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240화
상자 속 구도자가 원할 만큼의 이야기를 가진, 여섯 인물이 이곳에 있다.
그중에 누구를 평균 27년의 도망칠 수 없는 느리고 지독한 죽음을 향한 고통 속으로 던질 것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지가 지금 목전에….
“노루야.”
고개를 내렸다.
할머니 모습의 은하제 대리님이 내 어깨 부근을 툭툭 치고 있었다.
“좀 내려봐라. 내가 꼴이 이래도 진짜 노약자는 아니잖냐.”
하지만.
“나도 구슬 뱉고 기동력 좀 챙기자. 지금 보니까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은데.”
…….
나는 은하제 대리를 내려주었다. 대리님은 유리구슬을 뱉더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청동 요원의 표정이 변한다.
“그쪽은….”
“이야, 오랜만입니다. 꼰대 양반.”
은하제 대리가 씩 웃었다.
공교롭게도 둘은 이 지산마을에서 안면이 있었는데, 다시 비슷한 장소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오. 안녕하세요 대리님! 퇴사 이후로 잘 지내셨나여?”
“그래그래.”
이성해 대리와 인사를 나누는 은하제 대리와, 호유원을 번갈아 보던 청동 요원의 모자이크된 얼굴이 움찔 떨린다.
은하제 대리님의 몸을 쓰던 어떤 존재를 깨달은 듯.
“혹시 초자연적 존재에게 목숨을 위협받거나 부당한 압력을 받는 상태입니까?”
“비슷한데 일단 내 상황에 대한 건 그렇게 급하지 않으니 넘어가고.”
툭툭.
대리님이 나를 친다.
“노루 너 아무래도 저 괴상한 어둠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일단 설명부터 좀 해보자. 모르는 상태로는 우리가 무슨 위험 버튼을 누를지 모르잖냐.”
…….
무명찬란교의 위험한 상자
: 상자 속 구도자
나는 모두에게 최대한 빠르게 설명했다.
이 상자의 위험성, 이 장소의 특이성, 그리고 우리가 이 사이비 교단에서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담백하게.
마지막으로 가장 기본적인 파훼법까지.
정원으로 표기되는 희생자
현재 정원 : 2
내가 연기로 그리는 글자를 읽는, 괴담의 베테랑들 사이로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니까 둘 집어넣으면 한 몇십 년 고문당하다가 죽고, 나머지는 무사통과되는 어둠이라는 거구만.”
정답이다.
“한 꿈결이 B급 정도 추출되면 회사가 더럽게 좋아하겠는데.”
추측 : 상자에 들어가지 않을 시, 꿈결 추출 불가
“아, 역시 그런가. 그냥 어둠에 진입하지 않고 회피한 걸로 카운트되겠어.”
호유원을 힐끗 본 은하제 대리님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투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러니까.
요청 : 움직이지 말 것
괜히 자극하지 말아라.
사유
▶ 움직일 시 적합 대상으로 포착될 가능성
▶ 상자 내부에서의 탈출 가능성 희박
(아이템 사용 가능 여부 확인 불가)
상자 속 구도자는 정원으로 들이기 적당한 대상을 포착하면 계속 따라온단 말이다.
그 기간은….
정원이 차서 상자가 완전히 닫히기 전까지 영원히 지속된다.
상자 속 구도자는 아직 비어 있는 정원이 있을 시, 그것을 적합한 인물로 채우려는 시도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상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양과 더욱 가까운 위치에 나타나 양손으로 합류를 권유하며, 결국 희생양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눈앞에 나타나기까지 이른다.
이 시점에서 희생양은 움직이려 할 시 필연적으로 상자에 닿게 된다.
▶ 적합 대상으로 포착될 시, 상자가 닫힐 때까지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
자칫하면 이 중 누군가, 그런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내게 침샘과 식도가 정상 위치에 있었다면, 입이 바싹 말라왔을 터다.
‘확인해야 해.’
지금 상자가 이 중 누군가를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여섯 중 정확히 누구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선수 쳐서 내가 상자를 자극하든가.
‘내 쪽을 쫓아오는 편이 차라리 대응하기 쉬울 것 같은데.’
여차하면 상자가 나를 삼키기 전에 ‘읽어내서’ 설정을 지우는 것까지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체 그 과정에서 어떤 치명적인 부작용이, 얼마나 지속될지 섬뜩하긴 하지만, 수십 년간 저 상자 속에서 전시되기 위한 고통을 받는 것보다는….
“잠깐, 포도야.”
…….
“…움직이지 말자며. 거긴 너도 포함해야지.”
