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4장 : 얼어붙은 검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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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4장 : 얼어붙은 검 – 2화



킬리스타드 선장은 그랜드머더호의 고물 쪽 난간에 걸터앉은 채 해거름을 보고 있었다. 터릿 갤리어스의 뱃전은 상당히 높고 그래서 킬리 스타드 선장의 발 아래로 물거품이 이는 바다는 꽤나 멀어보였다. 어떻게 봐도 불안한 모습이지만, 킬리 선장은 그런 높이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술병 을 기울였다.

길고 느린 동작이었다. 한참 후에야 입에서 술병을 뗀 킬리는 그것을 내려놓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킬리 선장은 다시 술병을 들어올려 태양을 가 렸다.

금속제 술병의 옆구리 부분으로 태양이 반짝였다. 그리고 킬리는 그 황금빛을 보며 어떤 여인의 머릿결을 떠올렸다. 그가 버리다시피 한 여자였다. 

“킬리.”

킬리는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잠시 후 까무잡잡한 다리가 그의 옆 난간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 다리는 난간에 걸쳐진 채 한동안 버둥거렸다. 킬리 는 핏 웃고 말았다. 벨로린의 키는 아직 작은 편이고, 그랜드머더호의 난간은 그녀가 한 번에 올라앉기엔 약간 높았다. 벨로린은 기어오르다시피 하 여 간신히 킬리의 옆에 앉았다. 킬리는 술병을 한번 흔들며 말했다.

“마실래?”

“싫어.”

“응.”

킬리는 다시 서쪽을 바라보았다. 벨로린은 난간에 손을 짚은 채 다리를 까딱거렸다. 라미는 여름이 되자 그녀의 바지를 잘라주었고 그래서 벨로린은 다른 선원들처럼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벨로린은 가느다란 다리를 까딱거리다가 말했다.

“미안하다고 할까?”

“그러지 않아도 돼.”

“연주 안 하네?”

“응?”

“류트 말이야.”

“아아.”

“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선 연주하면서 왜 자신을 위해선 연주하지 않지?”

“글쎄. 넌 뭐든 알잖아. 내가 왜 그런지는 모르니?”

“난 질문할 때마다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선 몰라.”

킬리는 껄껄 웃었다.

“그럴 듯한 말이구나. 그럼 지금의 대답을 해볼까. 손에 술병을 들고 있어서야.”

“바로 그건데, 왜 술을 마시는 거지? 류트를 타는 편이 훨씬 어울릴 것 같은데.”

“모르겠군.”

“자신을 위해서 연주한 적이 없지?”

“가끔은 해.”

“그거야 연습이라고 불러야 더 어울리는 그런 거지. 네 뒤에 류트 있어.”

킬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덱체어가 있었고 그 위엔 자신의 류트가 놓여 있었다. 벨로린이 가져다놓은 것이리라.

“어쩌라고?”

“연주해.”

“취해서 안 돼.”

“취하면 더 잘해. 카밀카르 대사관에서 봤어.”

킬리는 좀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난간에서 내려왔다. 술병을 내려놓고 류트를 집어든 킬리는 덱체어에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현 위로 올 라왔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벨로린은 곧 손을 들었다.

“관둬.”

“어, 아무리 풋내기라도 시작도 하기 전에 구박받는 악사는 없어.”

킬리는 벨로린의 등을 향해 살짝 불평했지만 벨로린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첫음에서부터 벌써 알았어. 맥빠진 연주 할 거면 하지 마.”

킬리는 고분고분 류트를 내려놓고 다시 술병을 들어올렸다. 다시 똑바로 앉자 어느새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벨로린의 얼굴이 보였 다. 조금 전 술병으로 태양을 가렸을 때처럼, 이번엔 벨로린의 머릿결에서 태양이 부서졌다. 그래서 킬리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이상하군. 넌 자신을 위해서만 노래 부르는데, 넌 자신을 위해선 연주하지 않는군.”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노래는 별로 부르지 않는데.”

“아니, 너 말고, 그러니까………… 다른 너.”

“다른 나? 무슨 말이지?”

“난 찾은 것 같아.”

킬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벨로린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손에 든 술병도 거의 잊어먹고 있었다. 그때 벨로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망연히 그 웃음을 보 던 킬리는 조금 후 자신이 무엇을 본 건지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벨로린이 웃는 것을 본 사람은 노스윈드 선단에서, 아니 온세상에서 그가 처 음일 것이다. 그래서 킬리는 약간 이상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너 웃은 거야?”

