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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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6권 봉황무종(鳳凰無踪)편 : 3화


제 158장 불비불승(不備不勝)

종남산의 밤은 아직도 매서웠다. 산 아래에는 제법 봄 냄새가 나는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겨울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특히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동굴 안은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을 막을 수 있어서 좋았으나, 지금은 오히려 바닥에서 올라오는 싸늘한 냉기(冷氣) 때문에 더욱 춥게 느껴졌다.

“쿨룩‥‥‥ 쿨룩‥‥‥‥

조옥린은 몇 차례 세찬 기침을 했다. 그때마다 시커먼 피가 코와 입 밖으로 힌 사발씩 쏟아져 나왔다. 가뜩이나 창백하기 그지없던 조옥린의 얼굴은 삽시간에 핏기 한 점 없는 핼쓱한 몰골로 변해 버렸다. 평소에는 총명하게 반짝이던 눈동자도 빛을 잃고 흐려져 있어 금시라도 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하나의 손이 다가와 그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기침이 잦아들며 조옥린의 얼굴에 잠시 편안한 빛이 떠올랐다.

조옥린은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보더니 힘없이 웃었다.

“쓸데없이 아까운 공력(功力)을 낭비하지 마라. 난 이미 가슴뼈가 모두 부서져서 살아나기 힘들다.”

손의 주인은 이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고 얼굴이 창백한 유생 차림의 청년이었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눈빛은 의외로 맑고 정기(精氣)가 담겨 있었다. 걸치고 있는 하늘색 유삼(儒衫)이 냉정하고 고고해 보이는 그의 모습과 몹시도 잘 어울렸다.

하늘색 유삼 청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상처로 돌아가신다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영명(榮名)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차갑고 서늘한 음성이었으나, 그 음성을 듣자 조옥린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조금 더 질어졌다.

“영명이 아니라 화명(花名)이겠지. 수십 년 간이나 꽃을 찾는 나비처럼 꽃밭을 뒹굴었으니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윽‥‥‥‥”

조옥린은 다시 한차례 세찬 기침을 했다. 시커먼 핏덩이가 한 움큼이나 튀어나와 그의 앞가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하늘색 유삼 청년은 재차 그의 가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휴우·. .”

조옥린의 얼굴에 한 줄기 처연한 빛이 떠올랐다.

“정말 지독한 장력(掌力)이었다 괴절장이라고 했던가? 단 삼장(三掌)으로 내 호신강기를 산산이 파괴하고 가슴뼈를 으스러뜨려 놓았으니 실로 가공한 위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숙부께서 방심하지만 않으셨다면 어찌 그자가 숙부의 몸에 삼장이나 격중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나 정도 나이가 될 때까지 강호에서 굴렀다면 방심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정상적으로 겨루었다면 좋은 승부를 했겠지만, 그래도 그자의 장력을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옥린은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가쁜숨을 몰아쉬었다. 하늘색 유삼 청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이 떠올리 있지 않았지만, 눈가에는 희미한 근심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조옥린의 말마따나 현재 그의 상태는 당장 숨이 끊어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왼쪽 어깨는 섭선에 거의 관통당하가 시피 했고, 오른쪽 어깨 또한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슴과 갈비뼈가 대부분 박살나서 부서진 뼛 조각이 폐와 심장을 계속 찌르고 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 때문에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의 입과 코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조옥린의 내공이 아무리 심후하다고 해도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조옥린은 힘겹게 고개를 쳐들더니 무거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늘색 유삼 청년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가에 가늘게 미소를 그려냈다.

“너의 그런 표정은 모처럼 보는구나‥‥‥‥ “

“내 부상은 내가 잘 안다. 살 만큼 살았고, 이루고 싶은 것도 대부분 이루었다 뒤를 돌봐줘야 할 자식도 없고 복수해야 할 원수도 없으니 이대로 죽은들 무슨 여한(餘恨)이 있겠느냐?”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 자리에 나타날 수 었었느냐?”

