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1화
제101장. 해남래객(海南來客)
유난히 흐린 날이었다. 하늘은 금시라도 눈발이 뿌릴 듯 희뿌연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흐린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더니 천천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침상도 그대로였고, 하나뿐인 탁자와 그 앞에 놓인 두 개의 의자도 그대로였다. 그녀만이 없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방안의 구석구석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금시라도 방안 어딘가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려 올 것만 같아서 그는 몇 번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안이 그렇게 공허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방. 이 방에서 있었던 삼 년여 전의 어느 날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그녀의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 했다.
- 사형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고민을 남에게 털어놓을 줄도 모르고, 원하는 게 있어도 내색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너무도 어리석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사형 혼자서만 모든 짐을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저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조금씩은 나누어 주세요.
그때 자신이 무어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나 우수(憂愁) 어린 눈망울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 나도 언젠가는 나만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 주는 남편을 얻을 수 있겠죠…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의 손을 꼬옥 움켜쥐던 그녀의 뜨거운 손길이 잊혀지지 않았다. 진산월은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삼 년 전의 그날처럼 자신의 앞에 있는 빈 의자를 쳐다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반드시 그럴 수 있을 거야…”
언제가는 반드시…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굳은 다짐이었다. 아울러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 주위가 점차 어둑어둑해질 때까지도 그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조용히 열렸다. 진산월이 문득 돌아보니 방취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방취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녁 준비를 다했는데도 사형이 오시지를 않길래…”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방을 나오기 직전에 그는 다시 한차례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쓸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방취아는 그의 표정이 너무 무거워 보여서 무어라고 입을 열지도 못하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태화각에 도착할 때까지도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태화각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푸짐한 음식상이 차려진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산월은 모든 사람들이 음식상을 앞에 두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상석(上席)으로 가서 앉으며 담담한 음성을 토해냈다.
“먼저 시작하지 그랬어.”
방취아가 그의 옆에 앉으며 방긋 웃었다.
“그럴 수야 있나요? 본산을 되찾은 걸 기념하는 자리인데, 최소한의 격식은 갖추어야지요.”
진산월은 그녀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방취아가 그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그녀의 왼손은 붕대로 친친 동여매져 있었으나, 그녀는 행도에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 잔 받으세요.”
진산월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마시지 않겠다.”
방취아는 그가 술을 사양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요?”
“일방과 계성이 모두 돌아오면 그때 마시도록 하자.”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그 말을 듣자 방취아는 물론이고 소지산과 동중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낙일방과 응계성은 육 개월 전에 있었던 초가보의 침입 때 실종되어 지금까지도 행방은 물론이고 생사(生死)의 여부조차 불분명한 상태였다. 그들을 생각하면 종남파의 문인(門人)들은 모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특히 낙일방이 피를 뿌리며 절벽에서 떨어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해야만 했던 동중산의 마음은 다른 누구보다도 절절한 것이었다.
장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서문연상과 방화 등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수저를 들지 못했다. 방취아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쾌활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식기 전에 어서들 먹자구요. 장 가가(張哥哥)가 모처럼 솜씨를 발휘했는데, 다들 이렇게 쳐다만 보고 있으면 속이 터져서 화병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장 가가란 장승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녀는 장승표의 나이가 자신보다 십여 살이나 많은 것을 알고 그를 ‘가가(哥哥)’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승표도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말 잘했네. 가장 늦게까지 음식을 먹지 않고 꼼지락거리는 사람은 앞으로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구.”
진산월이 먼저 음식을 집어들자 그제서야 모두들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장승표는 어디서 구했는지 꿩과 토끼, 심지어는 노루 고기까지 마련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하려하지는 않았으나 음식들이 하나같이 정갈하면서도 구수한 맛을 지니고 있어서 다들 정신없이 음식을 입 속으로 집어넣는 데 열중했다.
방취아는 막 노루의 살점을 얇게 저며 만든 음식을 먹다가 진산월이 이내 수저를 내려놓자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더 안 드세요?”
“충분히 먹었다.”
“몇 점 드시지도 않았잖아요.”
