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12화
슈레이는 허름한 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옥 내부는 밖의 정경과 그리 다를 바는 없었다. 바이칼은 왕궁에서 주는 봉급이 굉장히 짜다고 생각했다. 슈레이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 있는 아이들 두 명과 침상의 노인이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잘들 있었니? 로테, 버지?”
“으응!”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이들은 슈레이가 갑옷을 입고 오지 않은 것과 남자와 함께 온 것에 대해 매우 궁금해했다.
“오늘은 뭔가 다른 것 같구나 레이야, 손님도 한 분 있고…”
노인은 쿨럭거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기침을 할 때마다 괴로운 표정을 잠깐씩 보였지만 애써서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 그냥 누워계세요. 로테, 아주머니는 오늘 안 오셨니?”
“으응, 집안에 일이 있으시다고 오늘은 못 오신대.”
“마침 잘됐구나, 내가 오는 날이어서.”
바이칼의 표정은 그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을수록 일그러져 갔다. 원체 참을성이 없는 그였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일들은 바이칼의 성질을 한계점에 이르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바이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어이, 벌써 가게 미남?”
“너에겐 흥미 없어졌어. 제기랄, 어쩌다가 이런 여자에게 걸려들었지?”
바이칼은 투덜대며 밖으로 나갔다. 슈레이는 약간 자존심이 상한 듯 뒤따라 나가며 말했다.
“이봐,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한데, 그럼 이렇게 하지.”
바이칼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혹시나 하는 기대에서였다.
“이번에 열리는 검투기 대회에서 정식으로 날 이긴다면 네 뜻대로 뭐든지 하지. 어때?”
“갑자기 마음이 변했나? 흐흠… 고생하지 않아도 여자는 많이 얻을 수 있다구. 게다가 그 대회에 내가 출전하게 된다면 결과는 뻔하다구.”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에게도 잘된 일이고. 그럼 살펴가라.”
그 말을 끝으로 집안으로 들어간 슈레이를 계속 지켜본 바이칼은 속으로 굉장한 고민에 빠졌다. 슈레이를 포기하자니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대회에 나가봤자 결과는 뻔할 테고.
“으으… 모르겠다. 드래고니스에선 장로가 조언을 해줄 텐데. 그렇다고 지금 갈 수도 없고…”
바이칼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심하게 긁으며 다시 길을 걸어갔다.
“한숨 잔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지 뭐. 으휴…”
어두운 방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다섯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각자 뭔가를 마시고 피워가며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왕국의 후계자가 정해졌다는 게 무슨 날벼락이오! 이 왕국은 거의 우리 손안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다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일차적인 우리의 계획은 성공했으나 전혀 상상치 못했던 복병이 있었던 것 같소. 듣기로는 파르하가 왕비를 피신시켰다고 합디다.”
“하지만 다행이오. 아직까지 우리의 계획을 아는 사람이 없지 않소.”
“하지만 공주를 왕궁까지 호위해 왔다던 그 멍청이 말이오. 첩자에 의하면 타르자님까지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라이논에 파견했던 마병들까지 손쉽게 처리했다 합니다. 겉보기와 달리 무서운 실력을 가진 자일지도 모릅니다.”
“흐음… 그 녀석이 문제로군. 도대체 어디서, 왜, 무엇을 위해서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 거지?”
“태자도 우리의 계략에 말려들어서 지금까지도 딴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정말 기분이 나쁘군.”
“좋소, 이렇게 된 이상 타르자님에게 도움을 청합시다. 섣불리 우리가 움직였다간 발각될 우려가 있지 않겠소?”
“그럽시다. 그분이라면 그 빨간 머리 녀석을 충분히 없애고도 남으시겠죠.”
“자, 그럼 연락을 드립시다. 영주들.”
리오는 피곤에 지친 클루토가 잠자리에 일찍 들어가는 걸 본 후에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에 대해 정리를 해보았다.
`음… 왕국의 후계자 문제도 거의 정해졌을 테니 영주들도 쉽사리 움직이질 않겠지. 하지만 걱정되는 건 태자와 영주들의 배후 세력이야…’
라이논에서 일어난 마병들과의 전투. 숲에서 보았던 리자드 맨들. 여러 가지가 꼬이고 꼬인 듯했다.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 놓은 이상 이제는 영주들 쪽에서 행동을 먼저 하겠지. 하지만 기다리고 볼 문제는 아니야… 레나님이 성안에 있다고 해서 결코 안전한 건 아니니까.’
리오는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머리가 아파왔다.
