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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152화


이 세계에서 그랜드 크로스 나이트란 곧바로 줄여서 가즈 나이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랜드 크로스 나이트가 기사 중에선 나이트 마스터 이상의 최고위 직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모르고 있는 휀은 안심하고 있었고 그것을 알고 있는 일행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으음? 너희들 왜 그러니?”

네 명의 아이들은 휀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아하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리오를 구해올 정도면 당신도 꽤 강한 사람처럼 보이네요?”

당연한 이야기인 줄 알고 있는 리카였지만 그래도 예의상 묻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꺼낸 이야기였다. 휀은 씨익 웃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올시다 꼬마 아가씨. 하핫….”

휀은 웃으며 자신의 금발을 쓸어 넘겼다. 리카와 메이린은 휀의 얼굴이 갑자기 반짝인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자신들의 눈을 부벼 보았다.

“전 옆방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절 부르십시오. 리오 대신에 여러분들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자, 그럼.”

휀이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서자 그 방 안에 있는 모든 여자들은 그의 말에 감명을 받은 듯 눈을 반짝였고 히렌과 클루토는 인상을 쓰고 문을 바라보았다.

“쳇, 닭살이 돋는데….”

조금 후, 크리스와 세레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고 리오를 간호하는 두 여성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 뭘 봐요, 수녀 아가씨.”

“당신이야말로, 크리스 씨.”

둘이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리오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놀라운 회복력을 발휘하여 자폭 때 입은 내상을 치유하는 중이었다.

“크리스 씨는 간호하는 법을 아시는가 보군요. 여기에 계속 계시는 것 보니까….”

그녀가 알 턱이 없다는 걸 계산에 넣은 세레나의 말이었다. 크리스는 움찔했으나 물러서지 않고 대답했다.

“후후훗…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리오 씨를 노리고 들어온 제국군 병사 몇쯤은 문제없이 쓰러뜨릴 수 있다구요. 당신은 할 수 있나요?”

멋진 반격이었다. 하지만 세레나는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리오의 이마에 놓여있는 물수건을 다시 물에 적시기 시작했다.

“훗, 미안해요 크리스 씨. 제가 중요한 일을 놔두고 괜히 당신과 말싸움을 했군요. 사과드려요.”

크리스는 이를 부드득 갈며 결국엔 돌아 앉고 말았다. 그러나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으으윽…! 등골이 쑤시는데…?”

리오는 의식을 되찾은 듯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천정이 보이자 그는 나름대로 안심했고 상반신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그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크리스와 세레나가 각각 자리를 잡고 침대에 엎드려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리오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나 두 미녀를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에 나란히 눕혀두고 벗겨져 있던 상의를 입은 다음 방을 나섰다.

“어? 일어났네 꺽다리?”

리카는 부스스한 얼굴로 양치질을 하며 방에서 나온 리오를 맞아주었다.

“으음, 걱정 많이 했니 리카?”

리오의 기대와는 달리 리카는 고개를 저었고 양치 물을 컵에 뱉어내며 말했다.

“이젠 꺽다리 걱정하는 것도 지겨워.”

리오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리카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해 준 보람 없이 오뚝이처럼 곧바로 일어서잖아. 난 꺽다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서 준다는 걸 믿고 있어.”

리오는 리카의 그 말을 듣고서 싱긋 웃었다. 그리고 리카의 입 주위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거품이나 닦으세요 아가씨. 후훗….”

리카의 입 주위에 묻어있는 양치 거품을 닦아준 리오는 리카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아, 그건 그렇고 누가 날 데리고 여기까지 왔니? 크리스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은… 궁금한데?”

리카는 옆방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으음, 휀이라고 자신을 밝힌 미남이 꺽다릴 여기까지 데리고 왔어.”

‘휀’이라는 이름을 들은 리오는 흠칫 놀라며 리카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휀!? 설마 휀 라디언트!!?”

리카는 고개를 끄덕였고 리오는 약간 인상을 쓰며 휀의 방을 바라보았다.

“… 그 플레이보이로 소문난 녀석이 여기에 왜 온 거지…?”

리오도 물론 그와 한 번도 대면해 본 일이 없었지만 그에 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바이런, 그리고 휀은 물질계에서 활동하는 모든 신의 사자 중 제일의 공격력을 자랑하기 때문이었다.

“도와주러 왔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녀석인데… 만나보면 알겠지.”

리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휀의 방문을 두드렸다.

“어이, 휀 있나?”

잠시 후, 머리가 헝클어진 휀이 부스스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리오는 억지가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잘 잤나 휀?”

“… 리오인가? 잘 왔어, 들어와 봐.”

둘은 방 안에 마련된 의자에서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날 구해줬다고 들었는데… 우선 고맙다는 말부터 하지. 그런데 그분께서 왜 자네를 보내셨나?”

휀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쓸어 올리며 답했다.

