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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99화


태라트는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의 함성과 함께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희미하게나마 들어왔다.

짙은 군청의 갑옷과 투구에, 펄럭이는 붉은 망토. 그리고 오른손에 들려있는 화염의 마검 <파이어 턴>…. 라칸과 다른 기사단의 대장들은 연극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굳어있던 템플 나이트와 트로이, 아사신 나이트들의 얼굴에 감동과 기대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어떤 이는 속으로, 어떤 이는 무기를 하늘 높이 쳐들고 달려오는 그 사나이의 이름을 외쳤다.

“블레이크님이시다! 조나단 블레이크님이 오신다―!!!”

세 개의 기사단이 연극을 하면서까지 기다렸던 사나이, 조나단 블레이크는 자신의 마검으로 스켈레톤들을 불태우며 태라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 저 사람은 원래의 템플 마스터?!”

태라트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려서 가이라스 3세를 만나러 왔을 때, 처음 그를 가이라스 3세에게 안내해주었던 왕국 최강의 사나이의 얼굴은 그의 뇌리에 박힌 지 오래였다. 검을 잡기 전에는 평범한 가족의 가장처럼 따뜻하게 보이지만, 검을 잡고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면 무자비한 템플 나이트로 변하는 공과 사가 뚜렷한 인물이었다.

“태라트 황태자님이십니까…?”

태라트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사나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나이는 투구를 벗고 다시 한번 태라트를 보았다. 콧수염을 중년 신사처럼 기르고 있는 조나단의 모습을 본 태라트는 그 사나이의 변한 점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풍체에서나, 어디서나. 조나단 블레이크는 전혀 변한 점이 없었다.

“장성하셨군요 태라트님…! 자, 저는 이만 실례할까 합니다. 죄송합니다!!”

조나단은 다시 자신의 투구를 쓰고 세 개의 기사단이 모여있는 전열로 향했다. 전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라칸, 발, 그리고 브론은 달려온 그에게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다. 다시 말에 올라선 라칸은 자신이 들고 있던 가이라스의 깃발을 조나단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블레이크님…!!!”

조나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건네받은 깃발을 힘껏 흔들어 보이자 기사단은 모두 함성을 울렸다.

“가이라스의 전 기사단이여! 이 깃발을 향해 맹세하거라! 가이라스 왕국의 위대한 승리를!!! 추악한 왕비를 몰아내는 것이다!!!”

전 기사단은 더욱 목청을 높여 함성을 울렸다. 그리고 그들은 연극을 끝내고 두 패로 나뉘어 후열의 스켈레톤들과 전열의 몬스터 부대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질풍노도와 같은 그 물결에 저항군도 휩쓸린 듯, 그들도 역시 함성을 지르며 다시 한번 힘을 내기 시작했다. 본성 작전의 또 다른 막이 시작되는 상황이었다.


리오, 지크와 바이나, 그리고 바이칼 넷은 계획했던 대로 최상층의 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리오는 손목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자아…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루브레시아 공작인가, 아니면 왕비인가…?”

바이나는 굉장히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 가이라스 3세의 신변이 걱정되서였다. 분명히 자신의 아버지는 저 거대한 문의 뒤에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이 들 뿐, 아버지의 온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 루브레시아가 나타나면 그 녀석은 나에게 맡겨라. 나 혼자 처리할 테니….”

바이칼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못 긴장하고 있었다. 리오와 지크는 누가 나오든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 나온다, 한 명… 두 명이다. 누구지?”

리오는 디바이너에 손을 가져가며 근육을 가볍게 긴장시켜 보았다. 꽤나 강한 마력이 느껴져왔다. 루브레시아인가 했으나 그의 기는 따로 있었다. 확실한 용의 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왕비 아줌마인가, 이 강대한 마력의 주인 말이야….”

지크도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중얼거렸다. 바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왕비가 아니야, 왕비에게서 이런 강한 마력을 느낀 적은 없어! 그러면 도대체…?”

바이나의 말끝이 흐려짐과 동시에 문이 열려지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마법의 빛이 문 안에서 퍼져 나왔고 리오 일행은 눈을 손으로 가리며 그곳을 보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곧 빛이 사그라들고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일행은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네가 리오 스나이퍼인가…?”

복면을 쓴 여성이 리오를 보고 말했다. 리오는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듯한 앳된 목소리라 생각했지만 그냥 넘어가버렸다.

“그렇긴 한데… 오, 옆에 있는 중년의 신사분이 바로 루브레시아 공작이신가?”

리오는 디바이너를 천천히 빼어들며 말했다. 루브레시아는 리오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바이칼도 기다렸다는 듯 바깥쪽으로 턱을 한번 젖히고 조용히 말했다.

“나가자, 루브레시아.”

루브레시아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돌았고, 곧 둘은 성의 벽을 부수며 공중을 향해 날아갔다.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리오와 지크는 복면의 여인에게 다가갔다.

“자, 비켜주실까 시녀 누나? 우리는 바쁘거든….”

지크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자, 복면의 여인은 눈을 번뜩였다. 지크는 순간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폭음 소리와 함께 지크의 몸은 벽 쪽으로 날아갔고 벽 가까이에서 지크의 몸은 멈출 수 있었다. 지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여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뭐, 뭐야 이건?!”

리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전음 주문법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넌 누구냐!!”

그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서 또 다른 남자와 여자가 걸어 나왔다. 가이라스 국왕과 왕비였다. 바이나는 왕에게 달려들 듯하다가 왕비를 보고 주춤거렸다.

