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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204화


유리벽에서 영상이 흘러나온다. 이럴 수가! 괴상한 감옥에 갇혔어! 여긴 어디지? 아하, 여기는 ■■시 수정동굴 속이라고? 고마워 브라운! 뭐? 나가는 방법도 설명해 주겠다니, 정말 고마워! 역시 우린 최고의 친구야! 미니어처형 고전 애니메이션이다. 현재의 나와 똑같은 차림을 한 주인공과 토끼 인형이 나누는 대화. 이상하다. 이상하다….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거기서도 영상이 나온다. 그렇구나! 내 주변 유리알을 깨서 수감자를 죽이고 미끼로 이용해 간수를 꾀어내는 거야!

‘…!’

마치 내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영상은 내가 어디로 고개를 돌리든 따라온다.

모든 유리벽에서 나온다.

세상에 그렇게 쉬운 방법이!

넌 정말 대단하다 브라운!

영상 속 나와 똑같은 크기의 토끼 인형은 친절히 공간을 넘나들며 탈출법을 설명한다. 유리알 채로 움직이는 법, 간수를 고문하는 법, 지도와 이동 경로까지. 경악스러울 만큼 상세하고 터무니없이 악랄한 방식을 태연히 설명한다.

마치 유아용 애니메이션에서 지침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아.

-그렇습니다! 노루 씨의 선호에 알맞지 않습니까? 몰입에 효과가 있군요. 아주 좋습니다….

극단으로 치달은 아동용 그림체의 영상은 피와 절규, 간수의 절단된 사지와 대피하는 재난관리국 담당자를 비춘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주인공’과 토끼 인형 브라운으로 끝났다.

좋았어! 이렇게 탈출하는 거야!

영상의 마지막 문구가 귓가를 맴돌고… 박수 소리가 들린다.

짝짝짝.

장갑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

-휴우! 짧지만 대단한 여정이었군요! 어떻습니까. 친구, 이제 미니 브라운이 알려준 대로 탈출할 준비가 끝났습니까?

“…….”

강렬하고, 과시적이고, 고전적이라 더 섬뜩한 TV의 영상.

이제 익숙해질 것 같은 브라운의 솜씨다.

하지만 하나는 눈치챘다.

-오, 고민하지 마십시오. 말했다시피, TV를 보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음?

나는 토끼 인형의 그림자를 보았다.

‘너는 유리 감옥의 법칙을 그런 식으로 어기지 않았어.’

-오.

왜냐하면….

‘영상은 유리벽 밖에서 튼 거잖아.’

단지 이 감옥 안으로 투영되는 것뿐이다. 마치 내가 유리벽 밖에 서 있던 청동 요원과 대화했던 것처럼.

‘거기서 착안한 거지?’

그렇게 법칙을 피해 간 것이다.

‘유리감옥 안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느끼도록 해서 더 충격적인 연출을 노린 것 같은데.’

짧은 침묵 후.

-맙소사… 정답입니다. 친구! 당신의 눈썰미와 번뜩이는 추론은 마술사들의 악몽이겠지요!

-훌륭한 재능입니다. 오, 그렇고 말고요. 이런 감명을 받을 때마다 아까워지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요. 프로그램에 대한 감상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

-자, 어떻습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생겼어.’

-오, 탈출에 대한 궁금증입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내가 궁금한 건….

‘너는 내 생각을 어디까지 알고 있지?’

…….

-아하.

친구 사이의 이해에 필요한 만큼 알고 있지요!

‘그런가.’

왠지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심야 토크쇼 사건 이후, 사회자는 내 머릿속을 꽤 많이 읽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무심코 떠올리는 정보들까지도 말이다.

아마 방금 본 유리 감옥 탈출법도 그 정보에 기초해서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게 끝이구나.’

-…….

-노루 씨. 당신의 말에서 터무니없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만… 오, 하하. 내 착각이겠지요. 설마 이 브라운이… 친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까?

‘아니.’

입가에 헛웃음이 떠올랐다.

‘너는 네가 필요한 만큼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야.’

취사선택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바로 엔터테인먼트지.’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엔터테이너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요!

-그리고 이건 노루 씨가 기꺼이 약속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나를 즐겁게 해주겠다고 단언했던 것을 확실히 기억합니다….

‘맞아. 그런데… 내가 좀 착각하고 있었더라고.’

-착각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공유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이제는 좀 직시할 수 있었다.

‘네가 쇼의 즐거움보다 내 입장을 먼저 고려해 줄 거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한 거지.’

사실 터무니없는 기대다.

괴담 속 기이한 토크쇼 사회자에게 대체 뭘 바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많은 비밀과 사건을 공유하고, 심지어 토크쇼에서 합의로 탈출까지 성공하면서 이성적 판단과 다른 류의 막연한 믿음이 생긴 것 같다.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내가 매번 설득하기 위해 써먹은 ‘더 즐거운 쇼를 위해서’라는 논리도 잊어버리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매번 도움을 받다 보니 감정적으로 편향이 생길 수밖에 없어서 말이다.

