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2장 : 모루와 망치, 그리고 다섯 번째의 검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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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2장 : 모루와 망치, 그리고 다섯 번째의 검 – 2화



하리야는 빙긋 웃으며 손에 든 두루마리를 흔들어보였다. 단상 위에서 사트로니아군의 훈련을 바라보고 있던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모습을 보았다. 장군은 하리야가 뭔가를 자랑하고 싶어하고 있으며 그건 손에 들린 저 서류와 관계된 일이라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서류에 뭐가 적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리야는 두루마리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선물입니다.”

“그런 것 같구려. 그 환한 얼굴을 보니. 이게 뭡니까?”

“직접 보시지요.”

바스톨 장군은 끈을 푼 다음 두루마리를 펼쳤다. 하리야는 뒷짐을 지고 훈련중인 사트로니아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인원들은 단지 그곳에 있 다는 것만으로도 박력을 느끼게 하는 법이다. 하물며 그런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라면 그 감동은 굉장한 것이 된다. 이 훈련에 찬성 하지는 않았던 하리야도 그것이 멋지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했다.

하리야는 법황이 이미 지적했듯이 망치의 역할을 맡은 바스톨 장군이 최대한 빨리, 록소나 침공 준비중인 휘리 노이에스가 돌아올 시간을 주지 않고 팔라레온을 쳐야 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기 위해선 훈련 따위로 허비할 시간은 없다는 것이 하리야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가 로저었다. 장기간의 항해를 거치고 방금 상륙한 사트로니아군은 반드시 적응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 장군의 주장의 요지였다. 훈련되지 않은 군사 로 급히 출발했다간 오히려 행군이 더 늦어질 뿐이라는 장군의 지적에 하리야는 못마땅스러웠지만 일보 후퇴하기로 했다.

그러나 하리야는 장군이 이젠 더 지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리야는 바스톨 장군을 돌아보았고 장군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맙소사, 로드 데자크가 살아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오늘 아침 제게 어떤 패스파인더가 찾아왔습니다. 로드 데자크로부터 의뢰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벌쳐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아, 그 친구.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소. 휘리 노이에스의 스베이 포고문을 우리에게 전달해 줬던 친구지요. 대단히 비싼 패스파인더라고 하던데.” 말 끝에 바스톨 장군은 하리야의 눈치를 살폈고 하리야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 친구는 로드 데자크에게 대금을 받았습니다. 돈이 무진장 아쉬운 우리 처지엔 감사한 일이지요.”

“그렇군요. 음, 믿을 수 있는 정보입니까?”

“패스파인더잖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그리고 그 벌쳐라는 친구는 로드 데자크에게 받았다는 대금도 보여줬습니다. 데자크 가(家)의 가보인 스완 대거였습니다.”

바스톨 장군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림 시내의 전문가들에게 물어본 결과 스완 대거가 확실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도 벌쳐에게 양해를 얻어 확인해 봤고요.”

“찔러보셨습니까?”

“저녁 식사에 사용될 거위 한 마리를 찔러봤습니다. 확실하더군요. 고기를 버려놨다고 주방장이 투덜거렸습니다.”

“그럼 로드 데자크가 진짜 살아 있는 것이군요. 일이 쉽게 되었습니다.”

“예. 그래서 말인데, 이제 출발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로드 데자크가 이런 모험을 한 것은 그의 처지가 위험하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장군의 작전에 대해 뭐라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그의 생존이 확인된 이상 첫 번째 목표는 당연히 공작의 구출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감이오. 흐음, 서신대로라면 투란으로 진격하는 길과 그런 대로 맞아떨어지는군요. 데자크 공작을 구해 내고 그대로 그분을 모시고 투란으로 진 격하는 것이 옳은 순서겠군요. 알았습니다.”

하리야는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질문했다.

“그럼 언제?”

바스톨 장군은 시원하게 대답함으로써 그를 기쁘게 해줬다.

