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가즈 나이트 – 91화


밤이 되었어도, 바이칼은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얼굴엔 나타나지 않았지만 마음속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흥, 그 요새인가 뭔가를 완전히 박살 내버릴걸… 그러면 분풀이라도 될 텐데 말이야.”

이미 그의 머릿속엔 오후의 일은 잊힌 지 오래인 듯했다.

“후우… 숙소로 돌아가자. 어제보다 날씨가 추워졌는걸.”

가을이라지만 가이라스의 수도와 야룬다는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편이라서 밤이 되면 다른 곳보다 기온이 낮아졌다. 하지만 춥다는 것은 인간 등의 보통 생물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고 바이칼 같은 드래곤은 ‘추울 것이다’라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오후에 왔었던 상업지구를 지나치며 바이칼은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 갔겠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길을 걸어갔다.

“…?”

그러던 도중 사람들 몇 명이 모여있는 광경을 본 바이칼은 잠시 그곳을 바라보다가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키가 그런대로 큰 바이칼이어서 사람들 위로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여있는 사람들이 각각 말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이런… 아이가 쓰러져 있네요…?”

“폭격당한 곳에서 온 아이 같은데…?”

“아이니까 배가 빨리 고팠겠지요.”

“어머… 추워서 꽃까지 안고 자네요….”

그러나 각자 그렇게만 말하고 그저 구경만 할 따름이었다. 개중에는 그 쓰러진 아이에게 동전 몇 개를 던져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아이에게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 죽지는 않겠지, 돌아가자.”

바이칼은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다시 비집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추, 추워….’

아이는 입마저 떨어지지 않았다. 꽃을 꺾어서 종이에 아는 대로 싼 뒤에 팔러 다닌 것도 이틀이 되어가는 날이었다. 그러나 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 오후에 사줄 것 같은 표정의 미청년이 있긴 했지만 그도 역시 사주지는 않았다.

얼굴이 시려왔다. 이제 떨리는 것도 멈추었다. 차갑기만 하던 돌바닥도 이젠 따뜻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발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어, 엄마…?’

아이는 흐린 눈을 슬며시 떠 보았다. 하얀색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하늘에서 미소를 띠우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은 옷과 같이 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가야… 춥지…?」

그 사람, 여인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얼굴과는 대조적인 붉은 입술이 눈에 선명히 보였다.

「배도 고플 거야… 그렇지?」

아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흰색의 여인은 더욱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배가 안 고프게 해줄게… 안 춥게 해줄게… 후훗.」

그 여인은 작은 호리병을 꺼냈다. 녹색의 연기들이 이상하게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영혼을 줘… 아프지도 않을 거야… 영혼을 줘….」

그 여인은 하얀 손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도 살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착하지…? 괴롭지 않을 거야… 그래….」

아이는 여인의 손을 잡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너무나 추워서… 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조금만 더… 이제 넌 내것이야….」

툭.

아이는 번쩍 눈을 떴다. 그 여인의 하얀 손이 바닥에 소리를 내며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그런대로 맑은 목소리였다.

“꺼져라… 하찮은 귀물(鬼物)….”

그 여인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붉은 입술에선 하얀색의 송곳니가 돋아났다. 떨어졌던 손도 다시 달라붙었다. 체형도 변하기 시작했다.

“하급 사귀인 주제에, 나에게 대항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여인의 홍안이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덤빌 것 같은 기세엔 변함이 없었다.

「인간인 주제에… 이 아라테 님의 일을 방해하다니…! 너의 영혼도 가져가주마!!」

아라테는 그녀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청년의 팔에 깊숙이 박았다.

「후후, 너의 영혼도 이젠 내것이야… 으윽?! 커, 커억!!」

아라테는 푸른색의 피를 토하며 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러나 송곳니가 박혔던 청년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바이칼은 천천히 드래곤 슬레이어를 들었다. 아라테의 하얀 얼굴은 회색으로 변해 아까와 같은 백색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드래곤의 피는 강하지… 말로만 신에 대항할 수 있는 생물이 아니야. 보통 드래곤도 그런데 이 용제님의 피는 다를 줄 알았나.”

「뭐…?!」

아라테는 슬쩍 일어서며 도망치려는 기색을 보였다. 바이칼도 아라테에게서 눈을 돌려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아이는 멍한 눈으로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의식은 없는 듯했다.

「오, 오늘은 운이 없군!」

아라테는 전력을 다해 도망치려고 몸을 허공에 날렸다. 바이칼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크, 크아아아악―!!」

아라테는 날아오르다 말고 다시 한번 푸른 피를 허공에 뿌리며 몸을 떨었다. 바이칼은 천천히 뒤로 돌아서서 아라테를 보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네가 그 궁금증을 풀어줘야 하겠어.”