최 요원이 내가 움직임을 멈추는 것을 확인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 다들 들으셨죠? 이 중에 누구 어디 화장실 가고 싶어서 미치겠고 이런 분 계십니까? 네, 없군요. 거참 불행 중 다행이죠?”
옆에서 청동 요원이 이마를 부여잡는다.
“아주 조금만! 시간을 내봅시다. 지금 들어보니 약간은 여유가 있는 것 같으니까.”
최 요원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씩 웃더니 침착하게 말하며 몸을 낮춘다.
“아직 코앞까지는 아니네.”
눈은 계속 상자 속의 기이한 양손을 보면서.
“일단 모두 앉아서, 상자를 자극하지 말고… 한 번 파훼법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괜찮지 포도야?”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권고 : 모두 상자의 위치를 계속 체크할 것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가까워질 테니.
그렇게 여섯 명은 무명찬란교 지하 벙커의 출입구를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안에 세 명.
밖에 세 명.
그리고… 출입구 옆에 가까이 붙은, 양손을 내민 검은 상자.
약간 더 가깝다.
‘…위치가 재조정됐어.’
단두대의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벌써 반걸음 더.
“포도 요원.”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청동 요원이 자연스럽게 내게 무언가를 던진다.
“두고 가신 지급품입니다. 받아가십시오.”
반사적으로 잡아챈 후에야, 그 정체를 눈치챘다.
……내 요원 재킷이다.
‘…왜.’
어차피 지금은 입지도 못할 텐데. 아니, 애초에 사직서까지 내고 간 산업 스파이를 뭣 하러 이렇게 찾는단 말인가.
위장이 울렁이는 것 같다. 재킷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그냥 만졌다.
‘일단은… 문신에 넣어둘까.’
그래서 접기 위해 재킷 하단에 손을 댔다….
주머니에 뭔가 있다.
나는 검은 연기를 보내서 그 안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색색의 선.
오방색 신발 끈이다.
[오, 탈출용 물건 아닙니까?]
맞다.
클리어 절차를 무시하고 초자연 재난에서 긴급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보통 현장 요원에게 인당 하나씩 지급되는 물건.
아까까지 내가 호유원에게 이런 거 없냐고 물어보던, 정말 필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 이걸 왜?’
이 급박한 순간에?
나는 청동 요원을 다시 보았으나, 모자이크된 그 얼굴은 내 시선을 피해서 최 요원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재킷 속에 무엇이 들어 있던 건지 물 흐르듯 넘기고 싶은 듯이.
설마….
‘지금 사용하라고?’
이걸 쓰면 재난관리국이 지정한 탈출 장소로 갈 테고 내 신원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넘어가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여기 남는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의도로 준 거지? 청동 요원의 단독행동인 건가?
“그럼 시작해 봅시다.”
그리고 내 혼란과 관계없이 최 요원이 빠르게 상황을 진행하려던 순간이었다.
“일단 저 상자가 정원으로 쳐주는 조건이 인격체….”
“저기여!”
번쩍.
이성해 대리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있어요, 제일 빠르고 간단한 방법!”
그 직원다운 말이 나온다.
“여기 사이비 교단이라구 하셨잖아요. 그중 제일 못된 사람 두 명 찾아서 집어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여?”
“…….”
“예?”
“선수 치면 되잖아여. 꼭 우리 중에 나올 필요가 없구요.”
그래.
최 요원은 상식적인 진행을 했다. ‘제한 시간 내로 이런저런 방안을 떠올려 보자’라고.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 인원이면, 결국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내가 알 것 같다는 점이다.
‘목에 칼날이 들어와 있는데 시간 끌며 토의가 가능한 구성이 아니야…!’
일단 이성해 대리는 무조건 이 기지에서 못된 인물을 털어서 보내자고 한다.
자기 조 직원이 죽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사이비 교단이라는 배경까지 갖춰졌으니 거칠 게 없을 것이다.
“아, 괜찮은 제안이네요. 마침 저 상자가 이미 사이비 간부 한 명을 삼킨 상태이기도 하답니다. 다른 사이비 간부는 저 뒤에 정신을 잃은 상태로 있고요.”
“오오, 좋네여! 집어넣기 더 편하겠구.”
이성해가 방긋 웃고, 호유원도 웃는다.
하지만 말이다.
“청동아, 혹시 나 난청 생겼나 싶다. 지금 어떤 분이 정부 요원 앞에서 시민을 초자연 재난에 가져다 넣겠다고 말하는 걸 들은 것 같은데.”
그걸 용납 못 하는 사람도 여기 있다.
최 요원이 농담하듯이 말을 던지긴 했으나 결국 한숨과 함께 입을 연다.
