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93화
리오는 숙소의 의자에 앉아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헝겊 아대를 팔에 끼운 후 가죽끈으로 단단히 감아준다. 겉으로 보기엔 보통 가죽끈으로 보이지만 굉장한 마법 방어력을 지니고 있는 강력한 방어구 중에 하나였다. 멋으로만 아대를 감기 위해 리오가 지니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망토도 색깔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리오가 착용하고 있는 방어구의 전부였다. 리오나 지크가 물리적인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맞지 않을 것이면 착용할 필요는 없다’였다. 두터운 방어구를 착용할수록 전투 시에 필요한 집중력이나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도 그중에 하나였다.
“자, 끝났다. 지크 녀석은 칼이나 닦고 있겠지….”
준비를 다 끝낸 리오는 지크의 방문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예상대로 지크는 정좌를 한 채 조용히 무명도를 닦고 있었다. 정신집중의 한 방법이기도 했고 무명도를 분신처럼 여기는 지크의 대 전투 전의 버릇이었다. 힘있게 칼날을 문지를 때마다 칼날의 독특한 광택이 햇빛을 강하게 반사시켰다. 사용자의 기에 반응하여 반사광의 색을 바꾸는 그 칼은, 현재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붉은색을 띨수록 사용자의 사념(邪念)이 강해지는 것이고, 푸른색으로 갈수록 잡념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어준다. 명계에서 만들어진 탓에 그럴지도 모른다.
칼날의 끝까지 다 닦아낸 지크는 칼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오 녀석은 아대에 끈이나 매고 있겠지….”
중얼거리며 그는 방문을 나섰다. 역시 그들은 형제였다.
“어라, 다 끝났냐?”
지크는 거실에 서있는 리오를 향해 물었다. 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자는 손짓을 해 보였다.
“자, 우리들이 먼저 가서 길을 닦아놔야지. 그런데, 바이칼 이 녀석은 왜 안 나오는 거야? 시간 없는데….”
바이칼도 나름대로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한사코 놓아주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표정엔 떠오르지 않았지만 굉장히 난감한 상태였다.
“싫어―! 나도 같이 갈 거야!!”
자신의 바지를 잡고 우는 아이를 달래는 건 바이칼에겐 취미가 없는 일이었다. 떼어놓으려고 힘을 줄수록 아이는 더욱더 그를 꼭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바이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올렸다.
‘일어서면 내가 없어진 걸 알겠지, 은혜를 베풀어 죽이진 않으마….’
손으로 아이를 내려치려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바이칼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봐, 뭐 하느라고 늦게 나오는 거야!”
거센 말소리, 바이나였다. 바이칼은 아이를 치려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다구, 아이는 그냥 놓고 나오면 되잖아!”
바이칼은 굳은 표정을 더더욱 굳히며 바이나를 바라보았다.
“… 넌 노크도 모르나….”
바이나는 움찔하며 다시 방문을 나섰다.
“칫, 어쨌든 빨리 나와! 기다려주진 않을 거니까!”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바이칼은 아이의 조그만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 너, 계속 날 잡고 울어대면 저 무서운 여자에게 줘버릴 거야.”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바이칼을 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것만은 싫은 모양이었다.
“… 기다리고 있어. 며칠 후에 올 테니까….”
바이칼은 말을 마치고 일어나려다가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손수건으로 아이의 눈가에 묻어있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이 눈에 고여있으면 토끼눈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무섭다고 피할 거야….”
리오, 지크, 그리고 바이나는 바이칼이 나오자마자 바로 북문으로 향했다. 그곳에 저항군 전부대가 집결해서 각 부대 대장들에게 지시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어, 누나는 부하가 없나 보지?”
지크가 바이나에게 팔을 기대며 얘기하자 바이나는 슬쩍 비켜서며 대답했다.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그리고 난 태라트님 직속부대의 부대장이니까 할 일은 거의 없다구. 전장에서 지휘하는 것 빼고는 말이야.”
지크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호오∼, 그랬어?”
그들이 얘기하는 동안 선발 기마대는 벌써 북문을 나서고 있었다. 병사들의 눈에선 두려움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가족이 당해왔던 수개월간의 고통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도로 진군하는 것이 두 번째인 고참 병사들도 오히려 신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사실 그전의 수도 공방전도 저항군의 승리가 거의 확실한 상태에서 대역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정예부대가 갑자기 변방에서 돌아왔고 왕비의 친위대라는 괴한들도 같이 나타나 당황한 저항군을 패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다행히 각 부대의 대장들이 몸을 희생해가며 태라트를 지킨 결과, 태라트와 몇 개의 부대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수도에서 탈출할 수가 있었다. 수도에서 당한 흉터가 아직도 몸에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참들은 그 전투를 자랑으로 여겼다. 결코 그들은 비굴하게 싸우다 도망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좋아, 우리들은 수도까지 가는 길목을 선발대보다 먼저 정찰하는 거야. 그래야 진군 속도도 빨라지고 그전에 당하는 피해도 없겠지.”