“모레로 하겠습니다. 열병식엔 참석하시겠지요?”

바스톨 장군에게서 확답을 얻은 하리야는 밝은 얼굴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동맹군이긴 하지만 어쨌든 너무 많은 수의 무장 집단을 끌어안고 있는 것 은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트로니아군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폴라리스의 전비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따라서 바스톨 장군이 출정 결심을 했다는 것은 하리야에겐 분명히 희소식이었다. 하리야는 임시 정부 청사로 걸어가면서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랬기에 하리야는 임시 정부 청사로 돌아가는 길에 라미를 만났을 때도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아, 라미?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부두로, 사냥.”

하리야의 유쾌했던 기분은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라미는 그 모습을 보며 차게 웃었다.

“몇 개월 만의 사냥이니 좋은 결과를 기원해 주지 않겠어? 어차피 쉬운 사냥이 될 것 같지만. 부두의 주정뱅이나 배에서 쫓겨난 선원 따위는 아피르 족과는 비교도 안 될 테니까. 그리고 이번엔 키 같은 무서운 방해자도 없을 테고………… 소문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말했듯이 내 사냥은 몇 개월 에 한번으로 충분하니까.”

하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라미를 바라보았다. 라미는 얼굴을 옆으로 약간 기울인 채 하리야 뒤편의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안 만나고 싶었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라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하리야는 그대로 라미의 옆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라미는 잠시 그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항구 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흘 뒤, 바스톨 엔도 장군의 지휘 하에 폴라리스를 출발한 사트로니아 군은 팔라레온의 남부 도시 담시나에 들어섰다.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담시나에 도달한 바스톨 장군은 그곳의 외딴 장원을 점잖게 공격했고, 장원을 지키고 있던 몇 명의 다벨 병사들 은 황당한 심정 속에 항복했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은 장원 내에 유폐되어 있던 팔라레온의 군주 로드 데자크를 구출해 내었다. 로드 데자크 생존 및 구출 소식은 팔라레온 전역에 빠르게 전달되었다. 지하로 잠적했던 자칭 타칭 팔라레온의 우국지사들이 환호를 지르며 은신처에서 뛰쳐나온 것은 당 연한 결과였다.

투란에 주둔하고 있던 다벨군은 다케온의 피린데 성에 있던 휘리 노이에스의 본대에 급보를 보냈다. 급보를 받아든 서 소팔라는 자신이 그런 전갈을 전해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 공포를 느껴버렸고 그래서 동생을 꼬드겼다.

“같이 가자고, 응? 제발!”

·형. 화장실도 손잡고 다니는 소녀였나?”

무안을 줬지만 그래도 형에게 친절한 소사라는 그의 형과 함께 그러나 손은 잡지 않고 사령관실을 찾았다. 그러나 소팔라의 예상과는 달리 휘 리는 별 노여워하는 기색 없이 보고를 받았다.

“사트로니아가 드디어 움직였단 말이지.”

보고를 끝낸 소팔라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덧붙였다.

“철군 준비를 할까요, 사령관님?”

“철군?”

“어, 급히 팔라레온으로 돌아가 바스톨 장군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쪽은 천천히 고민해도 돼. 그러라고 로드 데자크를 담시나에 처박아둔 거니까.”

“예?”

“담시나는 투란으로 가는 길목이야. 그래서 데자크 공작을 거기에 놔둔 거지. 내가 제일 걱정하고 있었던 건 투란 자체에 대한 기습 공격이었어. 하 지만, 이제 기습은 불가능하겠지.”

“아, 하지만 데자크 공작이 사트로니아에 넘어감으로써 팔라레온의 잔존 세력이 그들에게 달라붙을 텐데요. 바스톨 장군은 이제 보급이나 병력 충 원에서 훨씬 유리해졌을 겁니다.”

“잘됐잖아. 서 소팔라.”

“무슨 말씀이신지?”

휘리는 긴 탁자에 놓인 지도를 내려다보며 설명했다.

