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491화
하늘
‥내 고향의 언어로 한다면 스카이.
나와는 20살 정도 차이가 나는 내 친 누님의 이름이다.
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되신 어머니 대신 나를 키워주신 내 정신적 지주‥.
내가 7세 때‥누님은 결혼을 하셨다. 당연하겠지만 조카가 태어났다.
누님이 나에게 해 주신 것처럼‥난 조카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15세 때‥난 부모님을 잃고, 형제들을 잃고, 누님을 잃었다. 남은 가족은 조카 하나‥. 온몸에 난도질을 당한 채 한쪽 팔을 잃은 어린 조카를 안고 서서히 숨이 끊어져 가던 내 누님은 내가 경악에 찬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웃어주시며 숨을 거두셨다.
결국 조카도 오래 살지 못했다. 잘린 팔의 상처가 어린아이에게는 너무나도 컸고, 고통도 여간하지 않은 것이었다. 조카는 참극이 벌어진 지 4개월 만에 저세상으로 떠났다. 결국 라디언트라는 성을 쓰는 사람은 나 하나가 되었다. 운동이라는 것은 취미가 없던 내가, 해본 것은 학교에 다닌 것뿐인 난 결국 모든 희망을 잃고 말았다. 복수라는 단어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희망을 잃고 쓰러진 나의 눈에 갑자기 들어온 것이 있었다. 누님과 같은 이름을 쓰는 무한의 존재‥.
하늘이 있었다.
“….”
다음 날도 어김없이, 휀은 궁에서 가장 트인 곳인 광장 중앙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는 병사들이나 궁인들은 두 차례에 걸친 전투로 인해 휀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에 대해 말을 붙이거나 건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휀의 시선을 누군가의 손이 가로막았다. 가만히 자신의 시야를 가린 손을 바라보던 휀은 슬쩍 옆으로 비켜났고, 휀의 시선을 방해해 봤던 케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 양쪽에 손을 가져간 뒤 휀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그 목걸이, 린스 공주에게 돌려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케이도 역시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의 어제 행동‥지켜볼 의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소위 말하는 충격요법 같았는데요, 무슨 의미가 담긴 건지 말해줄 수 있나요? 말 안 해주면 공주에게 그냥 돌려줄 거예요.”
그러자, 휀은 옆으로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향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좋을 대로‥.”
멀리 사라져 가는 휀을 멍하니 보고 있던 케이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흠‥저 사람들 아무래도 ‘기사’라는 이름을 가진 건달패들 같단 말이야. 광기에 사로잡힌 회색 인간에, 다 좋은데 말이 없는 파란 머리 남자에, 여자 마음을 모르는 건지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는 건지 웃고만 있는 붉은 장발의 청년에,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른 폭력배에, ‥뭐, 래디 씨는 3개월 있으면 다시 살아난다니 넘어가고, 게다가 이번엔 빛의 힘을 사용한다며 인정사정이 없는 남자라니‥.”
한탄을 하던 케이는 다시 제궁 쪽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
“아니, 감히 나를 빼먹다니‥!!”
지크는 인상을 쓴 채 자신의 앞에서 야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넬과 시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넬은 씨익 웃으며 지크에게 초콜릿 맛 아이스바를 하나 건네주었다.
“헤헤‥그럴 리가요. 선배님 것도 다 사왔어요.”
그러자, 아이스바를 받아들고 있던 지크는 더욱 인상을 쓰며 넬에게 말했다.
“‥다른 맛은 없니?”
지크의 그 말에, 넬은 곤란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사실 시에가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서 초콜릿 맛만 잔뜩 사 온 것이었다. 지크는 넬이 베시시 웃고만 있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스바의 겉봉을 뜯었다.
“‥오늘만은 봐 주지‥. 이 꼬마 만난 첫날이니까.”
그때, 아이스크림 세 통을 혼자 비우고 있던 시에는 지크가 자신의 옆에 앉자마자 미소를 지은 채 지크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즐거워했다.
“와아!! 지쿠!! 지쿠!!!”
하루 동안 계속 시에라는 꼬마에게 머리를 쓰다듬 당해온 지크는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좀 말려봐‥.”
그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바이칼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TV 앞 소파에 앉은 후 조용히 중얼거렸다.
“흠‥정신 수준이 비슷한 동물끼리 붙어있군‥.”
그 순간, 시에가 그야말로 동물적인 순발력과 탄력을 이용해 바이칼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은 후 이번엔 바이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빠이!! 빠이!!!”
바이칼은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없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크는 킥킥 웃으며 중얼거렸다.
“쿠쿠쿡‥정신 수준이 비슷한 동물끼리 붙어있군‥하하하하핫!!!”
“‥베어버리겠다‥언젠간.”
바이칼의 싸늘한 말을 들으며, 지크는 집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그렇게 시끌벅적하던 집이 갑자기 조용해진 탓이었다.
“‥그건 그렇고 다 어디 갔니? 리오는 샤워하고 있고, 카루펠은 계속 유리창만 닦고 있고, 회색 분자는 베란다에서 술만 퍼마시고‥. 나머지 여자들은 싹 사라졌네?”
“아, 언니들이요? 아까 회합을 하신다면서 시내 호프집으로 가셨는데요.”
넬의 말을 들은 지크는 다시 인상을 찡그린 채 넬에게 말했다.
“‥루이체, 마키, 챠오, 티베, 세이아, 사이키‥까지 여섯 명 전부 다? 맥주를? 돈도 많아‥.”
그 말이 나오자, 아직도 시에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바이칼이 TV쇼를 틀며 중얼거렸다.
“‥여자라는 생물은 언제나 그렇지‥.”
아이스바를 입에 물었던 지크는 순간 바이칼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지크의 시선을 느낀 바이칼은 지크를 흘끔 쏘아보며 물었다.
“‥시비인가?”
“아니, 네가 왜 같이 안 갔나 해서‥.”
“…!!!”
바이칼이 막 화를 내려던 순간, 갑자기 시에가 바이칼의 머리 위를 살짝살짝 손으로 두드리며 TV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와아!! 노래다 노래!!! 시에 노래 좋아!!!”
그럴 때, 리오가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막 나왔고 바이칼은 완전히 굳어진 얼굴로 리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 호텔이 어디지? 말 안 하면 죽어.”
자신의 엄청난 장발을 수건으로 말리고 있던 리오는 무슨 소리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글쎄? 그런데 숙녀분들은 그사이 다 어디 간 거야?”
지크는 아이스바를 두 개째 개봉하며 리오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했다.
“계 모임.”
“‥계?”
※
“티, 티베야‥술은 좀‥.”
500cc 맥주잔을 양손에 든 세이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티베를 바라보았고, 직장을 다니며 주량이 꽤 늘어있는 상태인 티베는 걱정 말라는 듯 세이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하, 괜찮아 괜찮아. 맥주는 음료라구.”
“그, 그래도‥.”
그사이, 비슷한 느낌의 두 여성 마키와 챠오는 서로에게 시선을 둔 채 맥주를 마구 비우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크와 같은 일터의 동료라고?”
“‥유감스럽게도.”
두 근육질의 파이터 여성은 이상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마키는 지크가 챠오 앞에서 벌벌 기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챠오는 지크가 마키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는 순간부터. 일곱 잔째의 맥주를 비워 얼굴이 약간 붉어진 둘은 서로를 향해 동시에 중얼거렸다.
“‥‘그 녀석’과는 관계없다는 것을 알아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