“괜찮다.”
방취아는 잠시 진산월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가 자신도 이내 식사를 마쳤다. 예전 같으면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배가 터지도록 먹었을 텐데,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녀도 이제 식사 습관이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몰론 손과 어깨의 부상이 아직 아물지 않아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한 탓도 있었으나, 부상당하기 전에도 그녀는 과거와는 달리 먹는 양이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 사형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산에게서 들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사형은 낙양에서 자리를 잡고 살 모양이에요. 작년까지는 그래도 가끔 인편(人便)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 왔는데, 올해에는 통 아무런 연락도 없었어요. 분명히 본파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텐데…”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도… 본파가 그런 꼴을 당한 지 육 개월이나 지났는데 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을까요?”
그녀의 음성 속에는 한 줄기 서운한 감정의 빛이 담겨 있었다.
정해는 삼 년 전의 중원행(中原行) 때 상원건의 딸인 상소홍과 함께 부상을 당한 뇌일봉을 운반하여 석가장으로 갔었다. 그 뒤 진산월 일행이 종남파로 귀환했을 때, 그도 곧 돌아오리라고 예상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당분간 석가장에 머물러 있겠다는 소식만을 전하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런 세월이 삼 년이나 흐르지 이제는 모두들 정해가 종남파를 떠나 석가장이 있는 낙양에 뿌리를 내리고 살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낙양에 사는 것이야 자기의 자유라고 해도 일언반구(一言半句) 말도 없이 종남파를 떠나 돌아오지 않고 있는 정해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비단 방취아만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종남파가 초가보의 습격을 받고 거의 멸문(滅門)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텐데도 육 개월 넘게 아무런 소식도 없다는 것은 정해의 마음이 종남파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취아는 서운함을 넘어 원망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해는 두뇌가 명석하고 종남파의 문하들 중에서도 가장 박학다식했다. 게다가 성격도 원만해서 모두들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다만 이해타산(利害打算)에 밝았기 때문인지 가끔은 이기적(利己的)이고 소심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천성적으로 겁이 많아서 남과 싸우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종남파의 제자들 중에서 남과의 비무(比武)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도 정해였다. 어찌 생각하면 정해는 무림(武林)이라는 험한 세계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강호의 손꼽히는 부귀가문(富貴家門)인 석가장에서 지내는 것이 그에게는 더 적합한 것인지도 몰랐다.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식사하고 있는데도 떠들썩하기보다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진산월이 고개를 들고 입구를 쳐다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태화각의 입구에 언제 들어왔는지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키가 별로 크지 않았으나 다부진 체격을 지닌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산발한 머리를 하나로 묶어 아무렇게나 늘어뜨렸고, 추운 겨울임에도 얇은 마의(麻衣) 하나만을 달랑 걸치고 있었다.
반쯤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슴과 두 팔은 검게 그을린 데다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어 그야말로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마의청년의 허리춤에는 유난히 폭이 좁고 길다란 장검이 매달려 있었는데, 중원(中原)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기형검(奇形劍)이었다.
마의청년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는데도 전혀 거리낌 없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두 나와서 내 검을 받아라!”
불쑥 나타난 청년의 너무도 뜻밖의 행동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더구나 마의청년의 음성은 어찌나 사투리가 심하던지 그들 중 몇 사람은 그가 무어라고 소리쳤는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하나 그가 선의(善意)를 가지고 찾아온 것이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에 마의청년이 수중의 장검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챙!
날카로운 검명(劍鳴)과 함께 그의 손에는 쇠꼬챙이처럼 길고 뾰쪽한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 장검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검광(劍光)이 삽시간에 장내의 공기를 싸늘하게 얼려 버렸다.
기형검을 들고 선 마의청년의 두 눈에는 흉흉한 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맹렬한 기세와 검을 잡고 있는 자세만 보아도 그가 보기 드문 뛰어난 실력의 검객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느닷없는 마의청년의 출현에 모두 당혹해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지산이었다. 소지산은 마의청년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초가보에서 왔나?”
마의청년은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대뜸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네놈이 제일 먼저 죽겠단 말이지?”