“으음… 자네가 예전에 물리쳤던 고대 신 ‘부르크 레서’ 말이야, 그것은 이번 일의 전초전에 불과하다네.”

리오는 흠칫 놀라며 100년 전에 가스트란과의 마지막 전투를 잠깐 떠올랐다. 그때 부르크 레서의 힘을 얻은 가스트란의 파워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서 자신과 바이칼이 힘을 합쳐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전초전…?”

“자네도 알 거야, 지금의 신들에게 쫓겨난 고대 신들이 유배되어 있는 ‘시간의 저편’을 말이야. 무슨 수를 써서 그들을 다시 불러 내리려는지 몰라도, 가스트란이란 자가 부활하여 노리는 것이 그것이라는 건 확실해졌지. 그리고 가스트란은 이미 부활한 것 같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막으려고 했던 가스트란 황제의 부활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리오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휀은 계속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의 일당이 왜 고신들을 깨우려고 하는지와, 그들이 고신들을 깨우는 방법일세.”

리오는 한숨을 쉬며 마루바닥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상상 외로 사건의 규모가 광범위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리오는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 그렇다면 이제 질질 끌 염려는 없다 이거로군. 좋아, 나를 도와주겠나 휀?”

휀은 세면장으로 향하기 위해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훗, 도와주러 온 거니 안심하게. 일정은 나중에 짜도록 하지.”

휀이 세면장으로 들어가자, 리오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휀의 방을 나섰다. 방문을 닫은 리오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중얼거렸다.

“… 어디 한번 해보자 가스트란… 지옥조차도 구경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리오는 일행을 여관의 밖에 집합시켰다. 떠날 때가 온 것이었다. 모인 일행을 보는 리오의 눈은 자못 진지했다. 일행 역시 리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잘 와 주었습니다 여러분. 고통스러운 일도, 즐거웠던 일도 있었지요. 이제 전 제국의 수도로 갑니다. 이곳보다 훨씬 더 위험할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저와 휀만이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곳에 남으셔서 곧 이곳에 도착할 슈렌을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여러분을 각자의 고향으로 잘 바래다드릴 겁니다.”

리오의 말을 들은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반문은 하지 않았다. 제국의 수도에 자신들이 따라가서 리오에게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 제 말에 동의하셨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슈렌은 먼저….”

리오는 일행에게 간단히 목례를 한 후에 기다리고 있는 휀과 함께 길목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크리스와 세레나는 한숨을 쉬며 여관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아이들은 서로를 힘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 결국엔 도와주지 못했네 클루토.”

리카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클루토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는 투로 말했다. 메이린과 히렌은 할 말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 다들 뭐하는 거야 우두커니. 어서 들어가자구.”

리오는 도시를 빠져나가며 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처음 대면하는 서로였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것만 같았다.

“흐음… 자네까지 만났으니 이제 모르는 가즈 나이트는 두 명뿐이군. 자네는 그들을 만나 보았나?”

휀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고개를 저었다.

“으음… 땅의 가즈 나이트는 만나 보았지만 물은 만나보지 못하였네. 아, 그건 그렇고, 자네는 이 세계에 몇 번 와봤나?”

휀의 질문에 리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으음… 이번이 두 번째일걸?”

휀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나와 같군. 나도 실은 두 번째야. 정말 오래전이었지, 내가 두 번째로 맡은 임무였으니까 말이야. 그때 임무는 신에게 도전하려 했던 한 사악한 마도사를 쓰러뜨리는 것이었는데, 완벽히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었어. 나와 상관없었지만 나와 함께 행동했던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으로 끝나가지고 말이야… 정말 불쌍한 친구들이었지.”

“그랬군… 그럼 그 마도사는 어떻게 되었나?”

“그 녀석은 불사의 마법을 완성하여 자신의 몸에 걸어두었던 상태였어. 내 특기인 광황포를 일곱 번이나 직격으로 맞고 죽지 않았으니까 정말 어려운 상대였지. 결국 에너지를 다 소비해서 쓰러진 그 녀석을 초 중력계로 보내 버렸지.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거야. 아니, 없어야 하겠지.”

리오와 휀은 이윽고 수도의 거대한 기계 문이 보이는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그 문만 보아도 보통 사람은 그냥 질릴 것만 같았다.

“여기가 종착역이길 빌어야지… 자, 들어가 보세 휀.”

바로 그때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리오와 휀은 갈라지는 땅을 피하며 뒤로 물러섰고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이런! 너무 늦은 건가!?”

리오는 이를 악물었다. 제국의 수도가 점점 떠오르고 있는 그 장면은 그에게 너무나도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제길… 설마 이것이!?”

몇 분 되지 않아서, 제국의 수도는 공중으로 완전히 떠올랐고 그 아래에선 거대한 기계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메탈 재킷의 강화판이라 할 수 있는 메탈 아머였다. 그리고 붉은 빛 덩어리 하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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