“응.”

“뭐 즐거운 일이라도?”

“찾았거든.”

“뭘 찾았는데?”

“그리고 동시에 결정을 내렸어, 나는.”

“……무슨 결정이야?”

“난 네 쪽에 서겠어. 좀 성급한 결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꿀 마음은 없어.”

벨로린은 말 끝에 다시 한번 미소 지었고 킬리는 그 미소가 꽤 마음에 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 쪽에 서겠다니 고맙긴 하군. 그런데 말이야, 내가 어디에 서 있는데?”

“반대쪽.”

“어디의 반대쪽?”

“내가 선택하지 않은 쪽.”

“이런. 그건 사전에서 써먹는 수법이잖아. 남성 = 남자. 남자 = 남성인 사람.”

“그러네.”

“뭐든 아는 너잖아? 내 반대쪽이 뭔데?”

“넌 알 필요가 없어.”

“허! 그건 내가 여섯 살 때 어떻게 하면 아기가 생기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 아버지가 해준 대답하고 똑같군. 혹시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는 말을 덧붙일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할 건데.”

“하, 하하, 다행이군. 영원히 모르지는 않는단 말이지.”

킬리는 웃으며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벨로린이 말했다.

“아기를 가지고 싶어? 내가 만들어줄까?”

킬리는 마시던 술을 다 토해내고는 한참 더 켁켁거렸다. 벨로린은 눈이 동그래져서 그런 킬리를 바라보았고 겨우 숨을 돌린 킬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뭐라고 그랬어? 아니, 말하지 마. 다시 들어도 황당할 것 같으니까.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어떻게 하면 생기냐고 물었잖아. 가지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거 아냐?”

“혹시 가지고 싶어질 때가 올진 몰라도, 너와 만들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

“그래? 누구랑 만들 건데?”

“몰라. 잠깐. 그런데 너 아기는 가질 수 있는 거야?”

“물론 혼자선 못 만들지. 네가 도와주면……”

“그만! 됐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런 젠장. 조금 전에 내 편에 서겠다느니 뭐니 한 건 나랑 결혼하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였던 거야?”

“그건 아냐. 하지만 네 편에 서기로 했으니 되도록이면 네가 원하는 소망을 들어줄 생각이었어. 만약 나와 아기를 만들고 싶다는 게 네 소망이라 면……”

“그런 소망은 없어.”

킬리는 아직도 이 대화 전체를 일종의 농담거리로 생각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만일 그게 자신의 소망이라고 말할 경우 벨로린은 별 주저없이 그렇게 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애정 같은 것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는 것 같았다. 킬리는 그것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만약 내가 네 손에 죽고 싶다면?”

“그건 네 소망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그걸 원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고.”

“힘이 모자랄 테니 목을 졸라주거나 하는 식은 못해. 칼로 심장을 찌르는 편이 확실하겠지.”

확실해졌다. 킬리는 멍한 얼굴로 벨로린을 바라보았지만 벨로린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 미소 때문에 킬리는 살벌한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 포를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벨로린은 킬리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고 했다. 그가 죽음을 원할 리는 없으니 그에겐 일단 무서워할 것이 없다. 적 어도 그가 요구하지 않을 경우 벨로린이 밤중에 찾아와 그의 가슴에 단검을 꽂아놓고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거 참. 우리 어머니도 내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다는 말하면서도 항상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만 해줬는데. 넌 옳고 그른 것 따지지 않고 무 조건 들어준단 말이지. 하하. 고맙다고 말해야 되나.”

“고마워할 것은 없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난 너를 선택했어.”

“그리고 선택되지 않은 것이 누군지는 알 필요가 없다?”

“응.”

“묘한 일이군. 누군지 모를 그 사람에겐 안됐다고 할까. 아니면 그 친구가 나에게 불쌍해하는 눈길을 보내야 하는 건가. 이봐. 혹시 내가 선택된 이 유는 뭔지 물어봐도 돼?”

“네가 합리적인 대답을 원하는 거라면 해줄 말은 없는데.”

“비합리적인 거라도 좋아.”

“굳이 말하자면 그 여자의 일 때문에.”

“……아미?”

“응.”

