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696화
“… 마마,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까?”
완전히 재생되어 캡슐 안 액체 속에 웅크리고 있는 넬을 보던 멀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더에게 물었고, 책을 읽고 있던 아더는 멀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되물었다.
“음? 뭐가 말인가?”
“… 분명 수면 마법의 효과도 사라졌고, 생체 기능도 완전히 회복되어 이론상으론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이 소녀는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 한 것일까요?”
“… 글쎄. 난 그쪽 방면엔 그리 아는 게 없으니 뭐라 답해 줄 수가 없군. 하지만, 뇌와 척수만으로 사람을 다시 재생시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값어치가 있으니 계속 지켜보세나. 그리고 자네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나. 아까 보니 제궁 안에 좋은 골프장이 있던데, 나하고 거기나 함께 가세.”
“…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가시지요.”
아더와 멀린은 곧 연구실을 나섰고, 아무도 없는 연구실 안엔 곧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 뒤, 문이 다시 열렸고 금발의 싸늘한 표정을 지닌 남자, 휀이 안으로 들어왔다. 휀은 곧 캡슐 앞으로 향했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유리벽 안에 있는 넬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꼭 그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나셔야만 했습니까.”
알 수 없는 휀의 질문에 대답하듯, 넬의 눈이 반짝 떠졌고 그 시선은 휀의 냉엄한 표정에 돌려졌다. 곧 넬은 빙긋 웃었고, 뭐라 말하듯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그리워하던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모습만 같은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죽은 그 사람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에겐 슬픔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 슬픔조차 느낄 시간이 없습니다.”
휀은 눈을 감으며 대답했고, 캡슐 안의 넬은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 정말 강해졌군. 예전에 나를 바라보던 두려움 섞인 눈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이야. 세월이 자네를 그렇게 바꿔놓은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자네의 본 모습인가.」
휀은 다시 눈을 뜬 뒤 뒤에 있는 책상에 걸터앉았고,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대답했다.
“… 제가 냉정할수록 희생자는 줄어든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세월이 절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러자, 넬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그것이 자네의 본 모습이라네.」
“….”
휀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넬을 다시 바라보았고, 넬은 휀과 시선을 맞댄 채 말하기 시작했다.
「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봉사의 마음. 즉, 자네의 빛의 마음…. 예전과 달라진 것은 그 마음의 표현 방식일 뿐이지. 내가 소멸되기 전, 자네는 자신의 동료를 위해 수없이 목숨을 바쳤고, 내가 각성한 이후 자네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을 위해 그녀가 더 좋아하는 사람을 설득하고 그녀에게 돌아가라 그를 타이르고 있지. 다른 게 있나.」
“전 저보다 리오가 그녀에게 더 어울린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 후훗, 거짓말 같이 들리는군….」
“사랑이란 감정이 없다는 거짓말보다는 강도가 약하다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휀은 조용히 담배 연기를 흡입했고, 캡슐 안에서 휀을 바라보던 미카엘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 그래, 이제야 내가 자네에게 죽음을 당하기 직전 인간의 여성으로 환생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군. 800여 년 전엔 심한 말로 애송이에 불과했던 자네가 단 일순간 만에 왜 수만 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가 됐는지 이해가 갈 것 같아.」
“….”
「자네의 지금 그 모습… 난 그때 미래의 자네 모습을 본 것이라네. 어쩔 땐 무서울 정도의 냉정함을 보이지만, 그 내면엔 그에 상응하는 따뜻함을 가진 남자…. 비록 상냥함은 없다 하지만 말이지. 후훗….」
휀은 말없이 담배를 내렸고, 다시 넬을 바라보며 물었다.
“넬의 부모… 아니, 지상에서의 당신의 부모님께는 어떻게 설명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넬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 하하핫, 걱정하지 말게. 난 그분들을 사랑하니까. 난 때가 되어 미카엘로서의 기억을 되찾은 것뿐이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걸세. 그분들 앞에선 착한 딸로 돌아가야 하겠지.」
“… 훗.”
넬의, 아니 미카엘의 말을 듣고 있던 휀은 짧게 웃음을 지었고, 책상 위에서 몸을 일으킨 뒤 캡슐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 물론 표정은 다시 굳어진 상태였다.
“청소년기 소녀의 미소부터 되찾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오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 그래. 다른 사람들에겐 전부 이야기 하진 말게나. 알았지.」
“… 쉬십시오.”
휀은 다시 연구실을 나섰고, 넬은 눈을 감으며 다시 잠에 빠져들어갔다.
※※※
루이체는 리오와 소파에 마주 앉아 가만히 리오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쩐지 리오가 예전보다 더 말이 없어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예전에 비해 웃음도 많이 줄어들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는 탓이었다.
“… 오빠, 고민 있어?”
“….”
“리오 오빠!!”
“음?! 아, 놀랐잖아 루이체. 왜, 뭐 부탁할 것이라도 있어?”
리오가 평소와 같이 웃으며 물어오자, 루이체는 인상을 찡그리며 괜한 걱정을 했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전의 반응은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리오의 것이 아니었기에 루이체는 리오에게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몇일 전부터 버릇이자 취미던 칼 닦기도 안 하고, 그저 멍하니 앉아 생각만 하고 있으니 말이야.”
“… 아, 그냥… 그런 일이 있어.”
