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18화
군림천하 (1018)
제410장 대소집령(大召集令)
<대소집령. 모든 종남파의 제자들은 오는 칠월 십오일에 종남산 조사전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고(告)하라. 종남파 이십일 대 장문인 진산월령(令).>
섬서성 전체가 난데없이 날아든 하나의 소식에 지진을 만난 듯 거세게 뒤흔들렸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발동한 소집령 하나!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문파 내부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소집령을 발동한 주인공이 당금 천하의 제일고수이며 모두가 앙망해 마지않는 신검무적이란 것이 세인들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종남파에서 대소집령이 발동된 것은 백이십 년 만의 일로, 그동안 쇠퇴 일로를 걸어왔던 종남파가 화려하게 재기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었다.
종남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별 관심 없던 사람들도 과연 이번 대소집령에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모이게 될지 귀추를 주목하고 있었다.
종남파가 당금 강호를 송두리째 뒤흔들며 놀라운 명성을 쌓아가고 있으나 그 문하제자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부분을 종남파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고 있었다.
그런데 종남파의 장문인이 공개적으로 모든 문하제자들에 대한 소집령을 발동했으니, 그동안 숨어 있거나 잠재적으로 종남파에 적을 두었던 모든 고수들이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그 수가 얼마나 될지는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 종남파에서도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가뜩이나 신검무적의 귀환 이후 종남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어나는 와중에 발동한 대소집령으로 인해 섬서성 전체의 무림인들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무수한 인파들이 종남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번 기회에 어떤 식으로든 종남파에 연줄을 맺고 싶어 하는 자들이었으나, 신분과 목적을 숨기고 조심스레 접근해 오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을 맞이하느라 종남파의 제자들은 하루 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고, 그 와중에 의외의 피해를 본 사람도 생겨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손풍이었다.
손풍은 정말 잘 피해 다녔다.
문파로 귀환한 장문인의 일행 중에 누산산이 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손풍은 정말 필사적으로 그녀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고, 그녀가 오지 않을 곳만을 찾아다니느라 모진 애를 썼다.
하나 그러한 노력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집요할 정도로 끈질기게 손풍을 찾아다니다 반쯤은 포기했던 누산산의 눈에 손풍이 뜨인 것은 정말 우연한 일로, 손풍으로서는 하늘을 우러러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정말 억울하고 비통한 일이었다.
손풍은 식자재를 관리하고 부족한 자재들을 서안에서 보급해 오는 일을 맡았는데, 자재 관리 자체는 정해가 책임자였기에 손풍은 그의 지시를 따라 물건만 운반해 오면 되는 단순한 업무였다. 게다가 운반 자체도 인부들이 맡았기에 손풍은 그저 인부들 뒤를 따라다니며 물건이 파손되거나 도난당하는 일이 없는지만 감시하면 되는 그야말로 꿀을 빠는 일이었다.
종남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지 않아도 되었고, 공포스러운 존재인 누산산의 눈도 완벽하게 피할 수 있기에 손풍은 정말 모처럼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업무에 임했다.
정해 사숙은 온순하고 아량이 많은 분이었지만, 만에 하나 그의 눈에 벗어나서 다른 일을 맡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기에 손풍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적어도 손풍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토록 열심히 본 파를 위해 일을 하다니…………… 이걸 다른 사숙이나 어른들도 알아줘야 하는데.’
손풍은 흘러내리지도 않는 땀을 닦으며 인부들을 독려했다.
“자, 조금만 더 힘냅시다. 저 고개만 넘으면 본 파까지는 험한 길이 없으니 마지막 고비인 셈이오.”
공연히 인부들을 향해 큰소리를 치다 보니 몸에 힘도 잔뜩 들어가고 목도 칼칼했지만, 남의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어서 통쾌한 기분도 들었다.
‘역시 나는 남을 부리는 게 체질이라니까. 가끔은 본 장에 내려가서 호장 무사들이라도 집합시켜 볼까?’
손풍이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고갯마루에서 두 명의 여인이 내려왔다. 하나같이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는 절색의 여인들이었다.
각기 노란 색과 짙은 남색 옷을 입은 그녀들은 서로 무언가를 소곤거린 채 고개를 내려오고 있다가 마차를 운반하는 무리들을 발견하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노란색 옷을 입은 여인이 누군가를 발견한 듯 뾰쪽한 음성을 토해 냈다.
“앗? 당신은……!”
