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1019화
군림천하 (1019)
매상은 아침 일찍 일어나 침상을 정리했다.
밤사이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다.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하며 많은 고민을 했건만, 의외로 머릿속은 복잡하지 않았다.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어떤 결정을 할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동안의 고민은 자신을 진정한 검의 세계로 이끌어 준 사람에 대한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씻어 내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일단 결정한 이상 단 하루라도 늦출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매상은 등 뒤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조용히 사부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너라.”
누구인지 말하지도 않았건만 사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바로 응답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사부는 침상 옆의 탁자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 소마와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지만, 사부의 혈색이나 외관에서는 전혀 다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칼날처럼 예리해서 특유의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매상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사부는 냉정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가 몸을 똑바로 하자 불쑥 입을 열었다.
“마음을 정했느냐?”
매상은 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사부는 예전부터 이런 일에는 무척이나 눈치가 비상했다.
“예.”
사부는 다시 물었다.
“각오는 되어 있느냐?”
매상은 대답 대신 출검을 했다.
팟!
눈부신 섬광 한 가닥이 방 안을 휘젓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 매상의 오른팔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놀랍게도 매상은 왼손으로 검을 뽑아 스스로의 팔을 잘랐던 것이다.
매상은 고통을 참으며 지혈을 했으나, 단순한 지혈만으로 잘린 팔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다시 몇 차례 지혈을 하고 난 후에야 매상은 왼손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오른팔을 들어 그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제가 앞으로 염왕검법을 펼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사부는 눈앞에서 검광이 어른거리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여전히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냉정을 유지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검마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검마 금옥기!
매상의 사부이며, 양부이고, 실질적으로 그에게 검의 세계를 열어 준 은인이었다.
그에 대한 매상의 존경심은 변함이 없었고, 자신에게 베풀어 준 은덕 또한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상은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며칠 전부터 섬서성 일대를 온통 뒤흔들고 있는 종남파의 대소집령 때문이었다.
장문인 진산월이 종남파의 모든 제자를 부르고 있다.
매상은 자신이 아직도 종남파의 제자인지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졌고, 그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종남파의 제자다!
종남파를 떠날 때 진산월의 마지막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했다.
-너는 내 둘째 사제다. 무슨 일로도 그건 변할 수 없다.
그때 그 음성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절정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강호의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던 순간에도, 마침내 찾아낸 검마의 거처 앞에서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그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손이 부르트고 팔을 쳐들 힘이 없을 때까지 어렵사리 배운 염왕검법을 미친 듯이 익히고 있던 그 순간에조차 그는 진산월의 말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고 있었다.
그래서 사부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그를 떠날 결심을 굳힌 것이다.
매상이 스스로의 팔을 자른 것은 두 번 다시 사부에게 배운 검법을 펼치지 않겠다는 확고한 다짐이자 분명한 증거였다.
금옥기는 차갑고 냉정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매상의 오른팔과 피를 많이 흘려 창백해진 매상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얄팍한 입술을 살짝 열어 특유의 무심한 음성을 내뱉었다.
비로소 네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 “며칠 전부터 네가 무언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 원인을 모르다가, 어제 종남파에서 대소집령을 발동했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야
매상은 여전히 오른팔을 내민 채로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건 너의 선택이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네가 져야 할 몫이다. 너는 네 팔을 스스로 잘라, 내게서 배운 염왕검법을 펼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렇다면 너와 나의 부자 관계는 어떻게 정리하려느냐?”
금옥기의 말에 매상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함께 자신의 셋째 양아들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금옥기와 매상은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로 엮여 있었다. 금옥기가 매상을 받아들일 때 금함상이란 이름과
매상도 그 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팔을 자르는 것으로 자신이 얻은 무공에 대한 책임을 지려 했지만, 부자 관계로 묶인 질긴 인연의 끈은 대체 무엇으로 메꿔야 한단 말인가?
금옥기의 손이 움직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팟!
느껴졌다. 매상으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검이었다. 눈앞에서 검광이 어른거리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왼쪽 귀가 화끈거리는 통증이 거의 동시에
매상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툭!
잘린 왼쪽 귀가 바닥에 떨어지는 광경이 너무나 생경해서 마치 현실의 일이 아닌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금옥기의 손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예리한 검광을 발하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뚝뚝!
검날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 핏방울이 너무도 선연하게 보였다.
금옥기는 일부러 검을 검집에 넣지 않고 수중에 든 채로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스스로 자신의 검에 아들의 피를 묻혔으니 나는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다. 너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
매상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잘린 한쪽 팔을 들고 반대쪽 귀마저 잘린 채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처량해 보일 법도 했지만, 꼿꼿한 자세와 전신에서 흐르는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기상이 그를 한 명의 무인으로 보이게 했다.
금옥기가 천천히 자신의 검을 검집에 거둔 다음에야 비로소 매상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했다.
“영원히 갚지 못할 신세를 졌습니다. 강녕하십시오.”
금옥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읽고 있던 서책을 다시 편 채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었을 뿐이다.
매상은 팔 하나를 남겨 둔 채 금옥기의 처소를 떠났다.
그가 종남산으로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팔 하나가 잘린 채 돌아온 매상을 본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경악과 슬픔을 금치 못했다.
방취아는 한쪽 팔이 텅 비어 있는 그의 오른쪽 소매를 보며 울음을 터뜨렸고, 소지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낙일방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매상의 잘려 나간 팔 부위와 왼쪽 귀를 노려보았고, 정해는 어쩔 줄 몰라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진산월은 조용한 눈으로 물끄러미 매상을 바라보기만 했다.
생각하면 그와 매상은 사 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동안 매상의 외모는 많이 달라져 있었고, 특히 팔 한쪽이 잘린 탓인지 안색도 그리 좋지 못했다.
하나 날카로운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결연한 의지와 기상이 느껴지는 각진 턱은 예전 그대로였다.
매상 또한 진산월의 달라진 모습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예전의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그의 눈앞에는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당대 최고의 검객이 우뚝 서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매상은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렀고, 서로 간에 겪어 온 적지 않은 일들이 그 공간을 메우고 있음을 절감했다.
“아주 온 건가?”
진산월의 물음에 매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음울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종남파에 새롭게 복원된 무공이 제법 있다며?”
“몇 개 있지.”
“그중 내게 어울릴 만한 것 하나만 다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 검법만 익힐 생각이야.”
“그러지.”
매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이내 몸을 돌리다가 아직도 한쪽에서 울고 있는 방취아를 쳐다보며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만 짜고 내 방이 어딘지나 말해 줘라. 넌 그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울보로구나.”
방취아는 두 뺨이 흠뻑 젖은 채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성치 않은 몸으로 말도 없이 훌쩍 떠난 사람이 그런 꼴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안 울어요? 그 팔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한쪽 귀는 또 어디로 갔고요?”
매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피곤한데, 방이나 안내해라.”
매상이 몸을 돌려 대청을 나갈 듯하자 방취아가 황급히 그에게 따라붙었다.
“예전에 쓰던 방을 계속 쓰면 돼요.”
“그 방이 아직도 남아 있단 말이냐?”
방취아는 눈물을 그치며 억지로 방긋 웃어 보였다.
“매 사형이 언제고 다시 돌아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매상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막 그가 대청을 벗어나기 직전, 진산월의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잘 돌아왔네, 사제.”
매상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알아듣기 힘든 음성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