랄. 마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저, 노스윈드 선단에서도 가끔 포로를 공개 처형하던데요. 널빤지 걷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저와 같이 노를 젓던 친구 하나가 말해 주던데 그건 해적 나리들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 하는 행동이라 이거지? 나도 알고 있어. 칼에 피를 먹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지. 해적이나 병사같이 싸움을 일상으로 여기는 사 람들에겐 가끔 피를 먹여줘야 하지. 마왕도 아마 그런 생각에서 포로를 괴롭히도록 허락했을 테고. 하지만 저건 정도에서 벗어났군. 널빤지 걷기는 밝은 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갑판 위에서 벌어질 텐데. 맞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 록소나군은 이 어둠 속에서 포로를 죽이고 있어. 그런 피 먹이는 작업을 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엄숙하게 해야 돼. 그래 야 광기는 억제되고 올바른 죄의식과 함께 그 효과만 가슴 깊이 간직되지. 하지만 저렇게 어둠 속에서 할 경우에는 광기는 부풀려지고 효과는 망각 돼. 죄의식은 없고. 술과 어둠은 눈앞을 흐리게 한다는 점에서 똑같아. 취한 상태에서 하는 일에서 무슨 효과를 얻겠나?”
“그렇습니까.”
“어둠 속에서 목숨을 끊고 뭐든 다 태워버리고 내일 쓸 것 같은 건 생각도 안하고…………… 안 좋아. 저런 광기는 우두머리 자신이 냉정함을 잃어 부하 통 솔도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야. 아무래도 마왕이 걱정스럽군.”
바탈리언 남작은 뒤로 물러나자는 신호를 보내었다. 언덕 뒤로 내려온 바탈리언 남작과 오스발은 율리아나 공주가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돌아갔다. 마부석에 앉아서 고삐를 꼭 쥐고 있던 율리아나는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남작은 낮게 웃었다.
“이런 우리가 너무 조용히 돌아왔나 보군요.”
“조, 조금 놀랐어요. 잘 보셨어요?”
“예. 공주님. 아무래도 아까 제가 했던 말 취소해야겠습니다.”
“취소요?”
“예. 국왕 친정이니 잘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아무래도 우회해야겠습니다.”
“우회요?”
“지금 빌레스 국왕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다가가봤자 좋은 일은 없고 나쁜 일만 많겠습니다. 저 친구들은 지금 정신의 반쯤은 미쳐 있고 나머지 반쯤 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뒀다 흘린 것 같습니다. 마왕은 저럴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이겼다지만, 그래도 적국 가운데 있는 것이고 아직 전쟁이 끝난 것 도 아닌데 부하들을 저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놀아나게 할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마왕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 런 상태라면, 산발탄원 같은 건 무의미하겠습니다.”
“그렇게 심한가요?”
“그렇습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오늘 밤 내에 최대한 멀리까지 가야겠습니다. 오스발. 자네도 마차 안에 타게. 안에 타고 있다가 혹시라도 마차가 정지하면 자네가 얼굴을 내밀게. 공주님은 의자 아래에 숨기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알겠습니다.”
율리아나 공주와 오스발이 마차 안에 오르자 남작은 조용히 마차를 출발시켰다. 고함을 지르고 정신나간 듯이 불을 피우는 록소나군이 멀리서 들려 오는 마차 소리를 들을 수는 없겠지만 남작은 최대한 소리를 줄이기 위해 말을 천천히 몰았다.
달빛이 있는 바깥과는 달리 불빛 하나 없는 마차 안은 캄캄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 코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율리아나는 답답함과 불안함을 느 꼈다. 남작이 마차를 조용히 몰고 있는 것은 마차 안에서도 잘 느낄 수 있는지라 율리아나 공주는 말을 꺼낼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암흑은 공주를 오 그라들게 했고 불안은 그녀를 떨게 했다. 결국 율리아나 공주는 오스발이 앉아 있는 방향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오스발?”
대답이 없었다. 너무 낮았던 모양이다.
“저, 오스발?”
“예? 부르셨습니까, 공주님?”
“저, 예. 불렀어요.”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없는데요.”
“그러십니까.”
“어, 당신은 뭐 나한테 부탁할 거 없어요?”
오스발은 웃어버렸다.
“그런 건 없습니다.”
“미안해요. 우음. 캄캄한 데서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까 진짜 무섭네요. 폐소공포증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차가 자꾸 좁아지는 느낌 비슷한 것이 드는 걸로 봐서 그런 증세가 조금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노래 부르고 싶어요. 그러면 안 되겠죠?”
물론 공주에게 폐소공포증은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소리 없이 위험 한가운데를 지나간다면 누구라도 불안할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은 내 처지의 축소판 같네요.”
“축소판이라고 하셨습니까?”
“캄캄한 마차 안에 갇혀서 뭔지도 모를 위험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거. 내가 지금 이렇죠. 난 왜 스스로 걸어다니지 못할까요. 자유호에서는 당신, 테리얼레이드에서는 신부님과 데스필드 – 그 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그리고 다림에선 바탈리언 남작님이군요.”
“혼자 걷는다는 건 그렇게까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보다는 내 발로 걷는 것이 멋있잖아요. 아ᅳ아. 나도 알아요. 그게 약간은 유치한 생각이라는 거. 관두지요.”
오스발은 공주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공주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낸 오스발은 약간의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 다.
“저, 공주님?”
“예?”
“아까 남작님이 산발탄원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뭡니까?”
“나 다른 곳에 정신 팔게 만드려고 그러는 거죠?”
오스발의 요령은 이미 들킨 모양이다. 오스발은 어둠 속에서 짧게 웃었다.
“흠흠. 물었으니 대답은 하죠. 그건 고난에 처했거나 모욕을 당한 과부, 혹은 처녀가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취하는 매우, 매우매우매우 고전적인 수 단이죠. 대신 싸워줄 기사 ᅳ 남편이나 연인이겠죠 ᅳ 가 없는 그런 여인들이 머리를 풀고 왕에게로 나아가 탄원하는 거예요. 그럼 왕은 스스로, 혹은 자신의 기사 중 하나에게 명령하여 그 여인의 명예를 지키게 하거나 고난을 해결하게 하는 거죠. 바드들이나 오늘 아침 처음으로 면도날이 필요해진 젊은 친구들이 좋아할 근사한 장면이겠죠.”
“아, 예. 머리는 왜 푸는 거죠?”
“아, 머리카락은 여인의 성(城)이니까요. 그걸 푸는 건 자신이 무방비하고 무력함을 나타내는 거죠. 사실 보기 근사하다는 이유도 있을 거예요. 그러 니까.”
시큰둥하게 시작되었지만 율리아나는 곧 자신의 설명에 빠져버렸다. 율리아나는 설명을 하면서 중간중간 자신에게 묻고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또 스 스로에게 대답하며 (그건 이런 이유에서일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요) 열심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율리아나의 설명에 찬성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오스발은 안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