“원래 내 계획에선 빌레스 국왕과 네그리파 백작이 좀더 열심히 싸워주는 것이었지. 그 동안 팔라레온에서 정지 작업을 할 계획이었거든. 둘 다 짐 작했지? 그래, 좋아. 하지만 빌레스 국왕이 그냥 물러나버림으로써 우린 팔라레온을 충분히 장악할 시간을 잃게 되었어. 다케온이 숨돌리기 전에 쳐 들어왔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당분간은 그런 편안한 작업이나 하고 있을 시간을 또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따라서 팔라레온의 잡초를 단기간 내에 확실히 솎아낼 필요가 있었지.”

“팔라레온의………… 잔존 세력 말씀입니까?”

휘리는 지도에서 팔라레온 남부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래. 이제야말로 팔라레온 놈들의 성향을 단숨에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담시나로 달려가 로드 데자크 앞에 무릎을 꿇는 녀석들은, 이번과 같은 계기가 없었어도 조만간 독립 투사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놈들이다. 쓸어버려야지. 또한 녀석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좀더 조심성이 있는 녀석들에 대한 본보기도 될 거야.”

“말씀은 옳습니다만 바스톨 장군이 있습니다.”

소사라가 근심스럽게 말했지만 휘리는 그냥 웃었다.

“더 좋지. 껄껄. 바스톨 장군 정도가 와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면 팔라레온의 예비 독립 투사 녀석들은 다시는 독립 운동할 엄두를 못 내게 될 테니까.”

소팔라는 이것이 허풍인지 자신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껏 감탄할 수 없었던 소팔라는 약간 찝찝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여러 가지 고려 때문에 로드 데자크를 담시나에 놔두신 것이군요. 일부러 구출해 가라고……………” 

“그래.”

“그럼 사트로니아군을 어떻게 요리하실 생각입니까?”

“투란으로 전갈을 보내. 우리에게 동조했던 팔라레온인들 이끌고 지금 당장 탈출하라고.”

“예?”

“예?”

형제는 거의 동시에 당혹하여 외쳤다. 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못 알아듣겠나? 투란 주둔군은 투란의 중요 건물에 불을 지른 다음 재빨리 탈출하는 거다. 그리고 우리한테 넘어왔던 작자들은 거기 남아 있어봐야 좋은 꼴 못 볼 테니 도망치게 해줘야 되지 않겠나. 전부 이리로 오라고 그래.”

“팔라레온을 내주는 겁니까?”

“그래. 가져가라고 해. 어차피 원하던 것은 다 가져왔다.”

“예?”

“밀과 노예. 필요한 거 다 가지고 왔으니 시간 싸움할 준비는 다 되었지.”

림파이어 가문의 형제 기사들은 거의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그들의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사령관은 웃으며 설명했다.

“문제는 시간이야, 시간! 록소나를 치고, 그 다음 팔라레온을 되찾는다. 절대로 그 순서가 바뀌어선 안 돼. 어중간하게 록소나와 팔라레온 사이에 끼 여버리면 우린 그야말로 망치와 모루 사이에 끼인 꼴이 될 거란 말이다. 팔라레온을 먼저 수복하는 것도 안 돼. 서 브라도가 록소나 기병들을 끌고 우 리 꽁무니에 달라붙을 테니까. 우리가 택할 순서는 딱 하나뿐이야. 록소나와서 브라도를 먼저 치고, 그리고 그대로 반전하여 팔라레온과 바스톨 장 군을 친다.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 그래서 밀과 노예 다 가져온 거야. 그러니 바스톨 장군이 팔라레온을 가져가든 말든 상관없어. 우린 록소나에서 기병들을 장악하느라 땀빼고 있을 서 브라도부터 신경 써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아…… 예.”

