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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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2화


제 157장 흉수탐문(兇手探問)

“일각(一刻) 후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내 방으로 오너라”

두기춘은 뜻밖의 호출에 다소 어리둥절해졌다. 이세적의 죽음 조사하러 갔던 매장원이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조용히 그를 불렀던 것이다.

매장원은 화산파에서도 배분이 높을 뿐 아니라 평소 성격이 남달리 고고해서 화산파의 제자들은 모두 그를 어려워했다. 다른 문파에 적(籍)을 두었던 두기춘으로서는 더욱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두기춘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던 매장원이 난데없이 그에게 전음(轉音)을 날려 왔던 것이다. 더구나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부른 것이어서 두기춘으로서는 더욱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초조한 시간이 흐른 후, 두기춘은 불안함과 일말의 기대감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매장원의 방을 찾아갔다.

“이리 앉거라.”

매장원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두기춘이 자신의 앞에 앉자 한동안 그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너를 보자고 했는지 알겠느냐?”

두기춘은 솔직하게 답변했다.

“제자는 전혀 짐작하지 못합니다.”

“너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서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매장원의 독수리같이 날카로운 눈이 두기춘의 준수한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너는 본파의 무공을 어디까지 익혔느냐?”

두기춘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조금 당황했으나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검으로는 사절(四節), 권으로는 삼형(三形)까지 배웠습니다.”

“명령진기(冥靈眞氣)는?”

“얼마 전에 칠 성(七成)을 돌파했습니다.”

매장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이다. 그동안 네 노력이 적지 않았구나.”

화산파에서는 오직 이십사수 매화검법을 어느 정도까지 익혔느냐로 그 제자의 검에 대한 성취도를 판단한다. 몇 종(種)의 검법을 익혔든, 화산파 검학(劍學)의 기본은 이십사수 매화검법이며 매화검법을 완성해야만 비로소 화산파의 본령(本領)을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사절’은 화산파의 유명한 이십사수 매화검법을 사 단계까지 익혔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수십 년이나 화산파에서 검을 수련한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아직 ‘삼절(三節)’을 넘지 못한 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제 입문한 지 불과 삼년밖에 되지 않은 두기춘이 ‘사절’에 이르렀다는 것은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삼형’은 이형권(移形拳), 비형권(秘形拳), 화형권(化形拳)을 일컫는 말로, 이 세 가지 권법을 완벽하게 익혀야만 비로소 화산파의 비전 절예인 복호신권(伏虎神拳)이나 태을미리장(太乙彌離掌), 죽엽수(竹葉手) 등의 상승무예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명령진기는 비록 화산파의 최고 절예인 자하신공(紫霞神功)이나 태청강기미치지 못하지만, 천하의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신공절학(神功絶學)이어서 십이성 대성(大成)할 경우에는 능히 태청강기와 견줄 만한 위력을 나타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화산파에서도 불과 몇몇 장로만이 그런 경지에 올랐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두기춘의 지금 수준은 화산파의 일대제자 중에서도 능히 상위(上位)에 꼽을 정도로 탁월한 것이었다.

매장원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두기춘의 전신을 쓸어보았다. 두기춘은 종남파 출신이라는 업보(業報) 아닌 업보 때문에 화산파의 많은 사람들에게 백안시(白眼視)되는 존재였다. 애초에 화산파에서 선뜻 그를 받아준 것도 그의 재질이 탁월해서라기보다는 증남파의 제자가 종남파를 버리고 화산으로 왔다는 것에 대한 득의함 때문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두기춘이 임독양맥을 타통하여 절정고수가 될 수 있는 충실한 기본을 갖추고 있다는 결정적인 요인이 숨어 있었다. 종남파의 대제자도 이넌 두기춘이 어떻게 임독양맥을 타통할 수 있었는지는 화산파에서도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 때문에 그의 무공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였다.

