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05화
군림천하 (1005)
전흠과 서인걸 모두 무공에 관한 한은 젊은 층의 고수들 중에서는 손꼽힐 만큼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인재들인지라 조용하던 선상 위는 순식간에 찬란한 검광과 칼 부딪힘 소리로 뒤덮여 버렸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선실에서 꼼짝도 않고 있던 정소소와 누산산, 엄쌍쌍이 차례로, 선상으로 올라왔다.
뿐만 아니라 선주인 경장호도 놀란 얼굴로 올라왔다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눈부신 검의 향연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전흠의 검이 날카로운 빛을 뿌리며 무서운 속도로 서인걸을 향해 날아들 때면 금시라도 서인걸의 몸에서 피 분수가 뿜어질 것 같은지 놀란 헛기침을 들이켰고, 서인걸이 날렵한 동작으로 그 검을 피하며 예리한 반격을 날릴 때면 얼굴이 활짝 펴지며 손뼉이라도 칠 듯 양손을 움찔거렸다.
경장호가 하도 호들갑을 떨어대자 누산산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쏘아붙였다.
“시끄러워서 구경도 못 하겠네. 저러다 비무가 끝나기도 전에 숨넘어가는 거 아닌가 몰라.”
경장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누산산의 사나워 보이는 얼굴을 보고는 찔끔하여 막 나오려던 말을 속으로 집어삼켰다.
이 일대에서는 가장 커다란 명성을 지닌 경가의 사람이라고 해도 어려서부터 평생 동안 상단을 운영해 왔던 경장호는 무공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대신 많은 사람들을 상대한 경험은 누구보다도 풍부했다.
그는 때로는 말보다 주먹이 훨씬 더 빠르고 무섭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봉팔선자 중의 한 명이 분명한 누산산의 눈 밖에 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경장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조용해지자 그제야 누산산은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이제야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겠네.”
그녀는 한동안 두 사람의 격전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보기엔 막상막하 같은데, 큰언니 생각은 어때요?”
선상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싸움을 조용히 보고 있던 정소소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검법의 변화 위주로 싸우고 있어서 내가 보기에도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는 것 같구나.”
“하지만 실제로 싸운다면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누산산은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뭐예요? 그런 맥없는 말은 전혀 큰언니답지 않아요.”
“맹렬하게 싸우고 있는 것같아 보이지만, 아직은 검에 진력을 싣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진정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구나. 그러니 진짜 싸울 때 어떻게 될지를 누가 예측할 수 있겠니?”
누산산은 그녀의 말에 다시 눈을 반짝이며 두 사람의 대결을 열심히 구경했다. 그러다 결국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저히 모르겠네. 저 똑똑한 장문인에게 물어보면 좀 알려나?”
누산산은 슬금슬금 진산월의 옆으로 다가갔다.
진산월은 눈으로는 전흠과 서인걸의 싸움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녀와 정소소의 대화도 듣고 있었기에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얼 알고 싶은 거요?”
누산산은 혀를 날름거렸다.
“여자가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아는 척하는 건 정말 재수 없는 남자가 하는 행동이에요. 진 장문인은 안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진산월은 그녀의 억지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을 테니 물어보시오.”
“여자가 뭘 궁금해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굳이 물어보라고 하는 건 더 재수 없는 행동이에요.”
“음. 나는 입을 다물고 있겠소.”
진산월이 진짜 입을 굳게 다물자 누산산은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아녀자와 기싸움을 하는 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에요. 천하의 진 장문인이 이런 일로 삐치거나 꽁해 있을 리는 없다고 믿겠어요.”
진산월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누산산은 어떤 말을 해야 저 목석같은 진산월의 표정을 일그러뜨릴 수 있나를 열심히 고민했으나, 그녀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어느새 다가온 정소소가 영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분 소협의 대결은 겉으로 보아서는 무척이나 팽팽해서 누가 더 우세한지 전혀 알 수 없군요. 전 소협의 검법이 맹렬하고 기세가 대단한 반면에 서 소협의 검법은 빠르고 변화무쌍해서 아주 잘 어울리고 있군요. 두 사람이 사용하는 검법은 모두 종남파의 무공인가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전흠은 성라검법을 사용하고 있고, 서인걸은 낙전칠검의 변형인 전광십사검으로 대응하고 있소.”
“두 검법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검법이로군요.”
확실히 전흠과 서인걸의 대결은 팽팽하기 그지없어 아무리 오래 싸워도 어느 한쪽이 쉽게 패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진산월은 의외의 판정을 했다.
“승패는 진즉에 났소. 다만 한쪽이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 말에 정소소는 물론이고 샘이 난 얼굴로 정소소와 진산월을 번갈아 보고 있던 누산산마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녀들이 보기에는 두 사람의 대결이 너무 용호상박의 격전이어서 도저히 승패를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요? 누가 이겼나요?”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소맷자락을 떨쳤다.
파아아!
그러자 세찬 경력이 일어나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검을 거두고 서로 몇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정소소와 누산산은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전흠은 여전히 평상시와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있는 것에 비해, 서인걸은 이마가 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가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은 두 사람의 검법이 워낙 맹렬하게 부딪치고 검광이 난무했기에 미처 드러나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삼십 초가 지났다.”