“그럼 진군 준비해. 알겠나? 철군이 아니라 진군이다. 투란 주둔군에는 그들의 주둔지가 바뀌었다고 전해 줘. 여기, 다케온의 피린데 성이 그들의 다 음 주둔지다. 그리고 우린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록소나로 간다. 알겠어? 진군이다. 서 소팔라!”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서 소팔라는 경례를 붙이고 사령관실을 나서려 했다. 그때 휘리의 눈이 소사라를 향했다.

“그런데 자넨 왜 온 건가, 서 소사라?”

소사라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형이 말하길 혼자서 이곳에………. 우웁!”

“음하하! 소사라는 사령관님이 제게 무슨 지시를 내리는지 듣고 싶어서 따라왔던 것입니다! 질투가 심하죠? 그럼, 이만!”

휘리는 동생의 입을 움켜쥔 채 사령관실을 빠져나가는 소팔라의 등을 바라보며 약간 어이없어하는 얼굴이 되었다.


“애서가로 알려지신 우리 공주님께, 제가 문제 하나 내어볼까요?”

“예! 주세요!”

“어떤 노장군이 전쟁을 앞두고 레모에 급한 서신을 보냈다면 그건 무슨……”

“서 브라도께서 레모에 참전해 달라는 요청을 보냈나 보군요. 설마 그게 문제는 아니겠죠?”

에름 후작은 뜨끔한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그냥 웃어버렸다. 사실은 그것도 문제였다.

“그야 아니죠. 브라도 경은 그럼 왜…”

“다벨 8군단의 휘리 장군이 머리가 있다면 대포위 공격을 벗어나기 위해 록소나부터 치고 팔라레온을 치는 시간차 공격을 시도할 테고, 그렇다면 록소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다케온에서 대포란 대포는 다 끌고 갈 테고, 그런 휘리 장군의 공격을 맞이하여 록소나 기병들을 대포밥이 되게 하지 않으려면 브라도 경께선 레모에 포병 파견 요청을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문제는 언제 나와요?”

에름 후작은 다시 웃어버렸다. 하지만 이번엔 이루미나 후작 부인이 남편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살을 맞댄 부부라는 표현은 이 경우 쓸 수 없겠 지만, 어쨌든 부부만이 할 수 있는 말 없는 대화가 잠시 있었다.

‘우리 동생 어때요? 항복하시죠.’

‘당신 말이 맞군요. 이루미나. 입 쓸 필요가 없는 몇 가지 다른 일도 하면서……라고 했던가요?”

라트랑 후작 에름에게는 부인이 수를 놓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는 취미가 있었다. 채광 좋은 후작 부인의 방에서 약간 떨어져 앉아 한 사람은 수를 놓고 한 사람은 그 손에 떨어지는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럴 때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만질 수 없는 부부임도 잊은 채 고요 속에서 서 로를 말없이 사랑하곤 했다.

따라서, 아무 생각 없이 언니의 방을 찾아와 함께 손수건에 수를 놓던 율리아나는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이 멍청하게 끼여든 훼방꾼임을 깨닫곤 당황 하고 있었다. 어색하지 않게 도망칠 궁리를 짜내느라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에름 후작이 생각해 낸 것이 이 이야깃거리였지 만 그것은 간단히 격파되고 말았다. 율리아나 공주는 손으로 여전히 수를 놓으며 에름 후작의 질문에 대답해 버렸던 것이다. 에름 후작은 당황을 감 추기 위해 머리를 쓸어넘기는 척했다. 그리고 후작 부인은 남편이 이야깃거리를 생각해 낼 수 있도록 잠시 선수 교대에 들어갔다.

“유리. 난 잘 모르겠는데, 왜 휘리 장군이 록소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대포를 끌고 간다는 거니? 다케온에서처럼 대포까지 망가뜨리면서 말을 못 달리게……

“아니. 또 그러지 못하겠지.”

“그럼? 보병이라면 몰라도 기병은 순식간에 포병대를 짓밟을 것 같은데. 대포는 너무 느리잖아.”