조옥린이 능숙하게 화제를 돌리자 하늘색 유삼 청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차례 어깨짓을 하고는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번에 서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앞날의 길흉(吉凶)을 예측하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천봉궁과 크고 작은 다툼이 계속되는 것에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는 것 같다며, 저로 하여금 숙부님을 보필하여 사태를 보다 철저히 주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조옥린은 알겠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신목령주가 단순히 자신을 도우라고 그를 보낸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하늘색 유삼 청년은 열두 명이나 되는 제자들 중에서도 신목령주가 가장 아끼는 인물이었다.

신목령주의 열두 제자 중 제일가는 고수는 물론 대제자인 백자목이었다. 백자목은 강호무림에서 보기 드문 일대기재(一大奇才)로, 젊은 날의 모용단죽의 재림(再臨)이라고까지 칭송받고 있었다.

하나 백자목은 그 뛰어난 기결만큼이나 고고하고 냉철한 인물이어서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에 비해 막내인 한시몽은 백자목에 비견할 만큼 무공에 탁월한 재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심성이 부드러워서 신목령주는 물론 이고 조옥린도 무척이나 아끼고있었다. 특히 신목령주의 그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것이어서 다른 제자들의 질시를 살 정도였다.

그런 한시몽을 서안으로 보낸 것만 보아도 신목령주가 현재 서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얼마나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지 여실히 알수 있었다. 신목령주는 당대 무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답게 이미 신목령 내에 무언가 불손한 움직임이 있음을 눈치 챈 것이 분명했다.

조옥린은 한시몽이 단순히 자신을 보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목령의 인물들 중 배반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시몽은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는 그를 한동안 묵묵히 내려다 보더니 냉정하리 만치 차갑게 굳은 얼굴로 불쑥 입을 열었다.

“숙부께서 서안에 오신 것은 사부님의 지시 외에 다른 볼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조옥린의 눈이 잠시 가늘어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잊고 있던 작은 은원(恩怨)이 생각나는구나. 그것마저 갚고 떠났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 하나쯤 남겨두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건 십년도 더 된 오래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십년 팔 개월 전 일이지. 지금은 다 잊었다.’

“잊으셨다면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조옥린은 핏기 없는 얼굴에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것이었을까?”

그의 음성은 너무 작아서 입 속으로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하나 한시몽은 똑똑히 알아들었는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 일은 숙모님에 얽힌 오래된 빚인데, 갚지 않고 가신다면 지하에서 무슨 낯으로 그분을 뵈시렵니까?”

조옥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건 네가 상관할 필요 없는 일이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사람답지 않게 그의 음성과 눈빛에는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풍겨 나왔다. 한시몽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주제넘은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조옥린은 한동안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이내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네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나도 살 수만 있다면 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내 상처는 당대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고칠 가능성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종적이 신비로운 자들이라 찾을 길이 막막하고 나는 오늘을 넘길 자신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한시몽은 조옥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라면 철면군자 노방과 신수무정 제갈외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바로 그렇다.”

“노방이라면 행적이 신룡(神龍) 같아서 찾기가 수월치 않지만 제갈외라면 방법이 있습니다.”

조옥린은 별로 놀라지 않고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내가 제갈외를 만나러 이곳으로 왔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제갈외는 이미 거처를 옮긴 추었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심력(心力)을 낭비하지 마라.”

한시몽은 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애초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었다.

“제가 이곳 서안까지 오면서 가장 자주 들은 소문은 종남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종남파에서 보기 드문 절세의 신검(神劍)이 배출되었으며, 그의 검법이 실로 뛰어나서 누구도 그의 손에서 오초 이상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조옥린은 그가 왜 갑자기 종남파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몰라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자는 놀랍게도 출토한 지 한 달 만에 서안에서 확고한 위세를 뽐내고 있던 초가보를 섬별시켜 단숨에 서안의 제일패자(第一覇者)로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몇 명의 사제(師弟)들이 따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대해검이라는 자가 제 흥미를 끌더군요. 듣기로는 그 대해검이란 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외팔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초가보와의 종남혈사에서 그자는 멀쩡한 두 팔로 초가보의 이름난 고수들을 연파하여 혁혁한 명성을 날렸습니다.”