“어휴, 물론 심정은 이해합니다! 그래도 그런 건 진짜 막판에나 고려해 보는 게….”
“에이, 지금도 시간 없는데. 괜히 착한 사람들이 새로운 시도 해보면서 위험해지구 무서울 필요 없잖아여?”
“……!”
후우.
“아무 신도나 막 넣자는 것도 아니구요. 사이비 교단 간부 정도 되면 죽는 편이 사회를 위해 사실 더 낫다고 생각해여! 진짜 구속돼도 처벌을 강력하게 받는 것도 아닌데….”
이성해가 턱을 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 기회에 응징하면 좋죠!”
짧은 침묵이 흐른다.
“…상당히 개인적인 판단인데?”
“요원님들한테 고르라고 안 할게여. 나머지 한 명도 제가 잘 골라올 테니까 기다려 보세여! 혹시 상자가 따라와도 근처니까 잘 피해서 쓱쓱 넣을게여!”
“아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청동 요원이 입을 연다.
아마 이 요원도 이성해를 말리는 것에 가세하려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저희가 선별하겠습니다.”
“…!!”
오늘날의 초자연 재난관리국은, ‘꼭 죽어야 한다면 저 사람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체다.
악의 저울을 통해 악인을 선발해 죽을 자리에 보내서 더 큰 희생을 틀어막기도 하니까.
그 산증인인, 산장에서 살인마 역할을 맡았던 요원이 말한다.
반걸음 더 가까워진 상자를 눈짓하며, 초조하게.
“이 중에 그 사이비 단체의 간부가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내는 것을 직접 목격한 분이 계십니까?”
“뭐, 보긴 했지.”
대리님이 입을 열었다.
은하제 대리는 현실주의자이며, 주어진 상황에서 적절히 온화한 선택지라면 그럭저럭 수용할 줄 알았다.
“술 좀 담그겠다고 적어도 수십 명은 죽였을걸.”
“확인했습니다.”
“청동아.”
“요원님.”
청동 요원이 선임의 말을 막는다.
“규칙은 규칙입니다.”
-언제나 요원의 목숨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확정된 악인이 있다면, 그쪽이 죽는 게 맞다는 것.
“검증된 방법을 두고 상상을 토대로 토의만 지속하는 건, 더 결정을 내리기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하면 검증된 선택지를 고르고 싶어도 고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사이 사이비 간부가 정신을 차리든.
…상자가 너무 가까워지든.
“여유를 두고 할 수 있을 때 시도해야 합니다.”
그 말에는 최 요원까지도 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미 여론은 과반을 넘어갔다.
[흠. 의외로 잘 정리되는군요. 제3 자를 희생시킨다라. 용케도 빠져나갔습니다.]
[죄 많은 쌍둥이 역할이 상자 속에서 죽음까지 기나긴 고문을 당하겠군요. 엑스트라 교체야 별 의미도 없습니다만.]
김이 빠진 듯한 브라운의 목소리가 들린다.
최 요원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상황이 정리되는 것을 웃으며 지켜보는 호유원을 목격했다.
그리고 침묵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해피엔딩 교단의 진실이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돌발 행동이 날 게 분명한 이 사람들을 다 제압해 놓고 내 말을 들으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는 상황에, 혹시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이보다 특별한 대안도 없긴 했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른 시도를 해볼 시간은, 상자 어그로를 내가 끌면서 좀 끌어볼 수는 있긴 한 것 같….’
“포도야.”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바닥을 보다가 다시 상자를 쳐다보는 것을 반복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최 요원. 무언가 계산하듯 하던 그는….
어느새 바닥에 내려놓았던 도깨비등불을 집어 들고 있었다.
“…너, 원래는 네가 움직여서 상자 유인할 생각이었지? 다른 사람들 다 무사히 나갈 수 있을 때까지 말이야.”
…!
“여전하네. 크으, 이걸 또 내가 맞히고.”
웃음.
“근데 그런 건 막내가 하는 거 아니다? 짬순이지.”
잠깐만.
최 요원이 이쪽을 보고 씩 웃는다.
결심한 사람의 눈.
“그래도 요원이 돼서 할 수 있는 걸 하나는 시도해 봐야지. …고맙다.”
야!
최 요원이 일어나서 움직인다. 그 돌발 행동에 청동 요원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늦었다. 상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가진 요원을 감지하고, 그를 따라서 움직….
“저 정도면 꽤 덜 위선적인 요원이네요. 재난관리국답지 않아요. 노루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꺼져!
“그래서 저도 선별해 보려고요, 노루 님.”
툭.
“더 재난관리국다운 쪽을.”
청동 요원이 호유원의 손에 밀린다.
그 몸이 상자에 부딪힌다.
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