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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1화


제 1장 떠돌이 기사

아침을 알리는 닭의 울음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아직은 하늘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물 시계는 지금이 아침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 거구의 사나이가 침대에서 몸을 꿈틀 거렸다. 어제저녁 친구들과 과음을 한 것 때문인지 옷을 갈아입지 않은 그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 일어나셔서 진지 잡수셔야죠.”

여자의 음성이 그 거구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는 싫은 표정과 좋은 표정의 중간과도 같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안 일어나실 거에요?”

그는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레나야, 곧 나가마!”

그가 옷을 갈아입고 부엌에 나가자, 한 남자 아이와 젊은 처녀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지?”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의 미소였다.

“우움, 아주 잘 잤구나 코나. 오늘은 이불에 실례 안 했니?”

“안했어요 아버지.”

코나라고 불려진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했다.

“코나가 이제 몇 살인데요 아버지. 이제 몇 일 후면 열 두 살 이에요.”

그녀는 그에게 빵과 스프를 가져다주며 말을 했다.

“훗, 그런가? 그럼 레나야. 넌 시집갈 때 되지 않았니?”

“어머? 아버지, 코나가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안 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사나이는 짖궂은 표정을 하며 말했다.

“오, 그래? 그때가 되면 넌 스물여섯인데?”

“괜찮아요 아버지. 자, 식기 전에 드세요.”

“응, 자 어서 먹자, 코나.”

코나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과 동시에 빵을 집어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거의 정오가 되자. 레나의 가족들은 벌목장과 학교로 제각기 떠났다. 레나는 이때가 되면 뒷 뜰에서 가족들이 먹을 채소를 가꾸거나 빨래를 하게 된다.

“자아, 나도 나가볼까?”

레나는 앞치마를 의자에 걸어놓고 허리 밑 까지 오는 긴 머리를 등 쪽으로 묶은 후 뒤의 채소 밭으로 나갔다.

“아∼아. 오늘은 냄새가….”

뜰에 나갈 때 언제나 싱싱한 냄새를 맡는 게 즐거웠던 레나는 채소가 아닌 냄새에 약간 미간을 지푸렸다.

“어…? 무슨 샐까? 음…마치 젊었을 적의 아버지의 냄새와……히익!!”

그녀는 좌우를 둘러보다가 놀라서 뒤로 넘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집의 벽 쪽에 이상한 “것”이 있었다.

“것”이라 표현 하기엔 좀 뭐 하나. 처음에 힐끗 보면 헝겁에 감싸여진 큰 덩어리와 같았다. 하지만 그 덩어리의 끝엔 두 개의 다리가 나 있었다. 사람의 다리였다.

“아, 아니 당신 누구세요? 어디 아프세요?”

레나는 그 사람에게 접근했다. 헝겁…아니 망토처럼 보이는 것을 살짝 만져 보았다. 젖어 있었다. 밤 이슬을 흠뻑 맞은 것 같았다.

“여보세요! 일어나 보세요!”

레나는 덜컥 겁이 났다. 부랑자나 취객이 자기 집 뒷뜰에서 죽었다는 스토리가 그녀의 머리 안에 맴돌고 있었다.

“……조용히 좀 할 수 없어요?”

망토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나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이 집 담이 좀 따뜻 하길래 여기서 잔 것뿐이에요. 보아하니 채소밭 같은데 난 상관 말고 열심히 일 하슈. 난 자다가 곧 떠날 테니까.”

그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처음 반나는 그녀에게 청산유수였다. 레나는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가 났다.

“아니, 여보세요. 사람에게 얘기를 하려면 얼굴을 보면서 해야지, 계속 망토로 가린 채 얘기해도 되는 거예요?”

“…….”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잔잔해서 일까. 그녀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봐요! 일어나 보라니까요!! “

“……제기랄.”

그 사람은 망토를 걷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레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아버지보다 훨씬 큰 사람 이었다. 옆으로 말고….

“자, 이제 됐죠? 난 이제 더 잘께요.”

그는 등에 커다란 검을 차고 있었다. 자기 동생보다 약간 작으리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섬찟 했다.

“…? 아, 놀랄 것 없어요. 제 전 재산일 뿐 이니까요. 얘기가 다 끝났다면 전 그만 가볼게요…. 응?”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본 그 사나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왜 그러세요?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레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레…레나? 레나 맞지!!”

그는 레나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 무슨 짓이에요!!”

