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15화
파아악–!!
리오는 촌장의 집 옆에 자라고 있는 나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맞은 나무의 껍질은 리오의 주먹 모양으로 움푹 들어가 버렸고 리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젠장…!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내뱉은 후, 그는 집 벽에 웅크리고 기대어 눈을 감았다. 흥분을 했을 때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면을 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오의 화는 잘 풀리지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이유였다. 그렇게 눈을 감은 지 얼마 안 되어, 리오는 촌장의 집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누군가가 모포를 들고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리오는 벌떡 일어서며 그, 아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린스 공주님…? 왜 나오셨어요, 피곤하실 텐데….”
리오는 다시 몸을 웅크렸고 린스는 머뭇거리다가 가지고 나온 모포를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꺽다리도 추울 거 아니야. 이거라도 덮고 자….”
리오는 잠시 멍하니 린스를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후훗,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이거 황공한데요?”
리오가 공손히 모포를 받아들자, 린스는 멋쩍은 듯 자신의 긴 머리를 긁어 보였다. 그녀가 계속 그러고 있자 리오는 손으로 촌장 집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추울 정도면 공주님도 추울 것 같은데요? 어서 들어가세요.”
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고 집의 불이 다 꺼진 것을 확인한 리오는 모포를 덮고 눈을 감았다. 잠을 안 잔 지 3일이 넘었기 때문에 그의 인내심도 한계점에 이르러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리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믿지 않으면 믿게 만들어야지… 음, 이러니 무슨 선교사 같잖아? 젠장….”
멀어져 가는 그의 의식처럼, 개척촌 프로텍스의 밤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다음 날 아침, 이슬을 잔뜩 맞아 흠뻑 젖어버린 리오는 밤동안 허리를 굽힌 채 잠을 자서 그런지 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일어서서 허리를 풀어주었다. 허리 관절에서 나는 우두둑 우두둑 소리는 꽤 커서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잠시간 모으기엔 충분할 정도였다.
“꽤 젖으셨군요 스나이퍼 씨.”
리듬감이 전혀 없는 말투, 목소리는 같았지만 케이는 아니었다. 리오는 자신의 머리칼을 풀며 목소리가 들려온 문 앞을 돌아보았다. 레이가 큰 수건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오가 자신을 바라보자 레이는 들고 있던 수건을 리오에게 건네주었고 리오는 윙크를 해 보이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고마워요 레이 양. 잠은 잘 잤어요?”
레이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예, 며칠간 노숙을 해서 그런지 괜찮았습니다. 케이 언니가 저보다 건강한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리오는 수건 안에서 씁쓸히 웃어 보았다. 수일이 지나도 레이의 말투는 고쳐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병인가… 후훗.’
“…어제 아일리아 양이 한 말에는 악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나이퍼 씨가 속으로 크게 상처 입은 것 같다며 언니가 저에게 얘기하더군요.”
리오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와 언니는 스나이퍼 씨를 굉장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방 사람 치고 저희가 마음속을 읽지 못한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러나, 스나이퍼 씨는 보통 때엔 절대로 마음을 읽지 못한답니다. 마치 수련을 오래도록 쌓아온 동방의 고수들처럼 말이지요. 지금까지 저와 언니가 스나이퍼 씨의 마음을 읽은 적은 단 두 번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몸을 말리던 리오의 팔은 멈추고 말았다. 리오는 슬며시 레이를 바라보았다.
“그 두 번 다… 읽고 나서도 저희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례되는 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스나이퍼 씨에겐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었습니다. 남의 기분을 이해하고 남을 믿고 좋아하는 마음은 있어도 그보다 더 귀중한 마음인 사랑이 없더군요. 사랑을 해보지 않은 저희들도 그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리오는 잠시간 말을 잊었다. 그러다 미소를 띠우고 수건을 휘휘 돌리며 가볍게 말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조금 멍청한 말이 될지 모르지만요.”
레이는 그 얘기를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사랑이란 감정이 있어서 저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다시 머리칼을 묶으며 리오는 말을 이었다.
“그거야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감정이지요. 저에겐 필요 없어요. 괜히 정신 집중만 흐려질 뿐이에요. 자아, 전 여기저기 돌아보고 올 테니까요, 노엘 선생님께는 정오쯤에 이 집 앞에서 뵙자고 말씀드려주세요. 전 갑니다.”
리오는 레이에게 수건을 던져주며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레이는 수건을 차곡차곡 접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한 가지 말씀 못 드렸군요…. 그 사랑이란 감정이 없는 만큼 당신에겐 숨겨진 슬픔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언젠가 당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의하시길….”
동네의 처녀들과 아주머니들에게 물어서 리오는 겨우 허브가 자라고 있다는 옹달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손으로 수정같이 맑은 물을 떠 몇 모금 들이킨 리오는 주위의 풀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과연 엄청난 양의 허브가 특유의 향을 풍기며 자생하고 있었다. 리오는 그 풀들을 주섬주섬 따서 미리 마련해둔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좋아, 이 정도면 환각은 피할 수 있겠지. 그 전염병이란 것이 환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을 대비하는 건 좋을 거야.”
몸을 일으킨 리오는 가죽 주머니를 손에 들고서 천천히 마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최근에 한 번 느낀 적이 있는 섬뜩한 감각이 리오의 몸을 휘감았고 리오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주위를 탐색하였다. 그리고 그는 마을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젠장, 또인가!!”
그 말과 동시에 프로텍스 주위의 산과 숲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지진이 일어난 역사가 없던 지역이어서 프로텍스 마을 사람들은 더더욱 놀라고 있었다. 집 안의 집기들이 떨어져 부서지고 가축들이 난동을 부린 지 몇 분, 곧 지진은 거짓말같이 멈추었고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도, 도대체 지진이 왜 일어났지? 한 번도 지진에 당해본 일이 없는 지역인데…!”
떨어진 집기에 머리를 맞아 약간의 피를 흘리고 있는 촌장은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이 무사한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은 사람은 몇 있었어도 죽은 사람은 없어서 촌장은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마을의 청년들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촌장에게 달려와 그의 상처를 응급 치료하며 안부를 물었다.
“촌장님! 괜찮으십니까?”
“으음… 난 괜찮네, 나보다 더 다친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청년들에게 말을 하던 촌장의 입은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지나치며 그만 멈추고 말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청년들은 촌장이 바라보고 있는 지점을 돌아보았고 그들 역시 입을 벌린 채 굳어지고 말았다.
“저, 저게 뭐야…!?”
그들의 시선이 자리 잡고 있는 지점, 그곳에는 며칠 전 엣센이란 마을 근처에 솟아났던 검은색의 기둥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