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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47화


노크 소리가 나며 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와주세요.”

리오는 기다렸다는 듯 침대에서 내려오며 머리를 다시 묶었다. 언제나 그 스타일로, 위로 묶어 아래로 늘어뜨린 형태였다. 망토는 그대로 의자에 걸어두었다.

“어이, 클루토. 빨리 나와라.”

“알았습니다.”

클루토는 욕탕에서 나와 몸을 닦은 후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와 리오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선 수도원 안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점심시간인 듯했다. 리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빈자리에 앉았고 클루토도 자리에 앉았다.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있는 리오였기에 수녀들의 시선은 리오의 팔에 한 번씩은 스쳐 지나갔다. 스프와 빵이 사람들을 통해 전달되었고 리오도 간단히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둘 수 있었다. 보통 여관에서 내주는 식단보다 못했으나 음식의 맛만은 굉장히 좋은 것 같았다. 클루토는 이리저리 둘러보다 자신을 치료해준 키세레가 보이지 않자 원장에게 살며시 물었다.

“저… 절 치료해주셨던 수녀님은 어디 계시나요?”

“아, 키세레 수녀님은 기도실 안에서 기도를 하고 계시단다. 자, 여러분. 기도를 하고 식사를 천천히 합시다. 레호아스 신이시여, 그 위대한 이름으로…”

모두 양손을 모으고 주기도문을 읊는 중에 리오만 혼자 손을 모으지 않고 눈만 감았다.

`… 레호아스님은 기도를 중요시하시지 않지… 뵌지도 오래됐는데…’

기도가 다 끝나고 식사가 시작되자 리오는 신나게 빵을 먹어치웠다. 스프도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물처럼 마셔댔다. 그의 모습을 본 수녀들은 입을 손으로 막고서 웃어대기 시작했다. 수도사들도 그리 싫지는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오직 클루토만이 눈을 가릴 뿐이었다. 스프와 빵을 다 먹어치운 리오는 바로 일어서며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식당을 나섰다. 더 먹지 않을까 고민하던 주방 아주머니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른 수도사들보다 덩치가 큰 리오가 별로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리오에겐 따로 이유가 있었다. 전투 도중에 용변의 때가 오는 것을 되도록이면 막으려는 것이었다.

“어험…”

리오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한 후에 병실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몇 명의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리오를 쳐다보았다. 리오는 조심스럽게 리카를 찾기 시작했다. 몇 분이 지나서 리오는 잠을 자고 있는 리카를 찾을 수 있었다.

“자나…”

리오는 리카의 침대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리카는 약간 더운 듯 땀을 흘리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많이 아픈가.”

리오는 침대 아래에 놓여있는 수건으로 리카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병을 치료하는 마법은 몰라서 말이야… 배워둘걸 그랬나.”

키세레는 다시 한번 병실로 들어왔다. 환자들이 식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음식을 못 먹을 정도의 환자가 눈에 띄질 않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더 두리번거리던 키세레는 저편에서 리카를 간호하는 리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외의 장면을 보았다는 듯 키세레의 눈은 약간 커졌다.

“저 남자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싸움을 잘하는 떠돌이 기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키세레는 그때부터 리오에 관한 경계심을 약간은 풀 수 있었다.

“으응…”

리카는 정신이 들은 듯 힘겹게 눈을 떠보았다. 하루 만에 그녀의 눈에 처음 비친 것은 흰색의 수건이었다. 그 말괄량이 소녀는 엉겁결에 수건을 손으로 막았다.

“어, 정신이 들었나?”

리오는 수건을 아래로 내린 후 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리카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눈을 계속 비벼댔다.

“눈 나빠진다구. 비비지 말아.”

“여, 여기는…”

리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에 남는 건 뛰는 도중에 갑자기 땅이 올라오는 장면뿐이었다.

“수도원의 병실이야. 계속 누워있어.”

리오는 리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리카는 리오의 얼굴을 뚫어지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 징그럽게 왜 그러니?”

리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 꺽다리가 이상하게 변한 꿈을 꾼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어떻게?”

