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08화
군림천하 (1008)
제407장 관중제일(關中第一)
종남산으로 향하는 길은 예상보다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길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늘이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본 서인걸이 진산월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비가 더 세차질 것 같습니다. 길을 더 계속 가기에는 무리가 될 것 같은데, 어쩌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군. 근처에 잠시 머무를 곳을 찾아보게.”
“알겠습니다.”
서인걸이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곳의 지리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쓸 만한 주루가 있으니, 그곳으로 안내하지요.”
말을 한 사람은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틀어 올린 예쁘장하게 생긴 흑의무복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왕도일의 딸인 왕옥지로, 조금 전에 일행에 막 합류하여 서로 간단히 인사만 나눈 사이였다.
예쁜 외모와는 달리 눈빛이 날카롭고 입술이 얄팍해서 다소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의외로 행동거지는 얌전하고 말투도 차분했다.
“그렇게 해 주겠소? 부탁하겠소.”
진산월의 말에 그녀는 간단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몰아 빗속을 뚫고 달려갔다. 서인걸이 잠시 망설이다 진산월의 고갯짓을 보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 광경을 본 누산산이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좋을 때로구나. 저 정도면 선남선녀라고 할 수 있으려나?”
마부석에 앉아 있던 전흠이 노인네 같은 말투의 그녀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자, 그녀는 날카로운 논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죠?”
전흠은 며칠간의 여정으로 그녀가 어떤 성격의 여자인지 대충 파악했기에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 여자와 다투는 것은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 될 게 뻔했다.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흥. 당신은 인상이 좋지 않아서 쳐다보고만 있어도 시비를 거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지니 조심하도록 해요.”
전흠은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소저도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오.”
말을 해 놓고도 아차 싶었는지 전흠은 황급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나 눈앞에 무언가가 희끗거리더니 그녀가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쌍심지를 곤두세우며 그를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죠? 내 인상이 어떻다고요?”
“아니, 난 그저 느낀 대로 말했을 뿐…….”
누산산은 정말 성질이 났는지 눈빛이 표독해지며 금시라도 전흠을 향해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하나 전흠은 마부석에 있다 보니 달리 피할 수도 없어서 그저 난처한 얼굴로 진산월을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흠. 빗줄기가 더 거세지기 전에 일단 비를 피할 곳부터 찾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장문 사형.”
전흠은 물에 빠졌다가 구원을 받기라도 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치며 재빨리 마차를 몰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쳇, 생긴 거답지 않게 약삭빠르긴.”
누산산은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진산월을 슬쩍 쳐다보았다.
하나 아무리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는 그녀라도 감히 진산월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마차가 달려 나간 곳을 보더니 그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사실 그녀가 애꿎은 전흠에게 시비를 건 것은 이번 여행에 통 재미를 못 느끼기 때문이었다. 선자 두 사람은 임영옥을 돌본다는 핑계로 마차에 콕 틀어박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셋이나 되는 남자들은 사근사근한 성격이 아니어서 말 붙이기도 쉽지 않았다.
진산월은 워낙에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였고, 서인걸은 너무 반듯한 성격이어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만만한 전흠을 툭툭 건드리고 있는데, 전흠이 도통 받아 주지 않으니 공연히 심술이 나서 그에게 자꾸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일행이라고 들어온 여자는 아무리 봐도 호락호락한 성격 같지 않아 보여서 갑갑한 기분마저 들었다.
‘쳇, 큰언니하고 여섯째 언니가 동행한다기에 잔뜩 기대했는데 이게 뭐람. 이번에 가는 주루에서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일어나길 바라야겠네.’ 진산월이 알았다면 큰일 날 소리라며 화를 낼 생각을 태연히 하며 누산산은 열심히 말을 몰아 마차 뒤를 따라갔다.
때마침 앞쪽에서 서인걸이 마중을 나왔다.
“왕 소저가 안내한 주루가 저쪽에 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고 있던 참이라 전흠과 누산산은 재빨리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말을 움직였다.
과연 삼십 여장쯤 가니 넓은 사거리 한쪽에 제법 커다란 주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왕흥루(旺興樓)>라는 현판이 붙은 그 주루는 이 층으로 되어 있고, 한쪽에 상당히 큰 마구간이 있을 뿐 아니라 뒤편으로는 객잔까지 운영하고 있어서 이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커 보였다.
일행이 말을 마구간으로 몰고 마차를 한쪽에 대느라 분주한 사이 왕옥지가 이 층에서 내려와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이 층의 별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주루는 숙소까지 겸하고 있으니, 비가 그치지 않는다면 하루쯤 묵어도 괜찮을 겁니다.”
진산월도 쉽게 그칠 비 같지 않아서 오늘 다시 길을 떠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일 처리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소. 식사를 마친 후에도 비가 계속 내린다면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도록 하겠소.”