그렇더라도 불과 삼년 만에 매화검법을 ‘사절까지 익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임독양맥을 타통했다고 해서 짧은 시간에 매화검법을 그 정도까지 익힐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두기춘은 비단 용모가 보기 드물게 준수할 뿐 아니라 피부도 여인처럼 고와서 첫인상은 다소 유약해 보이는 편이었다. 게다가 눈치가 비상하고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왠지 모르게 약삭빠르다는 느낌을 주었다. 실제로도 그는 화려함을 좋아했고, 남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해서 행동이나 말투에 가식이 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종남파에 있을 때 매상은 두기춘을 무척이나 싫어해서 평상시에는 그와 말 한마디도 주고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매상도 두기춘에게 끈질기고 집요한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을 했다. 두기춘은 무공에 대한 재질은 최고라고 하기 힘들었으나, 일단 자신이 목표한 초식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집념의 소유자였다.

매장원은 한동안 두기춘의 준수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너는 이번에 막진웅을 살해한 본파의 배반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뜻밖의 질문에 두기춘이 바짝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매장원이 자신에게 이런 예민하고 중요한 질문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제자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매장원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랭했다.

“흉수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단 말이냐?”

“그런 건 아닙니다만‥‥‥‥”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두기춘은 매장원의 의도를 몰라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는 매장원에게 직집 사사(師事)한 적도 없었고, 마음속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안면을 쌓아놓지도 못했다. 오히려 이번에 화산파에서 서안으로 오는 일행에 자신이 합류하게 된 것을 어리둥절하게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매장원이 자신을 따로 불러 흉수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물어 오자 당혹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가 흉수에 대해 생각한 것이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어찌 감히 선뜻 입을 열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매장원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힐 위험도 있었다. 매장원은 능력이 없는 제자에게는 누구보다도 가혹한 인물이었다. 두기춘은 이내 결심한 듯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숙게서 물으시니 외람되나마 제자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다. 제자는 흉수가 막사형을 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장원의 얼굴에 흥미로워하는 빛이 떠올랐다.

“세 가지 조건이라니?”

“막 사형은 삼경이 넘은 시간에 자신의 방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따라서 흉수는 밤늦게 막 사형의 방에 출입할 수 있을 만큼 막 사형과 가까운 사이일 겁니다. 이것이 흉수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계속해라.”

“흉수가 막 사형을 살해할 때 사용한 흉기는 낭치편이었습니다 낭치편은 워낙 특이한 병기라서 만약 흉수가 그것을 들고 있었다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막 사형은 경계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막 사형이 피하지 못했던 것은 흉수가 출수(出手)할 때까지 낭치편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낭치편은 가시가 달리긴 했어도 근본적으로 채찍이기 때문에 연검(軟劍)처럼 허리춤에 찰 수가 있습니다. 흉수의 두 번째 조건은 연검을 차도 의심받지 않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흉수가 평소에도 연검을 차고 있었기 때문에 낭치편을 차고 있어도 막 사형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매장원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말에 수긍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이었으나, 두기춘은 망설이지 않고 세 번째 조건을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흉수는 발검술(發劍術)의 달인(達人)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자의 생각입니다. 막 사형은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쾌검(快劍)의 명수였습니다. 그런 막 사형이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고 해도 상대의 일격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흉수의 공격이 빨랐다는 것을 뜻합니다. 흉수는 적어도 막 사형보다 더욱 빠른 쾌검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임이 분명합니다.”

두기춘의 음성이 조금 더 강해졌다.

“지금 이곳에 있는 본파의 고수들 중 그런 조건에 모두 들어맞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매장원은 돌연 손을 흔들었다.

“됐다. 그보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이 정작 중요한 말을 하려는 순간 매장원이 제지하며 화제를 돌리자 두기춘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매장원을 응시했다.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에 너는 유화상단으로 가라.”

