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681화
휀은 장로와 헤어진 즉시 제궁을 나서기 시작했다. 장로가 아무런 생각 없이 말했던 확대 축소에 관한 얘기가 휀의 기억 속에 잠자던 무언가를 깨운 것이었다. 한참 제궁을 나서던 휀은 리디아와 함께 식당에서 나오던 바이칼과 마주쳤고, 바이칼은 휀을 흘끔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어딜 가시나. 뭐, 도망가도 말은 않겠….”
“… 풋!”
순간, 휀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겨우 웃음을 참았으나 그의 표정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휀의 갑작스러운 이상 반응에 바이칼은 말을 잊고 말았고 리디아는 현재 벌어진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후, 겨우 정색을 한 휀은 굳은 표정으로 바이칼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왕비를 볼 생각은 없나. 너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데….”
“… 흥,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아직 내 눈에 띌 정도의 여자가 없어서….”
“풋–!”
휀은 다시금 웃음을 참지 못했고, 이번엔 비틀거리기까지 하며 바이칼에게서 멀어져 갔다. 바이칼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저 녀석까지 무너지는 건가.”
“오라버니, 이상해요.”
리디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휀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 . . . . . . . . .
지크의 집에 도착한 휀은 지크와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과자를 먹고 있는 시에에게 다가갔고, 시에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은 뒤 강하게 뽑았다.
“으악! 무슨 짓이야 휀!”
시에는 머리카락이 뽑히는 게 상당히 아팠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화가 난 얼굴로 휀을 쏘아보았고, 휀은 뽑은 시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둥글게 말며 지크에게 말했다.
“지크,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음? 무슨 말, 대장?”
지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휀을 바라보았고, 휀은 시에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뒤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화이트 나이트에게 파일럿이 존재한다는 것.”
“… 우, 우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 지크는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기 시작했고 시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휀은 표정 변화 없이 지크를 바라보았다.
“아아아악!!! 난 결백해!!!! 결백하단 말이야–!!!!”
“….”
휀은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고, 시에는 계속 괴로워하고 있는 지크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 . . . . . . .
휀은 조용히 장로의 조직 검사·분석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보호 안경을 눈에 쓰고 있는 장로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장로는 시에의 머리카락이 담긴 시험관을 휀에게 보여주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처음 보는 조직입니다. 기본적인 구조는 단백질과 같고, 또 성장도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분석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우선, 표본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단단히 뭉쳐져 있고 또 어떤 산성이나 염기성 액체에도 녹지가 않습니다. 시에라는 아이, 이 머리카락이 뽑힐 때 상당한 통증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보통 인간이 머리카락을 뽑을 때 느끼는 통증과는 차원이 틀릴 겁니다. 과연 멀린 경의 기술은 대단하군요.”
“… 그렇습니까.”
휀은 한숨을 지으며 눈을 감았고, 장로는 시험관을 특별히 준비된 케이스에 보관하며 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직은 화이트 나이트의 비밀을 알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의 수준으로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듯하니 차차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요.”
“… 알겠습니다. 그럼 화이트 나이트에 대한 것은 일단 접어두도록 하고, 뉴델리 공습 작전에 대한 사항을 검토해 보도록 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
이틀 후, 드래고니스는 오전 다섯 시를 기해 둘로 천천히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전투용 지역과 주거용 지역이 하나로 되어 있던 드래고니스는 이제부터 개시될 전격 작전을 대비해 전투 지역만을 움직이기로 했고, 뉴델리 공습 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호주에 남을 주거용 지역을 위해 대부분의 함대가 남기로 해서 전투 지역이 없을 때 주거용 지역이 파괴당할 가능성을 상당히 낮추었다. 완전히 분리되어 다른 고도로 떠오르는 전투 지역을 보며, 드래고니스 주거 지역의 주민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주민들 속엔 지크의 어머니 레니와 시에, 그리고 라이아의 모습이 있었다.
워프 엔진에 에너지가 모이는 동안, 휀은 바이칼 대신 전룡단의 앞에 섰다. 올라갈수록 쌀쌀해지는 공기,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 휀은 바람에 흔들리는 자신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기며 전룡단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서룡족의 명예를 위해? 너희들보다 하등한 인간을 위해? 동룡족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으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전룡단들은 즉시 주거 지역으로 돌아가라.”
“….”
전룡단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휀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행성은 신계의 모든 행성 중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고 선과 악, 서룡족과 동룡족으로 대표되는 모든 대립 관계의 중립 지역이기도 하다. 이 행성이 어느 누구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신계의 균형은 깨어지게 되고 모든 세상은 혼돈에 빠지고 만다. 너희들은 이제 서룡족만의 군대가 아니다. 저기 계시는 이 행성의 성계 신 세이아님의 친위부대이다. 몇 달 전, 너희들이 장난으로 외쳐왔던 그 말, ‘여신을 위해’라는 말. 이젠 그 말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제 나도 더 이상 너희들에게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검으로 보여줄 것이다.”
