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81화
날이 밝았다.
황하에서 밀려오는 안개가 시야를 일 장 범위로 한정시켰다.
“살수들이 움직이기에는 좋은 조건이네요.”
여숙상은 아침 공기가 상쾌한지 한껏 숨을 들이켰다.
종리추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는 배를 빌려놨지만 은밀히 사용할 수는 없다. 황하에 띄워진 배 치고 개방의 눈을 벗어나는 배는 없다.
개방은 쥐 죽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다. 후개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흑봉광괴의 개방도들이니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설마 이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군요.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으니.”
“그 친구, 언제까지 데리고 다닐 참이지?”
정운은 엉뚱한 것을 물어왔다.
“왜요? 신경 쓰여요?”
“풋! 그런 살수 놈 하나에 신경 쓰일 것 같은가?”
“그럼 왜 묻죠?”
“질질 끄는 것은 집착이야. 아주 못된 집착이지. 설마 첫 사내라 못 잊는 것은 아니겠지?”
여숙상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놈… 못 믿을 놈이야. 치사한 놈! 비객을 이용 대상으로만 보고 있겠지. 호호, 네놈 마음대로는 안 될걸? 네놈은 구진법을 전수해 줄 수밖에 없어. 그 다음은….호호호!”
여숙상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음속 말과는 전혀 달랐다.
“그럴 수도 있죠. 어쨌든 첫 사내이니까. 당시는 고통스럽기만 했지만 지금은 즐길 수도 있지 않겠어요?”
“후후후!”
정운은 잘게 웃었다.
그에게는 오늘 일전이 중요했다.
한가하게 독기 풍기는 계집과 농담이나 주고받을 여유가 없었다. 살문 살수들을 몰살시키는 것도 중요했지만 천외천 고수들을 가급적이면 많이 죽게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어쩌면 후자가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살문이야 자신이 손댈 수 있지만 천외천 고수들은 명분상 손댈 수 없으니까.
“놈이 오는 대로 바로 알려줘. 좀 쉬어야겠어.”
여숙상은 지난밤 내내 뜨겁게 타올랐다. 끄고 또 꺼도 꺼지지 않는 불꽃과 같이 욕정을 불살랐다. 여자라면 얼마든지 만족시켜 줄 수 있다고 자신한 정운조차도 인상을 찡그릴 정도였다.
그러고도 어떻게 된 여자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다. 밤을 꼬박 새우고도 꿈조차 꾸지 않고 단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개운한 표정이다.
“오래 같이할 여자가 못 돼. 오늘만 지나면…”
정운은 처소를 향했다. 그런 그의 등 뒤에서 여숙상이 하얗게 웃었다.
종리추는 움직이지 않았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깊은 잠에 빠졌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살문 살수들은 경계 서는 사람 한 명 없이 모두 혼곤한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다.
안개 사이를 뚫고 햇볕이 스며들었다. 안개와 햇볕은 상극이다. 한쪽이 성하면 다른 한쪽은 물러설 수밖에 없다. 두 기세가 어우러져 다툼을 벌인 것도 잠시, 곧 안개가 물러가며 세상이 환하게 밝았다. 살문 살수들이 한 명 두 명 깨어났다.
그들에게 중원은 살얼음판이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중원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긴장은 팔부령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풀리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긴장을 풀고 편히 쉬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늘 긴장한다.
지난밤은 정말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푹 쉬었다.
살문 살수들은 잠에서 깨어났어도 일어나 앉지는 않았다. 누운 자리에서 몸을 뒤틀어보기도 하고 따스한 양광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기척을 흘리지는 않았다.
종리추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다.
종리추가 단잠을 푹 자도록… 질리도록 실컷 잔 후 몸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종리추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유구가 황하 물을 떠왔다. 그는 말로만 ‘주공’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종리추의 모든 수발을 들어주었다. 팔부령으로 돌아가면 어린도 있고, 벽리군도 있지만 밖에서는 오직 자신밖에 수발 들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날씨군.”
종리추는 결전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상쾌해 보였다.
퍼엉!