유화상단은 현재 서안에서 화산파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세력이었다. 때문에 화산파에서 파견된 고수들은 서안에 오면 모두가 그곳에 머무르고는 했다. 하나 매장원이 두기춘을 그곳으로 보내려는 것은 단순히 그 점 때문만이 아닌 듯했다.

“그곳에 가서 한 사람의 행적(行跡)을 조사하도록 해라.”

“누구를 말입니까?”

매장원의 시선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번뜩였다.

“본파에서 파견된 자들 중 서안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자다.”

두기춘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매장원은 그의 마음속을 송두리째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난 한 달간 자가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으며 어디를 주로 갔었는지를 빠짐없이 알아보아라. 얼마나 걸리겠느냐?”

두기춘은 빠르게 생각을 굴리고는 주저 없이 말했다.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내일까지 알아 오거라. 그렇다고 한 점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자가 눈치를 차리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가보거라.”

두기춘은 머리를 조아리고는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방을 나온 후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서야 두기춘은 자신이 기회를 잡았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화산파에서 이방인 같은 대우를 받아 온 자신에게 주류(主流)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매장원이 두기춘에게 이번 일을 맡긴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화산파에서 별다른 신임을 받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문이 늦어서 아직 화산파 검법의 약점을 파악할 정도의 수준에 오르지도 못했고, 화산파 절학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도 못했다. 그런 점이 오히려 두기춘이 흉수가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 두기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점만이 아니었다.

화산파에서 파견된 인물들 중 서안의 유화상단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인물은 집법을 맡고 있는 신산 곡수였다. 또한 곡수는 쾌검의 달인이며, 늘 허리춤에 묵정검(墨精劍)이라는 연검을 차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다시 말해서 곡수는 두기춘이 말했던 흉수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인물이며, 이번 일의 흉수로 두기춘이 제일 먼저 의심했던 용의자이기도 했다. 화산파의 이인자가 수뇌 중 한 명인 집법을 조사할 사람으로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서 집법을 대신할 인물로 발탁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화산파에 입문한 지 삼년 만에 비로소 두기춘은 정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조금 후에 자네 방에 갈 테니 어디 나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게.”

숙소로 돌아와서 막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종호는 자신의 귓전으로 들리는 나직한 전음에 한차례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음성은 다름 아닌 인시망의 것이었다.

이곳에는 자신들과 모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인시망은 왜 굳이 자신에게 이런 전음을 날린 것일까? 순간적인 의문은 들었으나 종호는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기지개를 켰다.

“어제 밤을 설쳤더니 피곤하군. 잠깐 눈 좀 붙여야겠소.”

모관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간밤을 꼬박 새운 셈이 되었군요. 저도 조금 쉬어야겠습니다.”

세 사람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종호가 잠시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더니 인시망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종호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묻자 인시망은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변혁의 죽음에 대해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어 자네와 상의하려고 한 걸세.”

종호는 정신이 번쩍 드는 얼굴로 인시망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이세적의 시신을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이세적 같은 사람도 뜻하지 않은 암습에는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네. 그렇다면 변혁이 그런 꼴을 당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 그런데 변혁에 비하면 너무도 운이 좋은 사람도 있단 말일세.”

“그게 누구요?”

“그는 상대가 암습할 길목을 훤히 파악한 듯 미리 그 자리에 잠복해 있었고, 게다가 긴박한 와중에도 화산파의 고수를 세 명이나 구해냈네. 비록 그들 중 두 사람은 인사불성의 중태에 빠졌고 다른 한 사람도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었지만 아무튼 그의 도움으로 살아난 건 사실이지. 그런데도 자신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실로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지 않겠나?”

종호의 몸이 움찔거렸다.

“모관을 말하는 거요?”

“그렇네.”

종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모관이 그자들 손에서 화산파의 고수들을 셋씩이나 구한 것은 나도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기는 했소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소?”

“이번에 우리가 화산파를 들기 위해 파견한 자들이 모두 몇 명을 었는지 아나?”