그녀는 강하게 그의 팔을 뿌리치려 했으나, 허사였다. 정말 놀라운 힘이었다.

“이, 이것 놔요!”

그녀가 소리치자, 그도 놀란 듯, 어깨를 놓아 주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레나 맞죠!”

그녀는 흠칫 놀랐다. 그의 눈…군청색의 눈에서 발산되는 그 어떤 무엇이 그녀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그런데요…?”

“레…! ……아니야, 후훗. 그럴 리가 없어. 하하하하핫….”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갑자기 허공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붉은 장발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남의 집 뒷뜰에서 잔 제 잘못 입니다. 그럼….”

그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길가로 나가려 했다. 레나는 얼핏 그의 눈을 보았다.

“아…! 잠깐만요!”

“…?”

“저… 아무것도 못 드셨죠? 들어와서 드시고 가실래요?”

“예…?!”

레나는 약간 긴장이 되었다. 집 안에 외간 남자를 앉혀 놓긴 이번이 처음 이었다. 그는 레나가 가져온 빵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꽤 예의가 있었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요?”

“예, 안 될 건 없잖아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입안의 빵을 마저 삼킨 뒤 말을 이었다.

“리오… 리오라고 합니다.”

“흠?, 딱 리오 두 글자에요?”

“후훗…”

리오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에요. 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먹은 빵은 단 3개. 동생 코나보다 하나를 덜 먹었을 정도이다.

“아니, 고작 세 개 밖에 안 드셨잖아요.”

“됐습니다, 원래 적게 먹는 타입이라서요. 그 정도면 괜찮아요.”

“…진짜요?”

그녀는 약간 의심스러웠다. 아버지 보다 키가 더 큰 젊은이가 열두 살의 아이보다 덜 먹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흠…그러면, 일이라도 해드려요?”

“예? 일은 무슨….”

“훗, 이래 뵈도 기사랍니다. 떠돌이이긴 하지만.”

“흐음…그러면….”

레니는 문득 뒷뜰에 있는 나무가 집에 햇빛을 잘 못 들어오게 한다는 걸 생각해냈다.

“뒷뜰에 있는 나무 좀 베어 주실래요? 한 두 세 그루 정도….”

“그거면 돼요?”

“예?”

“더 어려운 거…. 예를 들어 괴물 퇴치나 용의 제보 가져오기 등등….”

“호호, 그런 건 취미 없어요.”

리오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나서 뒷 머리만 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묶어 올렸다. 얼굴이 거의 확실하게 보였다. 붉은 눈썹에 그런대로 괜찮게 생긴 얼굴 이었다. 묶어 올린 머리 체는 날카로운 용의 등 지느러미를 연상시켰다. 머리결은 꽤 거칠었다.

“저…도끼 드려요?”

“훗, 이거면 돼요.”

그는 그의 등허리에 가로로 차고 있는 커다란 검을 들어 보였다. 보라색의… 흔히 볼 수 없는 디자인의 검 이었다. 중앙 부위는 검은색 이었고, 손잡이 쪽으로 내려갈수록 검은색은 짙었다.

“훌륭한 검이네요.”

“응? 이거요? …고물 칼은 아니에요. 자, 나가죠.”

둘은 다시 뒷뜰로 나갔다. 스무 발자국 거리에 아름드리 나무 세 그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활엽수였기 때문에 과연 햇빛이 안 들어올만 했다.

“이거 말이죠?”

“예. 저 쪽의 세 그루만 잘라주시면 돼요.”

“너무 쉬운데…”

“무슨 소리세요. 저희 아버지도 저걸 자르시려다가 이틀 만에 포기하셨어요. 그것도 보통 도끼가 아닌 전투용 대형 도끼를 쓰셨는데 말이죠.”

리오는 그 말을 듣고 나무 쪽으로 갔다. 나무의 밑둥 부위엔 약간의 흠집이 있었을 뿐이었다. 리오는 천천히 그 나무를 위아래로 보면서 중얼댔다.

“…철목인데요. 이런 나무가 여기서도 자생할 줄이야…”

레나는 자신이나 아버지도 모르고 있는 것을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알자 신기한 듯 되물었다.

철목이요?”

“예. 이 나무는 묘목일 때 겨우 자를 수 있어요. 왜냐하면 땅에서 흡수하는 물질 중 철분을 이 나무만 특이하게 겉 껍질로 보내기 때문이죠.”