알아듣기도 힘든 심한 사투리와 함께 시퍼런 검기가 소지산의 코앞으로 쏘아져 갔다. 사람들은 마의청년이 설마 이토록 성급하게 검을 휘두를 줄은 몰랐는지라 자신들도 모르게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앗?”
“사형, 조심해요!”
고함 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오는 가운데, 눈부신 검광이 피어오르며 날카로운 마찰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차창!
중인들이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어느새 소지산이 검을 뽑아 들고 마의청년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차분한 분위기로 식사를 즐기던 장내가 순식간에 살벌한 검풍(劍風)과 검광이 마구 난무하는 격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싸움은 치열하기 그지없어 일시지간 누구도 쉽사리 승패를 예상할 수 없었다. 소지산은 낙하구구검을 익힌 후로 무공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이제는 강호의 어디에 내놓아도 일류검객으로 손색이 없는 솜씨를 지니고 있는데도 마의청년과의 격전에서는 전혀 우의를 점할 수 없었다.
마의청년의 검법은 상당히 빠르고 매서워서 주위 사방이 온통 그가 내뻗는 검광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듯했다. 소지산은 마의청년의 실력이 절대로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알고 처음부터 낙하구구검을 펼쳐 맞섰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마의청년이 검을 사용하는 방식은 소지산이 처음 보는 특이한 것이었다. 그는 검날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휘둘렀는데, 그래서인지 검초(劍招)가 상궤(常軌)를 벗어난 방식으로 날아들어서 소지산을 당혹케 했다.
그 때문에 소지산은 낙하구구검의 현묘한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조금씩 열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소지산의 열세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두드러졌다. 마의청년의 검은 점차로 빨라지고 있었는데 소지산의 동작은 반대로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방취아는 절로 초조한 생각이 들어 슬쩍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지산이 더 몰리기 전에 그가 나서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나 진산월은 묵묵히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뿐, 전혀 끼어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흥미 어린 빛까지 떠올라 있어 그가 지금의 상황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휘파람 소리 같은 괴이한 음향이 들리기 시작했다.
슈슈슉!
그것이 검에서 발출되는 소리임을 알아차린 방취아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마의청년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벌한 기세로 맹렬하게 소지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열세에 처해 있던 소지산은 금시라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듯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아마도 마의청년은 지금까지 다하지 않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살수(殺手)를 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방취아는 다급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나 그녀가 채 장내로 뛰어들기도 전에 진산월이 자신의 앞에 놓인 빈 술잔을 집어던졌다.
술잔이 날아가는 속도는 그야말로 빛살과도 같아서 방취아가 자신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음을 알고 몸을 움찔했을 때는 술잔은 이미 그녀의 몸을 지나쳐 격전장에 도달해 있었다.
땅!
귀청을 찢는 듯한 격렬한 파공음이 드넓은 대청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장내의 격전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마의청년과 소지산은 일 장여의 간격을 두고 우뚝 서 있었는데, 그 표정과 상태가 실로 판이했다.
소지산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가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는 비록 부상을 당하거나 피를 흘리지는 않았으나, 얼굴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침통하리만치 가라앉아 있었다.
그에 비해 마의청년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숨결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검을 들고 서 있는 자세도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하나 그의 짙은 눈썹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고, 두 눈에는 한 줄기 의혹 어린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발 앞에는 잘게 부서진 술잔의 파편들이 가루가 되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마의청년은 슬쩍 그 술잔의 파편들을 내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술잔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앙상하게 마른 얼굴에 고적한 눈빛을 지닌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마의청년은 진산월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더니 불쑥 물었다.
“당신이 이들의 우두머리인가?”
사투리는 여전히 심했으나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의청년은 진산월이 단지 술잔 하나를 던져 자신의 무시무시한 공세를 막아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발로 술잔의 파편들을 뒤적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추가보(秋家堡)에도 제법 쓸 만한 작자가 있군. 심심하진 않겠는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자신들이 잘못 들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나 동중산은 오랫동안 강호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즉시 마의청년의 말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마의청년이 돌연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두머리라면 더더욱 살려 둘 수 없지!”