손풍은 그녀들이 나타날 때부터 사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황급히 화물 뒤로 몸을 피했다. 하나 그 순간 눈앞에 무언가 어른거리더니 어느새 황의미녀가 그의 앞에 우뚝 선 채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디에 있기에 도통 보이지 않나 했더니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나!”
손풍은 짐짓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한 차례 훑어보더니 이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누군가 했더니 천하에 이름 높은 천봉선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옥봉 누 소저이셨구려. 이런 곳에서 보니 반갑소. 그런데 숨어 있다니, 누가 어디에 숨어 있다는 말씀이오?”
누산산은 쌍심지를 곤두세우며 그를 잔뜩 노려보았다.
“누구긴? 뻔뻔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파렴치한이지.”
“어허! 신성한 종남산 일대에 그런 자가 있었단 말이오? 누구요? 내 당장 그자를 잡아서 물고를 내주고 말리다!”
천연덕스러운 손풍의 말에 누산산은 어이가 없는지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요. 누구겠어요? 멀다면 하늘 끝에 있고, 가깝다면 코 앞에 있는 존재지요.”
손풍은 끝까지 능청을 떨었다.
“그런 존재가 있단 말이오? 누굴까? 나는 전혀 떠오르는 사람이 없구려. 미안하오, 나는 바빠서 이만.”
손풍이 휑하니 몸을 돌리려 하자 누산산이 뾰쪽한 음성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정말 계속 딴청 피울 거예요? 어떤 벌이든 기꺼이 달게 받겠다고 무릎까지 꿇어가며 소리친 사람이 누구인지 정녕 기억이 안 난단 말이에요?”
손풍은 그녀가 과거에 자신이 내뱉은 말까지 들먹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한층 더 두꺼운 낯짝을 내밀었다.
“당당한 남자가 아녀자에게 무릎을 꿇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그 사람에게도 그만큼 급한 사정이 있었겠지. 그러니 같은 남자로서 동정하지 않을 수 없구려.”
누산산은 계속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그의 얼굴을 밉살스러운 듯 집요하게 쏘아보며 이죽거렸다.
“한입으로 두말을 하다니 남자가 아닌 모양이지요. 그러니 한낱 아녀자에게 무릎을 꿇고 제발 살려 달라고 야밤에 그토록 애절하게 울부짖은 거 아니겠어요?”
손풍은 순간적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단 말이오? 난 그저 꼬마 사형을 도와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을 뿐.
“오, 그 대단한 남자가 바로 당신이었다는 걸 스스로 고백하는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누 소저가 나를 이토록 간절히 찾았다니 뜻밖이구려. 나를 긴히 만날 일이라도 있었소?”
손풍은 재빨리 화제를 돌리려 했으나, 누산산이 그런 얄팍한 수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찾긴 찾았지요. 꼬마 사형을 살려주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하도 큰소리치기에 인사나 받으려고 했더니 하도 꽁꽁 숨어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군요.”
“어허. 난 한 입으로 두말하는 소인배가 아니오, 누 소저가 그토록 나를 애타게 찾는 줄도 모르고 본 파의 일에 매달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구려. 이제라도 보게 되니 반갑소. 그때의 도움은 잊지 않으리다.”
손풍이 점잖게 말하며 몸을 돌리려 했으니, 누산산은 어렵게 만난 그를 쉽게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나 잘 숨었는지 도저히 보이지가 않아서 포기하고 언니와 서안 시내나 구경하려고 나왔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이 아니겠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손풍은 재수가 옴 붙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길. 하필이면 마실 나오다가 나를 봤구나. 본산에서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더니……………. 아! 이게 정녕 하늘의 지엄한 뜻이란 말인가?’
손풍은 내심으로는 하늘을 원망하면서 겉으로는 당당한 명문정파의 제자다운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누 소저께서 나를 그토록 찾는 줄 알았다면 사문의 일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잠시 접어 두고 찾아뵈었을 것을. 이제 이렇게 나를 보게 되었으니 달리 당부할 말씀이라도 있으시오?”
손풍은 ‘그때처럼 무릎이라도 꿇어 드릴까?”라고 덧붙이고 싶었으나, 그랬다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면 진짜 다시 아녀자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참변이 벌어질지 몰라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때는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고 지켜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종남파의 산문이 지척인 데다 적지 않은 인부들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주시하고 있는지라 손풍은 행동 하나 말 하나도 그저 조심 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산산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희롱하듯 그런 손풍의 모습을 바라보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손풍은 재빨리 포권을 해 보였다.
