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690화
3개월 전.
“… 후, 후훗…. 하하하하하핫…!!!”
아란의 디스파이어가 자신의 목을 베는 걸 눈을 감고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리오는 갑자기 들려오는 아란의 웃음소리에 움찔하며 다시 눈을 떠 보았다. 아란은 디스파이어를 옆에 꽂은 채, 바위 위에 앉아 미친 듯이 웃으며 리오에게 말했다.
“… 후후훗… 이게 다 당신 때문이죠… 후훗…. 수백 년간 수십 번이 넘게 경험해 왔던 전생과 죽음의 고통… 그 끔찍한 고통이 절 이렇게 변화시켰어요….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게 있더군요…. 난 역시 당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 당신이 날 죽이는 건 그리 상관하지 않지만… 후후후후후훗….”
“….”
리오는 말없이 아란을 바라보았고, 디스파이어를 거둔 아란은 곧 리오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킨 후 부축을 하며 말했다.
“갈 곳이 있어요. 천천히 따라오세요.”
“… 갈 곳?”
아란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결국 리오는 하는 수 없이 아란과 함께 어디론가 향해 가기 시작했다.
…………………….. . . . . . .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된 리오가 아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폐허가 된 한 대학의 건물이었다. 건물 근처에 리오를 앉혀놓은 아란은 주위를 한참 두리번거리며 확인하다가, 이윽고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나무의 옆을 강하게 쳤고 동시에 건물의 앞엔 지하로 통하는 작은 비밀 통로가 열려졌다. 비밀 통로를 연 아란은 리오에게 안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고, 리오는 힘겹게 몸을 일으킨 뒤 아란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 어째서 대학 지하에 이런 시설이 만들어진 거지?”
리오는 통로의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아란에게 물었다.
“… 만들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요. 아마… 당신들 앞에 화이트 나이트라는 웨드가 나타나기 얼마 전… 정도? 자세한 건 내려가면 알게 돼요.”
“…?”
끝없이 내려가기만 하던 리오는 문득 또 하나의 의문점이 들었다. 통로의 어떤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바깥에서부터 느껴지던 모든 것이 거짓말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윽고, 리오와 아란은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고 아란은 옆에 있는 번호 입력기를 통해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곧, 문은 쉽게 열렸고 리오는 문 안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기운에 눈썹을 꿈틀대며 그 안으로 들어섰다.
“… 이곳은 대체… 음?!”
안으로 들어서던 리오는 멀리 앞쪽에 보이는 하얀색 물체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어디서 만들어지고,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아무도 모르고 있던 화이트 나이트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화이트 나이트…?! 도대체 여긴 뭘 하는 곳이지 아란?”
“… 내가 대신 설명해 주겠소, 리오군.”
“…?”
리오는 자신의 옆쪽에서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그쪽을 바라보았고, 하얀 실험복과 긴 수염, 뒤로 깔끔히 넘긴 흰 머리가 멋지게 어울리는 그 노인은 화이트 나이트 쪽을 바라보며 리오에게 말했다.
“… 급하게 만드느라 서룡족의 부품과 오리하르콘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구했지만, 성능은 뛰어난 기체라네. 베히모스들보다 더…. 물론 생체적인 능력과 동력의 문제 때문에 베히모스보다 오랜 시간 동안 돌아다닐 수는 없지만 말일세.”
“… 그렇군! 예전 웨드의 부품과 오리하르콘 결정체를 가져간 사람이 바로…! 그럼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리오에게 말했다.
“… 멀린이라 하네. 자아,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하세. 자네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진 않은 것 같으니 말일세.”
……………………… . . . . . . .
“… 그렇군요. 베히모스들이 저와 싸우며 수집했던 자료를 토대로 화이트 나이트의 인공 지능을 만드셨던 것이군요. 그런데, 화이트 나이트를 만드실 때 왜 서룡족의 기술력을….”
멀린은 스푼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뜨거운 차를 저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 난 생명체를 인공적으로 탄생시킬 수 있는 허가를 신에게 받은 유일한 사람일세. 하지만, 내가 만든 생체 병기들이 모두 와카루라는 자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이후, 난 생체 병기들을 만들지 않기로 맹세했다네. 그런데, 내가 모시고 있는 분께서 **’파괴신’**의 예언이 현실로 드러날 때가 되셨다면서 나에게 하나를 더 만들 것을 부탁하셨고, 결국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병기를 만들기로 했다네. 그래서 생각을 하던 도중, 서룡족이 만든 **’웨드’**라는 것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지. 파일럿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기계…. 그리고 시간도 급했던 나머지 결국 서룡족의 기술력을 훔치기로 했던 것이네. **’클로머트’**에겐 미안했지만….”