킬리는 화를 내지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지도 않았다. 그냥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허리춤에도 오지 않을 꼬마에게 동정받다니,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이다.”

“날 꼬마 취급하는 편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

“맞아. 그리고 난 가끔 네가 무서워.”

킬리는 다시 술병을 들어올렸다. 문득 킬리는 자신이 전혀 취하지 않았으며, 단지 타성으로 술을 마시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킬리 는 술병을 뱃전 너머로 집어던졌다. 풍덩. 그리고 킬리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벨로린은 여전히 난간에 오도카니 걸터앉아 있었다. 킬리는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커다란 손으로 벨로린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벨로린은 목을 한껏 움츠리며 말했다.

“뭐야?”

“알잖아. 꼬마 취급.”

“아니. 왜 술병을 던진 거냐고 물은 거야.”

“이제 그만 마셔야지.”

“그만?”

“그만.”


볼지악 요새 위에서 메르데린 공작은 정서 불안의 모든 증후를 보이며 멀리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 오른쪽, 즉 동쪽에는 사트로니아군이 대오도 정연하게 포진하고 있었고 왼쪽인 서쪽에는 휘리 노이에스의 8군단이 역시 엄정한 기세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휘리 노이에 스가 보낸 서신이 쥐어져 있었다. 이번에도 간단한 편지였다.

‘소신이 비록 바스톨 장군의 칼날 아래 쓰러진다 하더라도 그의 칼은 부러뜨려 놓겠사오니, 절대로 저를 위하여 7군단을 내보내지는 마십시오. 7군 단은 공작님을 지켜야 합니다.’

바스톨 장군의 꼭두각시 조종술에 휘말려 양쪽 부대를 번갈아 격퇴당한 지도 사흘째, 프란체스코 메르데린 공작도 어느덧 노장군이 어떤 재주를 부 리고 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휘리 노이에스가 보낸 서신이 무슨 뜻인지도 알고 있었다. 두 개의 창으로 번갈아 사자를 찌르다간 두 사냥 꾼이 모두 죽는다. 따라서 한 사냥꾼이 죽음을 각오하고 사자의 뒷다리를 찌른 다음 다른 사냥꾼이 사자의 심장을 노려야 한다. 휘리 노이에스는 참 으로 담백해서 피하기 어려운 수를 바스톨 장군에게 내민 것이다.

그렇지만 메르데린 공작은 요새 내의 7군단에 출동 준비를 내려놓고 있었다. 현명한 일이었다. 볼지악 요새 앞에서 벌어지는 그 싸움은 그만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볼지악 요새 내의 다른 가신들과 병사들 또한 보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눈앞에서 자신의 최고 가신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 여줄 수는 없었다. 황제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과 별개로 그는 군주의 도는 알고 있었다. 그에 덧붙여, 그는 자신이 여차하면 7군단을 출동시키고 말 것이라는 점 또한 알고 있었다.

사트로니아군의 진형은 참으로 위엄 있었다.

위대한 승리라고까진 할 것 없더라도 패배 없는 전투를 계속해 온 효과가 확실히 사트로니아군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폴라리스를 출발 한 이후로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 사트로니아군은 그야말로 갈기를 흩날리며 분수를 모르는 사냥꾼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노사자와 같은 기세 였다.

그리고 다벨군의 최정예이며 팔라레온과 다케온을 연거푸 멸망시키고 알레미지우스 평원에서는 제국 최고의 무장 서 브라도마저 물러나게 만들었 던 제8군단 역시 지난 40년 동안 제국이라는 들판에 그 맹위를 떨쳐왔던 노사자를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중한 사냥꾼의 기상을 풍기고 있었 다. 그리고 사냥꾼이라 한다면 그것은 다시 없을 사냥꾼이다. 나라를 사냥하는 사냥꾼이니까.