맑은 하늘에 폭죽이 터졌다.
붉은색도 있고 푸른색도 있고, 오색이 모두 가미된 아름다운 폭죽이다.
“멋있군. 오랜만에 보는 폭죽이야.”
“풋! 멋있기는 해도 우리가 모자도로 가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겠지. 그래도 멋있긴 하잖아? 기왕이면 밤에도 몇 발 쏘아 올릴 것이지.”
“싸우러 가는 것 맞아?”
종리추는 소고의 말에 빙그레 웃었다.
가지런하고 하얀 이빨이 햇살에 드러났다. 여인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사내도 아름답다. 소고는 종리추에게서 많은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배가 서서히 나아가 자도를 지나쳐 모도로 향했다. 모도 강변에는 백여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무인들이 기다리고 있다. 제일 앞에 서 있는 여인은 암중에서 살문을 뒤쫓던 여인… 여숙상이리라.
“왜, 왜들…?”
여숙상은 찰나 만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문 살수들이 강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천외천 고수들이 일제히 신형을 물렸다. 뒤로 빠진 사람들은 천외천 무인들뿐만이 아니다. 비객 무인들 중에서도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당황한 사람은 여숙상만이 아니다. 정운도 당황했다. 비객을 고스란히 남긴 채 천외천 무인들로만 치르려던 싸움이었는데 천외천 무인들이 싸울 생각을 하지 않다니. 이토록 이를 갈던 살수들을 눈앞에 두고.
하지만 여숙상과는 달리 정운은 곧 사태를 짐작해 냈다.
“그렇군. 서둘렀어. 사형이 소림 사룡이었다는 것을 깜빡했어. 너무 방심한 거야.”
정운은 툴툴 웃었다.
무림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무공을 배운 것은 단지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랬는데… 그렇다. 구진법을 통과하면서 야욕이 생겼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들. 소위 무림 최강 고수라는 선대 고수들을 단 일검에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후부터 무림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욕망이 생겼다.
욕심은 늘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한다.
“너무 서둘렀어, 너무…..”
정운은 천외천 고수들이 왜 물러섰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형은 천외천을 무림 세력으로 키울 생각이 전혀 없다. 천외천을 결성했을 때의 처음 뜻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한다. 암중에 숨어서 사마외도를 철저히 척결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사형은 무림을 제패할 생각 따위 전혀 없는 것이다.
그가 미워하는 것은 오로지 사마외도일 뿐이다.
개방에 손을 댄 것은 개방의 정보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 외에는 필요 없다. 사형은 천외천에 필요한 상대만 건드린다.
사형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오문주를 정리하러 떠난 것만은 알고 있는데, 그 후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으니.
“그랬어…..”
천외천에 정보를 주고 있는 사람은 흑봉광괴다. 야이간이라는 자도 있고, 하오문도 정보를 내놓고 있다. 쓸모없는 정보에 불과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정보는 흑봉광괴가 내놓은 정보인데, 흑봉광괴는 사형에 대한 정보는 내놓지 않았다. 벌써 사형과 이야기를 끝낸 게다. 사형은 천외천 명숙들을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방심을 유도해 낸 것이다. 철저하게 무능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이렇게 결정적일 때 뒤통수를 때렸다.
살문은 자신과 서른 명 가까운 비객들만으로 공격해야 한다.
천외천과 그들에 따라 움직인 비객들은 절대로 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게다. 자신들이 모두 죽는 순간까지.
이게 사형이 생각한 거다.
“후후! 사형이 이겼어.”
정운은 눈을 돌려 사형을 찾았다. 사형은 보이지 않는다. 굉장한 힘이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무림 명숙을 조종할 수 있다니.
그 힘의 원천은 올바른 사고에서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 바로 그렇다. 천객의 무공도 아니고, 엄청난 세력도 아니다. 사형은 올바른 사고를 했고, 자신은 사욕이 깃들었다. 무림 명숙이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처음부터 정해진 이치였다.
“됐어. 이것으로 사형이 이기고 내가 진 거야. 후후후! 오늘 죽을 사람은 바로 나군.”