리오의 말을 들은 지크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불만인 듯 말했다.
“어이, 리오. 그보다 우리가 먼저 수도를 때려 부수면 그만 아니야?”
그 얘기를 들은 바이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어댔다.
“하, 참나. 당신들 셋으로 어떻게 가이라스 수도를 때려 부순단 말이야? 너무 웃겨서 말이 안 나오네?”
리오는 그 말을 그냥 웃으며 넘겼다. 더 이상 얘기해봤자 바이나가 ‘꿈을 먹는 소녀’가 아닌 이상 자신들의 정체를 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자, 출발하자구.”
긴 머리채를 흔들며 걸어 나가는 리오를 저편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리오―! 잠깐만요!!”
리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세레…?”
리오는 셋에게 먼저 가라는 얘기를 한 후에 키세레가 오고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아, 하아… 찾았었어요….”
앞에서 멈춘 키세레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허리를 굽혔다. 리오는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서있었다. 숨이 진정된 키세레는 천천히 리오를 올려다보았다.
“흐음… 절 찾으신 이유가 뭐예요? 급한 환자라도 생겼나요?”
키세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깜박였다.
“아니요, 인사를 하려고요….”
리오는 어깨를 으쓱이며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하∼ 작별 인사를 하려고 여기까지 오실 이유는 없는데, 어쨌든 고맙습니다.”
“아, 아니에요!”
리오는 움찔했다. 키세레가 차가운 반응을 했으면 했지 갑자기 화를 낸 적은 거의 없어서였다. 키세레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 고마워요….”
리오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고맙다니….
“티퍼와의 약속을 지켜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 애의 누나를 찾아주신 거요…. 알고 계셨겠지만….”
리오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키세레의 키에 맞춰 자신의 허리를 굽혔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인 걸요?”
키세레는 움찔하며 리오를 바라보았다.
“에에?”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겠지요. 아마 하늘이 도와주신 덕택일 겁니다. 저는 그때 티퍼에게 부탁을 한 것 외에는 한일이 없습니다. 당신과 티퍼가 동생과 누나 관계인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키세레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생각해왔던 자신의 계획이 무참히 깨어져서였다.
“아, 그런데 키세레님도 너무했어요.”
“?”
키세레는 리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오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를 속이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저는 동안이시구나라고 생각했지만 티퍼에게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실망한 줄 아세요? 25세면 저보다도 나이가 많으신 거라고요. 제가 24세인데 말이에요….”
키세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오는 다시 웃으며 키세레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키세레는 리오를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소개해 주실래요?”
“네…?”
“당신의 소개요.”
키세레는 벙어리가 된 것만 같았다. 몇 년간이나 자신의 진짜 이름과 나이를 말하지 않아서일까…. 리오는 키세레의 가녀린 양 어깨를 살짝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이제 자신을 더는 속일 필요는 없어요. 지크, 바이칼, 그리고 제가 있는 이상 아무도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겁니다.”
키세레의 양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나중에 뵙게 될 당신의 아버지에게도 자신을 속일 건가요…?”
키세레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나서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며 리오에게 자신을 처음부터 다시 소개했다.
“… 세레나 블레이크입니다. 나이는 20세고요… 가족은 동생, 그리고 아버지 셋이랍니다….”
리오는 키세레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가 고마울 정도인데요? 세레나양….”
리오는 왼손으로 망토를 펼치고 오른손을 복부에 가져가며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정식 기사의 인사법이었다.
“나이트 리오 스나이퍼. 정식으로 블레이크가의 세레나양에게 인사드립니다.”
키세레, 아니 세레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저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서있을 뿐이었다.
“아, 늦었네요. 동료들이 기다리니 가보겠습니다. 세레나도 가보세요, 티퍼가 기다릴 것 같은데요?”
세레나는 다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입술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수도에서 만나 뵐게요, 그럼!”
세레나에게 손을 한 번 흔들고 나서, 리오는 바쁘게 군인들이 나가고 있는 북문 쪽으로 사라져갔다. 세레나는 목에 걸린 십자가를 손에 꼭 쥐면서 흐려져가는 리오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꼭 만나야 해요….”
이렇게 저렇게, 야룬다 요새에서의 일도 거의 끝나갔다. 이제 남은 건 가이라스 수도에서의 결전뿐이었다. 가이라스 왕국뿐만 아니라 말스, 그리고 제국의 판도가 걸려있는 중요한 전투였다. 그만큼의 희생도 있을지 모르지만 저항군과 그들을 이끄는 태라트의 눈빛에선 주저함이나 공포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