화창한 하늘 아래 산들바람은 승패를 관장하는 대천사의 신중한 조율 같았고 어떤 자에게 그 최후의 음악이 돌아갈지는 아직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 다. 그러나 객관적인 견지에서 제8군단 쪽에 위험 요소가 많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들은 록소나로부터 다벨까지 힘겹게 달려왔고 그 여정의 절반 정 도는 서 브라도라는 또 하나의 맹장에게 호된 공격을 받아가며 걸어왔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해서는 바스톨 장군에게 사흘 동안이나 농락당했다. 그 결과는 가장 정직한 지표인 숫자의 비교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사트로니아군의 배치는 정석대로라 할 만한 것이었다. 중앙에 배치된 것은 4,000의 중장보병과 2,000의 경장보병이었다. 그리고 좌익에는 2,000기의 중장기병을, 우익에는 1,500기의 경장기병을 배치해 두었다. 왼쪽부터 중장기병, 중장보병, 경장보병, 경장기병으로 전체적으로 보아 왼쪽에 무게 중심이 실린 진형이었다. 볼지악 요새로부터 응원군이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120문 가량의 대포는 우익의 경장기병 전 방에 배치되어 있었고 반대편인 좌익의 중장기병의 뒤쪽엔 300명 가량의 궁수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도합 9,800의 군세와 120문의 대포였다.

그에 맞서는 다벨 제8군단은 이번에도 대포를 본진 앞쪽에 배치하고 있었다. 110문 가량의 대포가 바로 정면의 사트로니아군 중장보병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중앙에는 2,000 가량의 중장보병대가 서 있었고 550기의 경장기병과 900기의 중장기병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리고 2,000명 가량의 노예 부대와 1,000명 가량의 경장보병은 본대의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도합 6,450의 군사와 110문의 대포였다. 진형을 놓 고 본다면 8군단의 진형은 알레미지우스 회전 때와 거의 똑같았고 바뀐 것이 있다면 중장기병과 경장기병의 위치뿐이었다.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대 는 알레미지우스 평원에서 서 브라도에게 워낙 강력한 공격을 당해서 그 숫자가 심하게 줄어들어 있었고 그 숫자로는 상대편의 2,000이나 되는 중장 기병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보았기에 휘리는 그것을 반대편, 그러니까 1,500기의 경장기병의 상대로 놓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편의 경장기병은 세 배나 되는 숫자였다. 그리고 우익의 중장기병 쪽도 2,000 대 900으로 8군단의 숫자가 적었다. 메르데린 공작의 왼편에 서 있던 최고사령관 클루 멕 켄지 경은 씁쓸하게 말했다.

“노이에스 장군은 응원군을 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있는 걸까요? 하지만 저 상황은..

“모든 면에서 열세로군.”

메르데린 공작은 맥빠진 어조로 말하곤 망원경을 들어올렸다.

8군단의 본영을 살펴보던 그는 곧 초록빛 갑옷을 찾았다. 휘리 노이에스는 다른 참모들과 함께 말에 올라 있었고 그 자세는 꼿꼿했다. 숫자로 나타 나는 불리한 점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듯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반대쪽을 살펴본 공작은 역시나 엄정한 기세로 서 있는 바스톨 장군을 발견 했다. 그 역시 숫자로 나타나는 유리함에 큰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장수를 번갈아 쳐다본 프란체스코 메르데린은 갑작스레 깨달은 사실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저런 사내를 수하로 두며 저런 사내와 싸운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런 고풍스러운 장엄함을 사병들에게까지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 사병들은 역사에 있어 이 전쟁의 의미라든지 이 전투의 승패가 이 전쟁에 참여하는 군웅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었다. (그들 중 몇몇은 승패에조차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아래 의 들판에서는 양군의 입심 좋은 병사들이 가장 병졸다운 함성을 지르며 전의를 북돋고 있었다. 먼저 시작한 것은 사트로니아 측이었다.

“흑사자! 흑사자! 사트로니아의 흑사자!”

이 함성에 응답이라도 하듯 8군단 쪽에선 야비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늙은 개! 늙은 개! 왕관 대신 목줄을 선택한 늙은 개!”

바스톨 엔도 장군은 그냥 웃었다. 하지만 사트로니아의 더블원 센츄리온인 크로즐릭 백부장은 필요에 따라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 서 자신의 집에서 자녀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라면 삼갔을 말을 서슴없이 꺼내놓았다. 더군다나 원래 그런 말은 장교보다는 백부장급이 사용할 말이 기도 했다.

“방종한 어미의 자식, 닥쳐라! 아비 이름에 먹칠할 염려는 없겠구나, 누군지도 모르니!”

8군단 쪽에서 끔찍한 욕설들이 터져나온 것은 당연했다. 그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악마와 교접하여 낳은 자식이라는 말까지 붙어다 니는 휘리 노이에스의 내력을 비난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웃음을 떠올렸던 바스톨 장군과는 달리 휘리 노이에스는 좀 강렬한 대답을 보내 주기로 결정했다.

