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9화
레나는 앞에 서 있는 7호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상기된 표정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평민인 주제에 당신들에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다시 한번 용서를 빕니다!”
리오는 놀란 표정으로 레나에게 달려갔다.
“왜 그러세요 레나! 당신께서 저들에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다구요!”
“도대체 제가 뭔데요!”
레나의 슬픈 목소리에 리오는 주춤했다.
“그, 그건…”
“전 처음부터 당신과 아버지의 말만 믿고 성 안까지 들어왔어요! 여기까지 오면 아버지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어요! 하지만 이게 뭐에요!”
“……”
리오는 천천히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솔직히 그녀에게 지금 당장 진실을 밝힌다 해도 흥분한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그냥 듣고만 있었다.
“전 리오를 믿고 싶었어요. 아버지께서 같이 가라고 하셔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리오는 저 때문에 떠난 날부터 잠을 한숨도 잔 적이 없었어요. 아이들이 동행해도 그랬었죠. 그런 리오의 모습을 보고 전 리오를 믿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레나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관람하고 있는 7호장들은 무슨 일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들도 그냥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요, 당신을 믿을 수가 없다고요! 왕궁까지 와서는 나라를 구하기는커녕 결투나 벌이고 있고…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그때, 7호장들이 동시에 레나의 뒤쪽으로 무릎을 꿇었다.
“말스 전하!”
리오는 꼿꼿이 선 상태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레나의 어깨를 살며시 잡으며 말해주었다.
“이제 당신께선 더 이상 평민이 아니십니다. 뒤를 돌아다 보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레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 머리가 혼란해졌다.
“리, 리오…?”
“제가 당신께 직접 말하는 것보다 이 방법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당신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리오는 레나를 천천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었다. 레나의 눈에는 곧 이 왕국의 왕 말스 3세의 모습이 들어왔다. 레나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국왕 폐하.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스 3세의 얼굴에서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레나에게 다가갔다.
“일어서거라. 레나야.”
레나는 송구스럽다는 말만 하고는 일어서질 못하였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는가?”
“예, 진실만을 대답하겠습니다.”
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의 어머니의 이름은?”
“로셀 베자스 이옵니다.”
로셀이란 이름을 들은 카라한과 페란드의 눈이 커졌다.
“너의 아버지의 이름은?”
“파르하 베자스 이옵니다.”
카라한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페란드는 뒤에 서 있는 헤리온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을 수 있었다. 둘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왕의 목소리도 떨려오기 시작했다. 약간 주저하다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너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둘 입니다.”
“어머니에 대해서 소상히 말해볼 수 있는가?”
“예, 저와 같은 머리색을 하고 계셨고, 요리도 잘하셨습니다. 특히 잘하는 요리는…”
왕은 말끝을 이었다.
“메라바 파이, 그것도 과일이 깃들여진.”
레나는 깜짝 놀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왕이 어떻게 어머니의 특별 요리를 알 수가 있는 것일까.
“예, 하지만 몸이 아프신 탓에 깨끗한 방에서 언제나 홀로 주무셨습니다.”
“음…어머니가 남겨준 물건은 없었나?”
레나는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소검을 생각해 내었다. 그녀는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예, 있습니다. 바로 이 소검입니다.”
그녀는 소검을 묶고 있는 끈을 풀어서 왕 앞에 내려놓았다. 왕은 그것을 몸소 들어보고 카라한과 페란드를 불렀다.
“자네들, 이리 와 보게.”
두 노장은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의 표정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오면서 놀라움에서 또 다른 표정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검을 받아든 카라한은 검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검을 높이 올리며 확실한 목소리로 외쳤다.
“확실합니다! 왕비님의 검입니다!!”
레나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쳐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그럴 리가요… 그건 어머님께서 남겨주신 유품일 뿐인데…”
왕은 무릎을 굽히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주름이 가득한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바로 그것이 네가 내 딸이라는 증거란다. 레나야…”
레나의 흰 손에 왕의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레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다른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몸을 떨고 있었다.
“이것이 저와 당신을 길러주신 분 파르하님께서 숨겨온 비밀입니다. 레나 바르자하스 공주님.”