말도 빨랐지만 행동은 더욱 빨랐다. 마의청년의 외침이 중인들의 귓전을 울리고 있는 가운데 그의 몸은 허공을 훌쩍 날아 진산월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수십 개의 예리한 검기들이 진산월의 몸을 그물망처럼 덮어 갔다. 진산월의 몸이 금시라도 그 검기의 그물에 갇혀 피를 뿌리게 될 것만 같았다.
진산월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몸은 엄밀한 검영(劍影)을 뚫고 어느새 일 장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었다.
“엇?”
마의청년은 진산월이 자신의 검세를 이토록 수월하게 피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짤막한 경호성을 내지르더니 다시 진산월을 향해 덤벼들려 했다.
그때 진산월이 맨손임을 알아차린 소지산이 재빨리 그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던져 주었다.
진산월이 검을 받아 들고 채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마의청년의 검이 날아들었다.
슈슈슉!
예의 괴이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드는 마의청년의 검은 좀처럼 보기 힘든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중원의 검법은 횡(橫)으로 휘두르거나 종(縱)으로 베는 방식이었는데, 마의청년의 검은 그와는 달리 찌르기 위주여서 그 검로(劍路)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찔러 오는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했던지 검광이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어느새 검날이 눈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진산월은 슬쩍 옆으로 두 걸음 움직였다.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들었던 장검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한데 막 그의 목을 스치듯 지나가던 장검이 돌연 한차례 부르르 떨리더니 한 송이 괴이한 검화(劍花)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그 검화는 순식간에 진산월의 미간으로 쏘아져 갔다.
“앗?”
지켜보고 있던 중인들 사이에서 다급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가 보기에도 진산월의 미간이 그 검화에 그대로 격중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땅!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던 검화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주위가 조용해졌다.
중인들이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진산월은 검집을 앞으로 쭈욱 내뻗은 자세로 우뚝 서 있었다.
그에 비해 마의청년은 기형검을 든 채 휘청거리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었다.
마의청년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어 마음속의 격동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의청년은 자신의 살인적인 일검(一劍)을 진산월이 검집으로 정확히 막아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역도(力道)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이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지 진산월을 쏘아보는 눈길에 은은한 경악과 당혹의 빛이 담겨 있었다.
마의청년은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후우,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
그는 다시 수중의 검을 힘껏 움켜쥐고 진산월에게 덤벼들려 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 왔다.
“잠깐만 멈추어라.”
그와 함께 대청 안으로 다시 한 사람이 날아들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 인영에게로 쏠렸다.
들어온 사람은 백발이 성성하고 피부가 거무스름한 노인이었다. 얼굴은 주름살투성이였으나, 의외로 체구는 단단했고, 군살이 전혀 없어 젊은이의 몸매와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옆으로 쭉 찢어진 두 눈이 매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노인은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처럼 행동에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그가 나타나자 마의청년은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려던 몸을 멈추고 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할아버지께서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자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노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방금 저놈이 너의 해저발침(海底發針) 초식을 막은 게 무슨 수법인지 아느냐?”
노인의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투박하고 거칠었으나, 마의청년보다는 사투리가 심하지 않아 중인들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의청년은 다소 당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못 알아보면서 혼자 힘으로 처리하겠다고? 너는 아직도 생각하기 전에 일단 말부터 내뱉는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했구나?”
마의청년은 노인의 꾸중에 멋쩍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노인의 시선이 이번에는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노인은 진산월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앙상하게 마른 놈이 대단한 기(氣)를 가지고 있군.”
진산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묵묵히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등뒤에 검을 메고 있었는데, 목덜미 위로 삐져나와 있는 검의 손잡이가 유난히 길어서 언뜻 보기에는 검을 거꾸로 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노인이 불쑥 물었다.
“방금 네가 펼친 것은 유운검법 중의 배운축월(排雲逐月)이 아니냐?”
진산월은 느닷없이 나타난 노인이 자신의 검법을 한눈에 알아보자 두 눈에 기광(奇光)을 번뜩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다시 물었다.