“나도 문제 내볼까. 기병이 이길 수 없는 것이 뭐지?”

“뭔데?”

“성이지. 성벽을 탈 줄 아는 말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하하하!”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입을 조금 벌린 채 동생을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는 웃으며 설명했다.

“기병 아닌 군사로 기병을 상대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 성을 만드는 거. 중장보병이 성벽이 되는 거야. 그리고 장창병, 장궁병, 대포 중 하 나를 중장보병과 결합시켜야 되지. 휘리 장군은 장창병이나 장궁병은 구하지 못할 테니 대포를 쓸 거야. 언니 말대로 기병은 순식간에 포병을 밟아버 릴 수 있지만, 성벽이 있다면 말이 좀 달라지지. 대마법사 하이낙스가 증명해 준 거야.”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감탄했다는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름 후작도 잔잔히 웃으며 질문했다.

“맞습니다. 그러니 서 브라도 경은 대포를 상대할 대포가 필요하겠지요. 그렇다면 서 브라도의 요청에 레모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건 모르겠어요. 레모가 그들의 자랑거리인 포병대를 끌고 참전한다면 휘리 장군은 대단히 곤란해지겠죠. 뭐, 그 분은 지금까지 놀라운 전투를 많 이 보여주긴 했지만 그건 모두 팔라레온과 다케온을 상대로 벌였던 전투잖아요. 좀 심하게 말한다면……”

“농부와 광부죠.”

“예. 하지만 록소나는 진짜 기사라고 할 수 있죠. 아마 휘리 장군은 양쪽 귀로 녹색 연기를 뿜어댈 정도로 고심해야 될걸요. 거기다가 레모 대포까지 더해지면 무지개빛 연기를 뿜을지도 몰라요………… 말해 놓고 보니 보고 싶어지는 모습이네요?”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그 모습을 상상하며 작게 키득거렸다. 율리아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레모로서는 록소나에 호의를 베풀 좋은 기회죠. 그들의 전통적으로 껄끄러웠던 관계도 개선할 수 있을 테고, 더군다나 이번 건은 빌레스 국왕이 아닌 서브라도의 요청이니까……… 서 브라도는 좋은 중개자 역할도 하실 수 있겠지요. 레모로서는 이 기회를 놓치면 바보예요.”

후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여들었다.

“그렇게 당연하다면 왜 모르겠다고 한 거니?”

“레모는 바보거든.”

율리아나 공주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에름 후작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후작 부인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동생을 바라보다가 곧 그녀를 질책했다. 

“실례잖니, 유리, 어떻게 그런 험담을.”

“어? 어? 난 나쁜 뜻으로 말한 거 아닌데. 으이. 또 나오는 대로 말했나 봐. 거 왜 있잖아. 우직하다고 하던가. 잇속 챙길 줄 모르고 무뚝뚝하고 쇳토 막같이 뻣뻣하고 고집은 화강암 같은………….. 알지? 레모가 그래요. 언니.”

“나도 레모 바위라는 말은 들어봤어.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응. 그러니까 레모는 아마 요럴 거란 말이야.” 

의자에서 일어난 공주는 턱을 불쑥 내밀고 두 팔은 가슴 앞에 단단히 팔짱을 낀 채 거친 저음으로 말 했다. 

“어헛, 이게 기회지 뭔지는 잘 모르겠고, 어ᅳ 헛, 마왕은 마왕이고 우리는 우리란 말씀. 어허 – 엇! 그러니까 말씀이야…..” 

후작과 후작 부 인은 공주의 흉내를 보며 배를 붙잡고 웃어대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웃어대는 두 부부를 보고는 방긋 웃으며 손수건을 들어올렸다.

“다했어! 나 이제 나가볼게요. 선물해야지.”

