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373화
“아, 그러시다면‥. 하지만 티베 씨의 방보다는 추울 텐데요.”
그런 리오의 말에 정작 티베는 말이 없었다. 리오는 어깨를 으쓱인 후 다시 지도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 분, 티베가 몸을 꿈틀거리며 리오에게 시선을 돌렸고 남미 부분을 보던 리오 역시 티베를 힐끔 바라보았다. 티베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말했다.
“흠흠‥. 아까 전엔 죄송했어요. 사과할게요.”
리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뭘요, 제가 먼저 숙녀분께 실례되는 말을 꺼냈는걸요.”
티베는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어쨌든 고마워요. 그건 그렇고 정말 이 세계는 사람의 성격을 바꿔 놓네요. 1년 전에 제가 과연 이랬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요‥.”
리오는 조용히 티베를 바라보았다. 티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적응이 되니‥마음은 조급해지고, 일을 하자니 계속 똑같은 일만 계속하고‥. 변화가 있는 직업을 원해서 기자가 되었는데 얼굴만 예쁜 인형 기자가 되었고‥.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돈이란 것에 점점 물이 들면서 제 자신조차 삭막해지고‥. 동생이나 친구들과 왕국 수도의 거리를 뛰놀던 기억이‥언제부터인가 유치하다 느껴졌고‥. 결국 그러다 보니 아까와 같이 리오 씨에게 실례를 한 것 같네요. 후훗‥. 정말 전 바보 같죠?”
리오는 그때 티베의 얼굴에서 쓸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홀로 이 험난한 세상에, 자신이 아는 내용이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세상에 떨어졌던 것이다. 리오 자신은 직업상 여러 차원을 떠돌아다니기 때문이 빠르게 적응을 할 수 있으나 그녀는 그렇지가 않았다. 결국 환경과 불안감이 그녀의 성격을 약간이나마 바꾼 것이리라. 리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흠‥그래도, 유치하다 생각이 드실 정도면 다행이군요. 쓸데없는 옛날 생각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은 겁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어린 시절 자신의 실수나 놀던 일 등등을 상기하면서 웃어 버리죠. 유치하다 생각하기 때문인데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그 기억을 버리려는 사람은 사실 드물죠. 그건 소중한 추억이니까요. 티베 양도 추억을 잊지는 않은 것이니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티베는 멍하니 리오를 바라보았다. 설마 리오가 그런 인간적인 말까지 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티베는 살며시 웃으며 리오에게 물었다.
“음‥대단하시네요. 마치 오래 사신 할아버지 같으세요. 그럼, 리오 씨는 어린 시절에 기억나는 추억이 있으신가요?”
그 질문에, 리오는 잠시간 대답이 없었다. 조용히 앞을 바라보며 눈을 흐렸다, 반짝였다 하다가 결국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에게 가장 기억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란, 자신의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티베는 리오의 그런 쓸쓸한 모습을 보고 실수를 했다 생각한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리오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제가 또‥.”
그러자 리오는 빙긋 웃고는 고개를 저으며 티베에게 누우라는 손짓을 했다.
“자, 주무세요. 내일도 방송국엔 늦지 않게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티베는 이번만큼은 군말 없이 소파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분명 리오의 말대로 약간 춥긴 했으나 이상하게도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미국 동부 뉴욕. 제네럴 블립 사 본사.
제네럴 블립의 본사는 80층의 빌딩 네 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 빌딩들 사이 정중앙엔 [신의 눈]이라는 이상한 모양의 넓은 원반형 유리질 물체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밝혀진 일이 없으나 그 주위 테두리엔 <위에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글귀가 쓰여 있어서 그리 흔치는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미국 재계의 제왕이라 불리는 제네럴 블립의 총 회장은 건물 지상층에 회의를 위한 시간 말고는 거의 올라가지 않는다. 지하 50층 중 20층이 그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지하 10층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나머지 40층의 존재 여부가 밝혀진 일이 없었다. 그리고 밝히려고 노력한 기자나 정보 요원은 꼭 행방불명 처리가 되어졌다.