“그럼… 자를 수 없나요?”

“아니요. 자 잠시 뒤로 비켜 주세요. 충격파에 옷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예? 충격파요?”

리오는 자신의 검을 세로 일직선으로 눕혔다. 그리고 잠시 몸을 경직 시켰다.

“타아아아앗!!”

그가 검을 휘두르는 동작과 함께 하늘을 찢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레나는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아니, 쓰러졌다는 것이 더 어울렸다. 그녀가 살며시 눈을 뜨자 검을 뒤로 기울이고 있는 리오와 잘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철목이 서서히 땅으로 쓰러져 가고 있었다.

“굉장해… 정말 대단하시네요!”

리오는 검을 다시 칼집에 넣으며 미소만 지었다.

“…자, 전 이만 가겠습니다.”

“가시려고요?”

“예, 여기에 더 이상 있으면 제가 견디지 못할 겁니다. 왜인지는 묻지 말아줘요 기분이 좋지 않아지니까요.”

레나는 아까 전에 리오의 눈에 비쳤던 그 눈빛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오래전에…. 자신도 잊고 있었던, 자신도 보았던 눈빛이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숨을 거뒀을 때 그녀의 아버지에게 보았던 눈빛이었다.

“인연이 있으면 만나게 될지도… 훗,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리오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레나는 잠시 동안 그가 간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있다가면 안 되나…?”

그렇게 말한 레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이 올 때가 되어서 였다.

“누나!, 나 왔어!”

코나는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반겨주는 예쁜 누나의 모습…이 오늘은 어딘가 좀 침울했다. 코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 누나 왜 그래?, 어디 아퍼?”

“응, 아니 괜찮아. 어머, 너 또 흙 바닥에서 뒹굴었니? 옷이 이게 뭐니…”

코나의 옷은 그녀의 말처럼 흙으로 알맞게 버무려져 있었다. 오늘은 더 심한 것 같았다.

“치, 그럴 수도 있지 뭐. 아, 누나. 오다가 어떤 떠돌이하고 그루드가 거리에서 붙기 직전인 걸 봤어. 그런데, 누나가 그런데는 끼지 말라고 해서 그냥 오긴 했지만 그 떠돌이 형은 정말 당당했어. 그 욕심쟁이의 부하 서너 명이 둘러싸고 있는데도 눈빛 하나 바뀌지 않더라구.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레나는 떠돌이란 말에 눈이 번쩍 띄었다.

“예, 혹시 그 사람. 빨간 장발에 망토를 두르지 않았니?”

“어…?, 누나가 어떻게 알지?”

“그게 언제쯤 이니?, 응?”

“오늘따라 이상하네 누나. 별로 안됐어, 오다가 잠깐 봤으니까. 시장에서 그랬지 아마?”

“시장?”

코나의 말대로 싸움이 발어지기 직전인 시장엔 사람이 들끓었다. 모두들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리오는 팔짱을 낀 채 말 위에 올라서 있는 그루드에게 말했다.

“나에게 볼 일이라도 있는 건가.”

구경꾼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그루드가 시장에서 벌이는 횡포는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었으나. 오늘만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단순했다. 그루드의 부하 중 한 명이 한 아주머니의 바구니를 빼앗아 횡포를 부리자, 리오가 그만 두라고 한 것이었다.

“볼일?, 이 녀석이 건방지게… 내가 누군지 아느냐!”

커다란 흑색 말을 타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루드는 자신이 이 시장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리오를 노려보고 있었다.

“흠, 알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이 녀석이!, 간이 부었구나!!”

그루드 옆에 서있던 부하인 듯한 사나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간이 부으면 사람이 어떻게 사나.”

리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루드와 그의 졸개들의 신경을 점점 자극하고 있었다. 구경하던 아주머니들은 이번만큼은 피를 볼 것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네 녀석, 지금 네 상황이 어떤지 알고 하는 소리냐? 일대 육 이다. 설마 장님은 아니겠지?”

“…….”

“왜, 드디어 너의 실수를 알겠냐?. 빨간 머리 씨. 하하하하!!”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지!!”

졸개 중 하나가 주먹으로 리오의 배를 가격했다. 사람들은 눈을 가리기 시작했다.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우우우욱…!!”

쓰러진 사람은 리오가 아닌 졸개였다. 그는 오른손을 붙잡은 채로 흙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타루, 왜 그래!!”