외팔이라는 말에 조옥린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 정업사에서 만났던 그 젊은 친구도 한쪽 팔을 못 썼는데… 잘 있는지 모르겠군. 좌절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대해검이란 자에 못지않은 고수가 될 수 있을지도…’

한시몽은 조옥린의 얼굴에 두 눈을 고정시킨 채 말을 계속했다.

“제가 그 대해검 소지산이란 인물을 주목한 것은 몇 달 전만 해도 외팔이 불구에 불과했던 그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단시일 내에 팔을 고치고 뛰어난 검객이 될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조옥린은 급히 물었다.

“대해검의 이름이 소지산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조옥린의 얼굴에 갑자기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업사의 그 젊은 친구도 소씨였다. 똑같은 외팔에 같은 성씨를 쓰다니…’

그의 머리 속으로 한 가지 놀라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한시몽은 결정적인 한마디를 내던졌다.

“외팔이를 불과 한 달 만에 멀쩡한 사람으로 고칠 수 있는 자는 아무리 강호가 넓다 해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더구나 서안 일대에서는 더더욱 참기 힘들겠지요. 대해검이 팔을 고친 시기가 숙부님께서 제갈외의 행적을 놓친 시기와 상당히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조옥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한시몽은 그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시몽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조옥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옥린은 무서운 눈으로 어두운 동굴의 한 점을 쏘아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조옥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너는 제갈외가 종남파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확실히 일리 있는 의견이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와 제갈외는 약간의 은원이 있다.”

“제갈외가 숙부님께 빚이 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조옥린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 안의 복잡한 사정은 네가 알 필요 없다만… 설사 제갈외를 만난다고 해도 그가 나를 위해 손을 써 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한시몽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가 숙부님을 살리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강조하거나 큰소리로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조용한 음성 속에는 무언지 모를 강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조옥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타인의 강요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한시몽은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옥린의 입가에 다시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너의 그 표정만 보아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구나. 알았다. 일단 종남파로 가 보자. 그가 나를 위해 손을 써 줄지는 알 수 없으나, 나도 하나뿐인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한시몽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나직한 음성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는 손을 써 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뿐만 아니라 종남파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 * *

“정말 안 비킬 거요?”

낙일방의 커다란 외침 소리가 장내를 쩌렁하게 뒤흔들었다.

종남파의 거처 앞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무사들은 난처한 기색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원래 그들은 종남파에서 누구도 나오거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상부의 은밀한 지시를 받았다.

지금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는데, 조금 전에 낙일방이 불쑥 나오더니 이씨세가 밖으로 나가야 했다며 언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잠깐 밖에 나갔다가 볼일만 보고 다시 오겠다는데 왜 안 된다는 거요?”

은근히 목소리에 공력을 담았는지 그다지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지 않았는데도 주위가 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무사들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으나,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이 진정될 때까지는 누구도 본가를 벗어나지 못하오. 이건 귀파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소.”

무사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장한이 말하자 낙일방은 옳다구나 하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럼 저자는 왜 멋대로 들락거린단 말이오?”

낙일방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린 무사의 얼굴에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곳에는 마침 화산파의 제자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를 본 낙일방의 표정 또한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 화산파의 제자는 다름아닌 두기춘이었던 것이다.

두기춘은 문득 고개를 돌리다 낙일방과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거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이구나.”

낙일방은 그가 태연히 자신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해올 줄은 미처 몰랐는지 안색이 절로 찌푸려졌다. 종남파를 배반하고도 모자라 화산파의 고수들까지 데리고 와서 매상에게 치욕을 주었던 두기춘이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매상이 종남파를 떠난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이가 갈릴 일이었다.