`으휴… 더욱 어려운 건 배후 세력이야. 제국, 그리고 타르자 할망구…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지? 도저히 예상이 안되는군.’
옆방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도 컸고 문 닫는 소리도 시끄러웠다. 리오는 옆방 사람이 오늘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니 하고 잠시 딴생각을 해보았다.
`음, 그러고 보니 드래고니스의 장로님이 생각나는군. 그분이라면 무슨 조언이라도 해주실 텐데… 나 혼자선 너무나 한계가 많구나.’
리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길게 쉬어보고는 눈을 붙였다. 오랫만에 잠이나 자볼까 해서였다.
`열흘만인가… 자보는 게.’
레나를 만난 후부터 한숨도 자지 못한 리오였다. 그렇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피곤함이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끔씩 하품이나 한두 번 하는 정도였다.
`… 검투기 대회의 예선이 내일부터지 아마.’
불을 천천히 끄며 마지막으로 생각을 해보고 그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 고급 침대는 아니었지만 열흘을 자지 못한 사나이에겐 더없는 안식처였다.
검투기 대회는 말스 왕국의 추수감사절 행사 중 가장 인기가 있는 행사였다. 그만큼 상금도 많았으며 그것을 노리는 도전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 대회에 출전한 사람 치고 연속으로 우승을 한 사람은 한 사람뿐, 그 누구도 연속으로 우승을 따낸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출전자들의 수준도 높았고 잘 알려진 경기라는 증거이다. 대회는 여덟 개의 예선대회를 거친 사람이 본 대회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예선에 지원하는 사람만도 1200여 명 가까이 되었다. 본 대회에 나가는 것도 영광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리카와 클루토는 예선전에 출전하기 위해서 왕국 대 경기장으로 향하였다. 그들의 얼굴에선 아이들 같지 않은 비장함까지 보였다. 클루토는 리오가 그들에게 잘 가라고만 얘기하고 나오질 않자 안심이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리카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경기장 쪽으로 힘차게 걸어나갔고, 클루토는 어제 리오가 가르쳐주었던 수행 방법을 생각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갔나?”
리오는 창문을 열고 리카와 클루토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지켜본 후 여관 밖으로 급히 뛰어나간 후 뒷길을 사용하여 경기장으로 향했다. 바이칼은 늦잠을 잤는지 몇 분 후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경기장으로 뛰어갔다.
슐턴과 슈레이 등 다섯 호장들은 예선 출전명단에 리오의 이름이 보이자 담당 관리에게 부탁해 리오를 자신들과 예선에서 만나지 않게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자신들끼리 예선에서 만나지 않게도 부탁하였다. 관리는 처음엔 안 된다고 하였으나 그들의 협박과도 같은 부탁을 하는 바람에 결국은 허락해주고 말았다.
“…있구나, 그 남자. 후훗.”
갑자기 명단표를 보고 웃는 슈레이를 보고 또 다른 여장군인 슈는 슈레이의 이상한 행동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레이. 기쁜 일이라도 있어?”
“아니, 아니야. 오르만이 이번 대회에서 예선 탈락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설마… 오르만이 그러려고?”
슈레이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빙긋 웃었다. 슈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5일간의 예선 경기에서는 파란이 많이 발생하였다. 예상치도 못한 신인들의 등장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충격은 제 8예선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7호장인 오르만과 처음 보는 신인 바이칼 레비턴스의 대결에서 오르만의 예상치 못했던 간단한 패배는 슈레이를 제외한 다른 호장들을 긴장시켰다. 단 두 방에 경기장 밑으로 나가떨어진 오르만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기절해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심판관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승부는 정해진 것이라서 자신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지막 날 저녁, 리오는 클루토가 어떻게 된 일이냐며 계속 질문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상금에 눈이 어두웠다며 거짓말로 클루토의 입을 봉하였다. 리카는 리오의 말을 듣고 이렇게 제의하였다.
“그럼 꺽다리가 만약에 준우승이라도 한다면 상금을 몽땅 우리에게 주면 되잖아, 벌도 되고.”
클루토는 그럴 수는 없다는 듯 반대했으나 리카의 언변에 결국에는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리오도 자신의 죄값이라 말하며 상금을 몽땅 리카와 클루토에게 나눠주리라 맹세를 했다. 리카와 클루토도 본선에는 거의 기적적으로 진출한 터였지만 나머지 출전자들이 7호장이란 말을 듣고는 기권할까, 말까 하던 참이어서 과연 목표를 이룰 수나 있을까 고민하던 참에 공짜로 목표를 이룰 수 있어서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새벽닭이 울고 추수감사절의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