「크으으윽…!!!」

아라테는 대답도 잊은 듯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는 영혼의 울음소리였다.

「뭐냐…! 빨리 말해라!! 괴로워―!!」

바이칼의 얼굴엔 차가운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그는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러자 거기에 따라서 아라테의 몸도 지상으로 다시 내려왔다. 바이칼은 드래곤 슬레이어를 오른손에 고쳐 잡은 뒤 아라테의 몸을 왼손으로 교차해 잡아 올렸다.

“죽음의 귀신에게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후후후.”

번뜩이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칼날이 아라테의 목으로 조여왔다. 아라테는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바이칼의 손에 잡힌 이상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푸욱―!

툭! 소리와 함께 아라테의 몸 일부분이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이칼은 그녀의 신체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다시 드래곤 슬레이어를 자신의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라테의 두 동강 난 몸은 곧 푸른 연기로 화하여 서서히 사라져갔다.

“귀찮군….”

바이칼은 다시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아이는 신체의 움직임이 이미 정지한 상태였다. 맥박도 뛰지 않았다.

“…….”

바이칼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아이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오른팔로 아이를 꼭 껴안은 그는 다시 망토로 자신과 아이의 몸을 감쌌다.

“이 오빠는 남 잘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바이칼은 중얼거리며 혈색이 돌지 않는 아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 네가 네 부모를 만나 즐거워하는 표정을 볼 수가 없단 말이야….”

그는 아이의 조그마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살짝 자신의 숨을 아이의 폐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하아아암∼. 어이, 지크. 바이칼 못 봤냐?”

리오는 머리를 다시 묶으며 아침 운동을 하고 있는 지크에게 바이칼의 행방을 물었다.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지크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쳇, 너에게 그런 걸 물은 내가 바보지…. 죽지는 않겠지 뭐. 그런데 너 배고프지 않냐? 그렇게 말라 빠져가지고….”

지크는 한 팔로 균형을 잡은 뒤 몸을 제자리로 돌리며 투덜댔다.

“얼굴만 마른 건지 너도 잘 알잖아. 어제 저녁을 빼먹은 녀석이 누군데 이제 와서… 어라?”

땀을 닦던 지크의 손이 멈추자 리오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지크의 시선이 고정된 쪽으로 자신도 눈을 돌렸다.

“어라…?!”

둘의 눈에는 낯선 아이를 목마 태운 채 빵을 가득 사가지고 오고 있는 바이칼의 모습이 들어와 있었다. 바이칼은 둘을 보고서 잠시 움찔했으나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계속 그들의 숙소로 향했다. 리오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지크에게 전음으로 얘기했다.

「저 녀석이… 어린아이에게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노망이 든 걸 거야… 우리도 저러면 어떡하지?」

둘의 이상한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칼은 그들의 앞을 당당히 걸어갔다. 숙소에서 나오며 눈을 비비던 클루토도 그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바… 바이칼 씨?!”

바이칼은 안되겠다는 듯 아이를 내려놓으려 했지만 아이가 더 태워달라며 때를 쓰는 바람에 결국 아이를 목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아 아이와 함께 빵을 씹기 시작했다.

“꼬마… 말해두겠는데, 오늘 하루만이다.”

표정을 바꾸지 않고 바이칼이 말해도 아이는 방긋 웃으며 빵을 꼭꼭 씹어 삼켰다. 리오는 아이의 옆에 앉으며 바이칼에게 아이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이 아이는 뭐지? 숨겨둔 아이가 있었냐, 아니면…?”

바이칼은 리오의 눈을 쏘아보며 그의 입을 막았다. 리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빵 하나를 집어 들며 중얼댔다.

“말하기 싫다면 말아라, 어, 옷도 새로 산 거잖아?”

아이의 옷이 너무나도 깨끗해서였다. 분명 어제 입었던 옷은 아니었다. 바이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빵을 맛있게 먹던 아이는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급한 듯 바이칼의 망토 자락을 잡아당겼다.

“뭐냐 꼬마.”

“베라 목말라요….”

그 광경을 보던 지크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숙소로 들어가 우유를 한 병 가지고 나와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 이름이 베라야? 훗, 어쨌든 속을 알 수가 없는 녀석이라니까, 이 기생오라비는 말이야….”

바이칼은 못 들은 척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

가벼운 가을바람이 바이칼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손으로 쓸어 올렸다. 꽤나 낭만적인 버릇이었다.

“리오, 오늘은 어디로 놀러갈래?”

“글쎄다, 키세레님이 있는 병동으로 갈까, 아니면 상가 지구로 갈까?”

분위기를 깨는 둘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칼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아이를 구한 이유를 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구할 마음이 있었는지는 바이칼만이 알 뿐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