스르릉….!
검을 뽑았다.
“어, 어떻게 하려고….!”
여숙상이 놀라서 물었다.
미련한 여인이다. 화산파를 움켜쥐겠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백일천하에 불과한 야망이었던 것을.
정운은 여숙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종리추를 향해 걸어갔다.
“나 정운이라고 하는 사람이지.”
스르릉…..!
종리추가 검을 뽑았다.
황금빛 노을이 은은하게 번져 나온다.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욕심나는 보검이다.
“그게 적룡검이라는 검인가?”
종리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검이군. 하하하! 아주 기분 좋아. 내가 이기면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살수를 죽이는 것이고, 지게 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검에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니 손해는 없군.”
“손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정운이 눈썹을 찡그렸다.
건방지게까지 들리는 종리추의 말투가 신경을 건드린 것 같다.
“후후, 넌 뛰어난 자야. 인정하지. 아니면 배짱만 두둑한 무식한 놈이거나.”
“…..”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싸우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해.”
정운의 검미가 또다시 꿈틀거렸다.
“후후, 도움이 되지. 그것도 아주 크게. 네가 이렇게 설치고 다니는 동안 난 팔부령에 가봤지. 거기도 살수 놈들이 있더군. 옛날 놈인데. 아마도 별호가 적지인살인가 그랬지?”
“뭣이?”
정운의 말에 놀람을 터뜨린 사람은 종리추가 아니라 모도에 발을 디딘 살문 살수들이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한 가닥 불안했던 예감이 적중했다. 모자도에서 팔부령에 있어야 할 정운을 보는 순간 더욱 강렬하게 작용하던 예감이다.
팔부령…. 그곳이야말로 완벽하게 안전한 곳이지 않은가. 비적 마의가 있고, 삼현옹의 기관진식이 있고. 재지가 번뜩이는 벽리군이 있다. 천객을 상대할 수는 없지만 적지인살의 무공도 뛰어나고, 어린의 무공도 날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정운의 말은….
“몇 놈 죽이고 계집년들은 잡아서 가둬놨는데… 모두 죽었더군. 어떤 놈인가 깨끗이 죽였어. 아마도 불쌍했던 모양이지.”
확실히 팔부령이 결딴났다.
“주공! 이놈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유구가 광기를 뿜어내며 나서는 것을 모진아가 잡아챘다.
“주공!”
유구의 비통한 외침이 모도를 쩌렁 울렸다.
암연족은 여자를 소지하고 있는 물건이나 다름없이 생각한다. 그런 유구가 정을 준 여자가 있다. 팔부령에 아이까지 데리고 있다. 팔부령이 결딴났다면 모두 죽었을 것이 아닌가.
유구는 정원지와 모지 생각에 종리추를 생각하지 못했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이 부모인 것을, 어린과 벽리군이 아내인 것을. 살문 살수 한 명이 죽어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흘리고 있을 피눈물이 얼마나 진한지를.
종리추는 담담했다.
팔부령 식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옅은 웃음까지 흘렸다.
하지만 그의 담담함이, 옅은 웃음이 마주 선 정운에게는 악마의 미소처럼 느껴졌다.
“무서운 놈이다. 심기가 흩어지지 않아.”
종리추는 세상 이치를 깨우친 고승이나 발할 수 있는 기도를 뿜어내고 있다.
“얕보면 안 돼. 절대!”
정운은 걸었다.
검을 뽑아 들고 종리추를 향해 걸었다.
천객이 된 다음 적이 공격해 오기 전에 먼저 검을 뽑기는 처음이다.
천외천 고수들이 물러나는 순간에 죽음을 직감하고 뽑은 검이지만, 그런 일이 없었다 해도 종리추와 겨루기 위해서는 공격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정운은 비로소 정군유와 양청이 종리추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들은 운이 없어 죽은 것이 아니다. 무공 대 무공으로 싸워서 진 것이다.
하양 진인이 종리추와 겨뤄 패배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믿지 않았다. 하양 진인이 어떤 사람인데 종리추 같은 자와 싸워 졌단 말인가.
