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가즈 나이트 – 504화


슈렌의 말에, 사바신과 린스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슈렌은 자신이 사용한 찻잔을 정리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임무만을 중요시 하긴 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진 않아. 물론 비정한 면도 있지만. …어쨌거나 쉽게 말이 통할 상대는 아니지.”

가만히 슈렌의 말을 듣고 있던 린스는 다시 인상을 쓰며 슈렌에게 물었다.

“…나에게 반말을 한거야?”

“그럴리가요.”


동쪽 성문을 수비하던 병사들중 한명이 잠시 하품을 하며 휴대하고 다니는 연초(담배)를 입에 문 뒤 부싯돌로 끝에 불을 붙였다. 그 연기를 폐 깊숙히 들이마신 병사는 연기를 길게 내 뿜은 뒤 약간 멍해져 오는 자신의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수비병에겐 연초들이 기본적으로 꽤 지급된다. 사실 지루한 직종이기 때문에 나오는 일종의 배려였다. 연초라는 기호식품 배급의 특혜라도 없었다면 도성의 수비병은 그야말로 할 병사가 없었을 것이다. 야만족들이 마족들과 함께 꽤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침입을 시도한 것은 최근의 일, 예전엔 수십명 몰려와 저주라는 이름의 이상한 행동을 하고 그냥 도주를 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성 외곽의 수비는 지루할 수 밖에 없었다.

한참 연초를 태우고 있던 그 병사는 성문쪽으로 광대의 가면을 쓴 흰 옷의 남자가 걸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는 즉시 연초를 끈 후 동료 병사들에게 경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몇몇 병사들은 연초를 입에 문 상태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퍼억—!!!

순간,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병사들은 즉시 성벽 밑을 내려다 보았다. 성문 밑에 동료 병사 몇명의 몸이 산산조각 난 상태로 성문 앞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의 가운데에 서 있는 흰 옷의 사나이는 자신의 광대 가면을 벗으며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키하하하하하하핫—!! 이 힘이다!!! 이 힘이야!!!!! 이것이 ‘신’의 힘이다!!!!」

쿠우우우우웅—!!!!!!!!

폭음소리와 함께, 동쪽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몸은 성문을 이루고 있던 돌들과 더불어 조각이 나며 팔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

자신의 방 한 가운데에 조용히 정좌를 하고 있던 휀은 눈을 뜬 후 자신의 코트와 플랙시온을 들고 방을 나섰다. 밖은 이미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동쪽 성문이 날아가 버리고, 병사들이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채 고깃덩이로 변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별궁 밖으로 나온 휀은 케이가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휀은 그녀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이봐.”

“아앗!!”

휀이 기척을 지우고 오는 바람에 케이는 화들짝 놀라며 엉겁결에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휀을 향해 아신도를 휘둘렀다. 케이의 아신도는 휀의 목 바로 옆에서 멈추었고, 케이는 십년 감수했다는 듯 아신도를 거둔 후 한숨을 푸우 쉬며 휀을 향해 소리쳤다.

“기를 지우실 상황에서 지우세요!! 이런 긴박한 상황에 기를 지우시면…앗?”

케이의 말을 듣는지 안듣는지, 휀은 말 없이 자신의 코트를 케이에게 넘겨주었고, 케이는 신기한 일을 당했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휀을 바라보았다. 휀은 동쪽을 향해 걸어가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 코트를 입고 있으면 마법에 의해서 죽는건 면할 수 있지. …왕비를 위해서라도 입고 있는게 좋을거야.”

휀의 알 수 없는 그 말에, 케이는 인상을 쓴 채 그를 따라가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마 마마를 위해서라니요!!!”

그러자, 휀은 귀찮다는듯 그 자리에 섰고, 케이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충고하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 나라 왕도 너에게 그랬지. …왕비이기 이전에 네 어머니라고. 어떤 나쁜말이 들려도 낳아준 사람을 믿는게 좋아. …그 전에 목숨을 보존해야하니 그 코트를 입어. 입기 싫으면 덮고 자던지….”