선언하듯 말을 내뱉은 진산월은 먼저 서인걸을 향해 다가갔다.
“잘 봤네. 전광십사검을 상당한 경지까지 수련했더군.”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고 있던 서인걸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장문인께 제대로 된 전광십사검을 보여 주지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낙전칠검이 십사검으로 바뀌면서 아무래도 초식 간의 연계나 흐름이 살짝 매끄럽지 못한 것 같더군. 그건 원래의 낙전칠검으로 돌아가면 자연스레 없어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게…….”
서인걸은 그게 아니라 자신의 무공이 전흠보다 뒤처져서 전광십사검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 주지 못한 게 아쉽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이내 진산월도 이미 그런 점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생각해서 돌려 말한 것임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팽팽한 대결로 보였을지 몰라도 실제로 검을 들고 싸웠던 서인걸은 자신과 전흠의 실력 차이가 당초 예상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내공을 펼치지 않은 상태에서의 대결이라 단순히 어느 검법이 더 뛰어난 것인지로 우열이 판가름 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검법의 우열 이전에 펼치는 사람의 기세와 검의 수발, 그리고 싸움에 대한 능란한 대응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전력을 다해 공격해도 전흠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검을 막아 내며 반격을 가해 왔다. 그러면서도 검의 속도를 적절히 조절해서 자신이 막아 내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전흠의 공격이 거칠거나 서툴러서 그런 줄 알았던 서인걸은 이내 일부러 전흠이 손길을 늦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더욱 전력을 다했으나, 전흠의 대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서인걸은 왜 진산월이 비무 전에 다치는 사람이 패하는 거라는 조건을 내걸었는지를 깨달았다. 진산월은 두 사람의 무공이 적지 않은 격차가 있음을 알고 그나마 비무가 어우러질 수 있도록 전흠에게 나름의 제한을 걸어 둔 것이다.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자신의 무공이 전흠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서인걸로서는 부끄러우면서도 의기소침해서 진산월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특히 가문의 최고 무공인 전광십사검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하나 전광십사검에 대한 진산월의 평가는 오히려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자네가 펼친 것을 미루어 볼 때 확실히 낙전칠검은 본 파의 최고 검법 중 하나임이 분명하네. 똑같은 수준이라면 성라검법보다 한 길 위의 검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군.”
서인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쳐들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진산월은 전흠을 돌아보았다.
“네가 말해 보거라.”
전흠은 입맛을 한 차례 다신 후 나름의 예의를 갖추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서 소협의 검법은 상당히 빠르고 위력적이었습니다. 특히 변초가 다양하면서도 검로를 예측하기 어려워서 상대하기 쉽지 않더군요. 중간중간에 조금 쓸데없는 사족 같은 부분만 없어진다면 무척이나 무서운 검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인걸은 자신을 가지고 놀다시피 했던 전흠이 오히려 자신의 검법을 극찬하자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고 한편으로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왜 그런 차이가…….”
서인걸의 표정만 보고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전흠이 그답지 않게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그야 사람이 다르니 그렇지요.”
“당신이 펼쳤다면 결과가 달랐을 거란 말이오?”
“그게 아니라, 서 소협은 아직 제대로 강호행을 한 적이 없지요?”
뜻밖의 질문에 서인걸은 조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호는 여러 번 나가서 활동했고, 남과 싸운 적도 적지 않았소.”
전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거 말고, 정말 죽기 살기로 다른 사람과 치열한 혈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까?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고수와 싸워서 그를 죽이거나 그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적이 있느냔 말입니다.”
“그건…….”
서인걸은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나름 강호의 명문에 속해 있는 그가 그런 험악한 싸움을 했을 리 없었다.
“나는 그런 싸움을 해왔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저기 계신 장문인을 비롯한 본 파의 고수들은 모두 무시무시한 강적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정말 처절한 싸움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결국은 살아서 여기까지 와 있는 겁니다.”
전흠의 음성은 거칠고 투박했으나, 그 안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런 싸움 속에서 나는 검법의 초식이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검로 또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 다른 길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서 소협의 검은 오직 정해진 법칙대로만 움직이더군요. 그래서 나도 최대한 그에 맞춰 싸워 준 겁니다.”
서인걸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만약 제대로 싸웠다면…….”
전흠은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검법의 수준과 관계없이 아직 서 소협의 검은 저에게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단순한 말이었으나 서인걸은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또한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재미있었습니다. 낙전칠검이 정식으로 본 파로 수습된다면 기회가 닿는 대로 배워 보고 싶군요. 제게 상당히 잘 맞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전흠은 그 말을 끝으로 진산월에게 목례를 하고는 선실로 내려갔다.
서인걸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이것이 종남파의 본모습이로구나. 이런 자들이 있기에 종남파가 당금 무림을 석권하고 있었던 거야.’
단순히 마부로만 생각했던 전흠조차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고수였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절로 승복하게 하는 신검무적은 과연 어떤 경지에 올라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문은 이제 그런 종남파에 속하게 되지 않았는가?
묘한 감상과 짜릿한 전율이 서인걸의 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한참 후에 다가온 경장호가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도 서인걸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말 못 할 여러 가지 감흥에 휩싸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