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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13화


레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드레스의 치마 끝을 살며시 잡고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아니 아바마마.”

영접실에서 왕에게 아침 인사를 하던 레나는 여전히 왕궁 말씨에 익숙해있질 않았다. 그래서 얼굴을 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대신들과 왕은 그럴 때마다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레나는 마음에 부담감만 더해갔다.

“괜찮단다 공주야. 아직 일주일도 안 되었잖느냐. 그렇게 쉽게 궁정 예법이 몸에 익는다면 이 세상에 귀족이 안 될 사람은 없을걸?”

“예… 아바마마.”

“자, 내 옆자리에 앉거라.”

레나는 조용히 왕의 옆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레나는 벌써 다섯 번째 앉는 것이지만 매번 앉을 때마다 가슴이 떨렸다.

“오늘은 짐과 공주 둘 다 바쁜 날이 될 것 같소, 그렇지 않소 카라한?”

“예, 그렇사옵니다 전하.”

68세의 노장 카라한은 페란드와 함께 왕을 보좌하던 중이었다. 말스 왕은 다른 호장들이 보이질 않자 페란드에게 그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지금 검투기 대회장에서 몸을 풀고 있사옵니다.”

“오오, 그들도 출전한단 말이오?”

“예, 이번 추수감사절은 공주님께서 처음으로 함께하시는 뜻깊은 대회라며 대회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특별히 참가한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그의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기쁘게 웃었다. 다른 신하들도 왕의 그런 웃음을 오랫만에 보는 터라 그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흘렀다.

“허허허. 그럼 이번 검투기 대회는 아주 재미있겠군. 아, 본선에 오른 출전자 명단을 가지고 있나? 궁금하군.”

페란드는 가지고 있던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읽어나갔다.

“예, 그런데 제 예상으론 출전한 호장들이 모조리 입선할 줄 알았으나 오르만이 그만 탈락하는 바람에 초반에 호장 간의 대전은 없을 것입니다.”

“오르만이 탈락을? 허허, 그동안 훈련을 게을리했나 보군. 그럼 다른 출전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예, 젊은이 두 명과 소년 소녀 한 명씩입니다. 직접 가셔서 보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전하.”

왕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관들은 왕이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 정도는 아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직접 가세나. 그리고 공주도 같이 가자꾸나.”

“예, 아바마마.”

레나는 그녀의 드레스 치마를 살며시 누르며 일어났다. 카라한과 페란드는 그녀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놀라운 기품에 언제나 놀라고 있었다. 처음 봤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그때도 물론 기품이 흐르긴 했지만.

“카라한은 왕궁 안에서 열리는 행사를 맡아주게나. 그리고 페란드는 밖을 맡아주고.”

두 노장은 무릎을 꿇고 왕에게 경례를 하였다.

“맡겨주셔서 영광이옵니다 전하.”

“자네들만 믿겠네. 자, 공주야 이만 가자꾸나.”

“예, 아바마마.”


“이봐, 멍청이 색골.”

리오는 대기실에 한발 먼저 와있는 바이칼을 보며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바이칼은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

“호오, 오랫만이군 빨간 얼간이.”

둘은 서로를 째려보았다. 그리고는 리오는 오른손을, 바이칼은 왼손을 서로를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는 마주 잡으며 동시에 말하였다.

“오랫만이다, 후훗.”

“30년 만인가? 이제 너 보는 것도 지겹구나.”

바이칼은 미리 꺼내 두었던 자신의 늘씬한 검을 준비해 두었던 칼집에 꽂아 넣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아직도 건재하군. 녹은 안 슬었냐?”

“훗, 디바이너완 다르니까 걱정 말라구.”

리오는 바이칼의 옆자리에 슬며시 앉았다.

“징그럽다, 너무 붙지마 임마.”

“훗… 입이 거친 건 여전하구나.”

“너도 마찬가지일 거 같은데?”