휀은 다시 동쪽 성문으로 향했고, 케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계속 지은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슈렌과 사바신은 일찌감치 현장으로 달려간 상태였다. 병사들의 시체들로 만든 산 위에 올라서서 가만히 빛을 뿜어내고 있는 그 존재를 본 슈렌은 오래간만에 크게 뜬 눈을 움찔거리며 중얼거렸다.

“…조커 나이트…같군. 기의 느낌이 그래.”

그 말에, 사바신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확실히 그렇긴 한데 그래? 하지만…이 기의 수준은 그 쓰레기 나이트의 것이 아니야…! 게다가 어둠의 힘이 아닌 빛의 힘…!!!”

슈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시체의 산 꼭데기에 올라서 있던 조커 나이트가 조용히 입을 움직였다.

「쿠쿠…약자들은 필요 없다, 휀·라디언트를 데리고 와라…!! 난 그녀석과 결판을 내고 싶다…!!!」

그 말을 들은 슈렌과 사바신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사바신은 심각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을 말려야 하나…? 네 말로는 조커 나이트라는 녀석 저번에 휀 앞에서 꼬리도 못내리고 사라졌다고 했잖아?”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 어쩔 수 없지…. 게다가 대상자도 왔으니….”

슈렌의 말 대로, 휀은 어느새 슈렌과 사바신의 곁에 와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슈렌과 사바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휀이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백색 전투 코트를 입고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휀은 조커 나이트에만 시선을 둔 채 둘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이나 보호하도록.”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슈렌과 사바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궁과 제궁을 향해 각각 사라져 갔다. 슈렌과 사바신이 주위의 병사들이나 궁인들을 모두 피신시킨 덕분에 성의 동쪽에 남은 것은 휀과 조커 나이트 뿐이었다.

「키하하하핫…좋아 좋아, 너도 조용한걸 좋아하나 보군….」

조커 나이트는 자신이 밟고 서 있던 병사들의 시체 더미를 어디론가 증발시킨 후 휀의 앞에 섰고, 휀은 그가 코 앞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 없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조커 나이트는 계속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휀을 한번에 날려 버리고 싶었으나, 나중에 천천히 요리한다는 생각으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쿠쿠쿠…내가 무서운거냐? 왜 아무 말도 안하고 옷만 매만지는거지?」

“…음? 왔었군…미안.”

휀은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조커 나이트를 흘끔 올려다본 뒤 거리를 적당히 벌렸고, 조커 나이트는 이를 악물며 어께에 걸치고 있던 긴 헝겁을 양 팔목에 묶은 후 마력을 방출하며 휀에게 소리쳤다.

「자아, 저번과 같이 치욕을 당하지는 않겠다!!! 이 한방으로 너와 이 성, 그리고 단 하나 남은 영혼의 기둥을 날려버릴 것이다—!!!!!!!」

그 말과 동시에, 조커 나이트의 헝겁에선 엄청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휀은 표정을 약간 굳히며 중얼거렸다.

“…처음보는 무기군….”

엄청난 빛을 내던 헝겁은 점점 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위로 붕 뜨는가 싶더니, 곧 조커 나이트의 양 팔을 끝으로 거대한 고리의 형태를 만들었다. 휀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보이진 않았지만, 무언가가 조커 나이트의 헝겁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휀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자신의 양 팔을 교차해 방어태세를 취하였고, 그의 흰 장갑에선 붉은색의 고대어 심볼이 떠올랐다. 그 상태에서, 휀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입자가속포(粒子加速砲)…같군.”

휀이 방어태세를 취한 모습을 본 조커 나이트는 더더욱 자신감이 생긴듯 크게 웃으며 휀에게 소리쳤다.

「쿠하하하하하하하핫—!!!!! 잘 느껴보아라, 신을 능가하는 나의 힘을, 그리고 너의 무력함을—!!!!!」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