“저 뒈지다 만 녀석을 완전히 묻어줘야겠군. 대포, 발사!”

다벨군의 포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볼지악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전투 초반의 포격은 맹렬하기 짝이 없었고, 동시에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8군단의 포문이 상대편의 본대를 향해 일제히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사트로니아 포병들이 응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전장을 가로지르는 포탄은 모두 태양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뿐이었다. 응사하지 않는 적을 보며 8군단 포병들은 적을 조롱하며 더욱 기세 좋게 포격을 가했지만 휘리 노이에 스는 심장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며칠 전부터 같은 위치에 포진하고 있던 사트로니아군은 철저하게 참호를 파둔 상태였다. 따라서 8군단의 대포들은 참호 속에 숨어 있는 사트로니 아군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참호 속으로 잘못 들어가는 포탄을 제외한다면 사트로니아군은 완전히 안전한 상태였다. 그리고 대포라는 것은 병사 와 달리 강력하지만 극히 짧은 시간밖에 사용할 수 없는 전력이다. 그것을 헛되이 낭비시킨 휘리는 어금니를 깨물며 포격의 방향을 바꾸도록 지시했 다. 8군단의 대포는 이제 사트로니아군의 좌익에 위치한 중장기병을 향해 포구를 선회시켰다. 그 순간 바스톨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다.

“3중대, 돌격!”

돌격 신호와 함께 사트로니아의 중장기병이 뛰쳐나갔다. 그들의 정면에 있던 서 켈커의 눈이 사납게 빛난 것은 잠시, 서 켈커는 곧 어이없다는 얼굴 이 되었다. 사트로니아의 중장기병은 정면으로 달려오는 대신 전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그리고 8군단의 포병들은 의외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은 거의 대포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민첩하게 움직였고 그들이 도착 한 곳에는 8군단의 좌익, 즉 서 기리우가 이끄는 8군단의 경장기병이 있었다.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메르데린 공작은 단말마를 내질렀다.

바스톨 장군은 과감한 부대 전진을 통해 8군단의 왼쪽 급소에 강력한 일격을 선사했다. 결과적으로 8군단의 왼쪽에서 2,000대 550의 싸움이 벌어 진 것이다. 8군단의 좌익은 누가 보아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휘리는 왼쪽을 흘끔 쳐다보며 이렇게 외쳤을 뿐이다.

“공작과 나의 승리를 너희에게 맡긴다!”

휘리는 서 기리우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 브라도를 믿고 있었다.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들은 최강의 록소나 중장기병들을 거느린 서 브라도와 몇 번이나 싸워봤던 부대였다. 그 훌륭한 교사에게 단련받은 8군단의 경장기병들은 흔히들 ‘대가 세고 입은 무거우며 손은 번개 같다’고 말하는 진짜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휘리 노이에스의 짧은 손짓으로 충분했다. 서 기리우는 침착하게 부대를 왼편으로 비켜주었다. 마치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로 하여금 본대의 배후 를 칠 기회를 일부러 주는 듯했다. 그러나 서 기리우가 만들어준 빈틈을 통해 8군단의 배후로 뛰어든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은 황당한 광경을 목격 했다.

서 소팔라는 검을 높이 들어 땅에 꽂고는 두 손을 입 앞으로 모았다. 그의 입에서 야수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아우우우 !”

그와 동시에 노예병들 역시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아우우우우 !” 늑대와 같은 포효를 내지른 서 소팔라와 노예병들은 기가 막힌 시선으로 그들 을 바라보는 사트로니아 중장기병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달려들면서 노예병들은 등뒤로부터 이상한 물건을 꺼내었다.

노예병들이 꺼내 든 것은 투망이었다. 노예병들은 날렵하게 움직이며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에게 투망을 던졌다. 야만인들의 수법이었다. 그물에 갇힌 중장기병들은 허우적거리다 낙마했고 그들 중 어떤 말은 네 다리가 모두 그물에 묶인 채 넘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중장기병들의 몸 위로 노예병들의 무기가 쏟아져내렸다. 노예병들이 사용하는 무기들 중 큰낫이나 대형 쇠스랑, 도끼 등은 더 가공할 필요도 없이 대기병 병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노예병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그 농기구들을 이용하여 마상의 기사를 낚아채거나 말의 다리를 공격하여 쓰러뜨렸다. 사트로 니아 중장기병들은 격노하여 투망을 찢고 노예병들을 짓밟았지만 돌격 속도가 줄어드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옆으로 비켜났던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대가 멈춰 선 중장기병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얼굴에도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지했어!”

