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28화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난 린스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짙은 청색의 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펴 보았다. 울다가 잠든 탓인지 그녀의 눈 주위엔 눈물이 마른 흔적, 즉 눈곱이 잔뜩 끼어 있었다. 거울을 보며 간단히 얼굴을 털어낸 린스는 세수를 하기 위해 촌장의 집 밖으로 나섰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온몸을 감싸왔다.
“…아으, 추워.”
인상을 찡그리며 팔로 몸을 감싼 린스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렇게 자니까 눈곱이 끼죠. 웬일로 일찍 일어나셨나 했더니….”
린스는 깜짝 놀라며 자신에게 비꼬는 투로 말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제 그 나무 의자에 앉아서 석양을 바라보던 리오가 어제와 똑같은 폼으로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를 띄운 채.
“뭐야! 드, 들어가서 옷 하나 더 입고 나오려던 참이었다구!!”
약이 오른 듯 린스가 소리를 크게 치자, 리오는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린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리오를 쏘아보았다.
“…제가 알던 여자친구 얘기 해볼까요?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린스는 약간 헝클어졌던 자신의 머리를 말끔히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고 리오는 앉아있던 자리를 린스에게 양보한 후, 그녀의 곁에 서서 얘기를 시작했다.
“오래전 일인데요… 에메랄드빛의 긴 머리를 가진 예쁜 여자가 있었지요. 상냥하고, 요리 잘하고, 이해심 많고… 후에 마법도 쓴 걸 보니 머리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랑 꽤 친했지요.”
‘친했지요’라는 소리를 들은 린스는 갑자기 이를 부드득 갈며 리오를 쏘아보았다. 리오는 얘기를 계속했다.
“많은 모험을 그녀와 같이 했거든요? 동료들과 함께… 어느 나라 왕자님도 일행에 끼어 있었죠. 아직 소년이었지만 그는 굉장히 용감했어요. 전 솔직히 바랐습니다. 이들과 계속 모험을 함께하고 싶다고요.”
리오는 고개를 숙이며 쓸쓸히 웃었다. 구겨져 있기만 하던 린스의 얼굴이 펴진 것은 그때 리오의 표정을 본 후였다. 한숨을 길게 쉰 후 리오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모험엔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었죠. 그 모험을 시작한 것도 저였고… 끝낸 것도 저였습니다. 제가 그녀를 죽였거든요.”
린스는 흠칫 놀라며 리오를 바라보았다. 리오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어떤 마녀의 조종을 받아 한 나라의 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전원을 몰살시켰습니다. 제가 보는 앞에서요. 그녀도 실수했었지만, 저 역시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의지를 믿지 않고 그녀의 목숨을 손쉽게 빼앗은 것이었죠. 그 일은 제 기억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 있습니다.”
린스는 아무 말 않고 리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는 많은 경험을 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 경험뿐이 아닌, 슬픔이라는 경험까지.
“…역시 리오는 거짓말쟁이야.”
린스의 갑작스러운 말에 리오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린스를 바라보았다. 린스는 자신의 손가락을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맘에 둘 정도면 그 여자를 사랑하진 못했어도 좋아한 거잖아. 그리고선 뭐 ‘그런 감정 따윈 없어요’라고? 그런 거짓말로 모두를 속이려고 해? 좀 재미있게 살아봐 멍청이, 그렇게 감정을 숨기고 산다고 해서 누가 알아줄 것 같아? 남 애태우지만 말고 어울려보라구. 사랑하진 못해도 신나게 어울려봐!!”
린스의 말을 들은 리오는 가만히 린스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저까지 정신없게 어울리면 공주님을 지켜줄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공주님을 공격할지 아무도 모르죠. 땅속에서 솟을 수도 있고, 원거리에서 마법 공격을 쓸 수도 있죠. 벨로크 공국이 공주님을 표적으로 삼았다면 지금 이 마을도 편안한 밤을 보낼 수는 없을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 경계를 늦추면 안 됩니다. 그것이 제가 공주님께 할 수 있는 모든 일입니다. 다소 재미가 없다 해도 이해해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린스는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말을 거부하는 것인데도. 린스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아~ 알았어, 알았다구. 날 위해서라는데 할 말 끝이지 뭐.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해둘게.”
“…?”
“넌 인간적으로 재미없어.”
말을 마친 린스는 일어선 후 천천히 세면장으로 걸어갔다. 리오는 피식 웃으며 린스가 앉았던 의자에 다시 앉고 점점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말 처음 듣는데… 후훗.”
크로플렌이 전멸당했다는 소식 때문에 리오 일행은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병에 대한 확실한 지식 없이 그곳을 통과한다는 것은 죽을 확률 90%의 도박이었다. 아침식사가 끝난 뒤, 케톤은 지도를 탁자에 펼치며 모두에게 말했다.
“크로플렌으론 갈 수 없으니 다른 길로 가야 할 것 같군요. 음… 어쩔 수 없이 또 산지를 거쳐야 할 것 같은데요?”
케톤은 연필로 크로플렌 남쪽에 자리 잡은 에크레팔 고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리오는 인상을 찡그리며 속으로 투덜댔다.
‘젠장, 이놈의 대륙은 산지로만 이뤄졌나…?’
리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레프리컨트 왕국의 60%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때문에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이 더러 있기도 하였다. 물론 개척자들의 활약 덕분으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잠깐, 이렇게 간다면 한 일주일은 더 걸릴 것 같은데?”
리오의 말에 케톤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제일 가까운 길이 있긴 하지만 벨로크 공국과 접경한 지역이라 위험성이….”
리오는 씨익 웃으며 케톤이 가진 연필을 빼앗아 들고는 지도에서 그 제일 가까운 길을 찾아 굵은 연필선을 그어 내렸다. 당황한 케톤은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리오의 말이 더 빨랐다.
“자, 결정됐어. 이 지름길로 가는 거야.”
“하, 하지만 언제 어제와 같은 마녀가 나타나 우리를 공격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지역인데요?”
리오는 자신의 손에서 연필을 휘휘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여긴 국경 인접 지역도 아닌데 네 말대로 마녀들이 나타났잖아. 언제 어디서 나타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그러니 이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리오의 말에 일리가 있다 생각한 케톤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린스는 지도를 탁 치며 크게 말했다.
“자아, 결정된 거지? 그럼 출발!”
모든 일행이 촌장의 집을 나섰고 리오는 마지막으로 뒷정리를 한 후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나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저어… 리오 씨.”
리오는 뒤를 돌아보았다. 촌장의 손녀인 아일리아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죄송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리오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아무 말 없이 문 밖으로 나섰다. 아일리아는 리오가 아직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 만큼 화가 풀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듯 더욱 고개를 숙였다.
“케톤 가는데 인사 안 할 거예요?”
아일리아는 깜짝 놀라며 문 밖에 서있는 리오를 바라보았다. 리오는 윙크를 살짝 해 보이며 나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아일리아는 그제서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행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