“대략 오십 명쯤 되지 않겠소?”

“정확히는 마흔아홉 명일세. 그들 중 오의단은 아홉 명이고 나머지는 분타의 제자들이지. 그들을 모두 칠 개 조로 나누어 화산에서 서안으로 오는 길목에 급파했네.”

그것은 종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서안으로 오고 있던 소림사 일행이 암습을 당하고 순의단 고수들이 몰살당한 것을 알고 화산파까지 같은 변(變)을 당할까 봐 허겁지겁 사람을 긁어 모았으나, 오의단 인원은 겨우 아홉 명만 불러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분타의 제자들까지 동원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 그들이 실제로 화산파의 고수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네. 소림사의 고수들과 순의단의 정예들도 몰살당했는데 겨우 그 정도 인원을 다시 칠 등분한 숫자로는 도저히 암습한 자들에 대항할 수 없네. 그래서 그들의 임무는 화산파 고수들을 만나게 되면 현재의 위급한 상황을 알려 주는 것이 첫 번째였고, 만에 하나라도 화산파가 암습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 암습자들의 정체를 최대한 파악해 놓는 것이 두 번째였네.”

인시망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모관은 뒤늦게 달려오느라 분타의 제자들을 대동하지 못하고 혼자 움직여야만 했네. 그런데 다른 일곱 군데는 모두 허탕을 쳤는데 모관이 있는 곳에서 일이 벌어진 걸세. 정말 공교로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세 명의 화산파 제자들을 구해내었네. 소림사와 순의단의 정예들도 당해내지 못한 암습자들의 손에서 말일세. 물론 모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나도 인정하고 있지만, 이번에 몰살당한 순의단 고수들 중에는 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자들도 몇 명 있었네.”

“하지만 모관이 말하기를…”

“물론 모관의 말로는 자신이 공격하자 암습자들이 크게 당황하더니 몇 수 제대로 겨뤄 보지도 않고 물러났다고 했지만, 진실이 어떠한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걸세.”

그제서야 종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인시망의 조리 있는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모관이 화산파 제자들을 구해낸 상황에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모관의 무공 실력은 종호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어서 만약 승부를 겨룬다면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 날 확률이 높았으나, 서로 정상적이라면 자신이 조금 더 우세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관의 장기는 무공보다는 날카로운 두뇌와 예리한 형세 판단이었다. 특히 심계에 있어서는 종호는 결코 그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나 모관의 실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순의단의 고수 다섯 명도 벗어나지 못한 암습자들의 공세를 유유히 뚫고 사람을 구해낸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암습자들이 화산파에만 유독 실력이 떨어지는 고수들을 보냈을 리도 없었다.

일단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미심쩍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싸움을 한 것치고는 모관은 지나치리 만치 멀쩡했다. 게다가 비록 늦게 도착하기는 했으나 분타 제자들의 지원을 거절하고 혼자 움직인 것도 수상했고, 하필이면 그가 잠복해 있는 곳에서 화산파에 대한 암습이 일어났다는 것도 공교롭다면 너무 공교로운 일이었다.

종호는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모관이 배반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소. 누가 뭐래도 모관은 지금까지 본방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사람이오. 그런 사람을 단순히 심증(心證)만으로 추궁할 수는 없는 일이오.”

인시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섣불리 그를 자극할 생각은 없네. 단지 앞으로 좀 더 그를 주목해 봐야 한다는 뜻일세.”

종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로군. 이렇게 복잡하고 정신 사나운 일은 아주 질색이오.”

종호뿐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할 것이다. 종호는 강호 경험도 풍부하고 머리도 둔한 편은 아니었으나, 지금 서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인시망은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네. 한 번에 한 가지씩만 생각하면 되는 일일세. 우선은 변혁을 살해한 본파의 배반자를 색출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 순서일세.”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일단은 모관이 배반자가 확실한지부터 확인해 봐야겠지.”

“그걸 어떻게 확인한단 말이오?”