“그건 그렇고… 이번 대회엔 왜 나왔냐?”

리오는 등에 걸고 있던 자신의 검, 디바이너를 앞쪽으로 꺼내며 넌지시 물었다.

“음… 그냥. 그럼 넌 왜 나왔냐?”

“나도 그냥 나왔다. 후훗…”

이래저래 말장난을 하던 리오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실은 타르자 할망구가 살아있어서 말이야…”

바이칼의 그림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약간은 놀란 듯한 눈으로 리오를 바라보았다.

“그 못생긴 마법 할멈이 살아있다구?!”

“음, 그때 성과 함께 매몰된 줄 알았는데 살아있다고 하더군… 무슨 재주인지는 몰라도.”

바이칼은 또다시 사건에 휘말린 것 같아서 턱을 괴며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이번엔 휴가차 내려온 건데… 다시 올라가야 하겠군.”

그때 갈색 피부의 슈레이가 갑옷을 장비한 채로 대기실에 들어왔다.

“다시 올라가다니, 무슨 소리지?”

리오는 슈레이와 바이칼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아니, 아는 사이냐?”

“흐음…”

슈레이는 같이 있던 리오를 쳐다보았다. 그러고서는 팔짱을 끼면서 미소를 지었다.

“오호… 빨간 머리 기사시군, 이거 오랫만인데?”

“그렇군, 글래머 우먼.”

리오는 코웃음을 치며 건성으로 아는체를 했다. 슈레이는 `글래머’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글래머가 무슨 뜻이지?”

리오는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다른 세계에서 통용되는 말을 사용하다니…

“좋은 뜻이야. 여자에게는.”

바이칼은 속으로는 웃으면서 겉으로는 진지하게 말했다. 어차피 말해줘도 모를 테니까.

“그래요? 하지만 어감은 좋지 않군요.”

아마색의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여장군 슈가 이어서 들어왔다. 약간은 호리호리한 체형의 그녀는 귀만 길다면 엘프족과 구별이 거의 가질 않을 정도로 엘프족과 닮았다. 체형이나… 얼굴 생김새나.

“리오 스나이퍼. 당신과 1회전에서 대전하게 될 슈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군요.”

“흠… 그래요?”

리오는 악수를 청하는 듯 내밀어진 그녀의 가녀린 손을 보았다. 손바닥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투에 시달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리오는 살며시 악수에 응했다.

“… 어이, 아가씨.”

리오는 갑옷을 옷 위에 걸치고 두 개의 중형 나이프를 장비하고 있는 슈에게 말을 하였다. 슈는 칼집의 고정 끈을 묶으면서 리오 쪽으로 뒤돌아섰다.

“왜 그러죠?”

슈레이와는 다르게 약간은 여성적인 말투를 사용하는 슈는 장군이라는 것이 믿어지질 않을 정도로 군인의 티가 나질 않았다.

“아가씨 친구들 이외에 타인과 대전해 본 적이 있나?”

슈는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호장들과의 대전에서는 슈레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정도의 실력자였지만 그들 말고 강자와 대결하는 건 리오가 처음이었다. 예선전에서는 호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압도적인 대전을 보여줬지만 전에 리오와 슐턴이 대결하는 걸 본 터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리오의 질문을 받자 더욱 긴장이 되었다.

“무, 물론이죠.”

“흠… 그러면 상관없구. 일이나 보셔.”

리오는 그대로 긴 의자에 드러누웠다. 바이칼이 흉하다며 일어나라고 농담을 했지만 그대로 그는 잠에 골아떨어졌다. 사실은 그것이 리오만의 정신 집중 방법이었다. 바이칼은 그런 리오의 버릇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심한 방해는 놓지 않았다. 대신 슈에게 겁을 좀 주려고 짓궂은 생각을 떠올렸다.

“흠… 아가씨 조심해야겠어.”

바이칼의 진지한 목소리에 슈는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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