“응… 그냥. 갑자기 성격이 차가워져서 나와 클루토를 남겨두고 꺽다리 혼자서 어디론가 가버리는 꿈이었어. 꿈이니까 다행이야, 헤헷…”

리오는 씁쓸히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래… 꿈일지도…”

조금 후 식사를 마친 클루토가 리카를 간호하려고 병실로 찾아왔다. 클루토는 리오와 리카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서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 왔냐?”

리오는 클루토가 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클루토의 손에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자, 이제 네 차례다. 난 그 키세레란 예쁜 수녀랑 놀아야겠어. 그럼 부탁한다.”

리오는 리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바로 병실을 나갔다. 리카는 약간 아쉬운 표정이었다.

“… 저, 리카…”

리카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말을 하려던 클루토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리카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뭐 해, 나 땀이 난단 말이야. 어서 닦아줘.”

클루토는 다시 표정을 밝게 지었다. 리카의 그런 말투가 자신에겐 어울린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클루토는 리카의 말대로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묻은 땀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할 일이 없어진 리오는 수도원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키세레가 피곤한 표정으로 기도실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템플 나이트와의 일을 처리할 때 갓스펠을 무리하게 사용한 것 때문이었다. 리오는 약간 비틀거리며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고 있는 키세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키세레는 앞에 리오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멈춰 섰다.

“아… 리오 씨군요. 그럼 전 이만…”

리오는 자신의 옆으로 비껴가는 키세레를 불렀다.

“이봐요, 수녀님. 식사는 했어요?”

키세레는 다시 멈춰 섰다. 다시 리오를 돌아보았을 때는 매우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게 저랑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당신에겐 볼일이 없습니다.”

키세레는 강하게 말한 뒤에 다시 자신의 방인 듯한 곳으로 향해갔다. 리오는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댔다.

“… 수녀치곤 짜증을 잘 내는군…”


다음날, 수도원은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디파스 촌의 이웃 마을인 하리사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아침부터 문을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을 안의 아이들이 푸른색 반점을 동반한 심한 열병에 걸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모두 무사한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근처의 의사들에게 찾아가 보았지만 하나같이 모르는 병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기가 막히고 만 사람들은 결국 수도원으로 아이들을 안고 찾아온 것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2백여 명의 아이들과 부모들을 본 수도원의 사람들은 가족들을 넓은 방에 들여놓기는 했으나 난처할 따름이었다.

“후우…”

원장은 아이들이 있는 방에서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나왔다. 매우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키세레를 비롯한 수녀들과 수도사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원장에게 아이들의 상태를 물었다.

“원장님, 병명은…”

원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도 처음 보는 병이야.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아이들만 그 병에 걸려있어. 푸른 반점에 고열이라니… 홍역도 아니고.”

키세레는 얼굴을 찡그리며 수도원의 도서실로 달려갔다. 고대 의학서에 나와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일에는 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열성을 다하는 그녀이기도 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2층의 도서실에 도착한 키세레는 다른 사람이 먼저 와있는 것에 내심 놀랐다.

“병명 찾으러 왔나요?”

리오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상태에서 그녀의 목적을 정확히 맞추었다. 하지만 키세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서실 자물쇠를 열고 있었다. 리오는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 쪽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키세레는 매우 흥분된 표정으로 리오를 쏘아보았다.

“왜 이러는 거죠! 지금 아이들은 한시가 급한데…!!”

“죽지는 않았잖아요.”

키세레는 기가 막혔다. 확실히 죽은 아이들은 없었지만 리오의 그러한 태연성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결국 그녀는 리오의 뺨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역시…! 기사라는 존재는 자신의 가족들 밖에는 관심이 없군요,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죽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요? 만약에 당신의 자식이 저런 이름 모를 병에 걸렸다면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아요!!”

리오는 키세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키세레는 갑자기 몸이 굳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치밀어 오르던 감정이 많이 진정되었다.

“아직 총각이라서 그런 감정은 모르겠지만, 저 아이들은 절대로 죽지 않아요. 그리고 의학 서적을 밤새고 찾아봤자 비슷한 병만 몇 가지 발견할 뿐이라고요.”

키세레는 리오의 자신 있는 말투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식할 줄 알았던 사나이가 자신과 원장도 모르는 병의 증세를 확실히 아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죠? 설마 병명을 아는 것은…?”

리오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놓아주며 말했다.

“병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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