“너는 종남파의 제자냐?”
“그렇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의청년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나 그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노인이 재차 진산월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사부가 누구냐?”
“임장홍이란 분이시오.”
노인의 두 눈에서 횃불 같은 광망이 번쩍거렸다.
“임장홍의 제자라구? 그는 전대(前代)의 장문인인데, 그렇다면 너는…”
“본인이 미약하나마 현재 본파를 이끌고 있소.”
“네가 당대(當代)의 종남파 장문인이라 말이냐?”
“그렇소.”
노인의 얼굴에 한 가닥의 괴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무어라고 딱 꼬집어 표현하기 힘든 이상야릇한 모습이었다.
노인은 한동안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임장홍은 순하디 순하기만 할 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인 줄 알았더니 제자 하나는 잘 두었군.”
뜻밖의 말에 종남파 제자들의 얼굴에 일제히 노기가 떠올랐다.
임장홍은 비록 삼 년여 전에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으나, 모든 종남파의 제자들은 그를 아직도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체 모를 노인이 그를 마치 아랫사람이라도 대하듯 함부로 말하자 분노를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쉽게 경동(驚動)하지 않고 침착한 눈길로 노인을 응시했다.
“선사(先師)를 잘 아시오?”
“알다 뿐이냐? 그 녀석이 코흘리개 꼬마였을 때부터 지켜봤었지.”
“귀하는 무림의 어느 고인(高人)이시오?”
노인은 차갑게 웃었다.
“고인은 무슨 얼어죽을… 그보다 어디 종남파 장문인의 솜씨 한번 보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주름진 손을 불쑥 내밀어 진산월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다. 그 손길이 어찌나 갑작스럽고 빨랐던지 중인들은 놀란 경호성을 내지를 겨를도 없이 멍청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진산월의 신형은 어느새 노인에게서 반 장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어룡이군.”
노인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계속 진산월을 향해 다가서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파팍!
마치 노인의 손이 수십 개로 불어난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지며 진산월의 주위 사방이 온통 노인의 손그림자에 뒤덮여 버렸다. 진산월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갔다. 그는 장괘장권구식 중의 오강감계(五剛坎桂)와 조운육환(彫雲六環), 천전만권(千纏萬捲) 등 몇 초식을 연속해서 펼쳐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치열한 공방을 주고 받았다. 비록 병장기를 사용한 흉험한 격전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뿜어내는 경기(勁氣)의 위력이 상당할 뿐 아니라 그들의 초식을 펼쳐내는 속도가 눈으로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빨라서 중인들은 팽팽한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던 중 소지산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노인의 손길이 너무 빨라서 전혀 알아볼 수 없었는데, 차츰 시간이 경과하자 노인이 펼치는 초식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던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소지산은 노인이 사용하는 수법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그때 진산월은 노인의 앞가슴을 향해 천성탈두(天星奪斗)의 식으로 주먹을 내뻗고 있었는데, 그 공세의 효력이 대단해서 노인이 달리 피할 곳이 없어 보였다. 노인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자신도 주먹을 불끈 쥐고 정면으로 마주쳐 왔다. 그런데 그때 노인이 주먹을 내뻗는 방식이 진산월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손목을 반쯤 구부린 채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구부린 파자권(把子拳)을 이용한 모습이 마치 판으로 박아낸 듯이 똑같았다. 두 사람의 주먹은 노인의 가슴 앞에서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딱!
마치 나무와 나무가 부딪치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두 사람의 신형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진산월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노인을 향해 공손한 표정으로 물었다.
“종남삼검의 한 분이십니까?”
노인은 진산월의 주먹과 부딪친 손에 상당한 통증을 느끼는지 슬쩍 왼손으로 오른 주먹을 매만지다가 아내 퉁명스런 음성을 내뺕었다.
“눈치가 빠른 놈이군. 노부가 바로 전풍개(典風開)다.”