또 한 명의 졸개가 동료에게 다가갔다. 타루란 사나이의 손목이 굽어져 있었다. 위로…….

“저, 저 녀석 갑옷이라도 입고 있나 봐!, 아아악!!!”

다른 세 명의 졸개가 리오를 둘러싸며 단도를 빼 들었다.

“…너희들. 오늘은 날 안 건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뭐라고!”

“타루를 저렇게 해놓고 무사하기를 바라느냐!!”

“용서 못 해!!”

그루드의 부하들은 반은 질린 표정으로 리오에게 각자 소리쳤다.

“……후우∼.”

리오는 웃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검을 칼집 체 땅에 꽂아 놓았다. 그 검을 본 부하들은 움찔했다.

“걱정 마라. 너희들은 벨 가치도 없으니까.”

리오가 손을 꺽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졸개들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와봐.”

리오가 말을 마치자마자 한 명이 리오의 옆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히아아아앗!!”

그러나 그가 단도를 쥔 손을 뻗을 새도 없이 리오의 오른손이 졸개의 광대뼈를 밀어 내었다. 또 한 명이 뒤에서 달려들었다. 동시에 리오의 왼발 돌려차기가 또 한 명의 목을 차 내렸다. 마지막 한 사람은 동료의 몸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더 없나.”

그루드는 겁에 질린 나머지 검을 뽑기에 이르렀다. 롱 소드였다.

“호오… 기사에게 검을 뽑다니. 이거 잘 된 일이군.”

“뭐, 뭐라고! 네가 기사라고!!”

그루드는 속으로 깊이 후회를 했다. 그가 만약 진짜 기사라면 그루드는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기사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만약 누구 하나가 죽는다 해도 그 책임은 묻지 않는다는 왕국의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오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햇빛이 검에 반사되어 자색의 빛으로 바뀌었다. 검의 가운데에 위치한 검은색의 줄이 그루드의 공포를 점점 고조시켰다.

“으…으윽!!”

“말에서 내려라.”

리오는 검을 어깨에 받혀 놓았다. 그리고는 살짝 살짝 어깨를 두드렸다. 구경꾼들은 신이 났다. 거의 매일같이 그루드의 횡포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항상 거만하고 난폭했던 그루드가 한 떠돌이 기사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광경은 그들에겐 최고의 구경거리였다.

“내리라니까.”

그루드는 생각했다. 이 위기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단 한 가지. 리오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 – 기사의 패배 시인 뿐이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졸개들은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도주했는지 찾을 수 없었다.

“으으윽!!”

그루드는 말에서 내렸다.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는 칼을 버리고 리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사로서 패배를 인정한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루드의 고통이 그들에겐 기쁨인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내 부탁을 들어줘야지?”

“으윽…”

“오늘부터 집에 가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마라. 그러면 다시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겠지. 이 말은 이 왕국의 나이트 마스터이자 위대하신 왕 말스 3세의 이름으로 법에 따라 기억될 것이다. 자 꺼져라.”

리오는 검을 집어넣고 돌아서서 시장을 나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집 안에서, 밖에서 그루드를 물리친 무명의 기사에게 박수를 보냈다.

“대단하시네요 리오님?”

리오의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리오는 그 쪽을 바라보았다. 하안 피부에, 허리 아래까지 내려온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머리를 가진 반듯한 이목구비의 여인이 그를 향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레나씨…?”

그러나 리오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시장을 나서기 시작했다.

“리, 리오님…?!”

레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코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나가 이런 적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리오는 멈춰 서서 레나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했다.

“당신과의 일은 끝난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신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아는 체하지 말아줘요.”

리오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레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감각으로 마음이 아파왔다.

“누나… 울어?”

레나는 자신의 볼에 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자기 자신도 왜 눈물을 흘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우, 울긴. 자 그만 돌아가자 코나.”

사람들은 갑자기 벌어진 이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슴을 치며 한탄하는 청년들도 여럿 있었지만. 레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오늘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하늘이 어두워질 무렵, 레나의 아버지는 뒷뜰에서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놀라움과 기쁨이 반 반 섞인 목소리 였다.

“아니, 레나야!! 이 철목이 어떻게 잘린 거냐! 세상에 이런 일이!!!”

밤이 되었다. 레나는 자신의 방에서 창문을 열고 별을 보았다. 기운이 없는 표정 이었다. 한순간 스쳐 지나간 사람일 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창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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