요새 위쪽에서 메르데린 공작은 환호를 질렀다.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과 서 소팔라의 노예병들은 자칫 8군단의 배후를 유린할 뻔했던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을 효율적으로 막아내어 그들을 전장의 남쪽에 묶어두고 있었다. 다벨 총사령관 클루 경은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말했다.

“중장기병을 묶은 솜씨는 훌륭하군요. 바스톨 장군은 왼쪽의 약점을 찔러 8군단을 배후 공격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물론 그랬겠지. 그리고 그건 이제 실패한 전략…..”

“아닙니다. 아직 실패하진 않았습니다.”

“뭐?”

바스톨 장군은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인지라 솔직한 감상을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남쪽에 묶여버린 중장기병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새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클루 경과 마찬가지로 바스톨 장군 역시 그 중장기병들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의 입에서 빠른 명령들이 쏟아져나왔다.

그의 명령에 따라 좌익 후방에 있던 300명의 궁수대가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중장기병이 빠져나간 그들의 앞쪽은 훤히 트여 있었고 그래서 궁수대 는 저 앞쪽에 보이는 8군단의 중장기병들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하자 중장기병대의 서 켈커는 곧장 휘하 부대를 돌격시켰 다.

“돌격 앞으로!”

서 켈커는 단순히 화살 공격에 화가 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궁수대의 앞쪽을 막고 있던 중장기병대가 저 남쪽으로 달려간 지금 사트로니아 궁수 대는 무방비 상태였다. 따라서 서 켈커는 자신의 중장기병으로 그들을 짓밟고 그대로 우익에서부터 사트로니아 본대를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각, 바스톨 장군 역시 복잡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궁수대의 지척까지 도달한 서 켈커는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사트로니아의 경장기병대를 보며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들은 사트로니아군의 우익에 있던 부대였다. 우익에 있던 부대가 사트로니아 본대의 배후를 돌아 갑자기 좌익 쪽에, 즉 조금 전 중장기병이 빠져 나간 위치에 궁수대를 엄호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무장이 약한 경장기병대라고 하지만 그 숫자는 1,500기로 900기의 다벨 중장기병대의 1.5 배가 넘는 숫자였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숫자였고 그것은 첫 격돌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났다. 서 켈커는 자신의 부대가 주춤하는 것을 보고 당 황해야 했다. 바스톨 장군 역시 적의 중장기병대를 전장의 북쪽에서 묶어버렸던 것이다. 그 순간 휘리의 명령과 바스톨 장군의 명령이 거의 동시에 터져나왔다.

“본대, 돌격!”

“궁수대와 포병대! 중앙을 공격한다!”

사트로니아군의 우익에 있던 포병대는 아무런 방해물이 없기에 거의 직사로 쏠 수 있었다. 그리고 좌익에 있던 궁수대는 아군의 경장기병과 적군의 중장기병이 어우러지는 전장의 머리 너머로 8군단의 본대 쪽에 사격을 가했다. 휘리의 빠른 판단으로 미리 돌격하고 있었던 8군단의 본대였지만 그 래도 직사로 날아오는 포탄들은 그들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포탄과 화살의 폭풍을 돌파한 그들 앞에는 사트로니아군 본대가 노도 같은 기세 로 돌격해 오고 있었다. 2,000명 가량의 8군단 중장기병들에 맞서 뛰쳐나온 것은 4,000명의 중장보병과 2,000명의 경장보병으로 도합 6,000의 군 세였다.

메르데린 공작은 몸을 돌렸다. 

“7군단, 출동.”

“안 됩니다, 로드!”

메르데린 공작은 살벌한 눈으로 클루 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서 클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공작의 재킷 주머니를 가리켜보였다. 그곳엔 휘리의 서 신이 들어 있었다.

“나더러 저들을 생매장시키란 말인가!”

