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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85화


따스한 햇살이 드는 여우 상담실.

창밖에 서 있는 또 다른 나.

그가 내 팔을 잡고 문신 속을 휘젓고 있다.

…….

어?

다른 사람 아니야?

그럼 거부해야 한다. 내가 규칙을 어긴 건가? 아니야. 그래, 이 상황은 옳지 않다! 옳지 않다! 옳지 않다! 옳지 않다! 나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규칙을 지켜야 하는 신규 선생

“다 됐습니다. 선생님.”

내 팔의 문신 안을 휘젓던 손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툭.

물건 하나가 그 손에 들려 함께 밖으로 튕겨 나온다.

분명 비어 있었어야 할 문신 속에서…….

“이게 들어 있었네요.”

정원의 조명 아래 선명한 붉은 글씨 타이틀이 드러났다.

갈색 서류철.

<■■부속 유치원 교육서>

“아는 물건인 것 같은데,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맙소사.

갑자기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또렷하게 올라왔다.

‘저거…!!’

그리고 막힌 둑이 뚫린 것처럼, 흐릿했던 지난 몇 주의 기억 속 몇 부분이 선명하게 쏟아진다.

내가 유치원에서 오염된 박민성 주임을 손목에 집어넣을 때!

타투 속 공간은 무리 없이 그것을 계속 삼켜갔… 아 교육서가 닿았다! 이건 따로 챙겨서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주임이 쥐고 있던 교육서도 한꺼번에 내 문신에 들어갔었다!

따로 챙기려던 충동을 누르고 한 번에 넣은 것이다. 아마 주임을 구조한 이후에 한꺼번에 보안팀에 신고해서 넘길 생각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혹시 ‘헝그리 행맨’ 어둠에서 가져나온 비품이나 아이템이 있다면 반납해 주세요.

-아, 따로 없습니다.

나는 교육서를 반납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신에 뭐가 더 있다는 것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무의식중에 거부감을 느끼고 멈췄다.

의심은 규칙에 어긋나니까!

그리고 내가 거부감을 느꼈던 것마저도 어느새 떠올리지 못하게 된다. 선생님은 규칙에 거부감을 느끼면 안 되기 때문이… 아냐. 이것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확실한 건, 그래도 내가 몇 번이고 시도는 했었다.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주변에 알리려는 시도를.

-…조장님.

-예.

-혹시 제가 규칙에 대해 이상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싶으면, 한번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예.

-……아. 최근에 업무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군요.

이자헌 과장에게 몇 번이나 해당 화제로 말을 걸기도 했었다. 교육서에 잠식된 내가 반문하면서 끝은 흐지부지되었지만 말이다.

‘큰일 날 뻔했다.’

문신 속에 있는 교육서는 점점 더 무의식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모든 기괴한 지점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나마 세광공업고등학교에서는 제정신을 차렸던 거였어!’

노스텔지어 캔디를 복용했던 덕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는 순간 그것도 끝이었다.

그리고 어제 이자헌 과장과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정점을 찍었다.

-김솔음 씨.

-예?

-최근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기묘한 압박감에 시달리거나 충동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까?

-규칙을 지키는 것은 직장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조장님!

-그렇군요.

“…….”

와 맙소사.

‘토할 것 같다.’

내가 저러고 있었단 말이야??

나는 비틀거리며 창가에 기댔다.

‘그래서 이자헌 과장이….’

나를 무조건 상담실에 처넣으려고 했던 거였구나.

“……하.”

모든 게 또렷해진다.

마치 안 맞는 작은 목티를 입고 있다가 벗은 것 같고, 지저분한 안경을 쓰고 있다가 닦아낸 것 같다.

시원한 해방감과 탈력감이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불안함도.

“…….”

“지금 어떤 생각이 드실까요?”

“……피곤하고 시원합니다.”

“혹시, 어떤 불편한 강박에서 벗어나신 것 같은 느낌인가요?”

“……예.”

창가 밖에 서 있던, 내 모습을 한 ‘상담 선생님’은 마치 위로하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아주 잘하셨어요. 상담을 계속 진행하면서 여기 참고 앉아 계신 건, 선생님의 강한 의지력 덕이거든요.”

“…….”

그리고 교육서를 조용히 정원 바닥에 내려놓더니, 어디선가 삽을 가져와서 가볍게 땅을 팠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강력한 충동이나 관념에 사로잡히면, 너무 괴롭지요.”