한참 얘기를 듣던 리오는 멀린의 입에서 **’클로머트’**란 이름이 나오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 ‘클로머트’? 서룡족의 장로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그렇다네. 나의 오랜 친구지. 내가 생물과 전기 전자 분야의 전문가라 한다면, 그 친구는 물리와 화학의 전문가이지. 드래고니스에서 사용되는 듀얼–하이드로 레이저의 설계와, 오리하르콘 결정질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한 사람이 바로 그 친구지.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와 그 친구의 지식이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 화이트 나이트이고, 그 성능은 가즈 나이트의 능력도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어. 자네의 행동을 따라 한 것뿐인 인공 지능으로는 화이트 나이트 역시 언제 또 와카루의 장난감으로 변할지 모르는 것이었거든. 그러다가, 난 우연스럽게도 저 아란이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지.”
리오는 곧 아란을 돌아보았고, 한참 차를 마시던 아란은 눈을 감으며 리오에게 말했다.
“… 멀린경을 뵙자마자 여쭤봤죠. 제가 살고, 또 당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말이에요. 유감스럽지만 전 아롤님에 의해 데스 발키리로 다시 태어날 때, 당신의 영혼에 의해 내 영혼이 반응을 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그런 덕분에, 당신의 영혼이 저와 같은 차원계에 있게 되면 제가 6개월 이상은 살지 못하게 되어 있었죠. 제가 데스 발키리를 떠나 당신과 함께 있지 못하게 만든 방편이라고나 할까… 후훗. 그 6개월이란 시간 이상으로 저와 당신이 같이 있으려면 다른 한 사람의 영혼이 이 디스파이어 안에 봉쇄되어야만 가능하게 되어 있어요. … 제 궁극적인 임무는 가즈 나이트들의 제거….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세계의 또 다른 임무가 늦어지면서 결국 그 6개월이란 시간은 점점 지나가게 되었고, 전 다급해지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당신의 영혼을 쉽게 디스파이어 안에 가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운이 좋게도 멀린경을 뵙게 되어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죠.”
“… 그런… 말도 안 되는…!!!”
리오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한 차원계 안에 6개월 이상 같이 있게 된다면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아란의 운명…. 그리고, 알기 전이라도, 안 지금이라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자신의 머리가 증오스럽기도 했다.
“… 그래서, 아란의 말을 들은 난 화이트 나이트 계획을 완벽히 만들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화이트 나이트 안에 특별한 스텔스 장치를 첨가시켰다네. 자네의 모든 것이 화이트 나이트 외부로는 절대 나가지 않는 것이지. 그렇게 모든 준비를 갖춰두고 있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오늘 동룡족의 기습으로 기회가 생긴 것이네. 자네의 생사가 불분명하게 될 기회가 말일세.”
“… 예? 하지만, 그런 것 정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해도….”
“… 이 해결 방법이 알려지게 되면 문제가 생기고 말 것이네. 가즈 나이트들을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악신계에서 아란에게 또 무슨 방법을 쓸지 모르는 일이거든. …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만 화이트 나이트를 사용해 주게. 그것이, 전생의 인연이란 운명을 지닌 아란을 돕는 길일세. 괴롭겠지만 참아주게.”
“….”
리오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지금의 사건들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행방불명이 된 상태로 자신의 동료들을 모른 체한다는 것은 리오로선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화이트 나이트가 되지 않으면 아란은 영원히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별다른 수단은 없었다. 결국, 결심을 굳힌 리오는 다시 멀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단, 부탁이 있습니다.”
“음? 뭔가?”
“… 화이트 나이트를 꼭 타야 하는 것 말고, 다른 대비책을 찾아 주십시오. 제가 죽었다는 사실에 당면했을 때, 슬퍼할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 알겠네.”
멀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리오는 곧 아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 진작에 말해줬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너무 아쉽군.”
“… 아쉬워할 것은 없어요. 아까 당신을 처치할 기회였을 때, 난 솔직히 당신의 영혼을 이 디스파이어 속에 넣고 싶었거든요.”
아란의 말은 차가웠다. 하지만, 그 말은 리오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리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아란을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 다시 헤어져야만 할 것 같군. 미안해.”
“…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버릇이 생겼군요. 예전과는 달리… 후훗….”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아란의 표정엔 깊은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
“결국, 널 세상에 다시 나오게 하기 위해 그녀가 자살했다는 건가.”
한참 함선을 격침시키며 리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바이칼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리오에게 말했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비행형 바이오 버그들을 한참 떨어뜨리던 리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 역시 괴로웠을 거야. 자신 때문에 3개월 동안 너희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던 내 모습 때문에 말이야. 그녀가 데스 발키리로서 다시 태어난 것도 결과적으론 내 책임…. 그녀는 타인들의 괴로움을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너무 착했어. 수백 년간 변함없이! 헙–!!!”
리오는 다시금 검을 휘두르며 말을 맺었고, 바이칼 역시 다시금 브레스를 뿜으며 함선들을 격침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