서 클루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절대 7군단을 내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약 내보낸다면… 거기서 클루 경의 말은 잦아들었 지만 메르데린 공작은 그 뒷말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7군단을 출동시킨다면, 그것은 8군단이 사트로니아군에 치명상을 입힌 다음의 일이다. 그러 나 그때 8군단은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메르데린 공작은 턱을 부르르 떨며 다시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전장의 북쪽에선 서 켈커의 중장기병들이 그 두 배에 가까운 사트로니아의 경장기병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중앙 역시 마찬가지였다. 8군단의 중장 보병들은 역시 그 세 배인 사트로니아 본대와 싸우고 있었다. 남쪽의 상황은 조금 나았다. 서 소팔라의 노예병들과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들은 사트로 니아 중장기병들을 맞아 훌륭히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버틸지는 알 수 없었다. 투망을 다 던진 노예병들은 중장기병들의 창칼에 찔 려 쓰러지고 있었고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들 역시 워낙 숫자가 적어 상대를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메르데린 공작은 그제서야 바스톨 장 군의 전략이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사트로니아군은 이미 전선 전체에서 상대를 압도하고 있었지만 만약 남쪽의 중장기병대가 풀려나는 상황이 되면 전선의 앞뒤에서 8군단을 포위하 는 형국으로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철갑으로 온몸을 두른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에게 노예병들과 경장기병들은 단순히 귀찮은 상대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였고 그 두 부대가 물러나게 된다면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8군단의 중장보병들을 배후 공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메르데린 공작은 흉벽을 움켜쥔 채 목이 벌겋게 되도록 외쳤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구할 수 없다! 그가 어떻게 말했든 상관없어. 지금 출동해야 돼! 그렇잖으면 본대가 포위된다!”

메르데린 공작 또한 무인이었고 전황을 읽을 줄은 알았다. 그래서 클루 경은 짧게 말했다.

“노이에스 장군에겐 아직 창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메르데린 공작은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황급하게 망원경을 들어올린 공작은 전선을 훑었다. 오래 찾을 필요도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 후 지금까 지도 움직이지 않은 병력이 있었다.


중장보병들의 뒤쪽에서 노예병들과 나란히 서 있던 경장보병들은 최초 배치 장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서 소사라는 팔짱을 단단 히낀 채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오른손이 쉴새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그가 침착을 가장하고 있음은 누구에게 도 분명했다. 가만히 서 있는다는 단순한 자세가 그 젊은 장군에겐 거의 고문에 가깝게 작용하는 듯했다.

그때 서 기리우의 경장기병들과 서 소팔라의 노예병들이 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두 부대의 성가신 공격에서 벗어난 사트로 니아 중장기병들은 그 상황에서도 침착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서 기리우의 부대나 서 소팔라의 부대를 뒤쫓는 대신 그대로 반전하여 중앙에 있던 8 군단의 중장보병들의 배후를 겨냥했다.

바스톨 엔도 장군의 포위 작전이 드디어 성공한 듯이 보인 순간,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나는 부대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던 서 소사라의 부대였다. 사트로니아 중장기병들을 지휘하고 있던 빌포 중대장은 달려들면서 거칠게 외쳤다.

“비켜라!”

서 소사라는 상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투구 아래로 보이는 꽤나 공을 들인 것 같은 콧수염과 손질이 잘된 갑옷, 그리고 격에 맞지 않을 정도로 큰 칼고리를 순식간에 살펴본 서 소사라는 계급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나는 림파이어 가문의 서 소사라다. 천민 소굴 출신이라 귀족에게 말하는 예법을 모르는가?”

말로는 공화국 어쩌고 할 테지만 속으론 계급주의자(동시에 높은 가능성으로 성차별주의자)일 거라는 서 소사라의 인물평은 정확했고 그런 계급주의자가 진짜 귀족을 만났을 때 흔히 그러듯 빌포 중대장은 크게 분노하여 창을 내질렀다.

“하? 어디, 공화국 국민의 창을 받아봐!”

서 소사라는 씩 웃으며 비어 있는 왼손을 오른쪽 어깨로 끌어당겼다. 다음 순간 빌포 중대장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과 함께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서 소사라는 빌포에게 망토를 집어던졌던 것이다. 낙마의 충격은 끔찍했고 그래서 빌포는 몸에 감고 있는 망토를 벗기는커녕 제자리에 누운 채 끙끙거렸다. 그래서 빌포는 자신에게 내려쳐지는 서 소사라의 검은보지 못했다. 다음 순간 서 소사라의 망토는 그의 수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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