“으, 으으윽…! 아바마마!!”

그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가이라스 국왕은 묵묵부답이었다. 왕비는 그런 바이나를 보고 조소하기 시작했다.

“호호호호…!! 마마는 너 같은 아이에게 관심이 없으시단다, 마마는 내 거란 말이야… 알겠니 공주? 오… 내 딸이니까 넌 나를 어마마마라 불러야 하겠구나, 호호….”

바이나는 드래곤 킬러를 뽑아들며 울분을 토했다.

“웃기지 마라 이 요망한 마녀!! 아바마마를 정상으로 돌려놔, 그렇지 않으면 널 없애버릴 거야!!!”

왕비는 더욱 바이나를 조소했다.

“호호호… 멋진 걸 보여줄까? 마마… 제 신발이 더러워졌군요, 닦아주실래요…?”

왕비의 명령에 복종하는 꼭두각시처럼… 가이라스 국왕은 왕비의 신발을 손수 닦기 시작했다. 바이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아… 심심하군요, 바닥을 기어 보세요 마마….”

국왕은 역시 그렇게 시행했다. 바이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검을 부여잡은 두 손이 더더욱 떨려왔다.

“아, 아바… 마마…!!!”

왕비는 마지막으로 국왕의 허리를 걷어차면서 조소하기 시작했다.

“호호호호…!!! 국왕은 미안하지만 죽었다. 여기 있는 이 국왕은 뇌가 뽑힌 국왕의 껍질일 뿐이야,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사람은 없었지.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나와 타르자님뿐이니까! 아무도 이 왕국 안에서 반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하나, 태라트인가 뭔가 하는 그 외국 왕자를 제외하고는 말이지… 후후훗.”

바이나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가이라스의 국왕의 몸은 뒹굴고 있었다. 바이나의 드래곤 킬러에서 흰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이 서서히 보여지기 시작했다.

“용서 못 해… 용서 못 한단 말이야!!!”

바이나는 울부짖으며 왕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왕비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왕비는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올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 찔러라…!”

검을 휘두르려는 바이나 앞에 쓰러져있던 가이라스 왕이 벌떡 일어섰다. 바이나는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왕의 오른손에는 단검이 들려져 있었고 그 단검은 바이나의 급소를 노렸다. 바이나가 반격을 못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할 수 없었다. 뇌가 뽑혀 이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분명 자신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파악―!!

몸에 큰 충격이 왔고 바이나의 의식은 단숨에 흐려졌다. 칼에 깊숙이 찔린 적이 없어서 구별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맞은 것인지….

리오는 의식을 잃은 바이나를 오른팔에 안고 칼을 휘두르려는 왕의 복부에 킥을 먹여 거리를 벌렸다. 리오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바이나를 바라보았다.

“… 아버지의 최후를 보여줄 수는 없겠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리오는 바이나를 지크에게 맡긴 뒤에 검을 고쳐 잡았다. 리오는 왕비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진짜로 왕의 뇌를 뽑았는가?”

왕비는 옷으로 입을 가리면서 소리를 높여 웃기 시작했다.

“오호호호호…. <마리오네트>의 첫 번째 조건이 대뇌의 제거라는 걸 모르나 보지? 운동을 할 수 있는 소뇌만 있으면 끝나. 아, 뽑아버린 뇌의 출처를 알고 싶겠지? 태워버렸지… 차마 애완동물들에게 주긴 그렇더라고. 호호호….”

리오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 어깨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상반신이 흔들리는 리오의 그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지크는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나왔군… ‘사신의 춤’…!”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상반신을 흔들고 있는 리오의 그 동작은 수천, 수만의 죽음을 본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다는 영혼의 울부짖음에 맞춘 것이었다. 생명을 잃는 것에서만 나오는 슬픔과 억울함이 담겨있는 그 리듬에 맞춰서 추는 사신의 춤. 그것은 곧 리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 산산조각을 내드리지요 왕비 마마… 그 마리오네트와, 옆에 있는 당신의 마술사도 같이 말입니다… 후후훗….”

붉은 아지랑이가 리오의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디바이너도 다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으으윽…?!”

왕비는 리오가 사신의 춤을 추면서부터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만큼 리오에게서 뿜어지는 살기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그때, 왕비와 리오 사이를 복면의 여인이 가로막았다. 그러자 왕비는 숨을 쉽게 쉴 수가 있었다. 그 여인이 뿜어내는 강대한 초마력이 리오의 살기를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리오는 그녀의 엄청난 마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력만으로 보면 육마왕이라 칭해지는 마녀 타르자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 여인의 얼굴을 감싼 실루엣이 꿈틀거렸다.

“네가 리오 스나이퍼구나…. 타르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굉장한 사나이군. 내 마력에 생체 에너지로서 대등하게 겨루는 사람은 보지 못했는데 말이지…. 아, 이 실루엣도 벗어야 하겠군. 너무 갑갑해… 그리고 타르자님의 말씀도 있으셨고. 네가 나타나면 이 실루엣을 벗어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네 표정이 재미있게 바뀔 거라고 말이야. 후훗….”

마력을 여전히 방출하며 그 여인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실루엣을 벗어 던졌다. 그녀의 말 그대로, 그 여인의 얼굴을 본 리오의 표정은 일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붉게 변해있던 그의 눈동자도 정상으로 변해버렸다.

“… 너,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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