“그럼 미리 주인에게 뒤쪽의 독채 몇 개를 준비해 두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녀의 똑 부러진 모습에 진산월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왕 소저는 이런 일 처리에 상당히 능숙해 보이는구려.”
왕옥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상행(商行)을 다니다 보니 익숙해져서 그렇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저 혼자 상단을 꾸려 돌아다니기도 했기에 아는 곳도 적지 않습니다. 이곳도 제가 자주 들르던 곳이라 주인과도 안면이 있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홀로 상단을 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부친인 왕도일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제 갓 스무 살 남짓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인이 하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왕옥지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척척 일을 해치웠다. 그녀가 안내한 이 층의 별실은 완전히 독립된 공간으로,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올라가는 계단까지 따로 설치되어 있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전흠은 제법 많은 주루를 가 보았지만, 이런 별실이 있는 곳은 본 적이 없기에 신기한 생각이 들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곳도 다 있네. 돈 많은 부자들을 위한 곳인가?”
그 말을 들었는지 누산산이 피식 웃으며 조잘거렸다.
“역시 촌사람 아니랄까 봐 티를 내는군. 원래 상단이 자주 다니는 관도에서 장사하는 주루들은 이런 식으로 외부의 시선을 막아 주는 별실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는 법이에요. 장사꾼들 중에는 남들의 시선을 꺼리는 치들이 제법 많으니까.”
전흠은 그녀의 말에 살짝 약이 오르면서도 궁금한 생각이 들어 불쑥 물었다.
“상단이 자주 다니는 곳이라면 대도시 주변의 주루들은 대부분 이런 별실이 있단 말이오? 난 본 적이 없는데?”
누산산은 짐짓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 같은 뜨내기들을 막으려고 설치한 곳이니 당연히 단골이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알아차리기 힘들겠죠. 지금도 일부러 이쪽 계단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이런 별실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 아니에요?”
전흠은 그녀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입맛이 씁쓸해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런 곳을 만들어 놓고 아는 놈들만 즐기고 있었단 말이로군. 역시 장사꾼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별실은 정말 좋았다. 실내장식도 은은하면서 고풍스러운 맛을 느낄 수 있었고, 탁자와 의자도 편안하면서 고아한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전담하는 직원이 따로 있는지 인물됨이 제법 번듯한 점소이가 정중하면서도 능숙한 자세로 각자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때마침 마차에서 나온 임영옥이 정소소와 엄쌍쌍과 함께 별실로 들어서자 점원의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으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그녀들을 가장 안쪽의 자리로 인도했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그 태도가 왠지 조금 전 자신을 안내했을 때보다 더 정중하고 예의 바른 것 같았다고 느꼈는지, 누산산이 무어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다.
하나 늦지 않게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주문은 잠시 후에 할 테니 이만 지리를 비켜 주게.”
“알겠습니다. 저를 부르시려면 언제든 저쪽에 있는 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편히 쉬십시오.”
점원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별실을 나가자 누산산은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손님에 따라 대응이 달라지다니 이곳의 수준도 알 만하구나.”
공교롭게도 막 주인을 만나고 별실로 들어서던 왕옥지가 그 말을 들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누산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어찌나 매서웠던지 두려움을 모르는 누산산조차도 순간적으로 움찔할 정도였다.
누산산은 왕옥지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으나, 의외로 왕옥지는 침착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별실을 담당하는 점원은 특별히 교육을 받은 자들만 선별해서 발탁하는데, 아마도 그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제가 주인에게 말해 두겠어요.”
누산산은 별생각 없이 내뱉은 자신의 말 때문에 엉뚱한 풍파가 일어날 것 같자,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일부러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
“번거롭지 않아요. 손님이 불만을 느꼈다면 당연히 주인이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정색을 하자 누산산은 절로 찔끔하여 손까지 흔들었다.
“정말 괜찮아요. 아마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말을 해 놓고 보니 이건 오히려 자신의 약세를 스스로 드러낸 셈이라 누산산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점원의 잘못을 지적하려던 일이 왜 꼭 내가 잘못한 걸 고백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지?’
생각해 보니 이게 모두 왕옥지의 예상치 못한 반응 때문이었다.
‘저 여자가 너무 정색을 하고 나서는 바람에 내가 지레 놀라 버린 거야.’
그런 누산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옥지는 다부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주인에게 바로 알려서 시정하도록 하지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누산산도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알았어요.”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왕옥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누산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가득했다.
‘만만치 않은 년이다.’
몇 마디의 말만으로 천하의 누산산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으니, 그녀로서도 좀처럼 겪어 보지 못한 특이한 개성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정소소와 엄쌍쌍은 나직하게 무언가를 소곤거리고 있었다. 듣지 않아도 방금의 일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