쓱쓱, 창밖에 선 ‘김솔음’의 손에 의해 야외정원 한구석에 작은 흙구덩이가 생겼다.

툭.

교육서가 그 안에 던져졌다.

“변화가 언제나 나쁜 건 아니지만, 선생님의 몸과 마음이 힘들어진다면 언제나 거부할 수 있는 게 맞지요.”

창밖의 내가 파낸 흙을 그 위로 깔끔하게 덮기까지 하더니, 개운하게 손을 탁탁 털어냈다.

“솔음 선생님, 거기 화분에 작은 식물 보이시죠?”

화분?

고개를 돌리니, 정말 소파 근처 테이블에 작은 화분이 있었다.

콩알처럼 작은, 설익은 열매들이 맺힌 풀이다.

“거기서 마음에 드는 열매 하나를 따와 주실 수 있을까요?”

“…….”

나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익은 열매 하나를 부드럽게 따내어, 창가 너머의 ‘나’에게 건네었다.

“정말 잘하셨어요.”

창밖의 상담 선생님이 열매와 함께 내 손을 잡았다.

그러자.

“…!”

내가 쥐고 있던 열매가 새빨갛게 익었다.

마치 영양분을 가득 섭취한 것처럼, 통통하고 먹음직스럽게.

“꼭꼭 씹어 드시고 가세요.”

“…….”

나는 열매를 입에 넣었다.

극렬한 불안, 울분, 상념, 비이성적인 슬픔과 고통이, 천천히 열매와 함께 녹아내렸다…….

정신 오염이 심각한 내담자가 방문 시 붉은 열매(여우주머니과 여우구슬로 추정)를 약으로 제공.

정신 안정에 탁월한 효과를 보임.

먹지 않고 반출하려던 모든 시도에서 해당 열매는 문밖을 나오는 순간 사라짐.

후.

한숨과 함께, 모든 감정적 찌꺼기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나는 평온해졌다.

그냥, 평범하게 몸과 정신이 지친 직장인으로.

평상시의 나로.

나는 고개를 들고 창가에 선 상담 선생님을 보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훨씬 나아졌습니다.”

“제가 고맙지요, 김솔음 선생님!”

상담 선생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어쩐지, 그 사람은 더 이상 내 모습을 흉내 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볼까요?”

이후로는 평범한 정신과 상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솜씨 좋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상담 선생님을 만나서 이것저것 잘 털어놓은 느낌이었다.

‘이것만은 인정한다.’

백일몽 주식회사 이 답 없는 이익집단 괴담 기업이 딱 하나 잘한 걸 꼽자면, 이걸 직원 복지로 넣어줬다는 거다.

“앞으로 나쁜 생각에 압도된다는 느낌이 들 때면, 언제든 여우 상담실에 오실 수 있도록 팻말을 드릴게요.”

나가는 길에는 물건도 하나 받았다.

여우 상담실

아까 내가 들어온 문에 붙어 있던 것과 동일한 팻말이다.

“그 팻말을 문에 붙이고 열면, 우리 상담실로 연결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간직하고 싶지만, 나가는 대로 문에 붙여야 할 것이다.

회사의 복지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모든 내담자는 반드시 상담이 종료된 후 받는 팻말을 이용한 문에 그대로 부착한다.

‘내가 썼던 문에 걸린 명패가 사라졌을 테니까.’

가불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못내 아쉬워하는 상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 사실 정기 약속을 잡고 꾸준히 1주, 혹은 2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으시는 게 가장 좋은데….”

으아아악!

“죄송하지만 너무 바빠서…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죠. 요새 사람들은 다 그렇더라고요….”

‘상담 선생님’은 약간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 모습에 넘어가면 안 된다.

‘정기 상담을 잡으면… 부작용 터질 확률이 극적으로 올라간다고…!’

이용기록 #521 (이레귤러)

‘상담 선생님’이 내담자에게 강력히 정기 상담을 권유.

내담자는 거절했으나, ‘상담 선생님’은 끈질기게 설득을 시도. 1시간 21분이 소요된 끝에 내담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권유를 수락.

이후 실종.

※해당 기록의 전문을 열람하기 위해선 B레벨 보안인증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상담 선생님은 다시 권유하는 대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날 보내주었다.

“그래도 김솔음 선생님 주변에는 좋은 지인과 가족,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

잠깐만.

확실히 내가 이 미친 괴담 세계관에서도 인성 좋은 지인이나, ‘착한 친구’가 있긴 하지만….

“가족…이라니요?”