“그래서 자네가 한 가지 일을 해줘야겠네.”

인시망은 종호의 두 눈을 응시하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선은 소신승 정화와 함께 소림사에서 제일 먼저 서안으로 파견된 승려였다. 그는 평소 성격이 온유하고 차분해서 가끔 급하고 날카로운 면을 보이는 정화를 보조하는 역할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입문(入門)은 정화가 몇 달 빨랐지만, 나이는 오히려 정선이 두 살이 더 많아서 두 사람은 동년배처럼 지내오고 있었다. 정화는 비록 장문인인 대방선사의 문하로 입적(入籍)되기는 했으나, 사조뻘인 굉자배(宏字輩) 고승들에게서 직접 사사받을 때가 많아서 뚜렷하게 스승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에 비해 정선은 팔대신승 중의 한 사람인 무영승 대현의 직전(直傳) 제자였고, 사부인 대현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평소의 성격도 차분하고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정선은 대원선사가 갑자스럽게 자신을 호출했을 때도 전혀 당황하는 빛이 없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사숙.”

대원은 정선의 사부인 대현의 사제뻘이었기 때문에 정선은 소림사에 있을 때부터 대원을 자주 보았었다. 대원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자신의 앞에 있는 탁자에 앉게 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한 달 넘게 객지 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정선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오히려 산에서 내려와 세상의 복잡함과 소란스러움을 경험하니 안계(眼界)가 크게 넓어진 것 같습니다.”

“불법(佛法)은 무변(無邊)하니 속세의 먼지 속에서도 청정심(淸淨心)을 잃지 않는다면 어디서건 부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어제 정화에게서 그동안의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오늘 너를 부른 건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이다.”

“하교하십시오.”

“얼마 전에 황성고검 나력지의 제자를 만났다는 말을 들었다…”

“예. 나 대협의 제자는 마검 조일평이라는 자인데, 정화 사형과 한차례 손속을 나누었습니다.”

정화가 비록 자신보다 두 살 어렸으나 사내(寺內)에서의 그의 지위는 독특한 것이어서 정선은 남들 앞에서는 그를 깍듯하게 사형 대우를 해주었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보거라.”

정선은 대원선사가 왜 그 일에 관심을 갖는지 의아했으나 자신이 본 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했다. 대원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나직한 음성으로 되묻는 것이었다.

“조일평의 혈천홍을 정화가 막았단 말이지?”

“예. 조 시주의 검법은 정말 빠르고 날카로웠으나 정화 사형의 무공 또한 그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정화가 사용한 무공이 무엇이냐?”

“달마십삼검(達磨十三劍) 중의 조화헌불(彫花獻佛)이란 초식이었습니다.”

“대원도법(大元刀法)이 아니라 달마십삼검이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정화 사형은 평소에도 본사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도(刀)보다는 검(劍)에 더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정화의 달마십삼검에 대한 조예는 어느 정도였느냐?”

“제가 보기에는 거의 완벽한 것 같았습니다.”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조 시주가 검을 거두고 물러났습니다. 정화 사형 또한 더 이상은 그를 추궁하지 않은 채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곳을 벗어났습니다.”

대원은 다시 물었다.

“그 후에 조일평을 본 적이 있느냐?”

정선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정선은 의아한 마음이 가득했으나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채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방을 나왔다. 막 방을 벗어나기 전에 문을 닫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정선의 눈에 띈 것은 심각하리 만치 무거운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대원의 모습이었다.

방을 나온 정선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세적을 죽인 흉수는 무섭도록 빠른 검법의 소유자라고 했다.