“특별한 말씀이 없으면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소. 내가 맡은 일이 워낙 위중한지라.”
손풍이 몸을 돌리려 하자 누산산이 재빨리 입을 놀렸다.
“왜 그렇게 자꾸 내빼려는 거예요?”
“내빼다니. 누가 말이오?”
손풍은 짐짓 눈을 부릅떴으나 누산산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물었다.
“내가 두려운가요?”
손풍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있는 대로 치켜뜨며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두드렸다.
“두렵긴. 평생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두려워한 적이 없는 나요. 그럼 이만.”
“어딜 자꾸 가려는 거예요? 이래도 내가 무서워 도망치려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손풍은 당당한 자세로 말했다.
“아녀자와 드잡이질을 하기 싫어서 몸을 피하려는 것뿐이오.”
“오! 당신은 여자와 싸우지 않는단 말이군요?”
“그렇소. 당당한 종남파의 제자로서 어찌 여인에게 손을 댈 수 있단 말이오?”
엄쌍쌍이 그만하라는 눈짓을 보냈으나, 누산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손풍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만일 여고수가 당신에게 덤벼들면?”
“점잖게 타일러 돌려보낼 것이오.”
“그래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 덤빈다면?”
그녀의 억지스러운 말에도 손풍은 화를 내지 않고 당당하게 응대했다.
“더욱 점잖게 타이를 것이오.”
“그래도 더욱 사납게 덤벼든다면?”
그녀가 집요하게 물어보자 손풍도 더는 참지 못했다.
“그런 여자는 꽁꽁 묶어 놓고 엉덩이를 때리면 얌전해지는 법이오.”
누산산은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는 듯 쌍심지를 곤두세웠다.
“뭐라고요? 어찌 여인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당신도 내게 엉덩이를 맞고 싶은 거요? 어이쿠!!”
누산산이 휘두르는 손에 정통으로 맞은 손풍은 바닥에 주저앉으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결국 이렇게 될 걸 괜히 쓸데없이 애만 썼네.’
손풍이 멍이 든 눈자위를 어루만지며 종남파의 경내를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손풍. 무슨 일이냐?”
손풍이 돌아보니 하동원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동원은 줄곧 서안에 있다가 이번에 진산월이 돌아온 것을 기화로 다시 본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사숙조님. 안녕하십니까?”
손풍이 재빨리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으나, 하동원의 시선은 퉁퉁 부은 손풍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슨 일을 당했기에 그런 꼴로 본산을 돌아다니고 있는 게냐? 대체 누가 감히 본산에서 본 파의 제자에게 손찌검을 했단 말이냐?” 손풍은 찔끔하여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제가 잠시 한눈을 팔다가 언덕을 굴러서……………”
하동원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매섭게 빛났다.
“이제는 감히 사숙조에게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너는 내가 사람에게 맞은 상처와 바닥을 구른 상처도 구분 못 하는 줄 아느냐?”
“아닙니다. 그저 모처럼 만난 지인과 잠시 손장난을 했을 뿐입니다. 사숙조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손풍이 정색을 하고 거듭 부인을 하자 하동원도 더는 그를 채근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가볍게 몇 대 맞은 정도라서 부상이라고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워낙 몸뚱어리가 튼튼한 손풍인지라 하동원이 보고 있는 사이에도 붓기가 줄어들고 멍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저놈의 몸은 진짜 부럽군.’
하동원은 새삼 감탄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손풍을 응시했다.
“본 파의 제자가 남에게 맞고 다니는 걸 더는 참을 수 없군. 너에게 이제부터 남에게 맞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마.”
손풍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 그런 법도 있습니까?”
“그렇다. 아무리 사나운 공격을 당해도 능숙하게 피하며 오히려 상대를 지치게 하는 최고의 무공이지. 어떠냐, 배워 볼 생각이 있느냐?”
손풍은 영문도 모르고 신이 나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본 파에 그런 무공이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제일 먼저 배웠을 것입니다.”
“알았다. 그럼 오늘 저녁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내 방으로 오도록 해라.”
손풍은 자신이 밤마다 곡소리 나게 두들겨 맞으며 몸뚱어리 튼튼한 걸 저주하게 되는 신세가 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채 기쁜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하 사숙조님. 잠시 후에 기필코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