후작 부부는 웃느라 공주에게 대답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공주가 나가고 나서 한참 후에야 에름 후작은 사실 말재주에 넘어간 쪽 은 자신들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눈물을 닦아낸 에름 후작은 아내에게 그 생각을 물어보기 위해 후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후작 부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에름 후작은 아내의 눈가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후작은 의자에서 일어 나서는 부인을 향해 걸어갔다. 이루미나 후작 부인은 남편을 올려다보았고, 에름 후작은 그녀의 발치에 앉은 다음 아내의 무릎에 몸을 살짝 기대었 다. 후작 부인은 다리를 조금 움츠렸다.

“이루미나?”

“예.”

“당신의 동생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레모인의 흉내는 근사했어요.”

“저 애는 어릴 때부터 저나 다른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 있어 별다른 노력이 필요없었죠.”

“그랬을 것 같군요.”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후작은 아내의 무릎에 볼을 살짝 기대었다. 남편이나 연인이 아닌, 오빠나 친구 같은 태도를 지니려 애쓰 면서.

그리고 에름은 곧 안타까움과 체념이 뒤섞인 서글픔을 느꼈다.

얇은 치마 아래로 느껴지는 이루미나의 다리는 바르르 떨리고 있었고 그것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공포는 에름에겐 낯익은 것이었다. 더 이상 다가가 보았자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와 같을 것이다. 이제는 익숙해졌다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슬픈 좌절. 불꽃 속에 아른거리는 것을 보고 싶다 해서 눈동자를 태우는 건 소용이 없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갔다 하더라도 눈동자를 태워버리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에름은 들리지 않게 한 숨을 쉬며 얼굴을 들어올리려 했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후작의 볼을 스쳤다.

이루미나는 무릎에 얹힌 남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에름 후작은 볼에 닿는 부인의 손가락에서 그녀의 맥박까지 느낄 수 있었다. 따스하 고 미미하게 떨리는 그 손가락들이 귀 뒤를 지나칠 때 에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양탄자 위에 놓인 그의 손가락이 오그라들며 에름은 양탄 자를 구겨쥐었다.

“그리고 난 항상 힘에 부칠 정도로 노력했어야 했죠.”

이슬 맺히는 소리가 있다면 지금 이루미나의 목소리는 그와 같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낮고 물기 어린 소리. 에름은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숨쉬기 가 더 쉬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으로부터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과, 단지 슬픔을 감추기 위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요… 차라리 무표정했으면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요. 하지만 동정심 때문에 엉터리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그들………… 왜 신경 써주는 척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신경 써주니까 내가 행복해할 거라고 생각할까요. 나를 동정해 달라고 말한 적도 없어요. 내가 나에게 보내 는 동정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인 것을…………… 원하지도 않았던 동정의 대가로 내가 그들에게 부채감을 느껴야 된다는 건………… 에름.”

“이루미나.”

“사랑하는 에름.”

“말해요. 이루미나.”

“내가 저 애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날 뭐라고 부를 건가요.”

에름은 이제 평온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루미나라고 부르겠지요.”

“정말로?”

“당신은 구분할 수 있을 텐데요, 이루미나. 내가 거짓을 말할 때와 진실을 말할 때를.”

“고백할게 하나 더 있어요. 그 아이가 이곳에 도착한 날 이후로 난 밤에 제대로 잠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 애를 만난 건 기뻤지만 당신과 함께 본다 는 건…… 당신, 그 애를 보고 나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요?”

“어떤 생각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 더 밝고, 더 아름답고, 더 정상적인 선택도 있었다는 생각……”

“그리고 더 멍청한 선택이겠군요.”

간단히 대답한 에름은 아내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킥킥거렸다. 남편의 웃음 소리가 다리를 통해 전해져 왔지만 이루미나는 이제 떨지 않았다. 열린 창문 너머 하얀 테라스로부터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으로 녹아들듯 물결치는 커튼을 보며 이루미나는 남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 럽게 쓸어내렸다.

“구분할 수 없어요.”

“예?”

이루미나는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난 당신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구분할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은 내게 한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서. 어떡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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