조일평 또한 마검이라 불릴 정도로 놀라운 검객이 아닌가? 더구나 자신이 보았던 조일평의 혈천홍이라면 충분히 이세적의 가슴도 벨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대원선사는 조일평을 흉수로 의심하고 있단 말인가? 하나 정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조일평이 흉수라면 이세적이 그를 경계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세적이 경계심을 품고 있다면 아무리 조일평이라 해도 단 일검에 그의 가슴을 갈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 다음 순간, 또 다른 생각에 정선은 다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그토록 빠르고 무서운 조일평의 검을 정화는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그것은 그의 검법 또한 조일평 못지않게 빠르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정화는 서안에 온 이후 이세적을 세 번이나 만나 이미 적지 않은 안면을 튼 사이였다.

그렇다면…

정선은 그 자리에 미동 않고 선 채 전신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조화헌불의 다음 초식은 세존참룡(世尊斬龍)이라 했다. 그것은 달마십삼검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날카로운 초식으로, 단 일검에 상대의 가슴을 갈라 버리는 무시무시한 살초였다.

만약 조일평이 흉수라고 생각했다면 대원이 그토록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리가 없었다. 대원은 혹시 조일평이 아닌 정화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동중산은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불안한 모습이었다.

“아까부터 이씨세가의 고수들이 이 일대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 은밀해서 긴가민가했었는데, 조금 전에 다시 보니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

사시(巳時)를 막 지날 무렵이었다. 아침부터 이세적의 참변 소식을 듣고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던 종남파의 고수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소식을 들으러 밖으로 나갔던 동중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진산월을 잠시 침음하다가 물었다.

“화산파의 숙소 쪽은 어떻느냐?”

“그곳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해서 적막감마저 감돌았습니다.”

“확실히 이상하군.”

그들이 있는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화산파의 숙소였다. 자연히 그들로서는 화산파의 분위기를 보고 사태가 돌아가는 추이를 짐작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화산파는 밤사이에 벌어진 자파(自派) 고수의 살인 때문에 새벽까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막상 이세적이 살해되었다는 말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씨세가에서 종남파 주위에 집중적으로 고수들을 배치했다는 것은 무언가 불길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그때 주변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낙일방이 뛰어 들어왔다.

“장문사형, 문제가 조금 심각한 것 같습니다.”

예전이었으면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도 낙일방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나가는 것을 막고 있을 뿐 아니라, 아무도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완전히 이곳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물었다.

“그것이 본파에만 해당되는 일이냐? 아니면 다른 문파도 비슷한 상황이냐?”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는 일말의 어두움이 떠올라 있었다.

“본파만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도 화산파의 고수들이 자신들의 숙소로 출입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가려고 하니 제지하더군요.”

동중산이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한 가지 경우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최악의 경우를 각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악의 경우라니요? 그들이 초가보의 복수를 하려 한단 말입니까?”

“그럴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본파를 압박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제 생각은 그들이 이세적의 살해범으로 본파를 지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낙일방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정확한 의도는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달리 떠올릴 수 없군요.”

낙일방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산월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초청한 문파를 출입도 못 하게 통제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 의혹은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럴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무언가 그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요인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게 중인들을 답답하게 했다.

낙일방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요? 아직은 저들의 경비가 삼엄하지 않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일단은 이씨세가를 빠져 나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동중산은 반대 의견을 냈다.

“그랬다가는 우리는 꼼짝없이 모든 의혹을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떠나더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혹이 없을 때 떠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이곳에 갇혀 그들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두 사람의 입을 다물게 했다.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움직여 올 것이다. 그들의 반응을 본 다음에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도록 하자.”

두 사람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한쪽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일환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간신히 늑대 입을 빠져 나온 것이 반나절도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호랑이 입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암담해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낙일방이 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내뺄까 고민하는 거요?”

지일환의 얼굴에 어색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라…… 혹시 어제 진 장문인께서 저지른 일 때문에 그들의 의심을 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낙일방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며 두 눈에서 차가운 섬광이 흘러나왔다.

“당신 같은 자는 해골이 되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장문인께서 쓸데없이 일을 저질러 문제가 생겼단 말이오?”

