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91화
길을 걷던 베르니카는 또 보는 것이지만 많은 가옥들이 파손된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가 어쩔 도리는 없었다. 그때 그녀 자신이 수도에 있었어도 결과가 달라진 건 별로 없었을 테니까.
“후우… 계속 가 볼까?”
계속 길을 걷던 베르니카는 문득 고개를 돌려 보았고 부서진 건물 잔해 위에 앉아 있는 한 사나이에게 잠시 시선을 두어 보았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장발을 위로 묶어 내리고 회색 망토 차림을 한 사나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사나이의 오른쪽 눈 부위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그의 왼쪽 눈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했다. 아마 이성에 대해 관심이 풍부한 사춘기 소녀가 그의 모습을 보았다면 곧바로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고 베르니카는 생각해 보았다.
“…음?”
그 사나이는 베르니카의 시선을 느꼈는 듯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고 베르니카는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을 뿐이었다.
“훗….”
그 사나이는 반갑다는 듯 빙긋 웃어 보였고 베르니카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도망치듯 여관들이 위치한 곳으로 향하였다. 거의 달리다시피 하던 베르니카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사나이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누구지…? 이 도시에선 처음 보는 남자인데… 내가 잘못 본 건가?’
가만히 사나이가 앉아 있던 잔해를 바라보던 베르니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길을 걸어갔다.
“오빠, 안에 있어?”
가만히 침대에 누워 마키가 자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지크는 루이체의 목소리가 들리자 한숨을 후우 쉬며 대답해 주었다.
“음, 들어올 거면 들어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지크는 들어온 사람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손가락을 휘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부엌에 가서 아줌마한테 과일 하나만 얻어 올래? 감자나 고구마 들고 오지 말고. 익은 거라면 몰라도.”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자 지크는 인상을 가볍게 쓰며 들어온 사람을 쏘아보았다.
“이 녀석이… 어? 루이체는 어디 갔지? 납치했나?”
베르니카는 자신이 이곳에 왜 자청해서 왔나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 자신의 용건을 간단히 말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어. 내가 온 용건은 말이야,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아느냐 물어보기 위해서야.”
“오호… 그래? 물어봐, 아는 한도 내에서 대답해 주지.”
지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니카는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붉은 장발의 사나이를 알고 있나?”
그 질문을 들은 지크는 가만히 베르니카를 바라보았고 베르니카는 인상을 쓰며 다시 물어보았다.
“붉은 장발의 사나이를 알고 있냐고!”
지크는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어 넘기며 대답했다.
“푸핫, 붉은 장발이라… 그러고 보니 이 여관 주인도 붉은 장발이고 저기 앞에 술집에서 일하는 기생오라비도 붉은 장발이었어.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베르니카는 주먹을 불끈 쥐며 차근차근 다시 묻기 시작했다.
“붉은 장발의 떠돌이 기사에 대해서 물어보지. 그 사나이도 꽤 강하다고 들었는데… 내 인내심을 자극하지 말고 어서 대답해.”
지크는 베르니카의 말이 거기까지 나오자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긴 알아. 근데 그놈이 왜?”
의외로 일이 잘 풀리자 베르니카는 표정을 풀며 계속 말했다.
“그 남자가 우리 왕국의 공주님을 인질로 잡고서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내가 직접 체포해서 심문을 해 보려고.”
베르니카의 말을 들은 지크는 멍하니 베르니카를 바라보다가 크게 웃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푸훗! 하하하하핫-! 뭐? 다시 말해봐, 누가 누구를 잡는다고? 그대가? 그놈을? 하하하하하핫-!!! 이제 보니 농담도 할 줄 아시네 안대 아가씨?”
지크가 계속 웃어 넘기고 있자 베르니카는 다시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뭐? 무슨 뜻이지 그게?”
지크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헤헷… 그놈 잘못 건드렸다간 이 왕국 최후의 날이 닥쳐온다구. 그 공국인가 뭔가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이 왕국을 침공해서 멸망시키는 시간보다 그 녀석이 멸망시키는 시간이 더 짧을걸? 그 녀석 생각 외로 인정사정이 없는 녀석이라서 말이야.”
지크의 말을 거의 농담으로 들은 베르니카는 피식 웃으며 그녀 역시 농담의 어조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너보다 강하겠네?”
지크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대 단위 전투와 파워는 그 녀석이 나보다 더 강하니까. 스피드만 좀 떨어질걸?”
베르니카는 그 대답을 듣고서 설마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지크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강함을 인정한 일은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왕국에서 두 번째로 강한 기사에 속하는 케톤이 간단히 굴했다는 것을 보아도 그랬다.
“그, 그럼 그 남자 인상 착의에 대해서 알아?”
“물론, 붉은 장발에 붉은 눈썹, 머리는 위로 묶어 뒤로 후루룩 내렸고 얼굴은 여자들이 좀 좋아하게 생겼지. 물론 나와 비교해도 괜찮아, 헤헤헷….”
베르니카는 문득 오는 도중에 만난 그 사나이를 떠올렸고 다시 한번 지크에게 물었다.
“그 남자… 오른쪽 눈에 붕대를 하고 있지 않아?”
지크는 다시 침대에 누우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붕대는 무슨 붕대… 붕대 필요할 정도로 병약한 놈은 아니야. 또 다른 질문은 없어?”
‘역시… 그런 눈빛을 가진 남자가 납치 같은 일을 할 이유가 없겠지. 이 녀석이 했다면 몰라도….’
베르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크의 옆 침대에 앓아 누워 있는 마키에게 시선을 돌려보았다.
“저 암살자 군은 왜 앓아 누웠나? 네가 때렸나?”
“쳇, 사람 완전히 나쁜 놈으로 만드는군. 내가 때렸으면 살아있을까? 저번에 루이체가 때렸을 때도 한 방에 기절한 녀석인데 말이야. 뭔지는 모르지만 무슨 열병 같은 거라나 봐. 그리 심한 건 아닌데 루이체가 알아서 치료를 해 줬지.”
그 말을 듣던 베르니카는 미네아가 미안하다는 말을 지크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생각났고 말할까 하지 말까 고민하다가 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만히 베르니카를 바라보던 지크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상당히 나쁜 녀석으로 내 앞에 있는 베르니카 양에게 인식이 된 모양인데… 어쩔 수 없지, 맘에 안 든다는데 꼬셔서 들게 만들 수도 없고 말이야. 에이고… 심심한데 왕궁이나 같이 가 보자구.”
베르니카는 또다시 인상을 쓰며 지크의 말에 반박을 던져주었다.
“왕궁은 놀이터가 아니야.”
“예예, 알아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