예전부터 낙일방과 두기춘은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두기춘은 자신보다 두 살 어릴 뿐 아니라 준수한 용모에 솔직한 성격의 낙일방이 다른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을 늘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낙일방 또한 잘난 척하기 좋아하고 어딘지 음침한 구석이 있는 그에게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종남파를 떠났을 때도 특별히 놀라거나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사문의 영약을 훔쳐 달아난 그가 뒤늦게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언제고 만나게 되면 단단히 쓴맛을 보여 주겠다고 벼르고 있는 터였다.

하나 막상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자 낙일방은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씁쓸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한때는 어려운 문파를 함께 이끌고 나가던 사형제가 전혀 다른 소속이 되어 얼굴을 마주친다는 것은 무언가 야릇하고 착잡한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풍운이 감돌고 있는 이씨세가의 한복판이 아닌가? 이제는 낙일방도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낙일방이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두기춘의 입가에 냉랭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와는 말도 하기 싫다는 건가?”

낙일방은 무덤덤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기 싫은 게 아니라 할 얘기가 없는 거요.”

“오호, 제법 강호에서 굴러먹은 터를 내는군.”

“당신은 나에게 할 얘기라도 있소?”

두기춘은 날카로운 눈으로 낙일방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다시 피식 웃었다.

“네 얘기는 들었다. 굉장한 고수가 되었다고 하더군.”

“굉장한 고수가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남에게 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는 되오.”

두기춘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구나. 제법 침착해졌어. 그 실력 좀 한번 보고 싶다만…”

낙일방의 눈에서 날카로운 신광이 흘러나왔다.

“원한다면 못 보여 줄 것도 없지.”

잠시 장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종남파의 숙소 안에서 한 사람이 불쑥 뛰어나왔다.

“사숙님, 아직도 안 가셨습니까?”

나온 사람은 동중산이었다. 우연인지 그가 멈춰 선 곳은 낙일방과 두기춘의 중간 부분이었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하하… 욱하는 성미는 여전하구나. 역시 사람의 본성(本性)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니까.’

그는 굳어진 낙일방을 빤히 바라보며 계속 빙글거렸다.

“너하고 투닥거리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너도 그 성질을 고치지 않으면 강호에서 고생깨나 할 것이다.”

낙일방이 무어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그는 한차례 손을 흔들어 주고는 휑하니 몸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낙일방이 우두커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동중산이 재빨리 그의 표정을 살피며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가지 않으실 거면 그만 들어가시죠”

동중산은 지금까지 몰래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낙일방이 두기춘과 시비가 붙을 것 같자 황급히 뛰쳐나왔던 것이다.

네 명의 무사들은 여전히 낙일방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뻔히 두기춘이 화산파의 거처를 나와 이씨세가 정문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를 제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다. 동중산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노골적인 행동에 절로 어금니가 깨물어졌다.

슬쩍 낙일방의 표정을 살피던 동중산의 외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렸다. 필시 화를 억누르고 있거나 분기탱천해 있을 줄 알았던 낙일방의 얼굴에는 의외로 침울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착잡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두기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처다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숙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숙님, 괜찮으십니까?”

동중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낙일방이 문득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싸움이라도 벌일까 봐 불안했어요?”

동중산은 그의 이런 모습에 내심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부드럽게 따라 웃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단지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다른 걱정이 있으신 게 아닌가 생각했을 뿐입니다. “

“걱정은 무슨‥‥ 그에게 빚이 있긴 하지만, 그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낙일방의 의연한 모습에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기춘에게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낙일방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소리를 죽여 나직하게 물었다.

“그자는 잘 갔습니까?”