리오는 여전히 미소를 띄우고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카라한과 페란드는 지금은 옆에 없지만 한때는 7호장 중 하나였던 파르하에게 감사를 하고 있었다. 왕에게 레나를 만날 수 있게 해준 것과 왕위가 영주들에게 넘어가지 않은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역시… 왕비님과 닮았다고는 생각했는데 진짜 공주님이실 줄이야…”
“흐흠… 전에 저희가 범했던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공주님.”
두 노장은 레나에게 기사의 예를 갖추어서 인사를 했다. 뒤에 서있는 다섯 명도 재빨리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예를 갖추었다. 슐턴은 특히 식은땀까지 흘리며 고개를 더더욱 숙이고 있었다.
“저희들이 범했던 죄, 그에 마땅한 벌을 받겠습니다, 공주님!”
레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전혀 기쁘다는 느낌은 들지가 않았다. 너무도 혼란했다.
“저…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레나의 뒤로 리오가 다가왔다.
“레나님… 이게 바로 왕국을 살리는 일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이 말스 왕족의 혈통을 이어주시지 못한다면 왕국은 몇 년도 못 가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진짜 공주라고 해도 저 혼자서 어떻게…!”
“레나, 아니 공주님. 당신은 혼자가 절대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께서 돌아와 주신 걸로도 크게 기뻐하고 있질 않습니까? 그들은 당신의 곁에서 언제나 당신께 충성을 맹세하며 도움을 드릴 겁니다.”
“하지만…”
“당신께선 왕족이 가지고 있을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자기 아래의 사람들을 생각하실 줄 알고, 자만하지 않으시며, 아무리 슬픈 사람이라도 그를 달래줄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정도면 공주가 되실 자격은 충분하십니다.”
레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리오에게 안겨왔다. 그러나 리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전 당신의 기사일 뿐입니다. 하인이기도 하지요. 절 아무리 생각해주신다고 해도 당신께선 냉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공주님이시지요.”
“리오…”
레나의 양 뺨에 반짝이는 것이 아래로 자취를 남기며 떨어져 갔다. 그 자취와 그녀의 눈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제 전 가보겠습니다. 저의 일차적인 임무는 끝났으니까요.”
리오는 돌아서며 천천히 성문 쪽으로 향하였다. 레나는 그의 등을 안으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리오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가지 말아요, 아까 한 말 취소할게요! 전 당신을…”
리오는 그녀의 입술에 그의 검지를 살며시 가져다 대었다.
“전 당신을 떠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존재를 믿고 계시면 전 당신 곁에 있는 것입니다, 공주님.”
“그런 말은 듣기 싫어요! 전 당신께 해준 것도 없는데 당신은 왜 절 위해서 이렇게 희생만을 해왔나요! 그 이유를 듣기 전엔 이곳에 남을 수 없어요!”
리오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훗… 그래야 제가 행복해지니까요.”
말을 마친 리오는 성벽을 가볍게 넘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레나는 그가 떠나간 성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페란드는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 비슷한 것을 속삭여 주었다.
“……정말이죠?”
“물론이지요, 이 늙은이가 어떻게 당신께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레나의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지자 왕의 얼굴도 펴졌다. 페란드의 화술은 역시 대단하다고 왕은 생각했다.
“여보게 카라한.”
“예, 폐하.”
카라한의 얼굴에서도 오랫만에 근심이 사라졌다.
“공주에게 새 옷과 그밖에 여러가지를 마련해주어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음, 그럼 부탁하네.”
“예, 그럼 즉시.”
다른 젊은 7호장들은 성안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 언제나 근심만 하고 있던 그들도 오늘은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음… 잘되었군 슐턴. 그렇지?”
“으음… 하지만.”
“또 뭔가?”
“리오라는 녀석…만약에 그 녀석이 나중에 적이 되서 나타난다면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게 걱정이 돼서 말이야.”
오르만은 슐턴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것은 나중의 일일세. 오늘은 공주님에 대한 축배나 들자구. 어떤가?”
슐턴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것도 좋지!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