그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전풍개라면 진산월의 전전대(前前代) 장문인이었던 하원지의 사제들인 종남삼검의 한 사람으로, 검법이 누구보다도 빨라서 질풍검(疾風劍)이라고 불리던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 그는 이십여 년 전의 기산취악 사건으로 종남파를 등진 후 행방이 묘연하여 그동안 많은 종남파 고수들을 안타깝게 했었다. 진산월은 그가 사용하는 무공이 방식은 조금 변형되기는 했으나, 종남파의 장괘장권구식과 유운비수(流雲飛手)임을 알아차리고 그가 종남파의 선배 고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종남파의 선배 고수들 중에서 노인과 비슷한 연배의 인물이라면 종남삼검 외에는 없었다. 진산월은 그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종남파의 이십일대 제자 진산월이 사조(師祖)님을 뵙습니다.”
일이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자 소지산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지 모두 멍한 표정이 되었다. 노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더니 냉랭한 코웃음을 날렸다.
“법도가 형편없군. 임장홍은 그래도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제자들은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이냐?”
소지산과 방취아, 동중산, 유소응이 그에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하나 그들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노인이 이미 오래 전에 종남파를 떠났던 종남삼검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진산월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 전풍개도 그들이 억지로 인사를 한다는 것을 꿰뚫어보았는지 미간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됐다. 쓸데없는 허례(虛禮)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대체 문파를 어떻게 관리를 했기에 제자라는 놈들이 달랑 팔병신에 계집아이, 애꾸눈과 꼬맹이뿐이란 말이냐? 노부가 이런 꼴을 보려고 이십 년 만에 돌아온 줄 아느냐?”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을 너무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지난 세월 동안 본파를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공(功)이었습니다.”
전풍개의 눈빛이 험악할 정도로 무섭게 번뜩였다.
“본파를 지켜 왔다구? 네놈은 지금 노부가 이십 년 간 본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비꼬는 것이냐?”
“제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단지 저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전풍개는 한동안 진산월의 앙상하게 마른 얼굴을 사나운 눈으로 쏘아보더니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말 한번 잘하는구나. 네놈이 그동안 몇 가지 무공을 익혀 나름대로 무공에 자신이 있나 본데, 그 정도 솜씨로 노부 앞에서 큰소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착각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검을 뽑아라. 노부가 진짜 무공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겠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찌 감히 사조님께 검을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웃기는 소리. 그 따위 나약한 정신 상태로 강호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서 검을 뽑아라.”
진산월이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전풍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등뒤로 손이 움직였다.
스릉!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인지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대청 안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검을 뽑아 든 전풍개의 모습은 더 이상 나이 먹은 노인이 아니었다. 검을 손에 쥔 채 허리를 쭉 펴자 그의 전신이 마치 하나의 예리한 신검(神劍)처럼 매서운 기운을 풍겨내고 있었다. 그것은 가히 검으로 평생을 살아온 진정한 검객(劍客)의 풍모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진산월도 무조건 못한다고 사양할 수만은 없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장검을 뽑아 들고 전풍개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럼 실례를 저지르겠습니다.”
그 순간 전풍개는 출수를 했다.
“검을 앞에 두고 그런 허식(虛飾)은 불필요한 것이다.”
눈부신 검광이 순식간에 진산월의 상반신을 뒤덮어 버렸다. 중인들은 단순한 비무(比武)라고만 생각하고 있다가 전풍개의 이런 행동에 대경실색했다. 전풍개의 공격은 그야말로 추호의 사정도 보지 않는 맹렬한 것이어서 살인적인 위력이 담겨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산월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의 신형이 옆으로 빙글 돌았다.
“이어룡으로는 피할 수 없다!”
전풍개의 날카로운 외침이 흘러 나오며 그의 수중에 들린 장검이 더욱 매섭게 움직였다.
파파팟!