저 ‘착한 친구’에게.

귀납적으로 생겼던 일방적인 신뢰였다.

‘앞으론 그러지 않으려고.’

그리고 사실 이런 말도 별 의미 없었다.

그냥 내가 더 조심하자.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아까 서운하다고 했지? 나도 비슷했어.’

…….

-맙소사.

사회자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그거였군…. 예상은 했었습니다만, 잘 알겠습니다. 노루 씨, 며칠 전 내가 당신의 도움을 거절한 것에 크게 상심했었군요.

후우.

-이런 오해라니! 이 브라운은 친구에게 가장 좋은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 좀 더 생각해 봅시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만일 거기서 내가 당신을 ‘그냥’ 도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당신은 마법처럼 사라져 버렸을 겁니다.

-그럼 이 멋진 스파이 역할을 지속하기는커녕 그저 맥락 없이 도망쳐야 했겠지요.

미치겠다.

-지금까지 당신이 쌓아온 모든 이야기가 그냥 허무하게 중단되는 끝이라니. 그만큼 허망한 마무리가 또 있을까요? 그게 정말 노루 씨가 원하던 겁니까? 아니지요?

“그게….”

그 순간, 벽에 붙어 있던 도깨비불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

“무슨 일이야?”

나는 녀석을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었다. 그러자 도깨비불이 큰 용기를 낸 듯 몸을 뻗더니, 토끼 인형을 향해 하나의 형상을 만든다.

거꾸로 내린 엄지다.

“…….”

그리고 내 옆구리에 (아마도) 고개를 박고 숨는다.

-오, 이런.

‘화내지 마. 재밌잖아. 그럼 감수해야지.’

-…….

‘미안. 하지만 네가 했던 말이랑 비슷하지?’

좀 미친 짓이란 생각은 든다만, 대놓고 이러니 왠지 속이 좀 시원해졌다.

‘어쨌든… 하려던 말은 이게 다였어. 네 행동이 틀렸다는 건 아니야.’

사회자의 반응도 예상했던 대로니까.

…앞으로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확률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대화 상대가 있다는 것에 만족하자.

-…친구.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좋습니다. 어떤 관계든 오해는 항상 따라오지요. 이 역시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탐탁지 않은 듯한 구둣발 소리가 몇 번 났으나, 곧 사라졌다.

이건 약간 놀랐다.

참을 줄은 몰랐는데.

‘더 중요한 걸 앞에 두고 있어서인가.’

-지금은 관계자 간의 논쟁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지요. 이 좁고 답답한 곳에 친구가 더 방치되어 시간을 끄는 모습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군요.

탈출.

-마음의 준비는 끝났습니까?

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유리알 속, 원형의 독방이 보인다.

그리고 이미 영상 속의 ‘탈출 방법’은 머릿속에 새겨지듯이 들어와 있다.

이제 나는 기묘하게도, 이 악명 높은 유리 감옥에서 끔찍한 소요 사태를 일으키며 빠져나올 방법을 안다.

그대로라면 <어둠탐사기록>에 기록될 만한 이레귤러 사태가 되겠지.

하지만….

…….

‘아니.’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기로.

-설마 이대로 심문을 받겠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

‘맞는데.’

나는 도로 의자에 앉았다.

‘…심문은, 다 받을 거야.’

* * *

“…….”

최 요원은 고개를 내렸다.

수감번호 : 37-999

수감자 : 김■■ (요원명 : 포도)

소속 : 출동구조반 현무 1팀 (보류)

갱신된 수감자의 심문 기록이 그 손에 들려 있었다.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참담하기까지 한 일주일간의 심문 기록이 보인다.

진술 거부와 건강 상태 악화.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심문 형태.

하지만 그 괴로운 구간을 넘기면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8일 차.

수감자 상태 : 불량. (회복 추세)

전날 진행된 심문 이후 수감자의 태도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관측됨.

심문 중 일부러 질문을 듣지 않기 위해 시청각적 소란을 유도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는 등의 비협조적 반응이 대폭 감소.

수면 및 식사 시간이 권장량과 유사하도록 증가, 도깨비불을 돌보거나 소지하던 인형(친구라고 지칭)을 확인하는 모습이 목격됨.

새로운 심문관으로 친분 있는 요원이 발탁된 영향으로 추측.

류재관이 온 이후부터다.

담당자 개인 소견 : 수감자가 안정을 되찾아 가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심문 강도를 높이는 것보다 이대로 자연스러운 자백을 끌어내는 것이 효율적일 겁니다.

해당 소견에 관계자 다수가 이견 없이 동의.

그렇게 페이지가 쌓여간다.

9일 차.

수감자 상태 : 불량. (회복 추세)

특식(갈비탕) 제공이 허가됨. 심문관은 동일한 메뉴를 지참해 수감자와 함께 식사하며 심문을 진행.