45층에 위치한 자신의 집 서재에서 제네럴 블립의 마크·레일로지 회장은 커피 대신 인삼차를 즐기며 조용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보통 모습은 미국 서부 농장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사원들에게 연설을 할 때나 회의를 할 땐 여지없이 재계의 제왕으로 변신한다. 그의 그 카리스마적인 면은 일본의 연합 기업인 [니혼 유나이티드]의 총수 텐진·시루부의 무릎을 저절로 꿇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단 한 명, 그의 부인만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으나 그녀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은 그의 아들조차 그의 마음을 모르게 된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회장은 조용히 책상 위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나서 파란 불이 들어오자 회장은 스피커의 버튼을 눌렀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흰색의 코트를 입은 그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만큼의 카리스마적인 면은 없었지만 경제를 움직이는 능력만큼은 회장의 뒤를 이어 나가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현재 전 세계 경제계에선 최고의 루키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사생활이 부도덕하기 때문에 매스컴에 많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회장은 자신의 아들이 왜 그렇게 부도덕하게 변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신문에 좋지 않은 기사가 나면 아들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 줄 뿐이었다.
회장의 단 하나뿐인 아들, 넥스·레일로지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 앞에선 정신 이상이 아닐까 할 정도로 냉혈한 그도 아버지인 회장 앞에선 최대한 예를 갖추었다. 어렸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최고 존경하는 인물을 적으라 했을 때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굽힘 없이 적은 일화는 유명했다.
회장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앞에 앉은 젊은 아들에게 물었다.
“그래, 다친 곳은 괜찮니?”
넥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심하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넥스의 머리엔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며칠 전 이 세계에 단 두 명뿐인 마법사를 납치해 오는 도중에 방해를 받아 생긴 상처였다.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고 중얼거렸다.
“음‥와카루 박사가 반년 만에 돌아왔다고 하더구나.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런데 꽤 늦는구나. 너도 같이 만나보지 않으련?”
넥스는 즉시 대답했다.
“예. 일본, 아니 세계에서 제일가는 생체 공학 전문가이신 와카루 박사를 한 번쯤은 만나 봐야 하겠지요. 하지만‥인간적으론 사귀기 싫습니다.”
회장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하긴 그래.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행하는 과학자는 그뿐이니 말이야. 후훗‥뭐 그렇다고 내가 와카루 박사보다 인간미가 있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똑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자 회장은 책상 위의 버튼을 눌렀고 곧 파란 불이 들어오자 회장은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들어오시오.”
곧 문이 열렸고 작은 키에 자주색 양복, 짧은 흰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낀 스타일의 노인이 들어왔다. 그 동양계의 노인은 빙긋 웃으며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허허헛‥.”
회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근데, 반년 동안 어딜 갔다 오셨소? 참으로 뵙기 힘들구려. 아, 앉아서 말씀하시오.”
박사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소파에 회장과 마주 앉은 후 얘기를 시작했다.
“허헛‥좀 다른 세계에 가 있었죠. 그쪽에 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제가 완성하고 싶었던 것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아아, 숙녀 한 분을 소개해도 괜찮겠습니까 회장님? 그쪽 세계에서 뵌 여자분이시죠.”
회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오. 그런데 그 여자분이 오시려면 오래 걸립니까?”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허헛, 아닙니다. 여기 계십니다. 자 나오십시오.”
회장과 넥스는 저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이해를 하게 되었다. 와카루 박사의 말과 함께 그의 뒤에선 검은색의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에선 타이트한 검은 가죽질의 옷을 입은 회색 머리의 글래머 미인이 나왔다. 와카루 박사는 일어서며 그녀를 소개하였다.
“그쪽 세계에서 저를 도와주신 분이십니다. [라기아]님이시죠.”
라기아는 요사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회장과 넥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호호호홋‥라기아라고 합니다. 뵙게 돼서 영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