마치 빗발이 퍼붓는 것처럼 수십 개의 사나운 검기가 진산월의 몸을 금시라도 짓이길 듯 가공할 기세로 날아들었다. 그 검세에 담긴 살벌함은 보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할 정도였다. 진산월은 몇 차례 더 몸을 이동시켜 전풍개의 검세를 벗어나려 했다. 하나 그때마다 전풍개의 검은 점점 더 빨리 그를 쫓아와서 종내에는 그의 몸 전체가 전풍개의 검영(劍影)에 완전히 휘감겨 버리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진산월도 출검(出劍)을 했다. 그의 검을 쓰는 자세는 유연하기 그지없었다. 손에 든 장검이 움직인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을 무섭게 압박해 오던 치밀한 검영 사이로 우윳빛 검광이 솟구쳐 오르며 검영의 한구석이 뻥 뚫려버렸다.
“유운검법이구나!”
전풍개는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황급히 검세를 변화시켰다. 그의 검법은 엄청나게 빠르고 사나워서 언뜻 보기에는 생사(生死)를 건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진산월은 침착한 표정으로 유운검법의 초식들을 전개해 전풍개의 무섭도록 빠른 검법에 맞서 갔다. 순식간에 이십여 초가 지나갔다. 전풍개는 의외로 진산월에게 조금도 우위를 점할 수 없자 기분이 상했는지 얼굴 표정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돌연 장검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잡았다. 그의 장검은 유달리 손잡이 부분이 길어서 두 손으로 잡아도 한 뼘 가까이 남아 있었다. 어찌 보면 왜도(倭刀)를 연상케 했는데, 왜도와는 달리 양쪽에 날(刃)이 있고 일직선의 형태를 띤 검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쥔 전풍개는 검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판이한 검세가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 그가 펼쳤던 것은 비록 빠르고 날카롭기는 했으나 중원의 일반적인 검법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지금의 검세는 베고 찌르는 방식이 전혀 판이했다. 마의청년의 검법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훨씬 더 괴이하고 악랄했다. 진산월의 상반신이 온통 검세에 노출되어 금시라도 수십 개의 피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진산월은 여전히 유운검법으로 맞서 갔다. 단지 조금 전보다는 빠르고 변화가 다양해진 것 같았다.
차차차창!
귀청을 찢을 듯한 음향이 거푸 터지며 사방이 온통 번쩍이는 검광과 휘몰아치는 검풍(劍風)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소지산은 조금 전의 격돌 때 그들의 검이 여섯 번쯤 부딪쳤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스물두 번이나 부딪쳤다.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후 전풍개는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유심한 시선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마의청년은 그의 앞가슴 부근 옷자락이 잘게 잘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안색이 변해 황급히 다가왔다.
“할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전풍개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계속 진산월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산월은 자신의 소맷자락을 내려보았다.
소맷자락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져 그 사이로 팔뚝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순수한 종남의 무공이 아니군요.”
전풍개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정말 대단한 놈이군. 노부는 본파의 성라검법(星羅劍法)에 해남검파 (海南劍派)의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을 일부 집어넣었다.”
해남검파라는 말에 소지산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쩐지 저들의 검법이 특이하다 했더니 해남검파의 무공이었구나.’
해남검파는 멀리 해남도(海南島)의 여모봉(黎母峯) 일대에 본거지를 둔 문파였다.
그들의 무공은 중원의 것과는 판이해서 괴이음독(怪異陰毒)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남해삼십육검은 해남검파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기세가 번개같이 빠르고 날카로워 일단 검법을 펼치기만 하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만다고 했다.
조금 전에 전풍개의 검법이 그토록 삼엄하고 독랄해 보였던 것도 그 안에 남해삼십육검의 변화가 깃들여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무공에 전혀 다른 문파의 무공을 융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무공에 대한 철저한 이해(理解)와 각고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라검법은 종남파의 무공 중에서 가장 빠르고 날카로운 검법이긴 했으나, 지금과 같이 살인적인 위력은 없었다.
그래서 유운검법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종남삼검의 실종 이후 이 검법이 사라진 것도 유운검법이 있는 한 비슷한 성질의 성라검법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 후인(後人)들이 검법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전풍개는 오랜 동안의 노력으로 이 성라검법을 완벽히 터득했을 뿐 아니라 그 속에 남해삼십육검의 정화(精華)들을 집어넣어 전혀 다른 놀라운 검법을 만들어 냈으니 실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진산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종남의 무학(武學)에 그런 일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풍개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네놈이야말로 장문인의 신분으로 어찌 다른 문파의 무공을 사용한단 말이냐?”