“예. 신법(身法) 하나는 소문대로 정말 쓸 만하더군요 사숙님이 그자들의 시선을 끄는 동안에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저도 계속 지켜보지 않았으면 그자가 언제 사라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겁니다. “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하긴 그 정도는 되니까 밤이슬 먹고 살면서도 강호에 이름이 알려졌겠지요”

낙일방의 다소 퉁명스런 대꾸에 동중산은 그저 쓴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조금 전에 낙일방이 밖으로 나가했다며 호원(護院)무사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은 그들의 시선을 빼앗아 지일환이 수월하게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그 목적은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었으나, 뜻밖에도 두기춘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단이 벌어질 뻔했던 것이다.

예전의 낙일방이었다면 틀림없이 앞뒤 가리지 않고 두기춘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 본다면 무공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낙일방은 확실히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볼 때마다 낙일방이 부쩍 성장한 것 같아 동중산은 왠지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 졌다.

두 사람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진산월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사람은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서로 눈짓을 교환한 후 기척을 죽이고 밖으로 다시 나오려 했다. 그때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그들을 불러 세웠다

“이리 오거라. 잠깐 할 얘기가 있다. “

두 사람이 자신의 앞에 앉자 진산월은 숙였던 고개를 쳐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담담하고 차분한 시선이었으나, 두 사람은 왠지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그 느낌은 낙일방이 더욱 강렬했다

마치 수백 개의 날카로운 침으로 전신의 피부를 찌르는 듯한 짜릿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느낌은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으나, 낙일방은 그것이 무공의 최절정에 오른 고수만이 발출할 수 있다는 전설의 무형지기(無形之氣)임을 깨닫고 마음이 크게 격동되었다.

‘장문사형의 무공이 무형지기를 발출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구나‥‥‥‥ ‘

당금의 강호에서 무형지기를 발출할 수 있는 고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낙일방의 짧은 경륜으로는 불과 두세 사람 떠올릴 수 있을 뿐이있다

진산월은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더니 먼저 낙일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손을 내밀어 보아라.”

낙일방은 영문을 몰랐으나, 순순히 양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진산월은 낙일방의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수련했구나. 손마디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여 있고 상당한 힘이 느껴진다. “

낙일방은 아무 말도 않고 멋쩍게 웃었으나, 눈자위가 조금 붉게 상기되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진산월의 입에서 칭찬을 듣게 되자 마음이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묵령갑은 가지고 왔느냐”

“예.”

낙일방은 품속에서 복령갑을 꺼내 들었다. 검은색으로 번쩍이는 묵령갑은 그동안 꾸준히 손질을 해온 탓인지 얼핏 보기에는 연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하나 그 재질은 강철로도 뚫을 수 없는 특이한 금속제 은시(銀絲)였다.

“묵령갑을 끼어 보거라.”

낙일방은 진산월의 지시대로 묵령갑을 양손에 끼었다. 손가락 끝부분을 제외한 손의 니머지 부분이 검은색으로 뒤덮이자 무언지 모를 강인함이 풍겨 나왔다. 진산월은 낙일방이 묵령갑을 낀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지금부터 내가 특별히 지시할 때까지 그것을 벗지 마라.”

낙일방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묵령갑은 촉감이 부드러워서 오랫동안 끼고 있어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앗다. 하나 그래도 하루 종일 착용하고 있기에는 번거로운 점이 몇 가지 있었다. 그런데 진산월은 특별한 기간도 징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이 다시 말할 때까지 묵령갑을 끼고 있으라고 하니 궁금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낙일방도 묻지 않았다.

낙일방은 진산월을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그가 그런 지시를 내렸을 때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진산월은 왜 낙일방에게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은 것일까?

동중산은 순간적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그가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진산월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존휘가 나를 목표로 삼고 있다면 이번에는 아무래도 한바탕의 악전고투(惡戰苦鬪)를 피하기 힘들 것이다. 만약 싸움이 벌어진 다면 너는 끼어들지 말고 어제 뇌옥에서 구출한 노인을 데리고 가급적이면 신속하게 몸을 피하도록 해라.”

