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83화
노엘의 질문을 들은 버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동거? 글쎄… 동거는 동거겠지 어쨌든 같이 살았으니까. 하지만 자네가 지금 상상하고 있는 불순한 동거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 내가 보장할 수 있으니까. 만약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내가 아까전에 ‘정말 멋진 커플’이라고 했겠나? 좋아,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말해주지. 근데….”
버크는 노엘에게 뒤를 돌아보라는 손짓을 해 보였고 뒤를 돌아본 노엘은 레이가 기절해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레이의 의식을 회복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버크는 서 있는 채로 계속 화를 내고 있는 린스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공주님, 버크 그란벨 인사 올립니다.”
자신의 앞에서 기사의 예를 갖춘 버크를 본 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하! 버크 단장 아니야? 제3 기사단장을 그만두고 뭐하나 했더니 여기 있었어? 많이 변했네… 살도 찌고.”
버크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세월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공주님. 그럼 쉬고 계십시오, 전 나가보겠습니다.”
“응, 신세 좀 질게.”
노엘과 레이가 있는 거실로 다시 돌아온 버크는 두 미녀의 앞에 앉아 천천히 리오와 세이아에 관한 얘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음… 아버님께서 더 잘 아시지만 친구분들하고 여행을 떠나 계시는 중이시라 더욱 자세한 얘기는 내일 들을 수 있을 거야. 거기 있는 동방 아가씨도 잘 들어둬요. 괜한 오해 해서 또 기절하지 말고.”
레이는 반 정신 나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고 노엘은 머리를 감싸 쥐며 버크를 바라보고 그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아마… 2년 전인가? 그 리오란 젊은이가 이 마을에 왔었어. 그는 이 마을의 촌장, 즉 내 아버님의 소개로 세이아 자매의 집에 민박을 소개받았지. 아버님께서 왜 여자 둘이 사는 집에 그를 소개했느냐가 제일 중요한 내용이야. 그건 나중에 말하도록 하고, 그 세이아 자매에 대해 소개를 해주지. 노엘은 좀 들은 지 오래된 내용일 것 같군…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노엘 자네 제2 기사단장을 역임했던 전설적인 마법 기사 <발컨 드리스>를 알고 있나?”
노엘은 자신의 테 없는 안경을 매만지며 버크가 말한 이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그녀의 기억 저편에서 발컨이란 이름을 곧 떠올릴 수 있었다.
“으음… 아, 그레이 공작님과 쌍벽을 이루던 마검술사 말씀이세요?”
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사단 동기생이어서 나와도 매우 친한 친구였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고, 세이아 자매란 바로 그의 딸들일세.”
노엘은 그 얘기를 듣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그분은 수도에서 행방불명되던 날까지 혼자셨다고 들었는데요?”
“사실은 아니었어. 행방불명되던 당시 숨겨둔 아내와 어린 딸 하나가 있었지. 그 딸이 바로 세이아고 이 마을에 정착하여 낳은 두 번째 아이가 세이아의 동생인 라이아야. 그가 이 마을에 정착했었다는 사실은 내가 제3 기사단장을 그만두고 내 고향인 이 마을에 돌아왔을 무렵이었지. 그러나… 그때 발컨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 한 7년 전에 마물들이 갑자기 날뛰던 때가 있었지? 그때 마물들이 이 마을에 쳐들어왔고 발컨은 그 마물들과 격투 끝에 숨지고 말았지. 중요한 건 바로 지금부터야. 어린아이였던 세이아는 아기인 자신의 동생을 지키다가 그만 어떤 마물의 독에 눈을 당하고 말았지. 결국은 치료를 하지 못했고 최근까지 소경인 상태로 지내게 되었어. 다시 본론으로 넘어와서, 아버님이 리오 군을 세이아의 집에 소개한 이유가 바로 이걸세. 집안에 남자도 없었고 눈도 안 보이는데다 그때 당시 마그라는 못된 건달 녀석이 세이아를 자주 괴롭혔기 때문에 아버님 나름대로 도박을 건 거지. 세이아를 마그에게 주느니 잘생긴 괴한에게 넘겨주겠다는 심산이셨을 거야. 세이아가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하핫. 효과는 상상 외였지. 그 리오라는 젊은이는 정말 기사다운 기사였어. 집안의 힘든 일은 모두 해결해주었고 마그 녀석도 찍 소리 못 하게 눌러버렸지. 게다가 축제에서 마을 사람들이 세이아를 인정하게 해주었고 말이야. 세이아는 결국 리오군에게 끈끈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리오군의 마음엔 이상하게 부담이 된 모양이야. 3년 전 마을 축제가 끝난 다음날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지. 그런데 공주님과 같이 이 마을에 돌아올 줄은… 라이아의 소원이 하늘에 닿은 건가? 하하하핫….”
자초지종을 들은 레이의 눈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밝아졌고 그녀는 곧 버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리오씨께서 두 자매를 보호해주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고 말고요, 이상한 짓을 했다면 세이아가 그렇게 간절히 리오군을 생각할 이유가 없겠지요. 아가씨가 세이아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리오군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에이, 갔구나 자식’하고 말았겠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리오군이 잘 알아서 할 거라 난 믿소.”
버크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들은 레이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노엘 역시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은 없는 법이었다.
빨간 지붕 집 안에서 리오는 세이아와 단둘이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괴물 수백 마리가 눈앞에 나타나도 태연히 웃던 리오가 지금 여자 한 명을 앞에 두고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하는 것이었다.
“…세이아씨, 축제날 저녁에 갑자기 사라졌던 것…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세이아씨와 같이 있게 되면 헤어졌을 때 세이아씨의 상처가 더 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리오의 말을 들은 세이아 역시 동감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고는 있었어요… 언젠가 리오씨가 저와 라이아의 곁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정작 그 상황이 닥치니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리오씨가 얼마나 많이 저희들의 시간을 메꿔주셨는지 알 것 같았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에서도요.”
리오는 그 말이 나오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긴 한숨을 쉰 뒤 생각했다.
‘안녕이란 말로 끝낼 수 있는 상황은 지났구나….’
세이아는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리오의 고뇌에 찬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들며 리오의 얼굴을 훔치듯 바라보았다. 리오는 걱정이 태산인 얼굴로 세이아로부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세이아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그 노인에게 감사의 말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해 보았다.
“정말… 제가 생각한 리오씨의 모습과 지금 제 앞에 계신 리오씨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네요. 제가 감히 끼어들지 못할 정도의 고뇌가 리오씨의 얼굴에 보이거든요. …저 말고 다른 여자분이 과거에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리오는 흠칫 놀라며 세이아를 바라보았고 세이아는 쓸쓸히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절 위해서 떠나신 것을 보면 그만큼 여자의 심리에 대해 잘 아신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전 리오씨가 저를 상대하실 때처럼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다른 여자분들과 상대한다고 믿거든요.”
“…그래요?”
세이아의 말을 들은 리오는 빙긋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은 힘없는 웃음이었다. 리오는 사상 최강의 적을 만난 것 이상으로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