“조금 전에 제가 사용한 것은 분명 유운검법이었습니다.”
전풍개는 그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유운검법에 무슨 이런 해괴한 변화가 있단 말이냐?”
“유운검법의 묘용(妙用)은 무궁무진하여, 익히면 익힐수록 또 다른 경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풍개는 그 말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지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 네놈이 노부도 모르는 유운검법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조금 전에 네놈은 몇 성(成)의 공력을 사용했느냐?”
진산월은 거짓말을 했다.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흐흐… 노부를 우습게 보지 마라. 비록 몸은 늙었어도 눈까지 늙은 건 아니다. 스스로의 무공에 자신감이 대단한 모양인데, 노부도 가진 실격을 모두 내보인 것은 아니니 노부 앞에서 건방을 떨 생각은 하지 마라. 한두 푼 정도의 힘은 남겨 둔 것이엿겠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었습니다.”
전풍개는 진산월을 쏘아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쓸데없는 자존심만 강한 놈이로군. 더 말하기 싫으면 관두자.”
그의 시선이 힐끗 소지산을 향했다.
“저놈이 펼쳤던 것은 오래 전에 실종되었던 삼락검 중 하나 같은데, 노부가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인연이 닿아 삼락검 중의 낙하구구검 비결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쩐지 검법이 상당히 예리하다 싶었다. 그런데 한쪽 팔을 못쓰니 본연의 위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구나. 그래서야 삼락검이 아깝지 않겠느냐?”
“그는 극복해 낼 겁니다.”
전풍개는 소지산의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아래턱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노부가 소문을 듣기로는 종남파가 추가보인지 뭔지 하는 놈들에게 점령당했다고 했는데, 어찌된 영문이냐?”
진산월은 그에게 간략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전풍개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네가 삼 년 동안 종남파를 떠나 있는 동안에 그런 일이 벌어졌단 말이로군. 저놈의 실력을 보니 다른 제자들도 보통은 넘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본산을 지키지 못했단 말이냐?”
“제가 자리를 비운데다 초가보의 고수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만으로는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초가보? 추가보가 아니라 초가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풍개는 잠시 침음하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해남에서 소식을 들을 때는 추가보라고 알아들었다. 삼 개월 전에 그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손자놈을 데리고 허겁지겁 길을 떠났는데, 이제야 겨우 도착한 것이다. 정말 해남에서 여기까지가 멀기는 멀더구나.”
이어 전풍개는 마의청년을 손짓해 불렀다.
“흠아(欽兒)야, 이리 오너라.”
마의청년은 쭈삣거리더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정식으로 인사를 해라. 항렬로 보아 네게는 사형(師兄)이 될 것 같구나.”
마의청년은 진산월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전풍개의 명령을 받자 어쩔 수 없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전흠(典欽)이라 하오.”
신분을 몰랐으면 모르되,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된 이상 문파의 제자가 장문인을 대하는 태도로는 너무도 무례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진정한 공경(恭敬)은 겉으로 드러난 태도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결코 하루아침에 생겨날 수가 없는 법이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진산월이라 한다. 이제 다른 사형제들과도 인사를 나누어라.”
진산월이 아랫사람을 대하듯 서슴없이 하대(下待)를 하자 전흠의 눈이 옆으로 쭉 찢어졌다.
‘이 자식이 나를 뭘로 보고…’
그때 소지산과 방취아 등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소지산이 먼저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소지산이고, 이쪽은 사매인 방취아요.”
하나 전흠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엉뚱한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소지산은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방취아는 안색이 붉게 상기된 채 성난 눈으로 전흠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벌써 그녀의 입에서 험악한 소리가 튀어나왔을 것이나, 옆에 사조인 전풍개가 있어서인지 그녀는 간신히 화를 눌러 참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전풍개 조손(祖孫)의 등장으로 종남파에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문의 어른이 생기게 되었다.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한 사람은 없었으나, 그들은 이것이 종남파 부흥의 신호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