수감자가 질의응답에 성실히 임함.

자신의 오염 흔적들이 재난관리국 근무 이전에 별도로 경험한 초자연 재난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인정.

유리 감옥에 수감된 자는 점점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며, 심문관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암시가 곳곳에 등장한다.

자신이 개인사나 성격, 재난관리국을 향한 호감, 초자연 재난에 대한 공포, 시민을 구조했을 때의 안도감과 보람까지.

그렇게 며칠이 지나….

결국 여기까지 온다.

12일 차.

수감자가 자신이 ■■■ 주식회사에서 근무했었다는 사실을 증언.

초자연 재난관리국의 공채에 지원하는 과정에서 타의적 압박이 있었다는 것과 근무 중 달성해야 하는 별도의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확언.

다만 절명에 준하는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었다는 것, 관리국에 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다는 것, 또한 수감자의 근무 중 관리국에 실질적 피해가 발생한 적은 전무했다는 것이 진실로 판명됨.

수감자가 입사 목적과 관계없이 근무를 이어가고 싶은 욕구가 있음을 확인.

심문관이 해당 진술을 상위 기관으로 보고.

“…….”

요원이 약간 떨리려던 손을 순간 진정시키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

13일 차.

수감자 상태 : 양호.

그리고.

수감자 심문 중 확보한 증언이 신뢰성 검사를 통과.

37-999(요원명 : 포도)의 구금 상태 해지 및 요원 신분의 복구 승인됨.

내일 출소 예정.

그리고 그 내일이, 바로 오늘이다.

탁.

최 요원은 페이지를 덮었다.

피로한 얼굴에 긴장과 안도가 교차했다.

“이제 곧 나올 겁니다.”

“그래.”

“그만 움직이십시오.”

“그래야지.”

하지만 여전히 최 요원은 대기실을 왔다갔다 걷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계획이 또렷하게 구체화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게 끝은 아니야.’

스파이였던 것이 공인된 것과 다름없기에 제법 험난한 절차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요원에게 주어지는 감사와 징계였다.

김솔음은, 현무 1팀의 요원으로서 해당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어.’

그게 중요했다.

이제 유리 감옥의 담당자는 포도 요원이 수감되어 있던 유리알을 회수해서 금제를 해제한 후, 자신들에게 신변을 양도할 것이다.

그럼 징계에 앞서서 백일몽 주식회사와 관련된 대화를 좀 속 터놓고 해봐야겠지만, 그리고 녀석이 감추고 있던 비밀과 아이템, 능력에 관한 이야기도 나눠야겠지만….

‘그것도 천천히 진행하면 돼.’

중요한 건 심문 절차가 잘 끝났다는 것이고, 김솔음이 안정을 되찾았다는 점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성공했다.

최 요원이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피 말리던 지난 2주가 끝났다.

이 결론을 얻어내기 위해 안 해본 짓을 대체 몇 가지나 한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재관아.”

“…….”

“고맙다. 고생 많았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청동 요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뚝뚝한 태도였으나, 그 안에서 부드러운 화해의 제스처를 읽어낸 최 요원은 그냥 잔잔히 자신의 후배를 바라보았다.

최 요원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한다.

“일단 우리 셋 다 온천부터 다녀와야겠다. 진짜로. 거기서 노는 건 내가 다 살게.”

“예.”

그렇게 류재관의 등을 두드렸을 때였다.

똑똑.

“…!”

문이 열리며 담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금은 풀렸습니다.”

“그럼….”

“예. 포도 요원은 지금 대기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최 요원은 담당자와 황급히 악수한 후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

대기실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최 요원은 거침없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입구 근처에 있는 명패 붙은 철문으로 향했다.

이 안에 있을 것이다.

김솔음이.

“…….”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아직도 까마득했다.

솔직히 정체도 모르겠다.

‘대체 그건 뭐였던 거야.’

그 기묘한 연구실과 초자연적 존재의 외양까지 말이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금제가 걸린 그날 밤에 김솔음은 자신을 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죽음의 위험을 각오하고.

“…….”

그러니까 말이다.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는 거겠지.’

최 요원은 망설이지 않고 철문을 단번에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텅 빈 대기실에 사람의 흔적은 없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요원님?”

최 요원은 굳어 있다가, 다시 대기실을 돌아보았다.

철제 의자 위에 새하얀 무언가만이 이질적으로 남아 있었다.

잘 접힌 종이 한 장.

맨 앞면에 단어 하나가 적혀 있다.

사직서

최 요원은 그것을 잡아들었다.

종이에 담겨 있던 작은 물건들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깔사탕부터 막대형 주사까지.

잡동사니처럼 보이지만 하나 같이 아이템일 것들이.

“…….”

그는 다시금 잠시 굳어 있다가, 접힌 종이를 펼쳤다.

꾹꾹 눌러 적은 글씨가 보인다.

안녕하세요. 요원님.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꼭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포도 요원의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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