리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넘기려는 듯이 말했고, 뭔가 있다 생각한 루이체는 순간 리오의 뒤쪽으로 달려들어 팔로 그의 목을 죄며 협박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 어서 실토해!! 그냥 그런 일이 뭔지 어서 말해!!!”
“아아, 이거 놓고 좀 말해. 심각한 일이 아니라니까.”
“거짓말!!”
“… 후훗, 진짜라니까.”
리오는 웃으며 루이체의 팔을 간단히 풀은 뒤 고개를 돌려 그녀의 볼에 살짝 키스를 했고, 생각지 못한 기습에 루이체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으, 으윽…!! 이런 걸로 그냥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마!!”
“음? 어렸을 땐 볼에 뽀뽀해 달라고 안기던 네가 왠일이야?”
“그땐 그때고!! 어쨌든 빨리 말 해!!!”
루이체가 계속해서 이유를 묻자, 리오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고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루이체에게 말했다.
“… 잠깐 이리 와 볼래.”
“… 으응?”
루이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잠시 머뭇거렸다. 리오가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본 일은 거의 없는 탓이었다. 루이체는 곧 리오의 곁에 앉았고, 리오는 슬픈 얼굴로 루이체의 몸을 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리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루이체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으나, 곧이어 들려온 리오의 낮은 음성에 루이체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정상으로 돌아왔다.
“… 다른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것…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구나.”
“… 오, 오빠….”
“… 미안해. 너한테까지 걱정을 끼쳐서…. 난 아무래도 가즈 나이트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 같다. 결국엔 이렇게 무너져 버렸으니….”
“… 그만 둬 오빠!!!”
순간, 루이체는 리오를 강하게 밀쳐내며 소리쳤고, 인상을 쓴 채 리오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 오딘님의 말씀이 맞았어, 오빤 언젠간 다시 무너져 버린다고!!!”
“…?!”
“…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오딘님께서 그러셨어. 지하드가 무너짐과 함께 리오 오빠의 의지도 같이 무너진다고!!! 난 무슨 소린지도 몰랐고, 지하드가 무너진다는 뜻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 리오 오빤 무너졌어!!!”
“… 루, 루이체….”
“내 이름도 부르지 마!!! 지금의 리오 오빤 내가 아는 리오·스나이퍼가 아니야!!”
루이체는 그렇게 소리치며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고, 리오는 곧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깊숙이 숙여 버렸다.
“이거… 받어 오빠.”
그때, 방문이 다시 열렸고 루이체는 리오에게 투명한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영상 자료가 담겨 있는 투명한 기록 파일…. 그것을 받아 든 리오는 다시 루이체를 바라보았고, 루이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리오에게 울먹이며 가까스로 말했다.
“… 오, 오딘 님께서… 만약… 리오 오빠가 무너졌을 때… 그걸 오빠에게 건네주라고 하셨어…. 오, 오빠… 미안해….”
루이체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리오는 말없이 루이체가 건네준 파일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 오딘님….”
※※※
“도대체 뭘 하는 거냐 리오·스나이퍼!! 똑바로 수련을 하란 말이다!!!”
“쳇, 어차피 마법이 더 강력하지 않습니까!!! 검술 따윌 배워봤자 몇 명이나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것 말고 마법이나 더 가르쳐 주시죠!!!”
“이런 못난 놈!!!! 검은 중도에 멈출 수 있지만 마법은 그렇지 못하단 말이다!!! 일단 뻗어 나간 마법은 상대방이 되받아 치지 않는 한 결코 물릴 수 없어!!! 그리고, 가즈 나이트라는 것은 천사나 악마, 그 밖에 존재들을 꼭 죽이라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단순한 킬러가 아니야!!!! 넌 지금 가즈 나이트라는 신성한 직업을 그저 마법사의 버전 업 판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젠장, 전 지금 근신 중입니다, 좀 쉬게 해 주십시오!!!!”
“시끄럽다!!! 어서 검을 들어라!!!!”
“싫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화면을 통해 쏟아지는 일진일퇴의 폭언. 리오는 파일 안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의 옛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히 웃어 보였다. 게다가 자신이 오딘에게 검으로 깨끗이 패하는 장면과 패한 뒤의 처참한 자신의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화면에 떠오르자 리오는 결국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렇게 영상 파일을 보고 들은 지 한참 후….
“검이란 살생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 그러나,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그 성격은 정반대로 변하게 된다. 가즈 나이트도 마찬가지. 전투를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가진 완벽한 전투 기계지만….”
“…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 기계와 다른 점이지….”
리오는 스피커에서 들리는 오딘의 말을 도중에 따라 하며 다시 화면 쪽에 시선을 돌렸다.
“완벽한 기술,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듯, 가즈 나이트도 불로불사라 해서, 오래 살아왔다 해서 완벽해질 수는 없는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행동에 자신의 양심이 허락할 수 있을 정도로 책임을 진다면 완벽까진 못해도 비슷한 경지까진 오를 수 있다.”
거기서, 리오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화면에 비춰지는 자기 자신의 옛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화면 안의 리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가즈 나이트로서, 진정한 기사로서, 그리고 절 믿어줄 앞으로의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다 하겠습니다.”
현실 속의 리오는 그 대목에서 그만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리오가 잠시 사용하고 있는 지크의 방 한쪽 벽에 기대어 있는 디스파이어는 붉은색의 빛을 은은히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