이제는 믿지 않을 수 없다.
“종리추…. 일개 살수가 아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구진법을 통과했는데… 내 무공은 천공. 누구도 상대할 자가 없다 싶었는데…”
정운은 종리추 일 장 앞까지 다가선 다음 멈춰 섰다.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려 종리추의 가슴을 겨눴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종리추가 공격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선제 공격을 가할 수도 있지만 종리추가 자신과 엇비슷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면 필승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 낫다. 들어오는 자는 맹렬한 검도 지녔지만 그만큼 허점도 많이 노출된다.
“승부는 단 일검에 끝날 거야.”
종리추는 절룡검을 축 늘어뜨린 채 정운의 눈동자를 빨아들일 듯 응시했다.
천객이 싸웠던 싸움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종리추가 천객이고 정운이 살수인 듯하다. 무공이 아직 선보이지 않았지만 겉모습은 그렇다. 정운은 긴장하고 있고 종리추는 여유로워 보인다.
종리추가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정운은 종리추가 도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앞발을 움직였다. 검은 종리추의 가슴을 겨냥한 채.
“비명 소리가 들리는군.”
“……”
“많은 사람들의 비명 소리.”
종리추는 말을 하는 가운데도 걸음을 계속 떼어 놓았다. 어느새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 처음 그 자리로 돌아왔다. 종리추는 계속 돌았다.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무척이나.”
“풋! 겨우 그 소리…”
정운은 실소를 터뜨리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씨이익….!
종리추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아직도 계속 맴을 돌고 있는 것 같은 환각이 어른거리는데 노을빛으로 물든 적룡검은 목전으로 짓쳐들었다.
쒜에엑!
정운은 검을 쳐냈다.
초식도 없다. 경력도 없다. 마음이 일면 경력이 따라 일고, 마음을 쏟아내면 전신 경력이 물밀 듯이 폭발해 나간다.
정운은 틈을 봤다. 종리추가 무슨 초식을 펼치는지 알 필요는 없다.
검을 쳐오는 방향과 속도만 읽으면 된다. 추후의 변화도 읽을 필요가 없다. 검이 변화하기 전에 먼저 쳐버릴 테니까.
피유윳….!
종리추의 신형이 갑자기 방향을 꺾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래도 어림없다. 이미 목표를 정한 검은 상대가 어떤 신법을 펼치든 간에 순식간에 따라붙게 되어 있다.
파팟!!
정운은 종리추를 따라 두 걸음 치달렸다.
검은 여전히 종리추의 몸뚱이를 노렸다. 종리추의 신형이 한 바퀴 회전했다. 처음 허공으로 치솟을 때부터 비룡번신을 펼치기로 작정한 것 같다.
정운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천객의 감각적인 검 앞에서 비룡번신같이 몸을 크게 움직이는 신법을 펼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다. 검은 가슴을 노렸지만 아마도 등을 베게 될 것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 등에는 척추가 있고, 척추가 잘린 인간치고 살아있는 인간이 없으니까.
정운의 검이 꿈틀하는가 싶었는데 종리추의 허리를 가격했다.
까앙!
“엇!”
정운은 놀랐다.
이런 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검이 튕겨 나와서는 안 된다. 살을 베고 파고들어 척추를 갈라야 한다.
정운의 검은 강한 반탄력에 튕겨 나왔다. 살을 파고드는 대신 허공으로 쳐들려졌다. 야비한 놈이다. 놈은 옷 안에 갑옷과 같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것은 아닌데, 설혹 갑옷을 입었다 치더라도 자신의 검을 막아낼 수는 없는데, 그 정도는 베어버리고 들어갈 수 있는 힘을 실었는데.
쒜엑! 쉐에에엑….!
눈앞에서 별빛이 번쩍였다.
“뭐, 뭐야?!”
정운은 깜짝 놀랐다.
몸이 부르르 경련하는 것 같은데…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움직이고 있기는 하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보인다.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려가고 있다. 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운은 이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