지일환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진 장문인께서 어제 이씨세가의 고수들을 살해한 일이 발각되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

지일환이 제대로 말을 맺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자, 동중산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오 하지만 그들이 아직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한 증거를 잡은 건 아닌 것 같소 그보다 지 형은 어제 그 노인의 상세를 살펴 주지 않겠소?”

지일환은 동중산이 때맞춰 나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감사의 눈길이 담긴 얼굴로 그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러리다.”

지일환이 재빨리 방을 나가자 그때까지도 낙일방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장문사형께서 왜 위험을 무릅쓰고 저런 자를 두 번씩이나 구해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저자가 제 발로 걸어 나가 덜컥 이씨세가에 항복이라도 해버린다면 우리는 큰 곤경에 빠지게 되는 거 아닙니까?”

진산월은 투정부리는 듯한 낙일방의 모습이 재미있는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같이 염치를 모르는 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그런 일을 당했군 때문에 그도 이씨세가와 초가보가 한통속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자신이 이씨세가에 순순히 잡혀 준다고 해도 사정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정도는 눈치 채고 있겠지.”

낙일방은 준수한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튼 저는 저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동중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동중산은 진산월의 의중을 알고 있는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제자는 다행히 낙 사숙같이 까다롭게 사람을 고르는 취미가 없습니다. 지는 오히려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 같아서 그다지 밉지 않더군요”

낙일방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하나 낙일방도 더 이상은 무어라고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은근히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낙일방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은 누구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중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한다면 언제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자는 분명 우리를 배신한 적이 있고, 나중에 또 그런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 번 배신했으니 염치를 알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가 강요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현재 그는 우리와 함께 있으며, 아직은 비난받을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낙일방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 눈에는 그가 신의 없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형편없는 작자로 보이겠지만 그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낙일방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장문사형 말씀대로 너무 사람을 쉽게 판단하면 안 되겠지요 그러고 보니 그자도 저를 성미 급하고 심술궂은 사람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그건 너를 정확하게 본 것인데·”

“뭐라고요?”

듣고 있던 동중산의 얼굴에도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낙 사숙이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요”

낙일방은 울상이 되었다.

“동 사질까지 왜 그러세요?”

그러더니 자기도 우스운 생각이 들었는지 어깨를 흔들며 나직하게 킬킬거렸다. 폭소를 터뜨리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조금 전의 무겁고 어두웠던 방 안의 공기가 한결 밝아졌다.

잠시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동중산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웃어넘기기는 했으나 조금 전에 지일환이 했던 말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장문인께선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현장에는 어떠한 물증(物證)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그 일보다는 이세적의 죽음과 연관된 문제일 확률이 높겠군요 물증도 없이 단순한 심증(心證)만으로 그들이 이렇듯 공개적으로 행동할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동중산은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다면 이세적의 죽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입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들의 다음 행동에 대비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옆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낙일방이 급히 물었다.

“하지만 그들이 밖으로 출입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데 어떻게 정보를 입수한단 말입니까?”

동중산의 외눈이 유달리 반짝거렸다.

“그들이 막고 있는 사람은 우리들 세 사람뿐입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낙일방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안색이 약간 변했다.

“당신은 그자를 이용하자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다행히 그의 무공은 별 볼일 없을지 몰라도 신법만은 상당히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그거야 직업이 직업이니‥‥‥‥”

“아마 지일환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곳을 빠져 나갔다가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그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산월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문제는 조금 전에 결론을 내린 것 같은데.”

동중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자가 그에게 부탁을 해보겠습니다.”

낙일방은 명문정파인 대종남파가 밤도둑에 불과한 지일환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표정이었으나, 감히 진산월에게 반대를 표하지는 못했다.

대신 약간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를 보낸다고 해도 그가 어디에 가서 정보를 얻겠습니까?”

동중산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멀리 갈 필요 있습니까? 천봉궁의 인물들에게만 가도 저간의 사정을 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

낙일방은 그저 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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