동중산의 외눈이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이곳이 아무리 이씨세가의 한가운데 라고 해도 많은 무림인들의 눈이 있는데 이존휘가 함부로 손을 쓰겠습니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남들의 이목을 두려워했다면 중인환시리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호원무사를 시켜 우리의 출입을 막고 있는 것은 이미 이존휘가 우리에게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일단 일을 벌이기로 한 이상 그는 반드시 확실한 결과를 보려고 할 것이다.”

듣고 보니 동중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진산월이 낙일방에게 항상 묵령갑을 끼고 있으라고 지시한 것도 앞으로 어떤 일이 불시에 벌어지게 될지 모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에 비해 무공이 한참 떨어지는 자신은 자칫하면 오히려 짐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진산월과 낙일방만 이라면 이존휘가 무슨 수작을 부린다 할지라도 몸을 빠져 나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동중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존휘가 언제쯤 손을 쓰리라고 보십니까?”

“적어도 오늘 밤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동중산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밤이 되면 진산월 쪽에서 선수를 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존휘는 진산월이 먼저 움직이기 어려운 밝은 대낮에 일을 벌일 확률이 높았다. 누구보다도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지혜로운 동중산의 얼굴에 일시적으로 날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이세적을 죽인 흉수가 밝혀지지도 않은 이때에 무작정 그들의 제지를 뚫고 이씨세가를 벗어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이 공격해 오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으니 난감하군요. 장문인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일환이 돌아오는 대로 우리가 먼저 이존휘를 찾아간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낙일방이 뜻밖의 말에 놀랐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하나 동중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외눈을 번뜩이며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좋은 방법 같습니다. 이렇게 수동적으로 이존휘가 손을 써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 우리가 공세적으로 나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일 듯싶군요.”

낙일방도 듣고 보니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나은 선택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 궁금함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존휘가 순순히 우리를 만나 주려고 하겠습니까?”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는 듯했다.

“만나 줄 것이다. 그로서도 우리를 만나지 않는 것보다는 만나는 것이 더 부담이 없을 테니 말이다.”

낙일방은 고개를 갸웃거렷다.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이 만나지 않는 것보다 부담이 없다는 진산월의 말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동중산이 옆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무작정 우리에게 손을 쓰는 것은 이존휘로서도 무척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않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직접 우리를 만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올가미를 씌울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제 발로 찾아간다면 이존휘로서는 거절할 명분도 없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존휘를 찾아가는 건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닙니까?”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이존휘에게 기회를 주든 주지 않든 그가 우리에게 손을 쓰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낙일방은 여전히 아리송한 모습이 됐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먼저 찾아갈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선기(先機)의 문제입니다.”

“선기 라고요?”

“이존휘가 우리에게 손을 쓸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그 전에 우리가 먼저 그를 찾아가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상대의 의표를 찌른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동(受動)과 능동(能動)의 차이입니다. 상대의 공격을 기다리는 것과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 것은 누가 기선을 제압하느냐는 측면에서 보아도 확연히 다르지요.”

낙일방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이존휘로서는 설마 우리가 먼저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할 것이기 때문에 당황할 테고, 그런 가운데 행동에 허점이 드러날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물론 그는 우리에게 함정을 씌우려 하겠지만, 우리가 그 점을 사전에 알고 있는 이상 조심만 한다면 그의 흉계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건 준비하지 않으면 승리도 없는 법입니다.”

낙일방은 비록 그 안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이 먼저 이존휘를 찾아간다는 것이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갑자기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자는 대체 어디 가서 뭘 하길래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혹시 이대로 영영 안 돌아오는 게 아닐까요?”

낙일방이 준수한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지일환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탓하고 있을 때,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그는 이미 돌아왔으니까.”

“예?”

낙일방은 물론이고 동중산도 깜짝 놀랐다.

낙일방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변에 그들 말고는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산월을 향해 무어라고 말하려 할 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꼭 이 안에 들어가야겠소.”

누군가가 굵직한 음성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낙일방은 황급히 달려나가 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전혀 뜻밖의 인물들이 종남파의 거처를 막고 있는 호원무사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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