휀은 말을 마친 뒤 단상에서 내려왔고, 곧이어 예전엔 그렇게 입기 싫다던 드레스를 입고 오래간만에 얼굴과 머리를 단장한 세이아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전룡단들은 그녀가 단상 위에 올라서자마자 숨을 죽였다. 그녀의 몸에서 부드럽게 뿜어지는 빛과 같은 분위기. 어제까지 전룡단들이 봐 왔던, 시장에서 찬거리를 사 가던 세이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이아는 멋쩍은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웃어 보였고, 곧 신의 공명음으로 모든 전룡단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우선, 이 자리엔 계시지 않는 가즈 나이트, 리오·스나이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변변치 못한, 그저 소경의 시골 여자를 어느 사이에 ‘신’이라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으니까. 물론 제 운명인 탓도 있지만, 그분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분과의 만남도 운명일 수 있겠군요. … 이제 전 그분의 의지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그분께서 목숨을 바치시면서도 기원했던 이 전쟁의 종결…. 우리에겐 아무 소득도 없겠지만 우리의 아이들에겐 크나큰 행복이 되어 줄 이 전쟁의 종결을 감히 여러분께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가즈 나이트 여러분들과 데스 발키리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들의 왕이신 바이칼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을 믿어주십시오. … 저 역시 여러분들과 함께입니다.”
그때, 전룡단이 감상에 젖은 눈으로 박수를 칠 사이도 없이 바이칼이 불쑥 단상 위로 올라왔고, 등의 칼집에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뽑아 하늘 높이 올리며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중력 닷을 올리고 돛을 내려라! 제룡함, ‘브리간테스’ 출항!! 전원 제 위치로!!!”
“오오오오오옷–!!!!”
바이칼의 신호에 따라, 전룡단들은 단장들을 중심으로 재빨리 해산하며 제 위치로 갔고, 웨드 안에서 그것을 보고 들으며 조금 후 있을 대 전투를 대비하던 웨드 파일럿들은 씨익 웃으며 웨드의 시동을 걸었다.
거대 전함, 브리간테스의 수십여 개에 달하는 돛이 크게 펴짐과 동시에, 브리간테스 자체는 오색의 빛을 내뿜으며 워프 드라이브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 빛을 보며 드래고니스 주거 지역에 있던 모든 주민들은 두 손을 모아 주신에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아버지, 남편, 자식, 형제, 친구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며….
브리간테스의 마스트 위에 홀로 서 있던 화이트 나이트는 마치 숨을 쉬는 사람처럼 몸체를 크게 꿈틀대며 바닥에서 올라오는 오색의 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허리에 장비된 두 개의 오리하르콘 소드를 꺼내 들었고, 두 검의 길쭉한 코어에서 반물질의 칼날이 생성됨과 동시에 브리간테스는 워프 드라이브를 개시하기 시작했다.
※※※
“이봐, 장군들께서 분명 서룡족이 오늘 내일 안으로 쳐들어올 거라 하셨는데, 그 오늘 내일이 벌써 보름이 지났잖아. 진짜 오긴 오는 걸까?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음… 그럼 우리로서는 바랄 건 없겠지. 에구, 누가 이기든 간에 빨리 이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구먼. 그건 그렇고 서룡족 녀석들, 그 무적이라 불리던 패왕 리오·스나이퍼 녀석이 전사한 이후 조용한 걸 보니 전력이 많이 상실되긴 했나 봐. 아직까지 조용한 걸 보니 말이야.”
뉴델리 외곽에서 습기와 싸우며 보초를 서는 동룡족 병사들에게 낙이라고는 담배와 잡담뿐이었다. 한 달 가까이 아무런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그곳은 그야말로 평온했다. 다만, 밤에는 그렇지 않았다.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끊기지 않는 비명 소리…. 밤엔 바이오 버그들의 식인 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참 수다를 떨던 두 병사 사이에, 역시 심심함을 담배로 달래던 한 고참 병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이봐, 패왕 녀석이 죽었다고 너무 안심할 건 없어. 내가 모스크바에 주둔했던 친구한테 들은 얘긴데, 패왕 녀석보다 더 무서운 광황 녀석이 이 세계에 있다 하더라구. 모스크바 전투에서 흘끔 본 것 같다고 하던데….”
“예? 정말입니까?”
한 병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자, 다른 한 병사도 뭔가 들은 것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나도 비슷한 소문은 들은 것 같아. 한 달 전인가 중동 어떤 지역에 소 잡는 칼 비슷하게 생긴 대검을 든 회색 피부의 미치광이가 기동 함대를 두 개나 부수고 함선 외벽에 병사들 내장을 붙여 놓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 기동 함대를 두 개나 부술 정도로 강한 회색 피부의 미치광이는 암왕 바이론이라는 녀석뿐이거든. 아무래도 이 세계에 알게 모르게 가즈 나이트들이 많은 것 같아.”
부스럭–
그때, 근처의 파괴된 폐허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고 한참 얘기를 나누던 병사들은 흠칫 놀라며 그쪽에 시선을 돌렸다. 무엇일까 생각하며 긴장감을 높이고 있을 때, 한 사나이가 부서진 담벼락을 돌아 병사들 앞에 나타났고 동룡족 병사들은 그 남자의 엄청난 덩치에 움찔하며 무기를 빼 들었다. 허름한 검은 코트에 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그 남자는 모자 밑에 생긴 음영에서 붉은색 안광을 뿜어내며 씨익 미소를 지었고, 곧 굵디굵은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크크큭… 병사들 내장을 무슨 재주로 함선 외벽에 붙여 놓나. 난 뇌수를 발라 놓은 기억밖에 없는데… 크크크크큭….”
“히, 히이이익–!?”
병사들은 순간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린 뒤 임시로 마련된 바리케이트의 문 안으로 숨었고, 검은 복장의 사나이는 자신의 모자와 코트를 벗어 바닥에 내 던진 뒤 등에 찬 거대한 대검을 뽑으며 바리케이트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크크크크큭… 죽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