상담 선생님이 손을 뻗더니, 자신의 손목을 톡톡 친다.

나도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치는….

: Socius :

“그분이요.”

“…?!”

♬♩♪♬~♪♪♩~

“아, 시간이 다 됐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김솔음 선생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창가에서 웃고 있던 상담사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소박하고 멋진 야외정원에서 쏟아지는 햇살만 들어왔다…….

♬♩♪♬~♪♪♩~

상담 종료를 알리는, 가벼운 왈츠의 멜로디.

저 멀리, 정원의 돌담 아래로 호다닥 사라지는 여우의 주홍빛 꼬리가 보인 것도 같았다….

“…….”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탈의실 커튼으로 향했다.

커튼으로 가는 길에 놓인 꽃무늬 레이스 테이블 위에 뭔지 모를 시원한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도 힘내요!

*^^*

“…….”

나는 음료를 쭉 마시고, 감사히 내려놓았다.

아주 고소한 보리차였다.

-상담은 유익했습니까, 친구?

“응.”

나는 ‘착한 친구’ 봉제 인형을 챙겼다.

……정신이 맑아지니, 이 녀석에 대해서도 몇 가지 드는 생각이 있지만….

‘그건 퇴근하고 나서.’

일단은 먼저 마주해야 할 상대가 있다.

끼익.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맞은편에 기대어 서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하얀 도마뱀 머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상담을 받았습니까?”

“예.”

모르긴 몰라도, 이 말을 하는 난 제법 머쓱한 표정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조장님. 덕분에 오염에서 벗어났습니다.”

“아닙니다.”

도마뱀 조장이 겸양을…?!

“김솔음 씨는 아직 오염 상태입니다.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으십시오.”

“……예.”

아.

그런 의미였구만….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은데, 조장님이 보시기에도 그럽니까?”

“예.”

도마뱀 조장이 마치 재어보듯이 나를 보더니,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보셔도 괜찮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박민성 주임의 전언입니다.”

“…!!”

…이자헌 조장은, 정장 주머니에서 작은 포스트잇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건넸다.

노루야, 고생 많았어.

꺼내줘서 고마워.

“…….”

나는 짧게 심호흡했다.

“회복되셨나요?”

“회복의 기준이….”

“이성적으로 소통이 가능하십니까?”

“확률적으로 가능합니다.”

후…….

‘오락가락한다는 뜻인가.’

어쨌든 회복 중이라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또 하나의 조원.

“……혹시 은하제 대리님이 조장님께 따로 연락드린 적은… 없습니까?”

“예.”

“…….”

은하제 대리는 휴직 처리가 되자마자 소식이 끊겼다.

문자나 카톡을 보내면 가끔 보시긴 하는데, 답장은 없다. 확인 표시만 해줄 뿐.

‘이 괴담 회사와 거리를 좀 두고 싶으신 걸지도.’

정신 오염 때문에 별 난리를 다 겪고 나니까 참 현명한 자세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그걸로 내 오전 일정은 끝났다.

“저는 이대로 사무실로 복귀할까요?”

“예.”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조장님.”

“예.”

이자헌 과장은 자기 일을 보러 떠났고, 나는 점심시간 전까지 잠깐 사무실에서 복지몰이나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바로 직전에 A등급 용액을 뽑은 덕택에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제정신을 누리니까 더 좋은가….’

모르겠다. 아주 그냥 이 회사가 무섭다….

톡톡.

“안녕하세요.”

음?

나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이 내 책상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던 것이다.

회색 정장을 입은 젊은 남성이었다.

‘모르는 얼굴이다.’

다른 팀이나 타부서 사람인가?

내 또래로 보였는데, 면접 자리에서 절대 경쟁자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인상이다….

‘그냥 다른 대기업 가지 왜 여기를.’

순간 측은한 눈으로 상대를 볼 뻔했으나, 잘 넘기고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아, 여쭤볼 게 있어서요.”

상대도 똑같이 친절하게 물어봤다.

“상담은 잘 받으셨나요, 솔음님?”

“…!”

“많이 회복되신 것 같아서 제 마음이 좋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호유원이라고 해요.”

그리고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민다.

“최근에 청 이사에게 재밌는 제안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

청 이사.

존칭을 붙이지 않고 불렀다.

그리고 이름.

호유원.

…….

…호 이사!!

“마침 저도 제안 드릴 게 있었는데, 신기한 우연 같아요.”

호 이사가 D조 사무실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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